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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아프리카<케냐>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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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9-25 20:50 조회2,9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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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통일운동원로 유태영 박사(원로목사)는 아프리카의 나라, <케냐>의 발자취를 연구하면서 "우리 민족이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들이 적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생활을 통해 고통 받아 온 <케냐> 민중들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우리
민족도 다시는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특별기고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아프리카 나라,<케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IMAGE##> 아프리카의 나라, <케냐>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필자는 우리 민족이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들이 적지 않았다고 절감했다.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 생활을 통해 고통 받아 온 <케냐> 민중들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우리 민족도 다시는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식민주의 유산과 외국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케냐
종족정치화와 친미독재 48년의 비극


최근 케냐에 세계의 큰 화제로 떠 오르게 한것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케냐 출신 완자루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남자마라톤 선수로 첫 우승하여 금메달을 따 냈다. 몸무게 51 kg의 작은 체구 이지만 <철의 다리> 를 가지고 있다.

둘째 화제는 케냐 출신의 흑인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된 것이다. 오바마의 뿌리는 케냐이며 <버락>(Barack) 이라는 이름의 뜻은 동아프리카의 방언 스화힐어로 ‘축복받음’ 이 라는 뜻 이다.

오바마는 과거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비공개로 케냐 여행을 두 번 했는데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이복 동생 조지 오바마 (26세) 를 상봉 했다. 이복 동생 조지는 월세 1달러 정도 의 오두막에 살고 있으면서 신문에 난 오바마의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할머니와 삼촌은 오바마의 당선을 위하여 <우리는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 라고 말했다.

케냐는 한반도의2.7배가 되는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약 3천만이다.그런데 케냐는 43개의 부족들로 구성된 복잡한 나라이다. 43개의 부족들 중에서 6개의 주요 부족들이 역사적으로 정치적 권력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 여섯 부족들이 항상 패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서로 대결하여 피를 흘리면서 싸우고 있다. 그 6개 부족은 키쿠유족, 루히야족, 루우족, 칼렌진족, 캄파족, 투겐족이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케냐의6개 부족중의 하나인 루우부족의 후손이다. 현재 케냐의 제일 야당 (ODM) 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오딩가도 루우부족 출신 이다.

2007년12월 27일에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정선거의 큰 혼란 속에서 겨우 재선에 당선된 키바키 대통령은 케냐의6개 부족중에서 가장 큰 부족인 <키쿠유부족인> 이다.

오바마 상원의원이 케냐를 방문 했을때 조상의 고향인 코겔로 마을에서 주민들에 둘러 싸여 왕처럼 환영을 받았다. 그 때 오바마는 테레비죤을 통한 연설에서 케냐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주요 원인인 부족들간의 분쟁에 대하여 <부족간 분쟁 종식>을 강조 하였다.

부정선거의 논란속에서 재선에 당선된 키바키 대통령에 항의하여 전면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오딩가는 영국 와의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아버지는 나의 외삼촌 뻘 이다> 라고 말 했다.

하지만 오바마의 삼촌 사이드 오바마는 오딩가의 주장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딩가의 어머니가 이곳 한 동네에서 오래 살은것 만은 사실 이지만 이곳 동네 사람들은 옛날 부터 대개 서로 사촌 이라 고 부르면서 살았다> 라고 해명을 했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웃 사촌> 이라는 뜻 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의 케네디 가문을 숭배하는 것처럼 지금 케냐 인들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막론하고 오바마를 숭배하고 있다.

키바키 대통령이 소속해 있는 키쿠유부족과 야당 지도자 오딩가가 소속해 있는 루우부족은 지난 해12월 27일에 치른 선거의 <부정선거> 시비로 시작된 분쟁으로 인하여 1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25만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비극의 난민생활을 하고있는데 대하여 정치적 책임이 있다.

키바키 대통령의 정권은 라디오 방송를 통하여 부족 간 학살 행동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집권 여당의 방송은 야당 후보자 오딩가를 비난 하면서 <살인자 권력에 굶주린자> 라고 방송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딩가가 속한 루우족 은 <게으르고 도둑질을 일삼는다> 라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방송 했다.

정부의 방송에 맞서서 야당 오딩가의 소속인 루우족 측도 극악의 대응을 서슴치 않는다. <독재자를 비롯하여 개코 원숭이들을 몰아 내자> <우리 땅을 지배하는 몽구 스를 몰아내자> 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몽구스는 고양이과 동물인데 서방의 침략자들을 뜻한다. 즉 친미주의 독재정권의 퇴진을 뜻 하는 구호이다.

키바키정권은 일선 경찰에게 <용의자를 사살해도좋다> 라는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 함으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미국은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가 할 수 없이 늦게 미국은 케냐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있는것을 우려한다 라고 언급을 하면서 책임을 슬적 면하려고 궁색한 태도를 취했다.

영국이 케냐에서 수 세기 동안 감행한 식민주의 분할통치의 유산이 오늘 케냐에서 정치와 사회적 혼란을 통하여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1. 누가 케냐를 빈곤과 죽음으로 몰고 왔는가?



기원전(BC) 1,000년경에는 케냐의 원주민 부시먼족 (Bushman) 이 살고 있었고, 1세기(AD 시대)에 들어 와서는 그리스인, 이집트인, 아랍인 그리고 인도인들이 인도양을 통하여 상륙하여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0세기에 케냐에 상륙한 아랍인들은 게냐의 원주민들을 <젠지의 땅의> 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젠지는 <검은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1490년경에 포루투갈인들이 상륙하여 무역의 기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아랍인들의 거센 저항으로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때 아랍인들의 영향은 인도양 해안지대에 제한되여 있었고 케냐의 내부지역은 서구인들이 노예무역을 하기위한 통로를 확보 하는데 그쳤다.

16세기에 서쪽에서 반투족이 이동해 왔고, 동부 해안 지역에서는 아랍인과 포루투갈 인들이 영토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영국과 독일이 케냐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을 시작 했는데
1824년에 영국은 몸바사 지역을 기점으로 삼고 포교 활동과 침략의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고 있었다.

1884년에 영국인 더불유(W) 맥키넌이 <영국동아프리카 회사> 를 설립하였는데 영국과 독일이 식민지 획득경쟁을 여전히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영국은 1888년에 회사 이름을 <영국제국 동아프리카회사> 로 이름을 바꾸고 케냐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드는데 성공 했다. 영국은 백인들의 이민을 장려하여 케냐의 내륙 고원 지대에 많은 백인들이 정착하 게 하여 비옥한 농업지대(White Height lands) 를 형성한 후 흑인들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1895년에 영국은 케냐의 몸바사에서 시작하여 우간다까지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착수하여 수 없이 많은 노예들과 인도인들을 징용하여 1901년에 빅토리아 호수 연안까지 이르는 철도건설을 완수 했다.

1907년에 영국은 케냐의 식민지 행정 중심지를 몸바사에서 오늘의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로 옴겨 케냐를 독점하고 식민통치를 본격화 하고 있었다.

1920년에 영국은 케냐를 영국의 보호령에서 직활식민지로 만들고 <원주민 등록제> 를 신설하여 아프리카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력을 조달하는 기구로 활용 했다.

그 후 영국은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케냐와 함께 공통의 돈(롱화) 을 사용하게 하여 세 나라를 하나로 묶어 통치했다.

1919년은 우리나라에서 ‘기미년3월1일 독립운동’ 이 터져 나온 역사적인 해 이다.

바로 이 1919년에 케냐 에서도 <동아프리카협회> 를 결성하여 영국을 향해 <반식민지> 독립운동 을 전개 했다. 케냐 민중들은 식민지 악법을 폐지하고 빼앗긴 토지를 반환 할 것을 요구하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 했다.

1919년을 기점으로 하여 진보적인 부족들이 결집하여 독립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 했으며 <키쿠유중앙협회> (KCA)가 창설 되어 케냐타가 서기장으로 임명 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됨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서 모든 독립운동들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에 이르렀다. 케냐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지하로 들어가 숨어서 독립 운동을 계속 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케냐의 독림운동은 다시 활기 있게 전개 되었다. 케냐타는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곧 귀국 하였다. 그는 곧 <케냐-아프리카인민동맹> (KAU) 을 새로 창설하고 당수가 되어 활약을 시작 했다.

1950년에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되면서 <마우마우>(Mau Mau) 라고 불리우 는 비밀결사대의 독립운동이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마우마우 독립운동은 1956년까지 6년동안 계속 됐는데 이 운동으로 인하여 사망자 1만명과 30만명이 체포되여 감옥 살이를 했다. 케냐타도 옥중에서 독립은동을 계속 했다.

이것은 마치도 일본이 조선반도에서 한일합방을 시작 했을대 우리 민족이 당한 수난의 역사와 비슷한 비교가 된다.

마우마우 투쟁으로 인하여 막대한 희생자들이 발생 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통일 운동의 믿거름이 되어 영국의 식민통치를 끝내고 종지부를 찍게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 되었던 것이다.

1960년에 케냐타가 주도하는 <케냐-아프리카인 민족동맹>(KANU) 이 결성 되었다. 또한 동시에 오딩가가 주도하는 <케냐-아프리카인 민주동맹> (KADU) 이 결성 되었다.

이 같이 두개의 진영이 우뚝 서서 쌍벽을 이루면서 독립운동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초기부터 양대 세력이 대립을 형성 하는데 대한 염려와 우려의 목소리도 아울러 들여 오고 있었다.

1964년 12월에 케냐는 독립된 공화국을 선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인민동맹의 (KANU) 의 지도자 케냐타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또한 동시에 민주동맹의 (KADU) 의 지도자 오딩가를 초대 부통령으로 추대 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주도하는 두 개의 정당이 하나로 통합하여 케냐터 대통령이 주도하는 <인민동맹> (KANU)으로 단일화가 성사 되었다. 그리하여 케냐의 정국은 <일당 정부 체제> 를 형성하여 독립국의 첫 발걸음을 시작하는데 성공 했다.

하지만 새로 구성된 <일당정부 체제>의 새 출발이 시작 하기는 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몇년이 지난 후에 정부 내부에 <근대파> 와 <급진파>로 양립하여 분쟁의 씨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분쟁의 씨는 날이 갈 수 록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급진파로 분류되는 오딩가는 부통령의 자리를 사퇴하고 <케냐인민연합>(KPU) 을 새로 걸성하고 독자적 노선을 선택하며 떨어져 나갔다.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떨어져 나간 직접적인 이유는 <동서냉전>시대가 시작 되면서 이념의 대립이 발생 했는데 오딩가 부통령은 중립 노선을 주장 했다.

하지만 케냐타 대통령은 우익 노선에 가깝게 치우치면서 중립 노선에 대하여 경계의 태도를 취했다. 이와같은 상항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오딩가 부통령은 스스로 사퇴를 했다.

1969년에 케냐는 독립된 국가로써 역사상 최초의 총선을 치루게 되었다.

총선 에서 오딩가 부통령이 사퇴하고 새로 결성한 <케냐인민연합’( KPU) 은 루우족과 루히야족의 지지를 받아 의회의 9석을 차지 했다. 오딩가는 의회의 9석을 기초로하여 ‘케냐인민연합’을 이끌면서 제1야당이 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야 양당의 경쟁적 정치활동이 시작 되면서 케냐의 부족들간에 분쟁으로 이여지 는 불행한 역사가 점점 더 심화 되고 있었다.

1971-1972에 루우족과 루히야족 그리고 캄파족등이 주도하여 대통령 암살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모두 다 허사로 끝났다. 케냐타 대통령이 보다 더 강력한 일당독재의 강권을 발동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케냐타 대통령은 <공공 치안유지법>을 적용시켜 오딩가와 KPU의 야당 간부들을 모두다 체포하여 감옥으로 보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케냐타 대통령이 소속한 키쿠유부족은 집권당의 권세를 배경삼아 자만심과 특권을 누리면서 타 부족들을 멸시하고 스스로 오만해 졌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일부 부족에 대한 반감이 다른 부족들간에 널리 퍼저 나감으로 인하여 케냐는 영국의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남아있는 부족들 간의 증오와 분렬의 골이 점점 더 깊어 가고 있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87년8월에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던 케냐타 대통령은 집권한지 14년만에 병환으로 인하여 갑자기 사망했다.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던 케냐타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Kenya Fact book’의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애도와 극찬의 말로 가득한 추모의 글을 발표 했다.

<그는 케냐에 빛을 던진자, 식민통치세력과 싸워 케냐 인민에게 독립의 소망과 용기를 보여 준 선구자, 그는 학자이며’ 언론인 이며’ 애국자이며’ 지칠줄 모르는 투사로써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서 싸운 유능한 정치가 였다. 케냐타 태통령의 민족해방을 위해 꿈꾸는 이상은 육체보다 강했고 그의 희생적 봉사 정신은 설교보다 더 오래 동안 케냐인민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위에 인용한 추모의 글은 매우 적절하고 타당한 추모사라고 생각 된다.

케냐타 대통령이 훌륭한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을 위하여 외세에 대항하여 투쟁을 감행한 에국자 이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 이다. 케냐타 대통령의 집권 초기의 여러가지 언행들을 되 짚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케냐타 대통령의 집권 초기의 어록중에서 일부분을 소개한다. 케냐타 대통령(1964년-1978년 집권) 이 집권 초기에 측근들에게 솔직하게 발언한
어록의 일부분 이다.

<어느날 백인들이 성경책을 들고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면, 우리의 손에는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고 우리의 땅은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케냐의 현대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게 하는 상징적이며 의미 깊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오늘 날 케냐에서 하루가 다르게 번지고 있는 부족들 간의 분쟁과 비참한 유혈사태는 케냐의 과거에 그렇게도 유능했던 정치적 지도자들에 대한 좋은 인식에 대하여 냉혹한 찬물을 끼얹고 있다.

실패한 국가, 실패한 지도자들 이라고 하는 역사적 평가의 목소리가 국내와 국외에서 널리 퍼져 나가고 있음을 어찌하랴 ....

케냐타 대통령은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약탈한 간교한 위선과 불의에 격분하여 자기의 몸과 영혼을 다 받쳐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싸운 애국자였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1963년 마침내 영국의 식민지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나 케냐의 자주독립을 쟁취했으며 초대 대통령이 되어 집 권 초기에는 경제적 성장을 어느 정도 이루는데 성공 하기 도 했다.

그러나 집권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후 계속되는 부정부패와 범죄 그리고 부족들간의 테로리즘에 시달리면서 케냐의 고질적인 식민통치의 유산인 부족들간 의 분쟁의 문제를 해소시키는데 있어서 케냐타 대통령은 완전히 실패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케냐타 대통령은 지도력의 부족이라고 하는 한계점을 운명처럼 품은 채 쓸쓸하게 세상 을 떠나 가고 말았다.

케냐타 대통령의 실패는 일당독재와 지도력 부족에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면 케나타 대통령의 실패의 근원적인 문제점은 어디에 있었던가?

그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한때 <민족동맹>을 크게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 했던 애국자 이었지만 일단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민족동맹운동>의 꿈과 그의 높은 이상을 승화 시켜 현실적 역사 속에서 계승하여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이 그의 큰 문제점 이었다.

영국과 생명을 내 놓고 투쟁하여 획득한 귀중한 독립의 아버지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영국과 투쟁 하여 획득한 독립된 나라를 또 다시 영국과 그리고 영국의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는 미국 과의 <연결고리> 를 과감 하게 끊지를 못했던가?

자주 독립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국의 <개량주의적 유사 식민주의> 와 그리고 포장된 미국 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 와 손을 잡고 제한적 정치발전을 시도하고 있었을 뿐 이었다.

케냐타 대통령은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독립후에 엄혹한 냉전시대 처하여 <반서방적 민족주의> 의 진로가 너무나도 힘 겨워 방황하고 좌절 했던 모양이다.

케냐타 대통령은 미국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허구적인 <비자유적 민주주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현혹되어 권위주의적 정권 유지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의 실패의 이유는 <케냐인민연합> (KPU) 의 지도자 오딩가가 주장 하고 있는 중립적인 <반외세> 기본 정신과 <인민위주주의> 적인 정치 노선에 대하여 그 것을 단지 <정권차원의 정적> 으로만 간주 하여 무조건 적대시하고 탄압을 가한 것이 그의 큰 잘못 이었다고 진단된다.

솔직히 말 하자면 제2차 대전후 냉전체제 하에서 독립를 쟁취 한 케냐타 대통령은 소련식 독재만 아니라면 어떤 <독재를 해도 좋다> 라는 미국의 묵인과 동시에 미국의 달러의 원조를 즐기면서 맘 놓고 장기집권을 유지 하고 있었던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케냐타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가졌던 <혁명적 민족주의> 의 기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마지막에는 케냐를 미국의 <안보의 우산> 하에 놓인 채 친미적 독재와 친미예속을 유지하여 결국은 케냐를 빈부 격차의 최빈국으로 추락 시키고 말았다는 냉혹한 평가를 받고 있다.


2. 다니얼 모이 2대 대통령, 키바키 현 대통령
그리고 오딩가는 누구인가?



다니얼 모이는 케냐타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부통령이 되여 10년동안 재직 해 오다가 케냐타 대통령의 갑짝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1978년에 국민투표 없이 자동적으로 대통령 으로 취임하여 케냐의 제2대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모이 대통령은 선임 케냐타 대통령으로부터 인계받은 <케냐민족동맹’> (KANU) 의 정당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모이 정권의 정책으로 삼으면서 일당체제의 독재 정권을 그대로 유지해 나아 갔다.

하지만 모이 대통령은 다당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 질뿐만 아니라 미국의 협박적인 압력에 못이겨 <단일정당제>를 폐기하고1992년에 <다당 정당제> 를 도입 했다.

국민들이 다당제를 요구하는 이유는 일인독재를 막고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을 여러 후보자들 중에서 민주주의적인 선거를 통해서 선출하자는요구 이였다.

모이 대통령은 할 수 없이 형식적으로 다당제를 만들어 놓고 1992년과 1997년에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민주주의적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형식적으로 두 번 치루기는 했지만 모이 대통령은 옛 날 케냐타 대통령 때 부터 닦아 놓은 KANU의 정치적 기반과 또한 그동안 집권당의 소속 부족으로 알려진 <키큐유부족>의 절대적 우세 하에서 무난히 1992년 선거와 1997년 선거를 치루면서 두 번 모두 다 재선에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케냐의 현대 역사의 기록은 다니얼 모이 대통령은 독립후 최초로 최악의 부정 선거를 재차 저질 렀으며 최악의 독재자로 24년을 집권 하다가 2002년에 3차 재선에 실패하여 퇴임한 대통령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모이 대통령의 퇴진은 한 세대의 종식 뿐만 아니라 1963년에 케냐타 초대 대통령이 <케냐민족동맹>(KANU) 을 창당 하여 집권을 한 14년과 모이 대통령의 24년의 독재 정권을 모두 다 합친 38년의 독재정권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큰 변화를 의미 한다.

모이 대통령이 <케냐민족동맹>(KANU) 정권을 등에 업고 그리고 <키큐유 부족> 을 배경 삼아 장기 독재 정권을 감행 한데 대한 후대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옛 종주국 영국과 그리고 미국에 의존하여 새로 출현한 제국주의의 자본과 지원을 대량으로 끌어 들여 독재정권을 강화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에 반공 교두부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모이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케냐를 미국에게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모이 대통령은 소학교 선생 출신인데 국민들을 소학교 학생처럼 여기면서 독재를 감행했다. 그는 국민들이 구호를 제창 하도록 강요했는데 그 구호는 <발자국>이다. <발자국>이라는 말은 스와힐리 방언으로<니야요> 이라고 한다

모이 대통령이 어느 곳이 던 , 어느 때 이던 나타 나기만 하면 국민들은 손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니야요>를 외쳐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불 충성 으로 낙인을 찍혀야 했다.

국민들은 무조건 모이 대통령의 <발자국> 을 뒤따라 오라고 명령을 하는 무서운 권위주의적 통치 방법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유치한 모이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오데인 부통령을 해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비판적인 유명한 지식인들과 대학 교수 들, 청년학생들이 모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왔다.

1982년8월1일에 이와같은 철권 독재 정권을 끝장내기 위하여 일부 군부에서 두 번차례나 쿠테타를 시도 했다. 쿠테타 군인들은 전국 방송으로 쿠테타가 성공 했으며, 모이 대통령을 몰아 냈다고 발표를 했다.

또한 같은 날 같은 방송은 전 국민에게 쿠테타는 실패로 끝났고 군인과 시민 500명을 사살 했다 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쿠테타는 실패로 끝 났던 것이다.

만일 쿠테타가 성공을 하였다면 케냐 에는 분명히 진보주의적 정권이 들어섰고 케냐 뿐만 아니라 동부 아프리카에서 정치적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쿠테타가 불발로 끝 났다는 보도가 전 세계에 전해지자 곧 다음날 모이 대통령에게 <축하 메시지> 를 보내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웃음을 자아냈다. 다시 말하면 미국 정부의 속셈을 드러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쿠테타 사건 이후에 모이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은 아예 접어 버렸다. 모이 대통령은 미국을 배경삼아 국제적 차관 외교에만 열중헀으며 또한 인도양 해안에 있는 몸바사 항의 <기지사용권> 을 미국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무상으로 넘겨주기 까지 했다.

1982년의 쿠테타 사건 이후부터 모이 대통령은 자신의 출신인 캍랜진 부족과 그리고 KANU 정권의 배경인 키큐유 부족 에게만 특별한 혜택를 주는 편파적인 정책을 공공연 하게 자행하고 있었다.

정부의 편파적 조치에 항의하는 젊은 세대와 학생들의 거센 데모가 계속 일어 나고 있었다. 모이 대통령은 젊은 세대와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적 불량배들의 소행 이라고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최루탄을 마구 쏘며 경우에 따라서는 총격을 서슴치 않았다.

모이 대통령의 무시무시한 야당 탄압에 대한 뉴스가 국제적 여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자 미국은 모이 대통령에게 경제적 원조를 중단 하겠다고 하며 으름장을 놓는 척하며 케냐 의 저항세력에게 환심을 사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모이 대통령은 미국에 완전히 굴복했다. 그는 1993년 서방 세계의 요구를 전폭 받아 들이고 IMF와 세계은행의 원조를 받아 드릴 뿐만 아니라 미국의 요구대로 구조조정등을 서슴치 않고 감행 하면서 미국을 의지하여 정치적 안전을 다시 보장 받았다.

이러한 친미사대주의 정책 때문에 모이 대통령은 미국의 신임을 얻어 케냐가 유엔의 비상임이사국 으로 까지 올라 가게 하는 혜택도 얻었다. 그리고 케냐는 미국의 후원을 얻어 수도 나이로비 에서 세계적인 각종 대규모의 세계대회를 유치하여 개최하도록 하는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케냐는 모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친미 국가로 발돋음 함으로 인하여 그 대가로 동아프리카 의 인근의 나라들 중에서 주도권을 행사 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또 미국의 요구에 의하여 유엔평화 유지군을 파견 하여 미국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케냐의 집권층은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왔다. 케냐의 부족들간의 분쟁의 원인을 깊이 고찰해 보면 근본 원인은 역대 독재자 들이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무지한 부족들의 경쟁 심리를 이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적 정권의 출현을 막기위해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부족(민중)들의 봉기를 무조건 원천 봉쇄하도록 독재 정권들을 새워 놓고 뒤에서 원조와 차관을 제공해 왔던 것이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부족간의 분쟁이<민중봉기> 로 이어질 것을 무척 염려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 모든 나라들에서 부족들 끼리 서로 싸우는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는 마음 놓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지배수단으로 여겨왔다.

미국은 필요시 에는 부족들간에 분쟁을 일으 키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는 부족들
간의 분쟁을 막는 다는 명분으로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 후원해 주는 것을 일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

혹자는 말하기를 부족주의가 뿌리 깊은 아프리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무조건 실현 하려고 노력 하는 것은 아직 비현실적 이며 오히려 내전을 유발 시키고 독재 정권을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는 반제국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성장시켜 나가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 아프리카 민중들은 점차 깨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제국주의자들의 수법이 날이 갈수록 드러났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의식은 점차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연합(AU)의 집단적 노력은 아프리카의 앞 날에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최근 수단과 짐바브웨에서 아프리카 연합의 역할이 오히려 미국의 영향을 점점 더 무력화 시키고 있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부쉬 정부에 들어와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키바키 대통령은 누구인가? 또 오딩가와의 관계는 어떠 한가?

키바키 대통령은 모이 대통령 독재정권 밑에서 1978-1988년에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하지만 모이 대통령의 부정 부패를 반대하여 부통령 자리에서사퇴하고 지식인들과 결탁하여 반정부와 반부패 운동을 전개 하여 케냐 민중들에게는 호감을 얻었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콜린 포웰(Colin Powell)은 키바키 부통령이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케냐의 지성인들과 합세하여 반부패 사회정의를 위하여 싸운다고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 를 보낸 적이 있다. 이것도 바로 미국의 이중성을 볼 수 있는 자세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모이 대통령의 독재 정권을 후원하고 지원 해 주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 으로는 모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저항세력들에게도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며 두 얼굴을 하는 정책을 해 왔다. 이것은 미국이 제3세계 나라들을 지배하는 일상적인 수단 중 하나이기도 했다.

키바키는 모이 대통령에게 도전하여 대통령 후보자로 세번 출마 했다. 그는 처음으로 1992년에 출마하여1백30만표를 얻어 3위로 낙선 했고, 1977년에 두번째 다시 출마 하여 모이 대통령에게 강력한 도전자로 떠 올랐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2002년12월27일에 키바키 후보자는 세번째 또 다시 출마 했다. 키바키는 야당 후보자들이 단일화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모이 대롱령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 했다. 자기 혼자의 힘 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키바키는 2002년에 있을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야당 후보 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무지개 연합 > 을 고안 해 냈다.

키바키는 야당 후보자들 중에서 제일 강력한 오딩가 후보자와 오랜 협의 끝에 단일화를 이루는데 성공 했다. 오딩가는 야당의 승리를 위하여 키바키에게 크게 양보를 하여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된 힘으로 키바키를 뒤에서 밀어 주었다.

이 것은 마치 우리들이 남녘에서 경험한 것을 일깨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 없이는 절대로 강력한 여당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이들 케냐 민중들도 깨닫게 된 것이다.

2002년12월27일 실시 된 대통령 선거는 여당의 모아 대통령을 향해 도전하는 키바키 후보자의 사생결단의 결투장이었다. 키바키 후보자는 역사상 처음 있는 <무지게연합> 의 단일 후보로 출전하여 현직 대통령과 대결하여 싸웠다.

저항세력과 야당의 연합은 끝내 승리를 안아 왔다. 이 선거는 키바키의 승리로 끝났다.

키바키의 승리로 인하여 모이 대통령의 24년의 독재 정권과 그리고 케냐타 대통령
의14년 통치를 합한 38년의 집권정당 <인민동맹( KANU)>의 아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오딩가는 누구인가?

오딩가는 1964년에 케냐가 독립 했을때 초대 대통령 이었던 케냐타 대통령 정권 하에서 부통령이 되었다가 사퇴를 했으며 그후 투옥 돠었던 지(G) 오당가의 아들인 알(R) 오딩가 이다. 그는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 받아 불의와 싸우는데 앞장 서는 모범을 보였다.

키바키 후보자는 강력한 야당 후보자인 알 오딩가 와 단일화를 하여 힘을 얻었기 대문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온 현직 대통령 모이를 물리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다.

키바키 대통령의 새 정권의 어제와 오늘은 어떠 한가?

파이낸셜 타임스 아프리카 편집자인 마이클의 키바키 대통령 에대한 논평을 소개 한다.

<키바키 대통령의 친미 정권은 미국과 영국이 이끄는 <테로와의 전쟁> 의 아프리카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면서 서방 세계로 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키바키 대통령의 정부는 절대로 건강하지 않고 뿌리깊은 부패와 연결되 있다.>

케냐출신 미국기자 PARAN의 와나마 기자는 키바키 대통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963년 케냐가 영국 식민지 에서 벗어나 독립한 뒤 우리는 케냐를 아프리카의 ‘오아시스’ 라고 부르며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 케냐를 보라. 키바키 대통령은 ‘민주주의 시계를 못 돌리고 있다’ 지금 케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는 부정선거의 도화선 이기는 하지만 그 보다 더 근본 원인은 민심의 이반에 있다. 대통령 선거 때 공약한 ‘대통령 권력 분산’은 알맹이 없는 거짖 공약이었다. 키바키가 다시 제출 한 개헌안에 대하여 케냐 인민들은 등을 돌렸다. 우리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 할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


키바키 대통령은 5년전에 모이 대통령과 싸울 때 세 번씩이나 부정선거의 죄악성
을 친히 보았고 또 국민을 기만하는 추악한 행동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12월 27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친선의
선량한 오딩가 후보자를 중상 모략 했다. 그리고 1,550명의 사상자와 25만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연출하면서 키바키대통령 은 자기 자신의 재선을 위하여 불법 선거와 폭력을 사용했다.

알(R) 오딩가의 단일화 양보가 없었더라면 키바키 대통령도 있을 수 없었던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바키 대통령은 관권을 총동원 하여 오딩가를 모략 중상하면
서 불법선거를 치루었다. 케냐 민중들이 키바키 대통령을 불신임 하고 투쟁을 벌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은 키바키 대통령이 재선에 승리했다는 보도가 발표되자 <키바키 대통령 재선을 축하한다> 라고 즉시 축전을 보넀다.

그러나 미국은 몇 일동안 사망자가 속출하고 부정 선거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전날에 보낸 재선 축하를 뒤늦게 취소 하기도 했다.

키바키 대통령의 불법선거로 인하여 야기 된 케냐의 폭동사건에 관련된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요한 몇 개를 추려 요점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키큐유 부족은 케냐의 최대다수 부족이며 특권 계급이다. 케냐타 초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이 대통령과 키바키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키큐유 부족은 그들에게 정치적 배후의 역할을 했으며 온갖 불의와 부정과 특권의 온상이며 독재 정권의 보좌 이다.

* 케냐의3대 독재자들은 <키큐유 부족>에 기반을 두고 38년 의 장기 집권을 했다.

* <아프리카-케냐인민동맹>(KANU) 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케냐타 대통령이 1963년에 창당 했다.

* 2007년12월27일 대통령 선거에서 <큐유 부족>과 KANU 정권은 전폭적으로 키바키 대통령을 지지 했으며 부정선거를 자행 했다.

* 오딩가 후보의 소속 부족인 <루우 부족> 과 그리고 기타 모든 다른 부족들이 단합 하여 오딩가 후보자를 지지했다. 특권 계급인 <키큐유 부족> (KANU) 은 오딩가 후보자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았다.

* 키바키 대통령의 재선이 발표되자< 키큐유 부족> 에 대한 폭력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터져 나왔다.

* 대통령선거 개표과정에서 초반 개표부터 줄곳 오딩가 후보가 앞서 가고 있었다.그러데 갑짜기 정부는 개표 발표를 중단한 뒤 여당 후보자인 키바키 대통령의 당선을 발표 했다. , 키큐유 부족>만 빼 놓고 전 국민이 폭발하여 뛰쳐 나왔다.

* 케냐의 <키큐유 부족> 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의 폭발은 종족 분쟁과 <인종 청소>의 양상으로 번지면서 무조건 <키큐유 부족>이라면 산채로 불에 태우거나 난도질 하는 등 부족간에 보복의 <피의 악 순환> 으로 이어 지고 있었다.

* 부정선거와 개표 중지등 사건을 계기로 하여 키바키 대통령의 당선을 반대하는 폭동은 사망자 1000-1500명과 30만명 이상이 추방되는 큰 비극을 초래했다.

* 전FT 아프리카 편집자 마이클 홀맨은 케냐 종족분쟁 에대하여 < 영국과 미국은
절대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라고 지적 했다. 미국과 서방 세계는 케냐의 역대 대통령들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케냐를 <반공 보루와 테로와의 전쟁의 전초기지>
로 활용 했다.

*세계 여론과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키바키 대통령(76세)은 지난 3월 알(R)오딩가
(62세)를 총리로 임명했다. 오딩가를 총리로 임명하여 부정선거로 궁지에 빠진 키바키 대통령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다.

* 케냐에 연립 내각이 성립되여 여야 지분으로 50대 50으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타협의 산물로 내각 장관직이 총 40개로 늘어났다. 총리와 차관등 52명으로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유래 없는 큰 수자 이다. 내각 운영 비용이 10억 달러 이
상 이라고 한다.

* 장관 1명이 받는 월급이 $16,000이라고 한다. 현재 케냐 국민의 60%이상 되는 빈민들이 하루 소득 1달어에도 못미친 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미국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제 케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까? 또다시 친미사대주의로 갈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만 그 것을 결정하는 것은 케냐 민중들 자신들의 몫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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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 관한 정보*

케냐는 아프리카에 소재한 22만4천 평방마일 넓이의 큰땅을 가진 나라로 행정구역은 1개의 나이로비 구역과 7개주로 되어있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원 지대는 동아프리카지구대로 나뉘며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 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기후는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주민 민족구성은 키쿠유 족 22%, 루히아 족 14%, 루오 족 13%, 칼렌진 족 12%, 캄바 족 11%, 키시 족 6%, 메루 족 6%, 기타 아프리카계 15%, 비아프리카계(남아시아인, 영국인, 아랍인) 1%이다. 종교는 개신교 45%, 로마 가톨릭교 33%, 토착신앙 10%, 이슬람교 10%, 기타 2%이다. 교육은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문맹률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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