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중국 땅에서 민족얼을 지켜 온 재중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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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1-11 01:03 조회5,431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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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동포들이 2백만여 명이 되는데 이중 북녘의 공민으로 거주하는 재중총련 회원들은 중국사회내에
약1만여명이 된다.재중총련 양영동의장(70살)은 《동포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활동해나갈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나가고있다.》고 말한다.조선신보 11일자 보도를 전재한다.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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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만여명이 된다.재중총련 양영동의장(70살)은 《동포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활동해나갈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나가고있다.》고 말한다.조선신보 11일자 보도를 전재한다.
〈재중총련〉 중국땅에서 《애국》을 지향하는 조선동포들 《추진력은 공화국공민으로서의 긍지》 【심양발 오양희기자】 현재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의 해외공민은 약 1만명에 이른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세워 애국운동을 벌리는 조직이 바로 재중조선인총련합회(재중총련)이다. 재중총련 양영동의장(70살)은 《동포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공화국의 해외공민으로서의 긍지를 안고 활동해나갈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나가고있다.》고 말한다. 《영구거류증》 가진 외국인 <##IMAGE##> 중국에 사는 《조선민족》은 《국적》에 따라 세가지로 분류할수 있다. ▼조선국적소유자 ▼중국국적소유자 ▼남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중국정부는 1949년 10월 1일의 건국이전부터 중국에 살았던 조선사람에는 중국국적을 주었다. 그리고 건국이후에 들어온 조선사람은 그대로 조선국적을 가지도록 하였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에는 57개의 민족이 있다. 그중 96%가 한족이며 그를 제외한 56개 민족이 나머지 4%를 이룬다. 그속의 하나가 《조선족》이다. 인구는 약 200만명이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신분을 《국적》과 《민족》의 두가지 징표로 증명하기로 되여있다.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에 속하는 중국공민이며 이들은 중국려권과 해당한 신분증을 가진다. <##IMAGE##> 조선국적소유자는 외국인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영구거류증》이 주어지고있으며 중국국내에서는 이것이 자기 신분을 증명해준다. 재중조선공민의 1세는 그 대부분이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화를 피해 중국으로 온 사람들이다. 오늘은 3세까지 대가 이어지고있다. 공민의 거주지역을 살펴보면 료녕성, 흑룡강성, 길림성의 동북3성에 분포되여있다. 원래 이 지역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다. 료년성 심양시 중심부 화평구에 있는 서탑은 이른바 《코리안타운》과 같은 구역이다. 거리에서는 조선말이 오가고 상점문루에는 조선말 간판이 걸렸다. 조선족병원과 조선족학교를 비롯한 시설들이 있고 묘향산레스트랑, 평양관, 모란관 등 조국의 해당기관에서 운영하는 음식점도 있다. 또한 남조선에서 들어온 오락시설도 있다. 다양한 생활경위와 배경을 가진 하나의 민족이 복잡하게 엉키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져있다. 《모범지부운동》의 전개 재중총련의 사무소는 원래 서탑에 있었다. 2002년에 심양시 황고구로 자리를 옮겼다. 《1950년대부터 공민을 위한 조직이 있었고 조국의 소식을 동포들에게 알렸습니다. 이것이 재중총련의 모체입니다.》 양영동의장에 의하면 비상설적인 기구로서 활동하고있었던 공민조직은 1991년 3월 3일,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의 결성을 계기로 재중동포들의 운동단체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였다. 이듬해에는 《재중조선인총련합회》로 개칭되여 상설기구로서의 활동을 벌리게 되였다. 재중총련은 심양에 본부가 있고 7개지구(료녕, 연변, 길림, 가목사, 목단강, 할빈, 중남)에 산하 협회를 두고있다. 그리고 지구협회아래에 61개 지부가 있다. 재중조선경제인련합회, 재중조선청년련합회, 재중조선녀성위원회 등의 계층별조직도 꾸려져있다. 현재 전임일군은 심양의 본부에서 사업하는 7명이다. <##IMAGE##> 양영동의장은 재중총련의 활동목적에 대하여 《공민들을 묶어세워 조국통일과 조국의 강성대국건설에 이바지하며 조중친선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는것》이라고 설명한다. 재중총련에서는 1998년부터 《모범지부쟁취운동》을 벌리고있다. 각 지부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은 ▼지부조직의 건설 ▼정규적인 학습 ▼다양한 행사운영 등을 주요목표로 상정하고있다. 운동은 년간을 통해 진행되며 년말에 평가사업이 있다. 지금까지 5개지부가 모범지부를 쟁취하였으며 길림시, 연길시, 심양시는 2중모범지부를 쟁취하였다. 모범지부로 표창된 단위들에 대해서는 동포들이 집단적으로 조국을 방문할 기회가 차례지게 된다고 한다. 또 태양절인 4월 15일이나 김정일장군님께서 탄생하신 2월 16일을 비롯한 조국의 명절에는 중국각지의 공민들이 집결하여 특색있는 행사를 진행하고있다. 한편 조국의 소식과 각지 지구협회, 지부의 활동을 편집한 뷸레찐 《백두-한나》도 매달 발간하고있다. 양영동의장은 이곳 동포들의 심정을 대변하여 말한다. 《우리는 조국의 사정이 좋을 때도 어려울 때도 변함없이 운동을 벌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여 보조를 맞추어 전진해나가는것을 공민으로서의 응당한 도리로 간직하고 애국사업을 전개해나갈것입니다.》 (오양희기자 yanghui@korea-np.co.jp) 2008/01/11 |
〈재중총련〉 심양 1세동포들의 《오직 한마음》 애국운동의 토대 닦은 긍지와 자부 【심양발 오양희기자】 재중동포들의 애국운동에서도 1세들은 중요한 역할을 놀고있다. 재중조선인총련합회(재중총련)는 심양에 본부를 두고 7개지구(료녕, 연변, 길림, 가목사, 목단강, 할빈, 중남)협회와 그 산하에 61개 지부를 두고 있는데 심양에 사는 동포들은 지난기간 자기들이 조국을 위한 운동에서 선구자적역할을 수행하여왔다고 말하군 한다. 특히 이곳 1세동포들은 그러한 긍지와 자부가 남다르다. 스스로 일으킨 운동 《우리는 변치 않은 마음을 안고 수십년을 하루처럼 살아왔소.》 <##IMAGE##> 심양지부 3분회 분회장인 렴순자씨(74살)의 집에는 진달래꽃이 있다. 텔레비죤옆에는 겨울철에도 꽃이 만발하게 피여있다. 《그건 조국의 진달래야.》 맵짠 겨울에도 꽃이 피고있다. 조국에서 가져온 조화라고 한다. 진짜 진달래는 창문가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것 또한 조국에서 가져온것이라고 한다.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여난 렴순자씨는 조선전쟁당시 중국인민지원군에 망라되여 조선땅에서 전투를 벌린 조선족의 남편과 결혼하여 심양으로 들어왔다. 1956년의 일이다. 당시 심양에는 동포들이 자발적으로 무은 학습회와 같은 모임이 있었다. 렴순자씨에 의하면 1주일에 한번 개인집에 모여앉았다고 한다. 조직이 동포들에 의한 정연한 체계를 갖추게 된것은 1977년이다. 대사관과 련계를 취하면서 각 지구별로 진행해온 공민들의 활동은 1991년 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 결성을 계기로 크게 전환되게 되였다. 이듬해에는 조직의 명칭이 재중조선인총련합회로 개칭되게 되였다. 《그때의 기쁨을 말로 이루 다 표현할수 없어요. 공화국공민으로서의 우리의 활동을 이제는 그 누구도 막지 못하게 되였으니까요. 수령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들에게 조국을 위한 일을 마음껏 벌릴수 있는 조건을 안겨주신거지요.》 재중총련의 이름과 더불어 실현된 조직의 확대강화의 의의에 대하여 황영두씨(74살)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심양지구협회 회장이며 료녕지구 지부장이며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상무위원을 겸임하고있다. 《학습회시기는 자기 단위에서 문제가 생겼어도 갈피를 제대로 찾지 못했지요. 지금은 심양의 본부로부터 기층조직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체계가 꾸려져있어 의지할수 있는 조직과 사람이 있소. 우리를 안아주는 어머니품, 조국이 우리의 배경에 있으니 가슴펴고 사업하고 생활할수 있게 되였단말이지.》 황영두씨는 1977년에 정식으로 무어진 심양지구 모임의 초대책임자도 맡았다. 그때로부터 김일성주석님의 탄생일이나 공화국창건일을 비롯한 명절에는 행사를 조직하였다. 중국정부에서는 조국의 명절에 즈음하여 행사를 치르는 심양의 공민조직에 대회장을 빌려주고 보조금도 주었다고 한다. 그 관례는 오늘까지 계속되고있다고 한다. 《심양에서는 학습회가 꾸려진 다음부터 행사를 꾸준히 치르어왔소. 다른 지역에서 못했던 그 시절에도 우리는 했거든.》 《자전거지부장》 <##IMAGE##> 심양의 동포들의 긍지와 자부를 대변하는 황영두씨는 동포들속에서 《자전거지부장》이라고 불리우고있다. 1972년부터 자전거를 몰며 애국사업에 헌신해왔다. 자전거는 당시 그가 다니던 직장에서 얻었다. 270여명의 직장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추첨회에서 당선되였던것이다. 그 직장은 규모가 크고 대우도 괜찮았지만 황영두씨는 심양에 조선령사관이 꾸려진 1986년 54살때에 그 직장을 떠났다. 령사관의 사업을 보좌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우리 공민들이 령사관 청소, 마중, 번역, 령사일을 돕는데 거의 근무하다싶이 다녔어.》 황영두씨는 매일 령사관으로 나갔다. 동포들은 황두영씨가 직장에서 맡은 분공이나 그동안의 경력을 놓고 볼 때 당시 그대로 직장에 적을 두었으면 상당한 액수의 월급을 탈수 있었을것이라고 말하군 한다. 황영두씨의 일본새를 직접 목격하여온 렴순자씨는 말한다. 《우리 책임자가 조국에 이바지한 공로는 대단해요. 돈으로 환산한다면 살림집 하나는 쉽게 세울수 있을거야. 동포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보수를 받지 않으며 활동해온 책임자를 이렇게 평가해요.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해외조직의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나갈 신념 하나로 살아온 사람, 바로 그러한 일군입니다.》 《조직은 수령님의 유산》 황영두씨는 1980년에 조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김일성주석님의 초상휘장을 가슴에 모셨다.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그는 한번도 가슴에서 휘장을 떼지 않았다. 오늘도 길거리에서 황영두씨를 만나면 가슴에는 초상휘장이 정중히 모셔져있다. 렴순자씨도 1989년 처음으로 초상휘장을 모셨을 때의 그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는 조국인민들이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섰을 때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오게 된 일이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군 한다. 그가 중국땅에서 할수 있는 일은 공화국의 해외공민단체의 한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일이였다. 1970, 1980년대 심양에서 국립교향악단, 피바다가극단, 만수대예술단, 평양교예단,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 조국의 많은 예술인들이 공연을 진행하였다. 심양동포들은 조국에서 온 예술인들에게 꽃바구니를 선물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역에 꽃을 파는 곳이란 없었다. 황영두씨는 참대잎으로 만들어진 과일상자를 풀어서 바구니를 만들었고 렴순자씨를 비롯한 녀성들은 밤새껏 종이와 짚으로 꽃을 만들었다. 《예술인들에게 선물한 꽃바구니이였지만 거기에는 수령님께 전하는 우리의 감사의 마음이 깃들어있었습니다.》 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된 2개의 큰 시계도 재중총련 심양지부가 김일성주석님께 드린 선물이다. 1989년의 일이다. 이에 대하여 황영두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해외에서도 공민으로서 떳떳이 살아있다, 조국과 항상 숨결을 같이하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싶었던것입니다.》 황영두씨는 당시 심양공민들의 성의를 모아 조국에 보낸 기부금의 장부며 심양에서 진행된 공민활동의 상세한 기록을 지금도 보관하고있다. 《우리가 조중친선이라는 〈따뜻한 집〉에서 운동을 벌려온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입니다. 수령님의 유산인 우리 조직의 력사는 영원히 계승되여야 한다는것을 새 세대들의 가슴에 심어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는 있습니다.》 (오양희기자 yanghui@korea-np.co.jp) |
2008/01/11
〈재중총련〉 창간 14년째를 맞는 잡지 《백두-한나》 재중동포들의 《마음 잇는 교류자》 【심양발 오양희기자】 《우리의 얼을 대변하는 〈백두-한나〉》 1994년 1월 1일에 창간된 재중조선인총련합회기관지 《백두-한나》창간호에는 이렇게 씌여졌다. 《우리의 얼을 대변》 <##IMAGE##> 《백두-한나》는 매달 5일에 발행되는 월간지다. 최신호 2008년 1월호로 루계 157호가 된다. 발행부수는 250부. 중국각지에 있는 재중총련 지부와 일군들에게 배포되고있다. 잡지 편집인을 맡은 한길수 재중총련본부 선전국장(60살)은 《3대장군의 위대성과 조국소식, 각 지방의 활동소식, 통일소식을 공민들에게 알리는것이 잡지의 기본사명》이라고 설명한다. 《각 지부들에서 실용성있는 좋은 학습자료로 활용하고있답니다. 독자들의 반향이 좋습니다.》 <##IMAGE##> 특히 이 잡지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재중총련 각 지역 조직의 활동소식은 넓은 중국땅에서 흩어져사는 동포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의 뉴대를 강화해주는 활력제로 되고있다고 한길수국장은 말한다. 중국에서 조선국적을 가지며 사는 사람들은 재중총련 결성 이전에는 조선대사관, 령사관과 련계를 취하면서 지역별로 각이한 활동을 벌리고있었다. 《다른 지역의 동포들이 어떤 활동을 벌리고있는지 서로 전할 방도가 없었지요. 학습도 조국에서 발행되는 출판물을 놓고 진행했지요.》 《로동신문》을 비롯한 조국의 정기간행물은 대사관, 령사관을 통해서 배포되였다. 《조국소식을 전하는 출판물은 직접 손에 들어왔지만 공민들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60여명의 통신원 한길수국장은 동포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창간된 《백두-한나》가 명실공히 동포들의 사랑을 받는 잡지로 되기 위해 《질을 제고하는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현재 실질적인 잡지편집은 한길수국장이 혼자서 맡아보고 보조성원으로서 본부에서 출납계를 하는 심선실씨(44살)가 협조하고있다. 전문기자는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놀고있는것이 《통신원》들이다. 각지에 40대부터 70대까지 60여명의 통신원이 임명되여 활동하고있다. <##IMAGE##> 《나는 통신원들에 의거하여 일하고있습니다. 그들이 보내오는 기쁜 소식을 제때에 동포들에게 전달하고있을뿐입니다.》 한길수국장에 의하면 새해를 맞으며 1주일도 지나지 않는 기간에 연변지구, 중남지구, 료녕지구에서 벌써 년말, 년초의 활동소식이 보내여왔다고 한다. 2004년부터는 재중총련의 홈페지(http://www.cnccr.com/)도 운영되고있다. 주된 내용은 《백두-한나》에 편집된 기사들이다. 잡지 창간 14돐이 되는 새해를 맞으며 한길수국장은 《전체 공민들의 마음과 마음을 상통하는 교류자가 될것이다.》라고 창간호에서 선언한 《백두-한나》를 더 잘 편집해나갈 포부를 피력한다. 그에 의하면 《앞으로는 재일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들의 소식도 잡지에 반영할 구상》도 있다고 한다. (오양희기자 yanghui@korea-np.co.jp) 2008/01/11 |
2008/01/11
〈재중총련〉 공민조직에서 일하는 조선족 식모 《흐르는 피는 같잖아요》 【심양발 오양희기자】 중국에 사는 공화국공민들의 조직인 재중조선인총련합회(재중총련) 성원들은 조선국적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재중총련 양영동의장에 의하면 《같은 민족이라는 공통점에서 우리 사업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조선족도 많다.》고 한다. 현재 재중총련의 본부가 있는 심양시에는 11만명의 조선족이 살고있다. 재중총련본부의 식당에서 식모로 일하는 주옥씨(38살)도 바로 그중의 한사람이다. 《공민》존재 몰라 <##IMAGE##> 재중총련본부에서는 낮 12시가 되면 점심시간이다. 3층짜리 회관의 1층에 식당이 있다. 밥상우에는 밥과 국물, 그리고 대여섯가지 반찬이 나란히 되였다. 식사를 장만한것은 주옥씨이다. 2003년부터 본부에서 식모를 하고있다. 흑룡강성에서 태여난 그는 1993년 심양으로 왔다. 본부에서 일하기전에는 시내의 음식점에서 일하거나 개인집에서 가정부를 하는 등 가지가지 직업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관절염을 앓게 되여 장시간의 로동을 하기가 힘들게 되였다. 그때 마침 이웃에 사는 이전 본부식모의 소개를 받아 일을 하게 되였다. 《내가 여기서 배운것이 진짜 많아요.》라고 주옥씨는 말한다. 지난시기 주옥씨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공민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공민〉이라는 말조차 몰랐지요. 우리처럼 계속 중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점심을 들면서 재중총련 일군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감동되는 일들이 많다고 주옥씨는 말한다. 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으며 공민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것인가에 대하여 조금씩 리해하게 되였다고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 힘을 합치는것은 응당한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호적이 다를뿐이지요. 흐르는 피는 같잖아요.》 《평양에 가고파요》 본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주옥씨는 조선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게 되였다. 《조선의 명절은 다 통달했어요. 4.15태양절, 2.16, 9.9, 6.15, 8.15・・・》 주옥씨는 그날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있다. 명절날이면 동포들이 본부에 모여 행사를 치르기때문이다. 그때마다 주옥씨는 《어떻게 하면 명절을 뜻깊게 장식할수 있을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지금 주옥씨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다고 한다. 《평양에 가고파요. 같은 민족이 사는 나라가 어떻게 되여있는지 보고싶어요. 산이 좋고 많고 물도 맑다고 들었는데 정말 좋을것 같애요.》 3월이면 본부에서 일을 시작하여 5년이 된다. 주옥씨는 지난 기간을 돌이켜보고 가장 기뻤던 일이 재중총련 일군들이 그의 생일날에 축하모임을 마련해준것이라고 한다. (오양희기자 yanghui@korea-np.co.jp) 2008/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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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나도 재중교포이고 총련에 소속된 사람이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참고로 북녘을 다녀온 외국인들중에서 중국대륙에 거주하는 중국본토인(재중교포도 포함)들이 다수인거 몰랐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