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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짐바브웨의 독립 영웅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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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9-11 01:16 조회3,3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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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독재자”로 규탄하는 짐바브웨의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를 소개하면서 그는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남미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식민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해방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고 말한다. 수세기 동안 영국의 가혹한 식민통치와 그리고
수십 년 동안의 미국이 목을 조르는 경제적 봉쇄와 제재 속에서 자연히 잉태 된 것이 무가베 대통령의
등장 이었다는 것이다. "반영, 반미 투쟁의 고달픈 독재 28년" 유태영 박사의 기고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짐바브웨의 독립 영웅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반영, 반미 투쟁의 고달픈 독재 28년



[유태영 박사 기고]1960년대 초부터 아프리카에서 독립의 선풍이 불기 시작하여 오늘 아프리카에는 54개의 신생 독립국들이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서 G7선진국들이 무리하게 추진하는 이른바 구조조정 세계화정책으로 인하여 특히 아프리카의 많은 신생국들은 감당하기 힘든 빈곤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IMAGE##>미국은 개방이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처럼 짐바브웨에 개방을 강요하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과 영국은 짐바브웨를 1차상품의 공급기지로 만들고 인플레만 심화 시키고 있다.

곡물증산을 말로는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정부의 보조가 부족한 상태 에서 영국이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던 짐바브웨의 농업기반이 갑자기 와해되고 가뭄과 기아와 빈곤이 엄습 하여 짐바브웨의 경제는 오늘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미국이 짐바브웨에게 자유무역과 개방을 강요하고 있지만 미국은 주요 농산물 분야 (식량) 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유개방무역을 가로 막으면서 식량을 무기로 삼고 있다.

미국의 정치쇼는 경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친미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반미정권을 퇴출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다 꾸미고 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치려진 총선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을 지키면서 총선 결과만을 시인하고 성공적인 총선 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에 전면적으로 협조하는 아프간 친미 정권에 대해서는 어떤 불법 선거라도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정치쇼다.

아프간 총선은 친미적 군정하에서 강도적으로 실시된 불법적 총선 이었으며 용병들이 연출한 선거 연극이었다. 심지어 미국의 요원들이 투표함을 투표소에서 딴 곳으로 옮겼다고 탈레반 정권은 폭로했다.

그런데 미국은 짐바브웨 총선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미국은 짐바브웨의 총선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선거라고 단정 하고 무가베 대통령의 당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아프간 총선을 합법적 선거라고 주장을 한다면 짐바브웨 총선도 합법적 선거라고 당연히 인정을 해야 하다.

무가베 대통령은 1980년에 짐바브웨를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다.

미국과 영국이 무가베 대통령의 재선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 이다.

나는 현재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 문제들 중에서 특히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짐바브웨 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1. 그레이트 짐바브웨


짐바브웨의 고대 역사에는 호이산족의 수렵인들(Bushman)이 약5000년 전에 원시림 속에 살고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석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이르러 반투족이 대 이동을 하여 호이산족을 몰아내고 짐바브웨 전역을 점령하여 여러 세기동안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반투족이 수 세기 동안 짐바브웨를 통치하고 있었으나 쇼나왕국이 짐바브웨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쇼나왕국은 9세기와 16세기에 이르는 약5-600년 동안에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창건 하고 크게 번영 하였다.

거대한 화강암 언덕이 100m높이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데 이 화강암을 배경하여 세워진 석조건물들이 쇼나왕국 시대의 문명을 과시하고 있었다.

1300년대와 1400년대에 이르러서 200여개의 거대한 궁전들이 건설 되였으며 이 거대한 궁전들이 쇼나 문명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산업의 최고 번영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쇼나 왕국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를 번영하게 했으며 농업과 광산 그리고 무역을 확장하여 인도, 유럽,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수출과 수입 등 다양한 교역을 실현 했다.

쇼나왕국은 1100년경부터 매우 인상적인 돌벽돌을 이용하여 건축을 하기 시작 했는데 돌벽돌 하나의 길이는 직경9m이고 건물의 높이는 6m이라고 한다. 200여개나 되는 이 거대한 석조 건물들은 짓기 시작하여 완성될 때까지 30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쇼나왕국의 문명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걸작품들이다.

하지만 ‘그레이트 짐바브웨’ 는 태양이 서산에 질 때 어두움이 찾아 오는 것처럼 번영한 나라의 운명이 점점 쇠태 하여 암혹의 시대가 찾아왔다.
1400년대부터 유럽에서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벌하기 시작했는데, 1600년대 초에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세력이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침입해 들어 왔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줄루족과 은데벨레족들이 침략해 들어 왔으며 또한 쇼나왕국은 자체 내에서 지방분권적 혈족사회로 분열하여 왕국의 중심이 흔들리게 됨으로 외세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쇼나왕국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를 포기하고 북쪽에 있는 잠베지 강(Zambezi River) 을 건너 오늘날의 마쇼날란드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마쇼날왕국’을 건설 해야만 하는 비운에 처해 있었다.

한편 ‘그레이트 짐바브웨’ 를 점령한 ‘은데벨레족’ 과 ‘줄루족’ 은 서로 싸우다가 결국 ‘은데벨레족’이 승리하여 영토를 독차지 했는데 독차지한 영토를 새로운 이름으로’마타벨레 왕국’ 이라고 불렀다.

9세기경부터 쇼나 왕조가 ’그레이트 짐바브웨’ 를 창궐하고 약 1000년 도안 찬란한 문화를 과시 했지만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바람처럼 살아져 없어지고 두개의 왕국으로 분열 됐다.

북쪽에는 ‘마쇼날왕국’이 건설됐고 남쪽에는 ‘마타벨레 왕국’ 이 건설 됐다.


2.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침략



몇 년 전에 영국의 총리직에서 물러난 블레어를 부쉬의 ‘길들은 강아지’라고 언론이 조소적으로 보도 했다.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면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미국과 영국의 크고 작음의 대조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태산 밑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와 같다. 사실 지도상으로 보면 미국과 영국의 차이는 ‘주인과 강아지’ 만도 못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영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이라고 한 때 호통을 쳤을까? 영국의 짐바브웨 침략은 어떻게 시작됐나?

1885년에 영국 개신교 교회의 선교사 D. 리빙스턴이 짐바브웨에서 세계3대 폭포중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 의 웅장한 모습을 처음 발견 하고 영국에 보고한 것이 영국이 짐바브웨와 접촉을 시작 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됐다.

영국이 짐바브웨를 침략 하는데 있어서 처음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교회의 선교사 리빙스턴 이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그 당시 선교사 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내부의 신비를 정탐하는 모험적 탐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리빙스턴 선교사의 이야기를 하자니 자연히 아메리카 신대륙에 처음 발견 했다고 자랑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에게 처음 드린 아메리카 신대륙에 대한 탐험 보고서에는 종교적 어휘로 가득 차 있다.

‘ ----그리하여 영원한 하나님, 우리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언뜻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을 넘어 승리를 주시옵나이다. ---- 그리고 왕께서 필요하신 만큼의 황금과 왕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노예를 가져 올 것을 약속 하나이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황금으로 배를 가득 채울 욕심으로 콜럼버스는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 달 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가져오면 목에 구리표식을 달아줬다. 하지만 목에 구리표식을 달지 못한 인디언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팔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콜럼버스는 남자, 여자, 어린이1,500명을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스페인으로 가는 배에 실었다. 배에서 200명이 항해 도중에 죽고 살아남은 300은 스페인 대 도시의 교회의 부주교에 의하여 경매에 붙여졌다.’

콜럼버스는 또 이렇게 말을 한 기록도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 참고: 미국민중사-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History , p20-21)

이런 보고서를 국왕에게 제출한 콜럼버스에게 국왕은 제2차 아메리카 원정 때 콜럼버스에게17척의 배와 200명의 선원을 지원 했다. 물론 제2의 원정은 더 많은 황금 보석과 더 많은 노예를 가져 올 것을 약속했다.

유럽의 백인 침략자들의 종교적 위선과 비인간적 잔인한 행동은 그 당시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침략의 초창기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종교의 위선적 행위는 어디서나 잔인성으로 표현 된다.

1888년에 리빙스턴 선교사의 뒤를 이어 영국인 사업가 세실 로즈(Cecil Rhodes)는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영국 아프리카 회사’ 를 창설하고 짐바브웨에 왔다.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 왕을 포섭하여 조약을 맺고 짐바브웨의 ‘광업권’을 획득 했다.세실 로즈는 마타벨리 왕에게 연금과 무기를 제공해 줌으로 친선을 두텁게 하면서 마타벨리 왕을 매수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 왕을 매수할 뿐만 아니라 북쪽에 있는 ‘마쇼날 왕국’ 까지 모두 포섭하고 매수하기 위하여 똑 같은 방법으로 접근 했다.

1891년에 세실 로즈는 남과 북의 두 왕국을 모두 다 동시에 ‘영국의 보호령’ 으로 정식 편입 시키는데 성공 했다.

짐바브웨의 두 왕국은 몇 년 전에 서로 화살을 겨누면서 분열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왕 국이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자신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대영 제국의 보호령으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동시에 편입을 했던 것이다.

영국은 보호령이 된 두 왕국의 이름들을 모두 다 제거해 없이해 버리고 영국인 사업가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이름을 따 식민지 이름을 ‘로디지아’(Rhodesia) 라고 부르게 했다.

영국의 짐바브웨 식민지 침략은 이렇게 순풍에 돗 단듯 쉽게 진행 됐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의 그 화려한 번영의 시대는 바람과 함께 살아져 없어 지고 침략의 앞잡이 ’광산권’을 획득한 영국의 한 개인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 가 식민지의 새로운 명칭이 됐다.

1923년 10월에 ‘로디지아’ 는 영국 연방 안에 속하는 ‘자치식민지’ 로 승격 됐다.

1953년에 영국은 식민지를 확대하고 강화 할 의욕으로 ‘로디지아’ 북쪽에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잠비아’와 그리고 ‘말라위’ 를 통합하여 더 큰 식민지를 편성하여 거대한 ‘식민지연방체제’ 를 구성 했다. 그리고 이 새로 구성된 ‘식미지 연방체제’ 를 ‘니아살란드 연방’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새로 구성된 ‘니아살란드 연방’은 오래 가지 못하고 구성한지 10년 후인 1963에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된 이유는 ‘잠비아’ 와 ‘말라위’ 두 나라는 제각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각각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 이었다.

두 나라가 독립하여 떨어져 나감으로 로디지아는 다시 ‘자치식민지’ 로 혼자 남아 있게 됐다.

1965년에 백인 이언 스미스는 백인들이 주도하는 ‘로디지아 전선당’ 을 창당 했다. 새로 창당한 ‘로디지아전선당’ 은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회를 새로 창설하고 로디지아의 ‘자치식민지’ 정권을 튼튼히 확립했다.

그리고 이 백인들이 주도하는 로디지아의 국회는 영국을 향하여 독립을 요청 하면서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의 독립운동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고 로디지아에 살고 있는 백인들은 로디지아 백인독립국을 위하여 선수를 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갑작스러운 백인들의 독립선언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영국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이 번져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들은 로디지아의 백인들이 ‘로디지아 전선당’ 을 창당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자극을 받았다.

이번에는 흑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반군 (ZANU) 을 조직하여 로디지아 독립을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 했다. 게릴라전이 몇 년 계속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인 ‘로디지아 전선당’ 은 할 수 없이 독립선언을 철회하고 영국 식민지로 복귀 하
기로 결정하고 영국정부에게 굴복했다.

3. 짐바브웨의 독립


백인들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흑인들이 들고 일어섰다.

1977년경에 로디지아 흑인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운동진영이 ‘온건파’ 와 ‘급진파’ 두 진영으로 대립했다.

온건파는 백인들과 협상을 통하여 서서히 흑인 다수의 지배체제를 조성해 가면서 결국 독립을 성취 하는 것이 올바른 독립운동의 길이라고 주장을 했다.

<##IMAGE##>이와는 정반대로 급진파는 로디지아에서 백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흑인의 독립은 불가능 하다고 주장했다. 흑인의 독립은 오직 투쟁의 길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주장 했다.

그리하여 급진파는 국내와 국외에서 게릴라 거점을 두고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 나아갔다.

무가베는 게릴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의 선봉자이며 지휘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하에서 흑인 온건파는 독단적으로 백인들의 ‘로디지아 전선당’ 과 손잡고 연합하여 1979년 4월에 독립국 창설을 위하여 총선을 시행하기로 합의 했다. 백인 후보자들과 흑인 후보자들이 함께 출마하여 총선을 실시했다.

그러나 흑인 온건파의 단독 행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총선은 독립의 쟁취가 아니라 오히려 흑인과 백인 양 진영의 대립만 가중 시켰으며 흑백 갈등만 극명하게 노출 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급진 개혁주의자 무가베 진영(ZANU) 은 흑백 연합 총선을 거부하고 불참 했다.

영국은 로디지아 식민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섰다. 국제적 정서와 UN의 눈치 때문에 그냥 보고만 앉아 있을 수 는 없었다.

1979년12월에 런던에서 로디지아의 흑백의 모든 정당들과 운동단체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서 ‘로디지아제헌회의’ 를 창설도록 영국이 주선 했다. 영국은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별다른 방도가 없음을 지각 했던 것이다.

런던에서 ‘로디지아 제헌회의’가 결성됨에 따라서 1980년2월에 역사적인 총선이 로디지아 에서 실시됐다.

이 총선에서 무가베가 이끄는 ‘짐바브웨아프리민족동맹’(ZANU)이 전체 의석 100석 중에서 75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대 승리를 거두었다.

1980년 4월18일에 드디어 아프리카 흑인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독립했다 이제는 영국이 지배하는 ‘로디지아’ 가 더 이상 아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주인이 되는 흑인의 나라 ‘짐바브웨’ 가 독립국으로 새로 창건된 것이다.

무가베는 새로 창건된 짐바브웨의 총리직과 국방장관을 겸직하면서 신생 독립국의 실권을 장악 했다. 1987년 12월에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1990년에 무가베 대통령은 재선됐고, 1996년3월에 또 다시 3선의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2002년에는 대통령 임기를 6년제로 개정됐다. 무가베 대통련은 새로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2002년 3월에 4선에 당선되었다.

2008년3월29일에 실시된 대선에서는 야당의 츠방기라이 후보자가 무가베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했다. 하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결선 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무가베 대통령은 2008년6월 27일에 치려진 결선 투표에서 절대 다수의 득표로 또 다시 당선 됐다. 무가베 대통령은 5선 대통령으로써 6년 임기를 시작 했으며 2014년 까지 통치하게 된다.

4. 로버트 무가배는 누구인가?


무가베 대통령은 1924년2월 21일에 쿠타마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잠비아와 가나 등 외국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60년에 귀국하여 ‘민족민주당’ 에 입당 하여 민족 해방운동에 뛰어 들었다.

1961년에 ‘민족민주당’을 영국이 불법 단체로 규정함으로 무가베는 엔 코모가 주도하는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ZAPU)에 가담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무가베는 체포 되었다가 탈출하여 탄자니아로 도망갔다. ‘탄자니아에서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을 창설하고 서기장으로 활약했다.

무가베는 또다시 체포되어 1964년--1974년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에 있는 남편의 구명운동을 위하여 무가베의 아내 샐리는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무가베의 아내 샐리는 가나 여성이며 무가베가 가나에서 활동할 때 알게 됐다. 샐리는 가나의 유력한 정치인 집안 출신으로 매우 활동적인 여성 이었다.

영국 정부는 샐리의 망명 요청을 거절함으로 추방위기에 처해 있었다.

무가베는 비자 만료로 추방위기에 처해 있는 사랑하는 아내 샐리를 위하여 감옥에서 영국의 총리와 내무장관에게 탄원서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 탄원서에는 무기베의 아내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구구절절 마다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가베의 간절한 탄원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영국 정부는 무가베의 탄원서를 정부의 비밀문서로 38년 동안 보관해 오다가 ‘정보공개법’ 에 의하여 최근에 영국의 인터넷 판을 통하여 처음 공개 됐다.

무가베의 영국에 대한 증오의 씨앗은 아마 그때부터 자라고 있었다고 생각 된다.

1987년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가베는 사회주의자로써 중국 공산당 주석 모택동을 존경하였으며 중국의 계획경제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가베 대통령은 사회주의자 이지만 집권 초기에는 서방으로 부터 ‘위대한 정치가’ 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흑인과 백인의 ‘화해정책’ 을 강력히 추진했다.

새로 조직한 정부 내각 에 백인 장관을 두 명이나 임명하는 관용을 베풀었고 백인 군 장성들을 그대로 직책에 머물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영국 마가릿 대처 장관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해서 ‘함께 일 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극구 찬양 했으며, 1994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무가베 대통령에게 ‘영예의 작위’ 를 수여 했다. 서방은 짐바브웨에 89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가베 대통령의 굳은 신념은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짐바브웨의 자주와 자립을 성취 하는 것 이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무가베 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에게 약속한 책임과 사명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수 세기 동안 백인들에게 짓밟혀 온 한 매친 분노와 비애를 보상하기 위하여 무가베 대통령은 생명을 받쳐서 투쟁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무가베 대통령이 영국과 틀어진 이유와 동기가 무엇인가?

영국의 혹독한 식민통치 하에서 흑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2% 뿐 이었고 80%는 백인들의 소유 이었다. 짐바브웨의 막대한 농작물과 풍부한 지하자원의 소득은 오직 소수인 백인들의 손을 통하여 영국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무가베 대통령은 그동안 불법적으로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공정하게 재분배할 수 있는 ‘토지개혁법’ 을 만들기 시작 했다.

당시 영국의 대처 수상은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보상으로 우선 약830억 달러를 무가베 대통령 정권을 위해 지불하기로 약속 했다. 대처 수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인들의 토지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는 뜻 이였다.

하지만 1997년에 토니 블레어 신임 총리는 약속한 보상금 지불을 거부하면서 영국노동당은 짐바브웨 식민통치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괴변을 주장했다.

영국이 보상금 지불 약속을 어김으로 2000년3월에 짐바브웨 의회는 토지 재분배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무가베 대통령에게 특권을 부여 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식민지 시절에 백인들이 부당하게 갈취했던 토지를 모두 되찾아 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조치라고 언명 했다.

무가베 대통령이 토지 개혁법을 공포한 후 짐바브웨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이에 관련된 기사들을 예로 몇 개 적어 본다.

* 무가베 대통령은 841개의 백인 소유 농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흑인들에게 분배할 수 있는 특별법을 공포 했다.

* 영국 식민통치 시절 총리를 지냈으며 ‘로디지아 전선당’을 창설했던 이안 스미스의 농장에 흑인 50명이 몰려와 토지1400헥타를 강제로 점거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은 없었다. (이안 스미스는 2007년 10월에 사망 했다)

* 옛 법에는 백인들의 토지를 흑인들이 무단 점유할 경우에 정부가 보상하기로 되여 있었다. 하지만 무가베 대통령이 발표한 ‘토지개혁법’에 의하여 이제는 그런 옛 법이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 영국 식민지 시절에 백인 4000명이 전체 토지의 70%를 점유하고 있었으나 무가베 대통령은 백인의 토지를 보상 없이 흑인들에게 넘긴다는 법안을 발표 했다.

* 미국은 무가베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백인 소유의 농장을 무단 점유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비난 했다. 영국도 무가베 대통령의 농지개혁법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못 된다고 비난 했다.

* 짐바브웨 정부는 백인 농장주인2,900명에게 강제 퇴거 령을 내렸으며 불응한 백인 농장주200여명을 체포 했다.

* 무가베 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짐바브웨의 백인 인구는15만 명이었다. 하지만 현재 백인 인구는 4만 명으로 줄었으며, 농장주4,500명 가운데3,800 명이 땅을 빼앗겼다.

* 최근 대통령 결선 투표로 어수선한 짐바브웨의 정세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백인 농장주 60명이 옛날 무가베 대통령과 함께 해방 전선에서 싸웠던 퇴역 군인들에 의하여 모두 쫓겨났다.

위의 인용한 몇 가지 기사들은 극히 부분적 이기는 하지만 해방과 독립을 쟁취한 짐바브웨의 어제와 오늘의 정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무가베 대통령의 강력한 애국적 지도력을 가히 이해할 수 있다.

815 해방 후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어떠했는가?
해방 63돐을 맞이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일본 제국주의 간악한 잔재들을 오히려 감싸 주고 있지 않은가?

무가베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해방의 영웅’ 으로 국내외적으로 인기가 대단 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영국과 미국을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노선’ 을 과감하게 취했기 때문 이었다.

2000년에 들어서서 무가베 대통령은 전체 농경지 7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의 땅을 몰수하여 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농지개혁을 강행 했다.

그 후 미국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 하여 짐바브웨의 경제를 파탄 시키며 목을 졸랐다. 미국은 짐바브웨를 세계 최악의 10대 인권 위반국 으로 지정하면서 경제적 보복을 계속 하고 있다.

영국도 미국에 가세하여 캐나다와 호주 등 영연방 여러 나라들을 총동원하여 짐바브웨에 대하여 경제적 제재와 봉쇄 조치를 취하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압박의 도수를 점점 더 높이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때 아프리카에서 풍요로운 경제력을 자랑하던 짐바브웨는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 했으며 빈곤층이 60%에 이르는 곤경에 처해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짐바브웨의 여류작가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 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흑-백 남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식민 통치하 에서 흑인에 대한 억압과 비애가 어떠했는가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주고 있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는 진지한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 정신이 품겨져 있다. 도리스 레싱이 파헤친 백인들의 억압과 흑인들의 비애의 유산이 아직도 짐바브웨 에서 ‘외세’와 ‘빈곤’ 이라고 하는 망령으로 나타나 있다고 도리스 레싱은 말 해준다.

무가베 대통령이 오늘도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그의 항변에 대하여 우리는 귀를 기우려야 하겠다. ‘IMF는 개발도상국에 도움이 안 된다’ 이것이 그의 항변 이다.

짐바브웨는 IMF 차관 45억 달러에 대한 이자 체납금2억9천만 달러 때문에 IMF로 부터 축출 하겠다는 공갈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IMF 채무에서 벗어나려면 ‘친미정권’ 으로 돌아 서라고 공갈과 협박을 하고 있다.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국제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대조를 이루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친서방 국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독재자’라고 규탄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남미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식민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해방의 영웅’ 이라고 무가베 대통령을 높이 추앙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식민통치의 죄과를 지니고 있는 서방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지칠 줄 모르고 투쟁하고 있는 “저항의 심장” 무가베 대통령 에게 친미예속 국가들을 제 외한 그 외의 모든 3세계의 나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5. 짐바브웨와 국제관계


2007년 8월에 소집된 ‘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정상회의에 제출된 비밀 보고에 의하면 ‘영국은 짐바브웨의 여야의 대화가 실패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은 짐바브웨 내분이 격화되기를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분을 조장하여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고립 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 공동체는 짐바브웨를 비난하는 영국의 ‘확성기 정치’에 절대로 합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의 선전술에 절대로 ‘속지 말자’ 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영연방정상회’(CHOGM)의 회장인 우간다의 무세베니 대통령은 영국의 브라운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매우 신중한 훈수를 했다. ‘무가베는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혁명가 이다. 서구 나라들은 그에게 명령을 내리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중한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라고 훈수 했다.

미국은 ‘아프리카개발공동체 (SADC)에 압력을 가해 짐바브웨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하자고 제안 했다.

하지만 공동체 회장인 잠비아의 대통령은 반대하여 말하기를 ‘짐바브웨 문제가 너 무 과장됐다 .짐바브웨 문제는 짐바브웨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미국과 영국은 개별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하여 짐바브웨의 목을 조루고 있다. 그러면서 영미 두 나라는 짐바브웨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으니 서방은 손을 펴서 구제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UN을 통한 국제적 제재안에 대하여 항상 반대 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혀 짐바브웨 제재 조치에 난항을 격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경제적으로 짐바브웨의 목을 조르고 있으면서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구제를 외치고 있는 ‘미국의 위선’ 을 반대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반미 국가들에게 가하고 있는 경재 봉쇄는 봉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봉쇄의 뒤에는 반드시 군사적 공격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이락이나 아프칸을 통해서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손만 대면 어느 나라던 비참한 국가로 전락 하고 만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남아공의 음베기 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무가베 대통령에 대하여 아무리 떠들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음베키 대통령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옛날 영국의 침략을 대항하여 투쟁을 할 때 무가베 대통령과 함께 싸운 엣 전우들이다.

영미가 아무리 제재를 외친 다해도 이미 28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온 무가베 대통령에게는 그와 같은 접근 방법은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이다.

미국과 짐바브웨의 갈라진 틈 사이에 중국과 러시아가 들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EU에서도 영국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독일과 포르투갈 등 여러 회원 국가들이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과 대화를 주장하고 있다.

2005년에 로마에서 열린 ‘유엔 식량농업기구’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무가베 대통령은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미국과 영국을 규탄 했다.

‘새 천년에 사악한 두 사람은 세계 지배를 노리고 있는 파시스트 이다. 이 사악한 두 사람이 이락전쟁을 일으키고 짐바브웨 같은 적은 나라의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물론 부쉬와 토니 블레어 이다.

무가베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188개국의 대표들의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이번 회의에 무가베 대통령을 초대하지 않아야 했었다.’고 혼자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글을 끝맺으며


미국은 무가베 대통령이 철통독재 장기집권자 라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어디 짐바브웨뿐인가?

미국이 지원하고 있는 리비아를 보라.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은 40년 넘게 장기 집권통치를 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국무장관 라이스는 2008년9월4일 현재 리비아를 방문하여 미국에 굴복하여 ‘종미주의자’ 로 전락한 카타피를 방문하고 있다. 라이스와 카타피는 뭐라고 비밀을 속삭이고 있을까?

그런데 미국의 국무장관 흑인 여자 라이스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짐바브웨 무가비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하여 비난의 발언을 연속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분노한 무가베 대통령은 라이스에게 서슴치 않고 폭언을 터뜨렸다. ‘철없는 라이스 소녀(계집애)는 제 조상이 백인들에게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은 역사 공부를 좀 단단히 해야 하겠다’라고.

아프리카 봉고의 오마르 대통령은 40년째 집권하고 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도 친미주의자 로서 28년째 정권을 장악하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카메룬 에서도 폴 비야 대통령이 28년째 집권을 하고 있다. 미국의 부쉬는 왜 이들 장기 집권 나라들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이 없는가?

아프리카 최대의 석유 산유국 나이지리아는 47년 만에 정권 교체를 하여2007년 에 야라두아 대통령이 취임 했다. 콩고도 46년 만에 2006년에 정권을 교체 했다.

아프리카 54개 나라들의 예를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을 할 수 있겠다.

첫째는 친미주의 정권은 장기 독재를 해도 오히려 미국이 뒤에서 도와주면서 일절 문제 삼지 않는다.

둘째는 반미주의 정권은 온갖 경제 봉쇄와 제재를 가하여 빈곤에 빠뜨리고, CIA는 숨어서 활동하면서 민심을 교란시켜 ‘민주주의라는 무기’ 로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공작을 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락과 아프칸 처럼 군사개입을 하여 그 나라를 망쳐 놓기도 한다.

미국은 무가베 대통령이2000년에 토지개혁을 강행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짐바브웨에게 판매 했다. EU는 2002년에 인권탄압 이유로 무기 수출을 중단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은 중국이 짐바브웨에 무기를 수출하는데 대하여 ‘독재정권 지원’ 이라고 하면서 국제 여론을 총동원하여 중국을 비난하고 있다.

지난 3월에 짐바브웨 결선투표에서 낙선된 야당 지도자 츠방기라이와 화해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라고 미국은 서방 언론을 총동원 하여 무가베 대통령을 긍지에 몰아넣고 있다.

무가베 대통령은 서방의 언론 플레이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여론은 여론이고, 짐바브웨는 짐바브웨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정치적 난국을 타결해 온 고유한 (우리식)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남의 나라 인권문제 참견 말고 너나 잘하라’

무가베 대통령은 2008년3월 27일에 치려진 결선 투표 때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맥기가 남의 나라의 내정을 간섭한다고 비난 하면서 추방 하겠다고 위협 했다. 제임스 멕기 미국대사는 말만 앞세우다가 실천도 못하고 엄포로 끝나고 말았다.

무가베 대통령은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두 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라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가베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대하여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물론 이고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나라 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쿠바와 베네스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무가베 대통령의 그와 같은 강경 노선에 찬사를 보내 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조선인민공화국’ 은 의사 22명을 짐바브웨에 파견하여3년 간 머물면서 의료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발표했다.(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5/9/08)

8억 인구의 아프리카 대륙이 총체적으로 빈고에 빠지게 된 이유는 물론 개별 국가들의 실패도 있겠지만, 빈곤의 문제는 서방의 국제기구들이 강요하는 무역자유화, 평가절하 등 이른바 ‘세계화구조조정’ 정책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의 빈곤을 심화 시켰다.

우리가 분노 하는 것은 서방이 아프리카의 비참한 빈곤의 현실을 보고 꽤나 자비를 베푸는 척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위선일 뿐 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서방이 가지고 있는 재력과 과학기술이나 의료적 구호가 올바로 추진되기만 한다면 아프리카의 비참한 문제는 우선 다소나마 해결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장래의 문제는 오늘의 빈곤의 문제 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미국이 아프리카 빈곤을 해결 하겠다고 하는 정치적 의지가 전혀 없다는데 더 큰 근본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악화시키려는 미구의 악의가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바마 흑인 대통령이 탄생 하는가 싶어 들뜬 재미한국동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말하는 ‘소수민족우대정책’ 은 오직 ‘흑인들과 스패니쉬’ 를 위한 말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소수민족우대’ 에 포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다.

만일 오바마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된다면 오바마의 제일 첫 번째 정책은 “워싱턴의 기득권 정치세력을 두려워하는 정책” 이 될 것 확실하다.

오바마는 미국의 세계패권주의를 여전히 유지할 것이다. 만일 오바마가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에 도전을 한다면 오바마는 그 즉시 옛날 케네디 처럼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재미 동포들은 ‘울며 겨자 먹기’ 로 오바마를 지지 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왜 미국이 흑인 오바마를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되게 했을까? 그것은 그가 당선이 되던 당선이 안 되든 관계없이 딴 이유가 있다.

현재 미국은 특히 “워싱턴 기득권 정치세력”은 이락과 아프칸 전쟁으로 인하여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열풍 으로 인하여 그리고 러시아와 중공의 부상으로 인하여 사면초과의 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백인 우월 주의적 정치” 의 한계점에 이르게 된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만 아니라 공포심마저 들게 됐다. 부쉬의 오만이 미국을 세계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아와 같은 곤경에서 임시라도 면하기 위하여 미국은 별안간 흑인 오바마를 하나의 위선적 방패용으로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또 다른 위선이 숨어 있다.

백인들이 세계적으로 망가진 체면을 되살려 보려고 궁여지책으로 백인이 절대 다수인 미국에서 흑인을 대통령 후보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의 출현을 절대로 백인들의 호의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수세기 동안 영국의 가혹한 식민통치와 그리고 수십 년 동안의 미국이 목을 조르는 경제적 봉쇄와 제재 속에서 자연히 잉태 된 것이 무가베 대통령의 등장 이었다.

쿠바를 국빈으로 방문한 무가베 대통령은 말하기를 “짐바브웨는 제국주의와 친구였던 적 없으며 앞으로도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언명 했다.

짐바브웨에 대한 글을 끝마치면서 마음에 직통하는 강한 느낌이 떠오른다.

지금 평양에서 공화국 창건 60듨을 축하 하는 분위기로 들떠 있는 모습이 문득 떠오르면서 짐바브웨와 평양을 상상해 본다.

짐바브웨도 평양도 영국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 인한 비운을 경험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두 나라는 지금도 미국 제국주의가 판을 치는 ‘개발 이데올로기’ 의 희생이 되여 끝을 모르는 곤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우리 두 나라 앞에 놓인 삶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짐바브웨도 평양도 “ 우리민족 끼리 우리식으로 자주자립을 쟁취하자”

끝. (유 태 영 9/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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