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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 분석: 쿠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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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7-07 17:44 조회2,5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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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박사이며 재미동포 원로목사인 유태영 박사(범민련 재미본부 고문이며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는
남미나라들을 차례로 연구하여 소개해 왔다. 그는 남미 나라들의 대부분이 미 제국주의에 시달려 온 역사적
배경을 가졌다고 설명하며 우리 민족 구성원들도 남미 역사에서도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번에는
쿠바 혁명사를 통해 미국 지배세력의 횡포를 폭로해 주었다. 쿠바혁명의 어제와 오늘을 두차례 나누어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분석]쿠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1)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원로목사,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


카스트로는 반세기 혁명인생, 이념전의 영원한 군인


<##IMAGE##> 미국의 최남단 마이아미에서 불과 95마일 떨어저 있는 가까운 나라 쿠바는 1959년에 카스트로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 이후 부터 미국에서 아주 멀고먼 나라가 되었다.

나는 “공산주의 국가라면 무조건 멀리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공산주의의 나라, 쿠바를 방문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었으며, 솔직히 말해서 흥분과 공포심이 동반한 야릇한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마이아미국제공항을 떠난것은 1986년2월10일 새벽0시20분 이었으며, 약45분 후에 목적지 쿠바의 수도 항구도시인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다.이렇게도 가까운 땅이 그리도 멀리 생각되었던가?

비행기가 땅을 치며 착륙했을때 누군가가 뒤에서 “여기는 쿠바”라고 외쳤다. 창박을 내다보니 “Jose Marti 공항”이라는 환한 네온싸인이 눈길을 끌었다.

Jose Marti는 누구인가? 그는 1895년에 스페인 식민통치 500년의 침략의 쇠사슬을 끊고 쿠바를 해방하고 독립시킨 혁명가이며 건국의 선구자이 었다. 쿠바인들에게 있어서 Jose Marti의 위치는 미국의 George Washington의 위치와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통관수속을 하기위하여 52명의 승객들이 건물 안에 들어서자 공항 여자직원들이 졸린 눈으로 우리를 맞는다. 여권에 적혀있는 이름을 일일히 확인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린것 외에는 일언반구 질문도 없고 짐도 전부 무검사로 통과시켜 주었다.

이럴줄 모르고 단단히 각오하고 긴장된 기분으로 입국수속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순간적으로 모두 허탈감 같은 것을 느꼈다. 통관이 끝났을때는 새벽 3시경 이었는데, 미리 편지로 약속된 쿠바 장로교 총회장 Mendez목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운전하는 미니 뻐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 첫 인상은 미국의 마이아미해안에서 볼 수 있는 휘황찬란한 불야성 전기 불빛과는 아주 대조적임을 느낄수 있었다.

내가 쿠바여행을 간다고 하니 많은 교회의 신도들이 “공산주의 국가에 어떻게 가는가?” 라고 의심스러운 질문을 했다. 냉전시대의 적성국 이미지가 강하게 표현되는 질문이었다.

미니 뻐스를 타고 시내 호텔로 가면서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쿠바교회의 오늘 현재의 근황과 Mendez목사가 활동하고 있는 역할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

나의 질분에 대하여 Mendez목사는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984년에 미국의 Jesse Jackson 목사가 쿠바를 방문했는데 그의 방문 목적은 고 Martin Luther King목사를 추모하는 추도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카스트로는 Jackson목사와 나란히 앉아서 King목사의 추도예배의 순서를 하나 하나 지켜보았다>.

<그후 카스트로는 미국의 진보주의적 개신교 목사들과 미국 천주교 Bishop들을 쿠바에 초청하기도 했다. 오늘 카스트로의 종교정책은 종교 말살 정책이 결코 아니라, 종교와 사회주의가 상호 협력하는 상생의 정책이다. 종교가 사회주의적 사상과 제도에 정면 충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협력하고 동화하여 사회에 공헌하
도록 하는 것이 오늘 쿠바의 종교정책이다>

<만일 종교가 Bourgeoisie (가진자) 편에 서서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협력하고, 가진자에게만 복을 더 많이 빌어주는 과오를 계속한다면 그런 종교는 쿠바에서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가 보리떡을5,000명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준것 처럼 정부가 가난한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기위하여 혁명을 이르킬 때 종교가 사회주의 혁명사업에 협력하고 지원한다면 종교는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행할때 로마 Catholic 교회에서부터 이탈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 루터는 다만 캐돌릭 교회의 개혁을 원했을 뿐이였다.마찬가지로 우리 쿠바교회 지도자들은 쿠바를 떠나기를 원치않는다. 우리는 쿠바교회가 새로운 교회로 변화 발전하기를 위하여 힘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Latin America의 모든 나라들의 교회 지도자들과도 상호 꼭같은 생각을 서로 교환하고 있다>

Mendez목사는 오늘 쿠바의 종교개혁정책에 대하여 대략 이상과 같이 설명했다.


<##IMAGE##>나는 12일동안의 방문을 통하여 쿠바 교회의 지도자들의 교회관이 카스트로의 혁명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쿠바를 방문하고 있는 같은 기간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는 Latin America Ecumenical Council (남미 교회협의회)의 임원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이들은 Colombia, Brazil, Argentina, Mexico, Nicaragua등 남미 10개국의 개신교회의 대표자들이다.

이 대표자들의 회의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밑에서 시녀 노릇을 하고 있는 부폐한 교회는 이제는 남미에서 존재할 땅이 없다는 주장들 이었다.

그들의 꿈은 교회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자주자립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능동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생동하는 새로운 교회로 변화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오늘 남미 여러 나라들의 교회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혁신개혁사상과 카스트로의 반제반미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매우 근사하게 연결시키려고 고심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의 개혁정신과 신약 성서의 세레 요한의 혁명적 정신을 남미의 교회갱신을 위하여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쿠바의 수도 항구도시 아바나 관광을 위하여 영어가 매우 서툰 안내원과 함께 미니 뻐스에 올랐다. 뻐스는 우리를 곧장 아바나의 명소라고 말할 수 있는 18세기의 요새가 있는 Main Square로 안내 했다.

태서양이 환하게 내려다 보이는 이 높은 요새 언덕에는 30 feet나 되는 높은 흰색의 “예수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것을 보고 나는 깜작 놀랐다. 이 아름다운 언덕에 웅장한 “예수의 동상”은 50년전 부터 오늘까지 서 있다는 것이다.

America 대륙 최남단 카리브 해역의 한 모통이에 있는 작은 섬나라 쿠? Marxist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나라 아바나시의 유명한 명소 언덕에 “예수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니…. 유럽의 어느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웅대하고 아름다운 “예수의 동상” 아닌가?

저 예수의 동상을 왜 쿠바 혁명 당시에 헐어 버리지 않았는가?

나의 질문에 대하여 안내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보기가 좋은데 왜 허무는가?”

허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년전에 벼락이 쳐서 동상의 어깨 부분이 파손된것을 쿠바 정부에서 수리를 하고 새로 페인트 칠을 했다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500년동안 흘러 내려온 부폐하고 왜곡된 병든 기독교 문명을 배격하였고, 병들고 썩은 Catholic 교회를 증오하여 때려 부셨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예수의 근본적 혁명정신 마저 배격한것은 결코 아니였을 것 아닌가?

나는 “예수의 동상”을 바라 보면서 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 보았다.

예수의 동상이 서 있는 언덕 바로 밑에는 넓은 항구가 있는데 또 다시 나의 시선을 끈 것이 있다. 그것은 붉은색 Banner와Sickle을 휘날리는 쏘련의 웅장한 화물선 두 척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였다.

언덕위에 서 있는 힌색의 “예수의동상”이 언덕 아래에 있는 붉은 깃발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서구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이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 오늘의 쿠바의 모습을 잘 설명 해 주고있다고 생각 했다.

지면의 제한 때분에 나의 쿠바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쿠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대략 살펴보려고 한다.

1. 쿠바의 간추린 역사


<##IMAGE##> 쿠바는 1492년에 콜럼버스의 첫 항해중 발견되였고, 1511년 부터 1898년 까지 400년 동안 에스파나의 식민통치 지배를 받았다. 식민 통치 동안에 쿠바 원주민 인디오들은 대량 학살을 당하였으며 살아 남은 인디오들은 탄광과 농장에 혹사를 당했다.

16세기 부터 19세기 까지 아프리카에서 끌어 온 흑인 노예 숫자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세기에는 스페인과 유럽 나라들 간에 경쟁적으로 수 없이 많은 쿠바 쟁탈전을 일으킨 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Latin America대륙의 식민지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아 쿠바에서도 1812년에 스페인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 났다.
이로 인하여 1886년에 쿠바에서 수백년 동안 계속된 흑인 노예제도가 끝났다.

1868년에 세스페데스가 이끄는는 제1차 쿠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불완전 하였고, 1895년에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Jose Marti가 “쿠바혁명당”을 조직 하여 대대적인 제2차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Jose Marti가 이끄는 쿠바혁명당의 독립투쟁이 분명히 성공 할 것을 미리 예견한 미국은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쿠바 문제에 재빠르게 뛰어들어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이 물러 갔으니 “이제부터는 미국이 주인이다” 라고 미국 지배세력의 야심과 간교한 술책을 유감 없이 드러 냈다.

미국의 야심과 간교한 술책은 어떻 했는가?

미국은1898에 아바나 항구에 정박중인 미국선박 메인호에 원일 모를 폭파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 미국은 이 폭파사건을 스페인의 음모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스페인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미리 계획된 선전포고 인고로 4개월만에 미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 났다
미국에 패전한 스페인은 500년 식민지의 긴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쿠바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말었다.

승리자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스페인에게서 빼앗은 미국의 전리품 정도로 여기면서 쿠바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그후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가로 막고 3년동안 쿠바를 강점하고 미국의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쿠바의 줄기찬 독립운동에 못이겨 미국은 1901년에 쿠바의 독립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쿠바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건부 승인을 했다.

그 조건부 승인이 이른바 “플랫 수정조항”인 데 이조항을 독립 헌장에 추가 삽입시킬것을 강요했다.

“플랫수정조항”의 골자는 무엇인가?

그 조항은 쿠바의 관타나모만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영원토록 허용한다는 조항이다. 쿠바가 독립을 쟁취 하기는 했지만 쿠바 령토의 일부분인 “관타나모”는 여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놓인채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속심은 쿠바를 영원토록 미국의 보호령으로 묶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미국이 아프간 전쟁과 이락 전쟁에서 전쟁 포로들을 잡아 와 가두어 놓고 비인간적으로 고문과 인권 침해를 자행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관타나모”이다.

1901년에 미국이 불완전한 쿠바 독립을 승인하여 정권을 수립 했다. 쿠바는 불완전한 독립을 쟁취 하기는 했지만 독립 후 1906년 – 1917년 사이에 3차레의 반란이 발생 하여 큰 혼란에 빠저 있었다.

그후 1924년과 1934년에 쿠테타가 계속 발생 하였는대, 1935년에 바티스타가 친미 쿠테타를 또 일으켜 1958년까지 저 유명한 악명 높은 바티스타 친미 독재 정권을 유지했다.

한편 카스트로는 1953년7월에 이른바 <7.26운동>을 일으켜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求?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투옥 되었다가 1955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카스트로는 그 해 멕시코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체 게바라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81명의 “쿠바 혁명군”을 조직하여 게릴라 작전을 준비했다.1956년에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그리고 라울 카스트로는 81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 하였다.

“쿠바혁명군”은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 했다.

1958년에 카스트로는 “반바티스타 통일전선” 을 새로 결성 하였다. 1959년1월에 쿠바혁명은 드디어 성공하여 카스트로는 쿠바 정권을 장악했다.

그 해 2월에 총리에 취임한 카스트로는 <쿠바 사회주의 선언문>선포 했다. 그리고 1965년에 카스트로는 첫 쿠바공산당을 창당 했다.

카스트로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여 대지주와 대기업의 토지를 몰수하였고,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 법을 만들어 미국계 설탕 석유회사를 접수하였다.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하여 바티스타의 친미 독재정권이 봉괴되자 미국은 즉시, 1961년에 쿠바와 국교 단절을 선포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1962년에 미주기구 (OAS)에서 쿠바를 제명시키고 철저한 봉쇄정책을 펴 나갔다. 이로써 쿠바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고립 됨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쿠바는 1960년데 중반부터 쏘련과 연합하여 아프리카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국교정상화에 크게 이바지하여 미국의 봉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늘 남미 나라들중에서 쿠바와 정상 외교를 하지않는 나라는 거의 없으며, 유럽연합도 최근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쿠바와 교역을 추진할 것을 공포 했다.2008년6월20일AFP 통신은 EU정상회담에서 각국 외교장관들은 쿠바 제재 해제 원칙에 합의했다고 보도 했다.

1960년대에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봉쇄 정책으로 대쿠바 소동을 일으켰다.그 후로부터 오래동안 굳어진 양국의 관계는1980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이 처음으로 쿠바와 화해 조치를 발표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가 다소 완화되는 듯 싶었다.

또한 1981년에는 양국간의 긴장 해소를 위하여 회담이 열려 두 나라 관계는 다소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 쿠바를 또 다시 “불량국 테로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 인하여 양국 관계는 전보다 오히려 더 악화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뉴스가 최근 보도되고 있다.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 온 미국과 쿠바가 이해 관계에 따라서 서로가 접근할 수 밖에 없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특이한 상황이란 쿠바 해안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 되었는데 최저 50억 배럴의 원유와 10조 평방피트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여 있다는 것이다.

만일 쿠바가 브라질이나 다른 나라와 컨소시엄을 하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수십억 달라의 사업과 막대한 석유와 천연개스 자원을 못 본 척 하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쿠바로서는 미국의 최고의 시추기술을 무시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이와같은 양국의 아이로닉한 이해 관계에 대하여 국제 사회의 관심은 지대하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지금은 진퇴 양난에 빠저 있는 처지가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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