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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유태영 박사: 쿠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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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7-08 00:03 조회2,8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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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박사이며 재미동포 원로목사인 유태영 박사(범민련 재미본부 고문이며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는
남미나라들을 차례로 연구하여 소개해 왔다. 그는 남미 나라들의 대부분이 미 제국주의에 시달려 온 역사적
배경을 가졌다고 설명하며 우리 민족 구성원들도 남미 역사에서도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번에는
쿠바 혁명사를 통해 미국 지배세력의 횡포를 폭로해 주었다. <쿠바혁명의 어제와 오늘> 첫번째에 이어 두번째
특별기고를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분석]쿠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2)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원로목사,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2.카스트로, 영원한 이념전의 군인



<##IMAGE##> 카스트로는 1926년8월13일 쿠바의 동부지방에서 스페인 출신 지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독실한 Catholic 가정에서 성장 했으며, 어렸을 때 부터 고등학교 학생 때까지 식탁에서 식사기도를 잊지 않았다고한다.

그는 유명한 달변가로 세계적 기록을 가지고 있다.1960년9월 29일에 UN총회에서4시간 29분동안 연설을 하여 유엔역사에서 “가장 긴 연설”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1966년 아바나에서 열린 공산당 당대회에서는7시간10분동안 연설을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로 꼽지만 서방에서는 인류 진보세계를 열어 나간 위인 중 한사람으로 꼽아 왔다. 그런 만큼 세계 패권주의에 몰두해 온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는 눈에 가시로 여겨왔다. 패권주의자들에 눈에 벗어나면 으례이 암살 대상으로 되어 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왔다. 카스트로가 암살 위기를 당한 횟수는 놀랄만하다.



미국에 의해 634차례 암살위기 겪은 카스트로


카스트로는 미국중앙정보국(CIA)으로 부터634 (혹은650) 번의 암살 위기를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폭발물 설치, 음식에 독약주입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무두 실패 했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자신에 대한 암살을 지시하지 않은 대통령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뿐이며, 클린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47년간 쿠바를 통치하다 물러 난 카스트로는 최근 “쿠바와 미국관계”라는 역사 시리즈로 후손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자라나는 신세대들은 역사적으로 국가 운명과 직접 관계가 있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을 바로 알아야 한다” 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이란 쿠바독립 초창기에 미국의 방해와 미국이 쿠바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둔 “플랫 수정안”, 관타나모 에대한 역사적 불행한 사건을 지칭한것이라 생각된다.

카스트로가 나이 81세이며, 47년의 통치에서 물러남에 대하여 서방의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가면서 쿠바에 정치적 급변이 초래될 것이라고 예측 보도를 했다. 하지만 서방 언론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 갔으며 또 앞으로도 빗나 갈 것이다.

퇴임 소감을 묻는 그란마 인터넷 기자에게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 했다.

“나는 평의회 의장직과 군 최고 사령관직을 바라지도 않고 받아들일 의사도 전혀 없으며, 나의 유일한 바람은 한명의 혁명전사로서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의장직 사임의 뜻을 밝히면서 ”안녕이라고 말 하지 않겠다. 단지 이념 전의 군인(soldier of ideas) 으로 남겠다” 라고했다.

카스트로는 사임 후에도 쿠바의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 발전 시키기 위해서 사회주의 이념 논쟁을 강화하는 역할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카스트로를 정치적 아버지라고 불렀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며 친구인 카스트로가 의장직을 떠나는 사실을 받아 드릴 수 없다” 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카스트로의 의장직 사임과 관계 없이 볼리비아는 쿠바와 우호관계를 변함 없이 이어갈 것이라고 자신이 입장을 밝혔다.

중국도 카스트로의 사임에 대하여 쿠바는 우리와 혁명의 영원한 친구이며 쿠바와의 협력의 관계는 변함 없이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미국의 “코 앞에서” 거대한 미 제국주의에 맞서서 사회주의로 가는 성공적 모델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특히 쿠바의 무상 의료제도와 무상 교육 시스템 및85%-90% 식량자급 능력에 대하여 아무리 적성국가라하지만 미국이 이와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주장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하여 노골적인 비판을 했다.

“세계화는 인민들을 배고픔으로 내모는 체제이다. 속임수와 거짓말 속에서 사람들을 살아가게 만들고, 이기주의의 씨를 뿌리는 것이고 또 사람들을 소비주의에 빠지게 하여 마비되시키고, 무절제 하게 만들고 그리고 타락하게 만든다”

카스트로의 혁명정신을 요약하면 다름과 같다.

<##IMAGE##>“그는 항상 생각 하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 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항상 상상하는 매우 과감한 혁명가 이다” 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인 라모네는 카스트로와 3년동안에 100시간 인터뷰를 하여 유명한 편집인이 되었다.

카스트로는 49년동안 국가수반으로 있으면서 긴 인터뷰는 4번밖에 안 했다.라모네는 긴 인터뷰를 통하여 카스트로를 가까이서 본 인물평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카스트로는 매우 수줍고 교양이 있으며 신사적이지만, 의지적 위반자이며 영원한 반항아 이다. 그는 풍부한 논증을 근거로하여 놀라운 말솜씨를 휘두른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를 말 할때 “체 게바라”를 빼놓을 수 없다. 카스트로는 혁명에 있어서 두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데 첫째는 쿠바 독립과 혁명의 아버지이며 선구자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이며 둘째는 체 게바라 이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에서1928년6월 14일에 태어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이며 지식인 이다.

23세 때 오토바이를 타고 칠레, 볼리비아, 페루, 콜롬비아와 과테말라등 중남미 전역을 여행했다. 여행을 통하여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인디오와 가난한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생과, 그 고생의 원인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다.

그의 질문의 대답은 남미의 모든 나라들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다는 사실과, 빈부의 격차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혁명의 길 뿐 이라는 대답이었다.

체 게바라는 손에 주사기만 들고서는 혁명이 불가능하고 총을 메고 혁명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결의 했던 인물이다. 그가 처음 달려 간 곳은 미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는 과테말라에서 반미투쟁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 다음에 과테말라에서 죽음의 위기를 피하여 멕시코로 피신했다.

두번째는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게된 운명적 기회이었다.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는 1956년11월에 82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에 침투 상륙했다. 혁명군은 15명만 살아 남았지만 3년이 지난 그 후에 혁명군은 바티스타 친미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몰아 내는데 성공했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이 완수된 것을 확인한 후에 또 다른 새로운 혁명지를 찾아 볼리비아로 떠났다. 떠날때 아무도 모르게 카스트로에게 편지 한장을 비밀로
남겨 놓은 것이 전부였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없어진 체 게바라에 대하여 미국 정보국은 카스트로를 모략 중상하여 카스르로가 체 게바라를 감옥에 가두어 죽였다 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나는 그런 소문과 음모가 가라 앉기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반제 혁명운동을 전개할것을 두려워 한 미국 중앙정부국은 용병을 앞세워 체 게바라를 1967년에 체포하여 사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9세 이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그가 죽은지30년이 되는 1997년에 볼리비아에 묻혀있는 그의 시체를 발굴하여 쿠바 산타 글라라에 그와 함께 싸운 혁명동지 28명과 함께 안장했다. 산타 그라라는 체 게바라가 선두에 서서 지휘한 쿠바혁명전쟁의 마지막 전투지이며 혁명을 완수한 곳이다. 이곳에는 체 게바라가 사용했던 칼빈소총, 여권, 전투장비, 라디오, 나침판과 책들이 전시되여 있다.

2008년6월28일에 체 게바라가 서거한지 4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 행사가 쿠바, 볼리비아, 베네주엘라, 과테테말라, 아르헨티나 등 남미 모든 나라들에서 동시에 거행되었다.

쿠바에서는 체 게바라의 동상이 서 있는 산타 글라라의 넓은 광장에 10만군중
이 모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때, 카스트로는 추모사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은 너무 일찍 가지에서 꺾어진 꽃이며 그의 죽음은 남미는 물론 전세계에 사회주의적 양심의 씨를 뿌렸다” 라고 칭송했다.

특히 이날 40주기 추모 행사에서는 1964년에 체 게바라가 쿠바를 마지막 아무 도 모르게 소리없이 떠나면서 비밀로 카스트로에게 남기고 간 편지를 대형 스피커를 통해 군중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 문제의 편지는 체 게바라가 남미 다른 나라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쿠바를 비밀로 떠나가면서 카스트로에게 전달한 비공개적 편지이었다.

3.쿠바에 Corea 후예들.


1986년에 내가 쿠바를 방문 했을때 마탄지스 시에서 김구희(쿠델리아 김72세) 할머니를 만났다. 김 할머니는 평안남도가 고향인데1924년에 8세때 양아버지를 따라 멕시코로 이민 갔다가 다시 4년후에 쿠바로 옮겨와 한국인과 결혼하여 6남매를 기르면서 이제까지 살아 왔다고 했다.

남편은 8년전 숨을 거둘때까지 우리 말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고향에 한번 가보 고 싶다는 말이 마지막 의사소통 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할머니의 6남매 자녀들은 모두 다 혼혈결혼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 말 의사소통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국가 보훈처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21년에 274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 밭의 저임금 노동자로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재차 이민 왔다고 한다.

저임금 노동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조건하에서도 우리 동포 노동자들은 함께 모일 때는 노래와 춤으로 이국 땅의 시름을 달래는 기회로 삼았다. 쿠바의 동포들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도 지극하여 3.1절 기념식을 해마다 빼지 않고 거행했다고 김 할머니는 자랑한다.

“국외 독립운동사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쿠바의 동포들은 1937년부터 1944년까지1,289 달러의 성금을 국민회에 보냈고, 246 달러를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에게 아바나에 있는 중국은행을 통해서 송금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1달러는 지금 100 달러와 같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모금 방법은 날마다 쌀 한 숟가락씩 모았다가 그것을 팔아 돈을 모은 것 이이었다.

쿠바의 동포들은 친미 바티스타 독재 정권하에 있을때는 뿌리 깊은 외국인 고용차별 정책으로 인하여 빈곤의 늪에서 벗어 나기가 불가능 했다. 대부분의 고령의 노인들은 하나 같이 평생 빈곤 속에서 살아 욌기 때문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저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부터는 쿠바 Corea 후예들에게 그 무엇 보다도 중요한 교육의 기회와 평등이 주어지는 큰 변화가 생겼다.

바티스타 정권하 에서 돈 없는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가 없었다. 카스트로 혁명 후에는 의욕과 재능만 있으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교육과 의료 보험은 쿠바인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어 졌다.

쿠바의 Corea 후예들 중에서 카스트로 혁명 운동에 가담하여 중추적 역할을 담 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임은조(헤로니모 임79세) 선생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쿠바공산당 창건 당원증, 지하투쟁 메달, 내무부 훈장등이 가지런히 진열되여 있어 보는 사람마다 그가 쿠바혁명에서 크게 활약을 한 모습을 보게 된다.

쿠바의 Corea후예 중에 호영길 (토마스 호74세)은 쏘련과 쿠바가 지원을 한 아프리카 앙골라에 파송을 받아 앙골라 인민해방전선과 함께 반제반미 투쟁에 공헌 했다.

그는 쿠바에서 태어난 2세로 쿠바 여성과 결혼하여 우리 말을 전혀 하지 못하지만 피마자 잎으로 김치를 담아 먹을 정도로 우리나라 음식과 우리 민족 풍속에 익숙하여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 쿠바에는 사회주의 나라의 정치와 문화교육게 그리고 사회 전반의 다양한 분야 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약하고 있는 Corea 후예들의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내가 쿠바 마탄지스에서 만났던 72세의 김할머니는 6남매의 자녀들, 6명의 사위와 며누리들 그리고 손자와 증손들 모두 합하면 일개 소대는 된다.

그런데 이 김할머니는 그 많은 자손들 중에서 한 사랍도 낙오자 없이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게하여 의사와 간호원, 교사와 교수, 사장과 회장 그리고 공무원과 사업가 등을 만들어 쿠바 사회주의 나라의 주류의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일하게 하였다고 자랑한 말들이 새롭게 떠오른다.

김 할머니의 자랑은 곧 쿠바의 Corea 후예들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6월2일에 수술울 받은 카스트로 수상에게 건강회복을 바라는 위문 전문을 발송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보도했다.

이와 동시에 주조 쿠바 대사 루벤 발테스 대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여 양국간의 “형제관계”를 강조 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보도는 “양국간의 형제적 친선 관계는 두 나라 영도자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날로 날로 발전되고 있다는 확신이며 증거이다.

두 나라 간에 영원한 우의와 번영을 바라는 것은 인류사회의 희망인 진보사회, 즉 지구촌의 이상사회인 사회주의가 건강하게 뿌리내리는 것을 갈망하는 애절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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