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 미국방문 강연에 내외동포들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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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6-04-05 20:35 조회3,1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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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한때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지하씨(65)가 미국의 주요도시, 뉴욕, 보스턴, 아트란타 등을 거쳐 미국 서부지역의 중심지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하여 4일 낮 캘리포니아주립대학 강의실에서 대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이날 저녁 오후7시에는 한인타운 밀집지역에 위치한 옥스포드 팰리스 호텔 2층연회실에서 1백여명의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생명과 평화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IMAGE##> 그는 뉴욕지역 강연회에서는 정치적인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여 참석자들을 당황스럽게 하였으나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는 그런 단서를 달지 않고 강연에 임했다.
이날 동포사회 행사는 한미평화협의회(차종환 회장, 김용현 이사장)주최, 한국일보와 크리스천 헤랄드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이태형씨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주최측 임원들의 환영사와 중동고등학교동창회장의 격려사, 그리고 강사소개에 이어 김지하 시인의 강연, 질의응답, 만찬순서로 이어졌다.
김지하씨는 강연을 통해 "우리 민족은 외세로부터 1천여 차례이상 침략을 받은 민족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왔다"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한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흥도 있었기에 서로 모순된 정서, 즉 음과 양이 상호 엇갈리면서도 그것이 결합되어 혼돈의 질서를 유지하여 왔다"고 설명했다.
<##IMAGE##> 그는 월드컵 축구, 세계야구경기 등에서 국내외 응원단들이 보여준 대~한민국(3박자와 2박자)이라는 구호에서도 엇박자와 박자가 어우러져 독특한 소리를 내며 외친 것은 우리만의 정서일 것이라고 진단하며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특이한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고 설명하면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촛불시위 문화가 정착된 것, 그리고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등이 이른바 "한류"문화의 통로를 통하여 다른 나라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은 논리로서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또 "한국에는 시한편 잡지에 실으면 1급시인의 작품도 4만원 정도 밖에 원고료가 되지 않는 실정인데 등록된 시인만 무려 1만여명이 되고 계간 문예지가 2백여개가 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은 민족"이라면서 이런 현상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날 김지하 시인은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국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가치를 부상시키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고 동아시아와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한국이 미국과 창조적 파트너쉽(?)을 갖고 그 지위를 높여가면서 이 과정에서 통일도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자신은 생명과 평화를 귀중히 여기는 환경운동 지지자라고 설명하고 그런 운동에 한 역할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과 창조적 파트너쉽"(?)이 되어야 한다는 그 참뜻과 양자간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에서 과연 그러한 표현이 적절한 것인가는 두고서 토론할 과제로 남기기도했다.
<##IMAGE##> 그의 고백에는 후배들에게 이해를 촉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자신이 감옥에서 나온 초기시기 이후 많은 후배들이 자리를 만들어 놓고 선동강연 등을 요구한 적이 많았다고 하면서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살짝 꼬집는 말도 던졌다. "선배님 그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는 좀 쉬시면서..."라는 배려가 없었다는 불만으로 들렸다.
그러면서도 김지하씨는 항간에 자신이 변신했다는 소리도 있었다고 시사하면서 "운동은 모두가 똑같이 할 수 없다. 제각기 역할이 다르다"고 지적하고 전투보병대도 있어야 하고 후방 지원부대도 있어야 하는 등 역할 분담론을 펴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강연뒤에 들어 온 질의응답 중에 민족통일 문제라든지 남북문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사회자가 직접 질문을 받지 않고 종이에 써서 질문을 내라는 요청으로 서면질문들이 들어 왔으나 그 중에는 환영의 뜻을 전하는 질문들도 있었지만 김지하 시인에 대해 실망의 뜻을 전하면서 던지는 질문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부 재미문인들은 강연이 끝나고 모인 자리에서 "김지하의 작품들이 이어져 나오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김지하씨가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 상"을 받았고,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한바 있고, 93년에 이산 문학상, 2002년에 "지용 문학상"수상, 2006년에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한바 있지만 작품들을 계속 만들지 못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깝다는 내용을 반복하여 되풀이 했다.
김지하씨는 이날 "한때 나를 포함하여 3대구라가 있었는데 나머지 두명은 황석영 구라, 백기완 구라였다"고 스스로 밝히며 상상력이 많아서인지 때로는 되는 말 안되는 말을 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표현이 겸손의 뜻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이 너무 허왕된 것이기에 이해를 요청하는 말인지는 진단하기가 어려웠다.
김지하씨는 본명이 영일이고, 지하는 필명이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했고 1963년에 "저녁이야기"라는 첫 시를 발표했다. 70년대 "황토길"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장시 "5적", "빈산", "밤나라" 등이 유명한 작품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80년대에는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2(1986), "검은 산 하얀 방"(1986),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대설 "남"(1982, 1984, 1985)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1992년 "생명"에의 외경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생명"의 시펀을 발표했고, 2000년대 "생명과 평화의 새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살림"을 출발했다.
김지하씨는 또 지금까지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도 가졌었다. 해외초청들이 있었지만 해외에 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그의 신조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방문은 김지하씨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내외 동포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IMAGE##> 그는 뉴욕지역 강연회에서는 정치적인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여 참석자들을 당황스럽게 하였으나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는 그런 단서를 달지 않고 강연에 임했다.
이날 동포사회 행사는 한미평화협의회(차종환 회장, 김용현 이사장)주최, 한국일보와 크리스천 헤랄드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이태형씨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주최측 임원들의 환영사와 중동고등학교동창회장의 격려사, 그리고 강사소개에 이어 김지하 시인의 강연, 질의응답, 만찬순서로 이어졌다.
김지하씨는 강연을 통해 "우리 민족은 외세로부터 1천여 차례이상 침략을 받은 민족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왔다"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한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흥도 있었기에 서로 모순된 정서, 즉 음과 양이 상호 엇갈리면서도 그것이 결합되어 혼돈의 질서를 유지하여 왔다"고 설명했다.
<##IMAGE##> 그는 월드컵 축구, 세계야구경기 등에서 국내외 응원단들이 보여준 대~한민국(3박자와 2박자)이라는 구호에서도 엇박자와 박자가 어우러져 독특한 소리를 내며 외친 것은 우리만의 정서일 것이라고 진단하며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특이한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고 설명하면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촛불시위 문화가 정착된 것, 그리고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등이 이른바 "한류"문화의 통로를 통하여 다른 나라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은 논리로서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또 "한국에는 시한편 잡지에 실으면 1급시인의 작품도 4만원 정도 밖에 원고료가 되지 않는 실정인데 등록된 시인만 무려 1만여명이 되고 계간 문예지가 2백여개가 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은 민족"이라면서 이런 현상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날 김지하 시인은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국은 동아시아 나라들의 가치를 부상시키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고 동아시아와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한국이 미국과 창조적 파트너쉽(?)을 갖고 그 지위를 높여가면서 이 과정에서 통일도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자신은 생명과 평화를 귀중히 여기는 환경운동 지지자라고 설명하고 그런 운동에 한 역할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과 창조적 파트너쉽"(?)이 되어야 한다는 그 참뜻과 양자간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에서 과연 그러한 표현이 적절한 것인가는 두고서 토론할 과제로 남기기도했다.
<##IMAGE##> 그의 고백에는 후배들에게 이해를 촉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자신이 감옥에서 나온 초기시기 이후 많은 후배들이 자리를 만들어 놓고 선동강연 등을 요구한 적이 많았다고 하면서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살짝 꼬집는 말도 던졌다. "선배님 그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는 좀 쉬시면서..."라는 배려가 없었다는 불만으로 들렸다.
그러면서도 김지하씨는 항간에 자신이 변신했다는 소리도 있었다고 시사하면서 "운동은 모두가 똑같이 할 수 없다. 제각기 역할이 다르다"고 지적하고 전투보병대도 있어야 하고 후방 지원부대도 있어야 하는 등 역할 분담론을 펴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강연뒤에 들어 온 질의응답 중에 민족통일 문제라든지 남북문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사회자가 직접 질문을 받지 않고 종이에 써서 질문을 내라는 요청으로 서면질문들이 들어 왔으나 그 중에는 환영의 뜻을 전하는 질문들도 있었지만 김지하 시인에 대해 실망의 뜻을 전하면서 던지는 질문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일부 재미문인들은 강연이 끝나고 모인 자리에서 "김지하의 작품들이 이어져 나오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김지하씨가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 상"을 받았고,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한바 있고, 93년에 이산 문학상, 2002년에 "지용 문학상"수상, 2006년에 만해대상 평화상을 수상한바 있지만 작품들을 계속 만들지 못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깝다는 내용을 반복하여 되풀이 했다.
김지하씨는 이날 "한때 나를 포함하여 3대구라가 있었는데 나머지 두명은 황석영 구라, 백기완 구라였다"고 스스로 밝히며 상상력이 많아서인지 때로는 되는 말 안되는 말을 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표현이 겸손의 뜻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이 너무 허왕된 것이기에 이해를 요청하는 말인지는 진단하기가 어려웠다.
김지하씨는 본명이 영일이고, 지하는 필명이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했고 1963년에 "저녁이야기"라는 첫 시를 발표했다. 70년대 "황토길"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장시 "5적", "빈산", "밤나라" 등이 유명한 작품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80년대에는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2(1986), "검은 산 하얀 방"(1986),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대설 "남"(1982, 1984, 1985)등의 시집을 발간했다. 1992년 "생명"에의 외경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생명"의 시펀을 발표했고, 2000년대 "생명과 평화의 새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살림"을 출발했다.
김지하씨는 또 지금까지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도 가졌었다. 해외초청들이 있었지만 해외에 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그의 신조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방문은 김지하씨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내외 동포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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