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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인종청소와 학살이 난무하는 비극의 나라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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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8-25 00:25 조회1,9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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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남미와 아프리카 나라들을 제국주의 나라들이 어떻게 착취하고 지배하였는가를 연재를 통하여 소개한 유태영
박사는 이번에는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영토를 가진 수단의 예를 소개하면서 수단의
근본적인 비극은 “외세와 ‘식민주의’ 가 뿌려 놓은 분열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서 그 결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
이다.” 라고 주장한다. 특히 영국은 수단을 통치하기 위하여 수단을 남과 북으로 갈라 분할 통치하였다. 수단의
예에서 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는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유태영 박사의 글을 상과 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유태영]인종청소와 학살이 난무하는 비극의 나라 수단(상)



다르푸르 분쟁의 원인은 식민주의의 유산


수단은 나라의 령토가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령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수단은 한국의 북과 남을 합친 한반도의 11.3배가되는 넓은 령토를 가지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 우랴눔과 코발트, 금은보화가 풍부한 나라로써 전체 인구 3400만이 먹고 입고 쓰고도 남을 아주 귀중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수단 남쪽에는 누비아 사막과 열대림이 있으며 백나일 강과 청나일 강이 수단에서 합류하여 이집트를 지나 지중해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나일 강 인근에는 농경이 발달하여 농업생산도 증진하고 있다.

<##IMAGE##>하지만 수단은 령토가 크고 자연자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국제사회에서 ‘실패한 국가’ ‘인종청소’ 의 나라로 악명이 높은 불량국으로 낙인을 찍히고 있다. 수단은 국제사회에서 불명예로운 나라로 전락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수단에서 다르푸르 분쟁으로 인하여 2004년 이후 20만 명이 학살을 당했으며 또 적어도 220만이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고 있다고 지적 하면서 수단의 바시르 대통령에 대한 체포령장을 청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수단의 바시르 대통령은 자기를 기소한 ‘국제형사재판소’ 에 대항하여 당당히 맞서면서 일절 협조하지 않겠다고 강력한 수단의 자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단의 비극적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수단은 70%의 아랍계 사람들과 30%의 비 아랍계 원주민 흑인들이 서로 대립 하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64%의 이슬람교도들과 27%의 기독교 신도들의 대립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는 뿌리 깊은 종교적 적대심이 심각한 문제의 요소가 되고 있다.

수단에서 영어와 이슬람어는 국가통치의 공용어 이다. 수단에는 역사적으로 19개의 주요 부족이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500여개의 부족들이 있는데 현재 이 많은 부족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약115 개의 방언이 있다.

그런데 외세가 오랫동안 지배하는 역사 속에서 부족들의 존재는 분쟁의 비극뿐이 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참하게 짓밟혀서 생존의 존엄성마저 부인당하는 압박 속에서 살아 왔다.

수단의 헌법8조4항에 보면 ‘영어와 아랍어에 추가하여 지방의 수준에 따라서 다른 언어를 업무용으로 채택할 수 도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조항은 순전히 형식적 기록뿐이고 부족들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저 남미의 볼리비아를 보라. 볼리비아 에서는 원주민 출신 모랄레스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부터 부족들 간에 사용되는 언어 (방언)을 국가 공용어와 병행해서 사용하도록 법적 조치
가 취해지고 있다. 볼리비아와 수단은 그 얼마나 대조적인가?

지금 수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내분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있으며 또 국제적으로는 ‘인종 청소’ 와 대량 학살에 대하여 국제법으로 추궁을 받음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

수단이 지금 당하고 있는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식민주의’ 에 의하여 조작된 비극 때문 이다. 외세의 ‘식민주의’ 가 뿌려 놓은 분열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서 그 결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 이다.

수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고찰을 하기 위하여 우선 수단의 간추린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1. 간추린 수단의 역사 개관


고고학적 관찰에 의하면 BC 60,000년경에 수단 북부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BC 9000년경에 이르러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어 산양과 고기잡이 그리고 목축과 농경으로 삶을 영위했다고 역사가들은 주장 하고 있다.

수단의 고대 역사는 이집트 및 에티오피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BC 8000년경에 이집트의 파라오왕이 수단의 북부지역을 침공 한 것을 비롯하여 BC 22세기부터 BC 11 세기에 이르는 약 천년 동안 이집트는 수단을 침공하고 지배 했다.

BC 8세기에 이르러서 수단은 외세를 물리치고 강력한 주권국가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수단은 이번에는 에티오피아의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수단은 또 다시 패망하여 주권을 상실 했다.

AD 540년에 Byzantine ( 그리스 동방 Orthodox 교회) 선교사들이 수단에 유입하여 기독교의 선교를 처음 시작 했다. 선교사들은 남부의 주요 흑인 부족 셋을 기독교 로 개종 시키는데 성공했다. 수단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부족들은 수세기동안 이집트와 북방에 있는 아랍나라 들의 이슬람교와 공존공생을 하면서 충돌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7세기에 들어서서 이슬람교도들이 이집트와 아랍세계에서부터 수단 북부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남하 해 옴으로 인하여 수단 남부에서 기독교로 교화된 여러 부족들에게는 큰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13-14 세기에 이르러 수단의 기독교는 쇠약해졌으며 수단 남반부에서 기독교화한 부족 왕국들을 붕괴 되고 말았다.

15세기에 수단에 유입된 대량의 아랍인들은 수단의 북반부 흑인 원주민들과 혼혈 사회를 형성하였다. 혼혈로 인하여 변형된 사회가 이뤄짐에 따라 수단의 북반부는 이슬람국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아랍어는 수단의 통용어가 됐다.

1819-1822년에 이집트는 수단을 침공하여 수단을 이집트의1개 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1874년에 드디어 이집트는 침공에 성공하여 수단을 통치했다.

한편 그 때 영국은 이집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프리카의 노예무역 제도를 근절시키는 역할을 서로 하면서 경제교류와 친선관계를 활발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이집트와의 친선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친선이 아니라 점령군의 관계로 돌변하여 1882년에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영국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이집트로부터 수단을 인수 받았다. 영국은 수단의 나일강 유역에서 최초로 목화를 심어 면화 생산과 수출의 기지로 삼았다.

1882년부터 수단은 ‘영국-이집트-수단’ 이라고 하는 3각 관계 속에서 두 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들의 지배 명칭을 ‘앵글로이집트수단’ 이라고 호칭했다.

하지만 1922년에 이집트는 독립을 쟁취하여 그동안 영국의 뒤를 따르던 모든 악습을 청산하고 독자적 행보를 취하고 있다.

이집트는 수단을 통치하는 영국과의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이집트가 수단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일단 영국과는 단독 행보를 취하려 했다.

영국은 이 기회를 오히려 악용하여 영국 단독으로 수단을 통치 하면서 이른바 ‘간접통치’ 라고 하는 특이한 통치 방법을 도입하여 수단을 북과 남으로 갈라놓는 분할통치를 실시했다.

영국이 수단을 북과 남으로 갈라놓는 ‘분할통치’ 를 실시한 그 저의가 무엇 이었을까?

첫째로, 남과 북의 낮선 부족들 간에 이질감을 자극시킴으로 인하여 분쟁의 폭을 넓혀서 통치에 이용하려는 저의가 있었다.

둘째, 북쪽의 이슬람교와 남쪽의 기독교와의 종교적 분리를 통하여 종교 생활양식과 교리의 우열을 부각시켜 분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셋째, 수단 북쪽의 아랍문화권과 수단 남쪽의 유럽 문화권을 대립 시켜 서로 적대심을 가지고 경쟁을 하게 함으로 영국의 침략에 대한 분노를 약화시키고 해소 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넷째, 아프리카 본토의 흑인 인종과 아랍에서 유입한 비 흑인 인종사이에 인종간의 분쟁을 일으켜서 백인의 통치권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영국은 북쪽과 남쪽에 서로 상이하고 고유한 구조를 만들어 놓고 아주 쉽게 양편을 쉽게 통치하려는 묘안을 창안 했던 것이다.

그 때 영국이 북과 남을 갈라놓은 분할통치 방법이 분열의 씨가 되어 오늘 까지 수단의 북쪽의 아랍계와 남쪽의 흑인 기독교계가 유혈 분쟁을 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 이다.

1936년에 영국은 수단의 통치방법을 근대화 한다는 구실 하에 이른바 ‘입법의회’의 도입을 준비 시작 했다. 영국은 1948년에 ‘수단 입법의회’ 를 창설했다. 영국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또 다른 새로운 현대적 방법으로 수단을 통치하려고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3년에 이집트는 ‘반외세 혁명 운동’ 을 일으켜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영국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저항파동이 전 지역으로 퍼져 나아갔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민족주의 운동이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으며 이때에 수단은 민족의 자결권을 승인할 것을 영국에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이집트의 강력한 혁명운동의 영향과 수단의 직설적인 제안에 영국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여 두 나라는 ‘영국이집트협정’ 을 맺었다.

영국과 이집트가 함께 맺은 이 협정에 의하여 영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953년에 131년 동안의 수단 통치를 끝내고 할 수 없이 수단을 떠나갔다.

영국과 이집트가 결국 수단을 떠나가기는 했지만 그 후에 두 나라가 수단에 남겨 놓은 어두운 그림자는 쉽게 지워질 수가 없었다. 다인종국가의 형성과 두 문화의 대결 그리고 종교적 갈등은 독립을 쟁취한 수단의 앞길에 가로 놓인 큰 장해물로 작용했다.

위에 기술한 간추린 수단의 역사가 독립을 쟁취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게 되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들과 특히 다르푸르의 ‘인종청소’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이해를 하는데 다소 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2. 수단의 독립과 분쟁


1953년에 영국과 이집트가 떠나 간 후 수단은 ‘국가통일당’ (MUP)을 창당 했다. 1954년에는 선거를 통하여 ‘자치정부의회’ 가 수립 됐으며 ‘자치정부의회’는 1956년1월1일에 수단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독립을 선포한 수단공화국 (Republic of the Sudan)은 곧 아랍연맹의 회원국이 됐으며 또한 UN에 가입하여 국제적으로 독립국가의 지위를 획득했다.

독립 이후 수단의 역사는 몇 번의 비효과적인 단명의 민간정부가 집권한 기간이 잠시 있었을 뿐이고 독립 이후의 역사의 대부분은 좌익과 우익의 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발생함으로 인하여 군사정권의 통치가 장기간 계속 됐다.

분쟁의 원인과 배경은 도대체 무엇인가?

분쟁의 근본적 원인은 영국이 수단을 오랫동안 식민 지배 할 때 북과 남을 분리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북남사이에 이질감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1956년 수단이 독립했을 때 처음부터 북부 엘리트가 중심이 되여 신생국의 정권을 모두 다 장악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했다.

1958년에 수단 신생국의 복잡한 정세를 틈타 아브드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학생들 중심의 반정부운동에 의하여 아브드 장군의 군사정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학생운동에 의하여 새로 창설된 민간정부는 불안전하여 위태롭게 보였다.
이와 같은 불안전한 정세를 틈타 또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니메이리 장군이 정권을 잡았다.

한편 북부의 엘리트중심의 중앙정부를 대항하여 독립 이 전 부터 남부에 벌서부터 결성되어 있던 무장 세력이 남부의 수도인 에콰토리에 총집결 하여 북부의 중앙정부에 맞서 극한의 무장투쟁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 극한 무장 투쟁을 ‘제1차 내전’ 이라고 부르는데 17년동안 이나 계속 됐다. 제1차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50만 명이었다.
1972년에 WBC의 중재로 ‘아디스 아바바협정’을 맺음으로 17년의 내전은 일단 끝났다.

‘아디스 아바바협정’의 내용은 남부 흑인들이 분리주의를 포기하고 휴전을 수용하는 대신, 북부 아랍계는 남부 흑인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협정이었다.

이와 같은 협정은 부족 간의 구성이 다르고 인종이 서로 다른 복잡한 수단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협정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1983년에 니메이리 대통령은 ‘아디스 아바바협정’을 일방적으로 깨고 남부의 자치권을 전격적으로 박탈하는 도발을 강행했다. 니메이리 대통령은 수단 전역을 장악하여 이슬람 율법에 따른 이슬람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니메이리 대통령은 수단의 남부지역을 3등분 하여 관리하면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아랍법률을 적응시키려고 강력한 남부 압박 정책을 계획했다.

이와 같은 니메이리 대통령의 야심이 수단의 제2차 내란을 불러 일으켰다. 남부에서 니메이리 대통령에 대항하여 ‘수단인민해방은동’(SPLM)을 즉각 조직하여 또 다시 남부의 자치정부수립을 목표하여 극한투쟁을 결의했다.

1983년에 시작된 제2차 내란은 20년 동안 계속하여 190만의 사망자와 고향을 떠나는 50만의 난민이 발생했다.

1989년에 바시르 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 강경파인 니메이리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바시르 준장은 역시 이슬람 강경노선을 견지하면서 오히려 니메이리 정권보다 더 강력한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바시르 장군은 ‘이슬람원리주의’ 를 제창하면서 이전 보다 더 강경한 정권을 수립하여 남부 ‘수단인민해방군’(SPLA)대하여 탄압을 강화 했다. 바시르 정권은 노동조합과 정당의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오직 이슬람 종교의 활동만 허용 했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바시르 장군은 자기의 정적인 투라비를 축출 했다.

바시르 장군을 수단 북부에 있는 투라비의 영향력을 짤라 없이할 목적으로 이슬람법을 적용시켜 78,000명의 군, 경찰과 공무원들을 숙청 하고, 신체 절단과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이슬람 법에의하여 허용했다.

투라비와 바시르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투라비는 아프리카와 중동에 걸친 광범위한 이슬람 혁명을 이상으로 삼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원헀다. 그리고 그는 수단의 북남대립을 반대하여 우선 수단의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바시르는 오로지 수단을 이슬람 화하여 엘리트들의 손안에 수단을 넣으려고 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의 전 지역 보다는 오직 수단만을 위주로 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바시르 장군이 경쟁에서 승리했다.

바시르 정권에 의하여 숙청을 당해 쫓겨난 투라비의 추종자들은 다르푸르로 피난하였으며 그곳에서 뭉치고 집결하여 훗날 다르푸르 봉기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적을 물리친 바시르 장군은 오히려 북남 화해 연방제 단일 정권을 제창하면서 니메리아 정권 때 시작한 제2차 내란을 종식시키고 부과남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민간정부의 대통령으로 1993년에 취임했다.

바시르 대통령은 2005년1월9일 남쪽의 기독교계 반군 ‘수단인민해방군’(SPLA) 의 지도자 존 카랑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회동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바시르 대통령은 민간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무엇인가 공로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니메이리 정권에서2002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해 오면서 해결하지 못했던 평화협정에 전격적으로 합의하여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평화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단 남부는 앞으로 6년간의 과도기간에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그 후 수단 내에 존속할지 혹은 완전히 분리 독립할지를 결절하기위하여 투표를 실시한다.

2) 중앙정부군과 남부 반군의 군대는 6년 후에 만일 남부가 분리 독립을 하지 않는 경우에 단일군을 편성하여 전체 병력을3만9천명으로 통합한다.

3) 수단에서 하루에 32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생산에서 얻는 생산수입을 북부의 중앙정부와 남부의 자치단체는 50대50씩 나누어 갖는다.

4) 수단 중앙정부의 구성 직위는 북부와 남부 70대30대 비율로 할당한다.

5) 종교문제는 북부에서는 이슬람 율법이 즉되지만 남부의 기독교계 10개 주에서 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이슬람 율법의 적용문제는 의회가 결정한다.

위의 다섯 가지 조항에 대한 지역 국가들의 공식 인준을 위하여 케냐 대통령을 비롯하여 우간다 대통령과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 그리고 이탈리아의 외무장관들이 증인으로써 서명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몇 년이 지난 후 에도 수단에서 총성은 끝이지 않았고. 오히려 다르푸르분쟁은 ‘인종청소’ 사건으로 인하여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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