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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사회주의 미얀마 현주소와 미래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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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6-04 20:16 조회3,13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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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인 유태영 목사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지난달 2~3일 미얀마 서남부 지방을 강타해
20만여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240만명에 이르는 이재민들이 발생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얀마는 어떠한 나라인가에
대해 연구한 글을 민족통신에 특별기고 했다. 지금까지 서방 언론들은 미얀마(과거에 버마로 알려진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그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왜곡된 보도만 쏟아내었다.

미얀마 사회주의 현주소는 어디이며 그리고 그 미래의 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제사회에서 버마로 알고 있던
나라, "미얀마"의 국내외 사정은 어떠한가. 필자는 미얀마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했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기고]사회주의 미얀마 현주소와 미래를 전망한다

*글:유태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상임고문)


영국에서 해방된 미얀마, 군정이 또 제2의 해방운동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는 아웅산 수지


<##IMAGE##> 미얀마의 역사는 대략 BC 100-AD 800년경에 북쪽에는 피우족이 살고 있었고,
남쪽에는 몬족이 각각 왕국을 이루어 다스렸다.

1044년에 몬족이 미얀마의 통일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1287년에 북쪽에서 몽골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몬족이 건설한 통일왕국은 무너졌다.

그후 또 다시 몬족이 미얀마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여 1750년경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1759년에 버마족의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의 령도하에 미얀마 북쪽과 남쪽의 전역을 하나의 왕국으로 확보하고 미얀마 최후의 왕조가 건설됬다. 미얀마는 막강한 왕국으로 팽창하여 국토와 국력을 확장해 나아감으로 이웃 나라들을 놀라게 했다.

미얀마는 고대로부터 135개의 종족들이 100개의 방언들을 사용하면서 살아온
잡다한 다만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얀마 인구의 비율은 버마(미얀마)족이 78%를 차지하고, 나머지 22%는 몬족, 카친족, 카렌족, 구르카족, 샨족, 중국인, 인도인등 기타 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영국이 미얀마를 침략하기 시작한것은 1824년 이였다. 영국과 미얀마 사이에 1차전쟁 1824년, 2차전쟁 1852년, 3차전쟁이 1885년 까지 게속됬으며,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로 넘어 갔다. 영국은 미얀마를 점령한 후에 미얀마를 인도에 부속된 일개 주로 격하 시켜 놓고 인도와 미얀마를 동시에 통치했다.

영국은 미얀마를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으로 활용하다가 1937년에는 미얀마를 인도에서 부터 분리시켜 영국이 직접 식민통치를 했다.

1. 미얀마의 독립과 우누정권


미얀마의 독립운동은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된지 5년 후인 1890부터 시작되었다
보민 야웅(Bo Min Yaung)은 독립운동의 선봉자로 맹렬히 활약하다가 1890년에 영국군에 체포되여 교수형으로 사망 했다. 그런데 이 통일운동가 보민 야웅은, 1937년에 역시 영국에 의하여 암살을 당한 독립운동가 아웅 산 의
아버지 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미얀마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영국 침략자
의 손에 죽고 말았다.

1930년에 독립운동가 사야 산(Saya San)은 자기자신을 “버마의왕” 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불교의 승려, 농민, 노동자, 학생들이 추종하도록
한때 선풍을 일으켰다.

그후 미얀마의 독립은동은 Thakin Movement, White Campain, Signature Campain등의 활동에 의하여 줄 곧 계속되면서 사회단체와 불교와 청년 학생들이 열성적으로 가담하여 “반영국 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미얀마 독립운동의 결정적 시기는 일본이 미얀마를 점령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였다. 영국의 식민지도 큰 문제이지만, 일본의 침입도 역시 시급한 큰 위협으 로 등장했다.

1942년에 그때 미얀마의 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던 아웅산은 일본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미얀마에서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는 원수의 나라 영국군과 손을 잡고 일본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영국과 협력하여 일본을 물리쳤으니 아웅산은 자연히 영국과 가까워 졌다.

일본을 물리치는 일로 인하여 아웅산은 원수의 나라 영국에게 식민통치에 대한 면제부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웅산은 영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가동착적인 모순에 빠져 있었다.

1947년 1월에 일본을 격퇴시킨후 32세의 젊은 나이의 아웅산은 영국을 직접 방문하여 미얀마의 독립을 타협하려고 자신 만만한 태도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일본과 싸울때 영국의 손을 잡고 함께 싸운 인연을 활용하면 독립을위한 대화와 교섭이 쉽게 진행되리라고 생각 했다.

영국을 가는 도중에 인도를 경유하는 아웅산은 그곳에서 만난 인도의 수상 Clement Attlee에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영국에 가는 목적은 “미얀마의 완전한 독립” 이라고 역설하면서 독립의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적 이라고
역설했다. 아웅산은 몰려든 기자들에게도 “비폭력 독립운동”을 역설 했다.

아웅산은 영국과 대화와 교섭을 통하여 미얀마의 독립을 획득할 수 있으리 라고
확신하고 자신 만만해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옛 속담에 “믿는 나무에 도끼로 찍힌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1947년 7월에 아웅산은 영국에서 돌아온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세력에 의하여 암살로 죽고 말었다.

후에 알여진 바에 의하면 앞으로 미얀마가 독립된 후에 새로 구성될 정권에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U Saw가 아웅산을 암살한 배후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하지만 그 것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U Saw뒤에서 분명히 영국이그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다.

현재 살아서 미얀마에 생존해 있는 아웅산의 옛 동지들과 또는 외국에서 오래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아웅산의 옛 동지들은 모두가 다 하나같이 아웅산 암살의 배후에는 영국이 비밀리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참조The Irrawddy News Magazine-Covering Burma and South Asia. by Aung Zaw)

아웅산이 암살로 죽은후에 아웅산과 같은 노선에서 함께 미얀마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누(U Nu)가 아웅산의 뒤를 이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대영제국과 투쟁을 통하여 쟁취하는것 보다 오히려 타협과 교섭으로 독립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다.

1948년1월에 우누는 영국과의 교섭 끝에 마침내 미얀마의 독립(버마 연방)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영국은 미얀마를 124년 동안이나 식민지 통치를 해 오다가 드디어 형식상으로 손을 떼고 물러 가게 되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국과 쏘련이 동서 냉전으로 대립하기 시작하는 국제적 정세하에서 쏘련을 의식하여 미얀마를 껴안아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우누가 제기하는 타협안을 순수히 받아들여 미얀마의 독립을 승인했던 것이다.

아웅산이 영국의 배후 조종으로 인하여 암살을 당해 죽은지 불과 6개월 후에 미얀마의 독립이 선포되였던 것이다. 국민들의 축하 물결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아가고 있었지만 암살로 사라진 아웅산의 위상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
고 오직 우누의 위상만 크게 돋 보이는 축하의 행렬이였다.

새로 탄생된 우누정권은 태생적으로 영국과의 연결을 깨끗하게 끊을 수가 없는 불투명한 정권 이였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하면 우누정권은 처음부터 영국과 미국 두 나라와 가까히 하는 친서방적 노선을 선택하여 경제적 원조를 획득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우누의 정권이 처음 시작부터 친서방노선으로 출발하는것을 보고 민중들은 크게 실망하여 부정적 반응을 이르켜 정치적 혼란을 자초했다.

외세의 착취와 탄압속에서 지치고 지친 민중들이 또 다시 친서방 노선을 지향하 는 우누정권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나서는 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 이였다.

미얀마에서 버마족이 절대 다수인데 버마족 중심으로 우누정권이 창출되였음에 불구하고 오히려 버마족 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우누 정권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카랜족, 샨족, 몬족등 소수 민족들이 제각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우누 정권을 규탄하고 궐기했다.

특히 우누 정권에 대항하여 강력한 도전을 취한것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좌파적 독립운동가들 이였다. 이들은 총동원 궐기하여 우누정권의 주류 세력이 취하
고 있는 친서방 노선을 적극 반대하여 정면 대립하면서 자주와 자립을 주장 했다.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요구했으나 우누정권은 말뿐이고 실현의 가능성을 농민들에게 보이지 못했다. 독립은 허울 좋은 그림의 떡으로만 민중들에게 보이게 되였을뿐 개혁의 희망은 점점 더 멀어저 가고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누 정권은 미국과 영국 등의 원조에 의존하여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외세에 의존하여 통치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우누의 신정권은 날이 갈수록 정치적 혼란으로 빠져갈 뿐이었다.

2. 군사정권 등장과 사회주의 나라 건설



미얀마의 우누정권이 출범한 후 사회적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정치적 위기는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우누 정권의 친서방 노선을 반대하는 민중의항쟁이 점점 더 거세게 악화되여 결국 내전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946년7월 공산당 과격파인 “적기 공산당”이 임이 반란을 시작했으며, 1948년에는 속칭 “백기 공산당”이 반제 반서방을 외치면서 반정부 운동을 시작 했다. 뿐만 이니라 1949년에는 소수민족 카렌족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서기 까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누정부는 다급해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외국계통의 대기업들을 몰수하여 국유화를 강행하고 또한 토지개혁을 실시 함으로 농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고 크게 선전을 했다. 하지만 정부의 선전을 믿고 따르는 민중은 별로 볼 수 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누정부의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과 분열하는 조짐이 외부에 나타 나기 까지하여 정국은 수습되지 않았다.

한편 그동안 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산악지대에 분산해 있던 게릴라들은 모두 다 함께 집결하여 네원 총사령관의 통솔하에서 구국을위한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1962년3월2일 드디어 네원 장군이 이끄는 게릴라군은 쿠테타를 일으켰다. 게릴라는 미얀마 정권의 의회를 해산 시키고 우누수상과 많은 정치인들을 체포 했다.

미얀마는 네원장군이 영도하는 군사정권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네원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도입하여 그 명칭을 “미얀마식 사회주의” 라고 불렀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개혁당”을 창설하고 그외의 모든 정당들을
불법화 하여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1974년에 네원 사령관은1당 체제하에서 내각책임제도를 혼합한 새로운 헌법 을 제정하여 발표하고 지금까지 통치해온 군사정권을 새로 제정 된 헌법에 의하
여 민정에 이양 시켰다. 그리고 네원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1980년 네원 대통령은 국민 화해단결을 위하여 “대은사령”을 내려4,000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특헤를 베풀었다. 이때 그동안 외국에서 추방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우누전 수상도 11년 만에 복권 귀국했다.

1981년에 네원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와 또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열망으로
대톨령직을 사임하고 산유 (USan Yu)에게 통치권을 이양 했다. 하지만 네원은 당 의장직만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미얀마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고 20여년 동안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통치 해 온 네원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미얀마 민중의 가슴속에서 지워질 수 없었다.

1988년은 미얀마 군정26년째 되는 해 이며, 또 가장 어려운 해이기도 했다.
외부에서 침투 해 들어오는 “민주화 자유화” 바람이 불어닥침으로 인하여 감수성이 강한 학생들의 동향이 사회적 홀란을 일시적 일으키고 있었다.

1988년 3월과 6월에 수도 양곤에서 학생들의 반정부 데모가 대규모로 일어나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일어 났다.
이와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영국에 오래 동안 체류하고 있던 아웅산 수지가 1988년에 미얀마에 영구 귀국하여 돌아 왔다.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의 영웅으로 부각 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아웅산 수지가 노벨 평화상을 타도록 국제적으로 적극 추천을 함과 동시에 미얀마 군정이 독재정권 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전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동남 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친미 친영 친서방” 정권으로 변화돠고 있는 역사속에서 유독 미얀마 군정만은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외롭게 자주자립 정신으로 외세에 대한 방위 투쟁을 군사정권 초 창기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하고 있는것이다.

1989년9월에 국방장관 겸 참모총장인 마웅장군이 국내외에서 혼란을 조성하면서 사회적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불순 세력들을 총체적으로 제압하고
국가의 질서를 지키기위하여 친위쿠테타를 일으켜서 사회적 안정을 회복 했다.

마웅은 국가의 “질서회복위원회(SLORC)” 를 창설하여 자신이 의장이되고 또 총리직도 겸직했다.

마웅 군정 총사령관은 군정 창건 26년만에 최대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학생들의 데모가 1988년에 영국에서 귀국한 아웅산 수치의 영향이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웅산 수치에게 가택연금을 명령 했다. 그리고 6년후에 가택연금을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1992년 마웅은 모든 공직과 총리직을 사임하고 탄 슈웨(Than Shwe) 장군에게 정권을 승계했다.

2006년 3월에 탄 슈웨 정권은 마얀마의 수도를 “양곤”으로 부터 새로운 수도인 “네피도”로 이전했다. 국가 명칭도 지금까지 사용하던 “버마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포기하고 새로운 명칭 “미얀마연방”으로 고치고, 집권당의 명칭도 “민족통일당(NUP)”으로 고쳤다.

미얀마에는 의회가 없으며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를 정점으로 국방, 외교,
내무등 32개 부처로 구성되여 있다. 탄 슈웨는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국가의 수반이다.

미얀마 군사 정권은 최근에 닥친 사이글론 나르가스의 재난속에서5월 19일에
예정된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강행하여 찬성표 92%를 획득하여 통과
시켰다.

개정된 헌법은 2010년에 민정 이양을 내용으로하는 개정안인데 의석의 25%를
군인이 차지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3. 미얀마의 소요를 부추기는 외세들



부쉬 미국대통령은 미얀마를 인권탄압의 나라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한편 유엔을 통하여 미얀마에대한 경제봉쇠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부시의 대외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남미에서, 아푸리카에서, 중동과 아시아에서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 “친미독재는 무조건 OK” “반미독재는 무조건 NO” 이런 식이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가 양민 대량 학살을 한데 대한 부쉬의 논평을 일언반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친미적 독재자들 이였기 때문이다.

만일 미얀마의 군사정권이 반미노선을 버리고 친미노선으로 선회 한다면 미얀마의 인권탄압이 부시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미얀마의 정보장관 챠우 준장은 다음과 같이 말 했다 고 <미얀마뉴라이트>가 보
도 했다.

“친미 파키스탄은 붉은 사원 시위에 대하여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 또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파키스탄과 타이의 군부는 어린이들을 포함한 수백 수천만을 살해하고 추방을 했다. 하지만 미국은 파키스탄과 타이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

미국이 미얀마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세계를 향하여 크게 선전을 하려면 미얀마 보다 더 잔인한 인권 탄압의 나라들에 대하여 먼저 나서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부시의 이중 잣대는 미국의 위선을 그대로 폭로해 주고 있다.

미국과 영국등 서방 국가들은 경제봉쇄, 자금동결, 비자발급 중지, 거짓 헛소문
유포등 온갓 수단과 방법은 총동원하여 미얀마 내부에서 반정부 소요가 계속하여
일어 나도록 공작을 하고 있다.

아웅산 수지의 노밸평화상 수상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고안해 낸 방법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아웅산 수지가 노벨평화상을 받음으로 인하여 미얀마에 독재
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전하는 효과를 미국은 노린것이다.

아웅산 수지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가?

그녀는 15살때 침략국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로 싸우다가 영국군에게 붙잡혀서 교수형을 받아 목이 짤려 죽은것을 모를리가 없을것이다.

또 그녀의 아버지는 개량주의자로 변신하여 영국에 친근하게 접근하여 명예와 권력을 한꺼번에 쟁취하려는 꿈을 꾸다가 영국의 배신으로 인하여 결국 암살을 당하여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 된다.

15살의 어린나이로 영국에 가서 성장하고 공부하면서 영국식 가치관에 몰입되어 서구문명의 다원적 사회생활 양식과 정치제도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음으로 조국을 배반하는 과오를 범했으리라고 판단 되기도 하다.

어째던 아웅산 수지는 가정적으로 조상을 배반했고, 민족적으로 조국을 배반하는
이중의 배반자가 된것을 의식이 있는 미얀마인 들은 다 알고 있을것이다.

한국의 박근헤와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와의 공통점은 매우 흥미롭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사실은 김재규 뒤에는 미국이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공개된 비밀로 되어 있다. 아웅산은 U Saw의 총에멎아 죽었지만 사실은 U Saw 뒤에 영국이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의 죽음과 아웅산의 죽음은 일점 일혹도 차이점이 없는 미리 계획된 시나리오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웅산 수지는 영국에 매수되여 자기의 조국보다 영국을 위하여 충성하고 있다.
박근헤도 역시 미국에 매수돠여 자기의 조국보다 미국을 위하여 충성하고 있다.

아웅산 수지와 박근헤는 자기들의 아버지를 총으로 살해한 미국과 영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한심하고 불쌍한 딸들이라고 말 하지 않 수 없다.

4.미얀마 군정의 자신감과 우호적 이웃들



미얀마는 인구가 약4,700만이고 국토는 한반도의3.5배 가량 된다

미얀마는 석유, 천연가스, 샤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옥등 세계 최대의 생산
국이다. 특히 양질의 루비는 세계 생산량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옥은 세계 최대 원산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얀마이다.
그외에도 구리 목재등 다양한 천연자원들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부극이다.

미얀마산 루비는 세계 부호들이 선호하고 있으며 다이아몬드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작년에8.62 캐럿 루비가 370만 달러에 팔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제재와 봉쇄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얀마는 해마다 수 차례 보석 경매를 실시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수 천명이 몰려 들어 수 억 달러를 벌어 들인다.

미얀마의 보석 경매는 미얀마 군정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돈줄 구실을 하고 있는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미얀마를 제재하기위하여 유엔 안보리를 활용하고 있지만 어떤 결의안을
내놓아도 중국과 러시아등의 반대로 실패해 왔다. 미얀마에 대하여 미국은 말로만 큰 소리를 칠뿐이며 미얀마의 목을 죌만한 힘과 능력이 없다.

미얀마 군정은 국민투표 과정을 참관할 유엔 선거 감시단의 입국 요청도 내정간 섭이라는 이유로 단호히 거부해 왔다.

지난해9월 미얀마 군정의 학생 데모 유혈진압 사태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은 경제 제재 조치를 강화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고 미얀마의 풍부한 천연가스 수출 액은 지난해 오히려 80%나 급증했다.

중국은 미얀마 군정과 이른바 “혈맹” 관계를 오래동안 유지 해 오고 있으며 지난
10년간 20억 달러 규모의 군사 장비를 제공했다. 미얀마 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의 무기체제와 유사한 각종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군 창설때 18만명이였던
병력이 현재 50만명으로 증가하여 동남아에서 군사강국이 되고 있다.

중국과 미얀마는 양국을 연결하는 길이 2380km 송유관과 900km 송유관들을 각각 설치하여 석유와 천연가스 확보와 수송에 양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얀마는 벵골만의3개 광구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프로젝트
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미얀마 코코섬에 15억 달러를 투자하여 방파제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중국의 동남아 군사기지용 이라고 말들 하고 있다.

2007년1월부터 7월까지 중국의 대미얀마 수출액은9억6400만 달러였다.
미얀마는 중국의 장치와 군사적 파트너뿐만 아니라 중요한 제조품 수출국 이기도 하다.

미얀마 군사정권의 장기 집권에 대하여 서방 여론이 떠들고 있지만 중국은 미얀마 정권을 지원하는 우방국으로서 조심스러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이 나서서 미얀마 군사 독재정권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중국은 “이웃 나라로서 미얀마의 안전과 경제발전을 바란다”라며 원칙적 인 입장만 밝히고 있다.

인도는 어떻한가?



인도 역시 중국에 뒤질세라 미얀마와의 친선과 경제교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4월에 나흘간 인도를 방문한 미얀마의 군정 제2인자 마웅 아예 장군은
인도 정부의 최대의 예우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양국은 미얀마의 시트웨 항공사에1억3000만 달러 투자 협정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1억 달러 규모의 칼라단강 프로젝트도 추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공사를 통하여 방글라데시를 통하지않고 인도와 미얀마는 직송 루트를 가지
게 된다.

올해 5월초에 새로 취임한 인도 신임 카푸르 참모총장은 기자들에게 말 하기를
“우리는 미얀마와 좋은 관계를 맺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런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라고 했다.

미얀마의 군부가 민주화 데모 유혈 진압을 하는데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카푸르 참모총장은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 나라의 내부 문제이다” 라고 답변했다.

에너지 개발과 무역 증진, 국경지대 무장세력 색출 문제등 미얀마 군사정권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카푸르 인도 신임 참모총장은 단호하게
미국의 요구대로 미얀마 내부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밝혔다.

태국도 미얀마 군사정권과 관계 정상화를 적극 원하고있다.

올해3월14일에 태국의 사막 총리는 미얀마를 방문하여 탄 슈웨 최고 지도자와 회담을 갖고 미얀마의 풍부한 천연가스 채굴과 수력발전소 건설에 태국 기업이 참여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동시에 투자보호협정도 체결했다.

특히 사막 태극 총리는 “미국과 유럽의 대 미얀마 제재조치를 반대한다” 라고
언명하며 태국은 이웃 우방으로서 미얀마 구정을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도와줄 준비가 되여 있다고 말했다.

태국은 2007년에13억4000만 달러를 미얀마에 투자를 해. 미국의 대 미얀마 제재 조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에너지 부족 국가인 태국은 전체 천연가스 수입의 20%를 미얀마에 의존하고 있다.

태국도 중국이나 인도처럼 미얀마 군사정권과 우호 친선을 계속 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천연가스 개발을 위하여 5년간 10억 달러를 투자 하겠다고 밝혔다.

글을 끝 맺으며



미얀마가 동남 아시아의 이웃 나라들과 교류와 협력을 즐기면서 미국의 제재를 아랑곳 하지 않은채 미국의 협박 소리를 콧방귀로 여기고 있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1962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얀마식 사화주의” 이념을 굳건히 지키면서 반제와 자주자립 투쟁을 변함 없이 벌여 나가고 있는 미얀마 군정의 지도자들과 그 국민들의 심정은 어쩌면 우리 북부조국의 정서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미얀마는 몇년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던 북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여 지난 2007년4월 26일에 다시 “국교협정”에 조인하고 외교정상화를 복원했다.
.

뿐만 아니라 국교 정상회복 후인 2007년5월20일에 북조선 화물선 강남 1호가 미얀마의 양곤에 도착하여 공화국 제품인 자동소총등 소화기들을 수출
한바 있었다.

동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후에 사회주의 노선을 외롭게 끝까지 고수해 온 미얀마 는 미국의 일방적인 제재와 봉쇄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위기와 난관에 봉착 했었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국제정세는 미얀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얀마의 사태를 보며 북부조국의 상황을 떠올린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북조선을 제재하거나 봉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북과 수교하고 교류하기를 원하면서 손을 내미는 나라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이제 미얀마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들의 미래 또한 승리로 아로 새길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과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자립을 성취고있는 나라들이 중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서 줄줄히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미얀마 군정은 2003년에 제정한 민주화 실현 계획인 “7단계 민주화 로드맵”
을 가지고 이 설계도를 이정표로 삼고 전진하고 있다. 또 최근 2008년5월 10일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92%의 지지로 민주화 계획을 위한 법안을 통과 시켰다. 이번 통과된 법안은 2010에 민정 이양을 실시하기 위한 법안이라고 한다.

미얀마 군정의 최고 사령관인 탄 슈웨 의장은 올해 나이가 75세이다. 후계자 물색에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그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일련의 주도권 다툼도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된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투쟁으로 지켜온 “미얀마식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반드시 성취될 것으로 믿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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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미얀마는 얼마전 군정종식을 기다리며 민주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수도 양곤에는 호텔숫자가 과거에 비해 많아지고 여성들의 옷차림들도 전통의상은 론지에서 벗어나 청바지에 미니스커트 나시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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