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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기 선생]<역사는 말한다>에서 남북 발자취를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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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0-01 16:23 조회2,9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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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기 선생은 재미동포서부지역연합회 9월 월례회를 통해 <역사는 말한다>라는 제목의 주제를 발표하면서 남북이
걸어 온 발자취를 더듬었다. 그는 "북은 쏘련 블럭에도 가담하지 않고 통일지향적, 자주적 독자노선을 걸어오면서
우리 식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해온 전통적인 60년 역사를 지녔다면, 남은 이승만 단독정부와 군사정권이 내부적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분단지향적이며 외세의존적인 정부로서 놀부 심보 통을 가진 서자임을 60년 역사는 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기고]<역사는 말한다>에서 남북 발자취를 더듬는다



*발표:현준기 선생(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


역사란 사물 또는 어떤 현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지사관으로 보느냐, 아니면 진보적 사관(혹은 민중사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짐과 같다.

<##IMAGE##> 우리나라는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이다. 분단정책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통치의 한 수법이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자. 그 많은 나라들의 국경선이 자로 잰 듯 일직선으로 되어있지 않은가? 서구제국주의자들은 인종이나 국가의 존엄을 무시하고 통치에 편리한 대로 자로 재어 국경선을 만든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동해안 일부 주를 제외하고는 미국의 서진정책으로 토착 인디언들의 땅을 약탈하고 인종을 말살하는 악랄한 수법으로 침략하여 주 경계선을 그어 통치하였기 때문에 자로 잰 듯 반듯하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나라에 분단정책을 쓰지 않은 것은 북방진출의 전초기지로 삼고 조선의 지하자원과 식량자원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대신 학도병, 지원병, 위안부 차출 등 악랄한 제국주의 정책을 썼던 것이다.

미제는 어떠하였는가? 미제는 오로지 쏘련의 남진을 막고 쏘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기지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

해방정국

외세가 이미 국토를 분단한 것을 몰랐던 조선사람들은 큰 충격 속에 해방정국을 맞이하게 된다. 북위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쏘련군과 항일무장유격대가 진입하였고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게 된다.

북의 쏘련군은 김일성 주석이 귀국하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자 모든 군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남녀평등권을 선포하여 봉건제도의 악습을 타파하고 일제잔재를 숙청하는 등 3대 과업을 거침없이 수행한다. 그 부작용으로 종교인, 일제시의 군경과 일제의 끄나풀, 그리고 일부 인테리, 기술자, 실업가들이 대거 남하하게 된다.

남은 미군정의 서릿발 같은 포고령으로 그들 제국주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사회현상은 어떠하였는가?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고 좌우충돌로 잠잘 날이 없었다. 더욱이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놓고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으로 더욱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 수반인 김구 선생과 그 요원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평민자격으로 각기 입국하기를 허용함으로써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승만 박사는 미군용기 편으로 미국으로부터 입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는 미 중앙정부의 전신인 OSS의 첩보요원으로서 “블랙 보드”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군정은 일제시대의 관리, 군`경, 그리고 보안계 끄나풀 등 친일파들을 재 등용하고 독립투사, 애국적 진보적 인사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가정과 인권을 유린하게 된다.

반면 북에서는 독립투사, 애국지사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자손을 위하여 만경대유자녀혁명학원을 세우고 애국릉을 설립하는 등 큰 대조를 이루게 된다.

이승만박사가 군정을 업고 단독정부수립을 꾀하자 양심적이고 통일국가 건설을 하려는 김구선생, 김규식박사 등을 대표로 하는 695명의 남쪽인사들이 월북하여 1948년 4월 19일 역사적인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평양에서 열리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박사는 동년 8월 15일 드디어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김구선생이 암살 당하고 만다.

남에 단독정부가 출범하자 북은 더 기다릴 수 없음을 알고 20여일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게 된다. 이것이 9.9절인 것이다.

두 정부의 성격

한마디로 북은 준비된 정부이고, 남은 날치기정부라 할 수 있다.

북은 항일무장유격대 출신을 주축으로 정부수립을 하였다면 남의 이승만박사는 미국의 비호아래 친미파,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을 정치기반으로 삼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북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투쟁 당시 유격구 행정방식을 모체로 영토의 보위와 안전을 위하여 군을 재건하였고 인적 물적 부족을 자체의 힘으로 극복하는 시책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남의 이승만 단독정부는 독립운동가, 사상가 등을 소위 불온분자로 몰아 때려잡는 아이로니칼한 현상을 빚기도 했다.

북의 토지개혁에 자극 받은 남은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지만 명색뿐이고 구태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국회 내에 결성된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무산시키는 폭거도 자행하였다.

나는 1952년인가 부산피난국회를 참관한바 있는데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을 때 였기 때문에 그 파동의 본색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여수반란사건, 4.3제주사건, 대구10월혁명사건 등은 그야말로 정치적 혼선과 혼탁의 연속이었다.

이북에서 말하는 <어버이 수령>과 이남에서 말하던 <국부 이승만>

솔직히 나는 북에서 어버이 수령이란 말이 언제부터 나온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국부 이승만 대통령, 국부 이승만 각하라는 말은 아마도 1954년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버이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돌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나는 “김일성 주석은 인민들 속에 들어가 인민들과 함께 호흡하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민들은 그분을 어버이 같은 수령으로 받들게 되었다고 본다. 그 뚜렷한 실증은 1994년 김 주석께서 돌아가셨을 때 북의 인민들은 마치 자신의 어버이가 돌아가신 이상으로 전 인민이 애도하고 땅을 치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우리는 테레비죤을 통하여 보았다. 이것이 북의 인민들의 진정한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남쪽의 고관인지 국회의원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김일성 동상 앞에서 북의 어떤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이 동상을 받들고 있는 토대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하고 물었더니, 그 소녀는 거침없이 “우리 온 인민의 심장의 무게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우문현답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남의 이승만 박사는 자신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받들기 위해 애쓰다 종래에는 1960년 4월 19일 시민혁명이 일어나자 치욕의 하야를 하였고, 그의 동상에 시위대들이 밧줄을 목에 매고 트럭으로 끌어내려 시내로 끌고 다니지 않았는가? 이것이 국부 이승만의 모습이다. 어느 책에선가 그 동상 머리가 서울 어느 가정집 뒷마당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결론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쏘련 블럭에도 가담하지 않고 통일지향적, 자주적 독자노선을 걸어오면서 우리 식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해온 전통적인 60년 역사라면, 남의 이승만 단독정부와 군사정권은 내부적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분단지향적이며 외세의존적인 정부로서 놀부 심보를 가진 서자임을 60년 역사는 말하고 있다.(끝)




*필자 현준기 선생님 걸어 온 길---아래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현준기 선생, 8순기념 모임 ...『가슴이 찡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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