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선우학원 박사-조미관계의 평화적 단계 전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7-07 13:28 조회2,66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북미관계가 대결관계에서 평화적 관계로 전환하게 된 것은 북조선의 <선군정치>에 의한 대미정책의 결과라고
재미동포 원로학자 선우학원 박사가 평가했다. 그는 최근 북미관계 움직임과 관련하여 "이번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북의 주장인 <행동대 행동>의 정책을 실천한 것이다. 이것은 곧 북의 선군정치정책의 승리로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특별기고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재미동포 원로학자 선우학원 박사가 평가했다. 그는 최근 북미관계 움직임과 관련하여 "이번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북의 주장인 <행동대 행동>의 정책을 실천한 것이다. 이것은 곧 북의 선군정치정책의 승리로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특별기고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기고]조미관계의 평화적 단계 전환 *글:선우학원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IMAGE##> 지난 6월 26일 워싱턴 기자회견에서 부시대통령이 공식으로 북조선의 경제봉쇄와 테러국가리스트에서 해제 할 것을 선언했다. 그 후 즉시 북조선 영변에 소재한 핵 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광경을 외국기자들이 목격하고 전 세계 테레비죤을 통하여 보도했다. 냉각탑의 폭파는 북조선이 핵 개발을 포기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변이 발생되기 위해서 지난 7년간 조미관계가 준전시상태로 계속 되어왔다. 핵개발 시작부터 핵 페기에 이르기까지 북은 자주권을 유지하면서 강대국 미국의 위협공갈에 대항해 왔다. 그 결과로 미국의 강경한 탄압정책을 막고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부시대통령은 북을 침략할 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의 최후목적은 평화적 조선, 비핵화의 조선에 있다.”라고 선언케 됐다. 이것은 부시정책의 180도 전환이다. 물론 공화당 내에 네오콘 극우파는 부시의 변화된 정책을 반대한다. 예를 들면 전 미국유엔대사인 죤, 볼튼(Bolton)은 “부시정책은 창피스럽다. 부시교리가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부시 대통령이 이번 선언을 한 배후에는 북조선에서 지난 5월 8일에 영변핵시설에 관한 서류 1만 8천폐지의 대량 증거물을 전달한데서 시작된다. 북이 솔선하여 핵프로그램을 중단하는 것을 세밀히 보고 한 것은 핵 개발을 포기한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이 서류 속에는 우라니움에 관한 것도 포함돼 있다고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 스티브 하드리(Hadley)가 밝혔다. 북이 테러국가 리스트에 등록된 것은 1987년 대한항공기가 폭발된 것을 이유로 시작됐다. 그러나 북은 그것에 대해 일절 부인했고 아무 증거도 없다. 테러국가리스트와 동시에 경제 봉쇄가 시작되었고 이로 인하여 북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크린턴정권 말기에 조미관계가 1994년 제네바 조약을 통해서 평화적 협정으로 즉 정상화의 길로 가고 있었고 올 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게 됐고 크린턴 자신이 평양방문을 계획했었다. 그 것이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완전히 전환되어 부시가 북을 선제공격 대상자로 규정하고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제네바조약에서 약속한 경수로 원자로 건설을 2002년 11월 21일에 중단하게 되자 북은 핵확산방지기구(NPT)에서 탈퇴하게 됐다. 이것은 미국의 입장을 당황케 했다. 미국은 북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없었다. 2005년 2월 10일에 북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9일에 핵 실험 한 것을 선포했다. 이사실은 미국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됐다. 즉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은 결국 북조선으로 하여금 핵 소유국가로 만든 것이다, 핵 확산을 중요시하는 미국은 적대시하고 있는 북조선이 핵 소유국가로 등장한 것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됐다. 그 영향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미국은 북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했다. 북이 핵무기를 증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사실을 부시 정권이 알게 된 것은 2005년 5월 이다. 미국의 핵 학자인 헥카(Hecker)가 영변을 방문한 후 “방북 보고서”를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북이 2008년에는 매년 10개의 핵무기를 재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헥카 교수는 이 보고서에 대해서 공개 발표하여 워싱턴 포스트지가 2005년 11월 9일에 보도했다. 2006년 10월 6일에 북이 핵 실험 한 것을 발표 한 것을 보아서 헥카교수의 보고가 재확인 된 것이다. 북의 핵실험은 북의 대미공세인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18일에 하노이에서 개최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APEC)에 참가했을 때 한국대표에게 휴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바꿀 의사를 말하면서 북에 전달을 요청했었다. 그후 10일후 베이징에서 6자 회담시에 미국의 힐 차관보는 북의 대표에게 워싱턴 국가안전회의에서 북의 테러리스트국가 해제와 국가 정상화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전달했다. 즉 부시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과의 평화조약을 맺고 싶다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북의 김계관 외무부상은 미국의 의사가 그렇다면 평양은 영변 핵시설을 페기하고 국제 사찰단을 재입국하게 할 것을 전달했다. 이처럼 조미관계는 발전했다. 부시정권은 초기에는 무력으로 북조선을 굴복시키는 정책으로 시작했으나 그 정책의 제한성, 그리고 북의 핵 개발의 성공으로 충격을 받고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에 합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10.3 합의서를 발표하면서 북조선과 미국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교를 수립하는 공약, 쌍방의 교류를 증가하여 상호신뢰를 증진하는 것, 북조선을 테러리스트 국가에서 삭제하고 적성국 무역법적용을 끝내고 정상화 작업을 완수하기로 서약했다. 이번 부시대통령의 발언은 북의 주장인 <행동대 행동>의 정책을 실천한 것이다. 이것은 곧 북의 선군정치정책의 승리로 평가된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