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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비단이불 챙겨준 북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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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10-25 14:57 조회1,9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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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서울 명동거리에 나가도 일없겠습니까?”
황선씨가 남녘으로 가던 날, 입고갈 검은 바지와 흰색 외투를 들고 나타난 북녘의 인사였다. 전날 황선씨의 몸치수를 재어가더니 밤새 옷을 만들어 들고 왔다는 거다. 아닌게 아니라 남쪽에서 만든 옷처럼 세련된 맛이 났다.

평양산원은 황선씨 입고 가라고 옷까지 만들어 주었다

<##IMAGE##> 집에 도착해서 새로운 환경이 신기한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통일동이. 세상에 나온 후 첫 나들이인데도 지치지 않은듯 울지도 보채지도 않던 통일동이는 베시시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평양에서는 잘 울지 않고 잘 우는 아이로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다

황선씨만이 아니다. 통일동이에게 쏟아진 북녘의 정성은 더욱 세심했다. 남녘에 고운 옷 입고 가라며 꽃그림 가득한 신생아용 원피스에 색동 비단 덧싸개를 선물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통일동이 감쌀 비단이불에
두 모녀 담은 만수대창작사 그림까지


통일동이를 출산한 다음날 산원측에서 찍어간 두 모녀의 사진이 그림으로 되돌아왔다.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날 평양산원은 황선 모녀에게 그림 한점을 선물했다. 아이를 다정스레 바<##IMAGE##> 라보는 황선씨가 담긴 그 그림은 평양산원이 만수대창작사에 부탁해 그린 유화였다. 실제 사진과 똑같은 유화 그림에는 ‘2005. 10. 10 8층6호 2부인과 일동’이라며 쓰여 있으며 두 모녀 뒤에는 평양산원 건물과 함께 황선씨가 입원해 있었던 호실의 불이 켜져 있다.

그림과 함께 평양산원은 통일동이에게 비단이불을 선물했다. 연두빛 비단깔개와 환한 아이들의 웃음이 그려진 덮개와 앙증맞은 베개, 그리고 베넷저고리 두벌과 신발, 아이용품을 담으라며 분홍색 가방 하나와 아이가 손에 쥐고 놀 수 있는 인형까지…. 세심한 정성과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산후조리를 채 마치지 못하고 내려가는 황선씨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평양산원과 북녘동포들은 갖가지 몸에 좋다는 약을 보내왔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금당에서부터 인삼가루, 경옥고, 꿀 등 건강식품은 한 상자 가득했다.

적어도 한달은 산후조리를 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통일부가 26일로 방북기한을 못박은 까닭에 산원에서 나와야 했던 황선씨를 두고 산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쩨쩨하게…. 쓸려면 팍팍 쓸 것이지”라며 아쉬움과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물 사이에는 특이하게도 A4용지 한박스가 끼어있었다. 웬 거냐는 질문에 황선씨는 “산원에 있는 동안 글 많이 쓰라고 6.15공동위 북측준비위에서 보내온 것인데 푹 쉬어야 할 산모, 손가락에 관절염 생길 일 있냐면서 담당의사한테 크게 한 소리 들었다”며 ‘그 종이까지 싸서 보내줬네’라고 웃어보였다.

다섯명의 의료진, 산원에서 숙식하며 돌봐
산모에게 죽 떠먹여 주기도


<##IMAGE##> 선물만이 아니었다. 황선씨는 ‘미안해서라도 더 있을 수가 없겠더라’며 그곳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간호에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황선씨와 통일동이가 있는 동안 황선씨 담당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 통일동이 담당 의사와 간호사 1명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에서 숙식을 하며 산모와 신생아를 돌봤을 뿐만 아니라 간호사 2명은 아예 황선씨 병실에 이브자리를 깔고 함께 잠을 자며 황선씨 건강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98년 방북했을 당시 황선씨를 안내했던 ‘영희 언니’가 출산 소식을 듣고 개성에서 만사 제치고 달려와 황선씨 입원기간 내내 옆병실에서 출퇴근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단다. 출산 초기 병원에서 식사로 나오는 죽도 간호사들이 떠먹여 준 것이다. 너무 미안한 나머지 ‘제가 먹겠다’고 일어서려는 황선씨에게 간호사가 정색을 하며 “황 선생님. 이건 우리 의료일군들이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며 계속 떠먹여 줬던 것. 죽을 떠먹여 준 일은 황선씨에게 특별히 차례진 일이 아니라 평양산원에 입원하는 모든 산모들에게 차례지는 의료일군의 몫이었던 거다. 아마 아이를 낳아본 산모라면 알 것이다. 출산 직후 숟가락 들기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렇게 평양산원에서의 14일을 보낸 황선씨는 “산후 산모 우울증에 걸릴 새도 없었다”면서 산후 우울증 때문에 밤새 혼자 울기도 했던 첫 번째 출산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듯 건강한 웃음을 내보였다. 지난해 출산 때 옆에서 지켜봤던 황선씨와 지금의 황선씨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다. 여유와 편안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우리가 북쪽에서 받은 환대와 정성은 만약 북녘동포가 남쪽에서 출산했다면 응당 남쪽에서 해주었을 그것들”이라고 전한 황선씨는 ‘떠나올 때 산원 의사선생님이 건강하게, 그리고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것처럼 통일동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몫이 남았다며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꼭 잡았다.

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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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현장>평양출산한 황선씨와 통일동이, 남녘으로 돌아온 날


박준영 기자

“저기 좀 보세요. 분단과 비극의 상징이던 이곳 판문점이 통일동이를 환영하는 기쁨의 상징으로 변했어요. 60년간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기쁜 통일의 날을 우리 통일동이가 이뤄냈잖아요.”

지난 10월10일 평양에서 탄생한 우리 민족의 첫 통일동이. 이 통일동이는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을 통일과 기쁨의 상징으로 전변시켜 놓았다

<##IMAGE##> 오늘(25일) 판문점 평화의 종각에 내걸린 황선씨와 통일동이의 귀환을 축하하는 꽃그림 가득한 현수막들을 보면서 환영나온 가극단 미래의 대표 강문주씨가 던진 감격어린 말이다.

판문점은 지난 60년간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다. 그러하기에 지금도 판문점을 찾는 실향민들은 북녘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판문점 자유의 다리에 놓여진 철조망에 가족을 그리는 쪽지를 붙여놓고 북녘을 향하는 바람에라도 그리움이 실려가라고 눈물젖은 손수건을 걸어놓는다. 그렇게 60년간을 버텨온 철조망에는 세월의 비극과 눈물이 쌓이고 쌓인 수많은 종이들과 편지, 손수건과 깃발들이 버거운 듯 축 처져 있다.

또한 판문점은 대결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로지 민족통일에 보탬이 돼보겠다는 일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판문점에서 쇠고랑을 차고 곧바로 차디찬 감옥으로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황선씨도 그랬다. 98년 한총련 방북대표로 어렵사리 평양을 방문했던 그는 판문점을 통해 내려오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가족의 품이 아닌 감옥속에 갇혀야 했으며 그렇게 2년6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7년 후인 2005년 10월25일 황선씨는 판문점이 가진 ‘대결의 상징’을 ‘화해의 상징’으로 바꿔놓았으며, 그의 둘째딸,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동이는 ‘분단의 상징’을 ‘통일의 상징’으로 전변시켰다. 그러하기에 황선씨와 통일동이에게 보내는 민족의 고마운 인사는 끝이 없다.

그래서일까. 판문점은 12시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황선씨와 통일동이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온 환영 플래카드를 붙이고 환영풍선을 부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단원이 판문점에 왔다는 가극단 미래의 강문주 대표는 “민족적 대경사를 맞이하는 자리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통일동이를 생각만 해도 좋다”며 조만간 통일동이를 위한 노래도 하나 만들어야 겠다고 웃어보였다.
또한 강문주 대표는 “이 애기는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면서 “분단과 이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통일과 기쁨, 만남의 상징으로 변했다”며 통일동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전했다.

1시경 판문점에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황선씨와 꽃분홍색 이불에 싸인 통일동이가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들고있던 풍선을 흔들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에게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는 통일동이에게 모인 우리 민족의 관심을 대변이라도 하듯 뜨거웠다.

오후 1시경 황선씨와 통일동이를 태운 앰뷸런스가 판문점에 도착했다. 황선씨의 건강을 고려해 앰뷸런스를 준비한 남북적십자사와 통일부는 황선씨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네기도 했다

<##IMAGE##> 한바탕 환영과 축하, 기쁨의 인사가 오고간 후 열린 기자회견 자리에서 권오창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는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통일동이를 업고 온 황선 동지를 열렬히 환영하자”며 여느때와는 달리 기분좋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권오창 상임대표는 “통일의 꽃 황선 동지가 10개월간의 신고 끝에 통일 옥동자를 낳았다”면서 “이제 이 아이가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는 나라, 주인된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한편 황선씨의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는 황선씨의 출산에 큰 힘을 쓴 평양산원과 편안한 산후조리를 위해 애쓴 남북적십자사와 통일부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누가 뭐래도 기쁜 사람은 황선씨 본인이었을 게다. 98년에는 미군의 총칼 앞에 눈물을 꾹 참았던 그였지만 2005년 오늘은 출산을 환영하는 남북적십자사의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판문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별하기 싫어하는 평양산원 소아과 간호사들의 눈물바다를 보며 남녘으로 향했다. 내가 평양에서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이며 6.15공동선언에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전한 황선씨.

동생을 맞은 큰 딸 "민"이는 마냥 신기한 듯 엄마와 동생 주변을 떠날 줄 모른다. 이 행복한 가족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는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이 환영의 자리에 자신과 함께 서서 웃어야 할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딸은 평양에서 태어나고 아빠는 국가보안법 수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직 이 땅의 현실이다. 어서 빨리 아빠가 집으로 와서 둘째아이의 첫돌에는 온 가족이 손을 잡고 평양관광길에 올랐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자 바람이다.”

평양산원에서 작성해준 ‘출생증명서’와 남쪽 정부에서 내어줄 ‘대한민국 국적.’ 분명 황선씨의 둘째 아이는 출생은 평양에서 했지만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의 딸이 빠른 시일내에 ‘남한’ ‘북한’이 아닌 ‘코리아’라는 국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10분만 늦었어도 산모와 아기 다 위험했다
긴박했던 출산 당시 상황…민족의 정성이 위기 넘겼다


애초에 황선씨는 평양방문을 하지 않으려 했다. 수술날짜가 아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월8일 출발하기로 했던 시부모님의 평양행이 인천공항에서 명단누락으로 좌절된 것을 알고 부모님과 함께 10월10일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10월17일로 분만날짜를 잡아놓았던 황선씨는 의사의 ‘평양 정도면 아무 상관없다’는 허락에 한번 실망으로 주저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일은 그날 오후 터졌다. 평양에 도착하고 오후쯤 동명왕릉 참관을 할 때 갑자기 진통이 온 것이다. 걸음이 더딘 그의 상태를 알아본 북측 한 인사가 곧바로 평양산원에 연락을 취해 평양산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한차례 진찰을 받고 어렵사리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으나 저녁 9시30분경 또다시 강한 진통이 찾아와 대기해 있던 앰뷸런스에 몸을 실고 평양산원으로 향해야 했다.

상태를 살펴보던 의사들은 자궁 수술자리가 곧 파열될 위기라고 진단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10-20분만 늦었어도 산모와 태아 모두가 위험할 수 있던 상황. 평양산원 원장이 오후 내내 황선씨 곁을 지키며 상태를 지켜봤던 그 정성으로 의사들도 수술을 진행했고, 다행히 황선씨는 건강한 딸을 출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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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출산 소식 듣고 눈물이 울컥 했다”

<인터뷰>통일동이의 아빠, 윤기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만나


박준영 기자

<##IMAGE##> 지난 10월10일 평양을 방문하던 중 갑작스런 산통으로 둘째딸을 출산한 황선씨가 15일 여간의 산후조리를 마치고 오늘(25일) 낮 12시경 판문점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오늘 판문점은 황선씨의 건강한 출산과 통일동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통일운동단체 회원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판문점 평화의 종각을 에워싼 통일동이 출산 축하 플래카드는 판문점이 분단과 비극의 상징이 아니라 만남과 기쁨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 할 한 사람이 환영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해, 분단의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기도 했다. 바로 황선씨의 남편이자 평양에서 태어난 우리 민족의 첫 통일동이의 아빠인 윤기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이다.

아내인 황선씨도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을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남편을 찾아갔다. 황선씨는 남편을 보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담긴 카메라를 내밀었다. 카메라 액정을 통해서나마 아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찍힌 사진 한 장 한 장을 보며 설명을 해주는 아내, 카메라 액정을 통해서지만 아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는 남편.

아기를 본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윤기진 의장은 “사진으로 보니까 어떻게 생겨 잘 모르겠다”면서도 “애기 엄마가 (애기가) 건강하다고 하니 다행이다”며 얼굴 근육을 풀지를 못한다.

무엇보다도 황선씨가 웃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는 윤 의장은 “작년에 첫애를 낳고 나서 만났을 때는 펑펑 울었는데 이번에는 얼굴도 좋아보이고 웃고 있어서 마음이 좋다”면서 황선씨의 건강한 모습에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 사진으로나마 아기 사진을 봤는데 소감이 어떤가
= 사진으로 보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직접 보지를 못하니까…. 그래도 애기엄마가 그러는데 아기가 건강하다니까 다행이다.

- 평양에서 출산할 것을 예상했었나
= 전혀 못했다. 올라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병원에서 가도 괜찮다고 해서 갔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했다.

- 출산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을 것 같다
=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더라. 눈물이 울컥 했다. 출산 다음날(11일) 저녁 늦게야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을 볼 수 없으니 아마 내가 가장 늦게 알았을 거다.

- 평양산원에서 정성을 많이 쏟았다고 하는데 한말씀 부탁한다
= 남쪽에서 했어도 어려운 수술이었을 텐데 산원 관계자분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주셨다고 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다. 애기 엄마한테 들어보니 말 그대로 친혈육보다 더한 정성으로 돌봐주신 것 같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둘째 이름은 결정했나
= 한달전부터 고민했다. 그런데 아직도 결정을 못하겠다. 애기엄마랑 더 상의해서 조만간 좋은 이름을 지어줄 생각이다. 솔직히 이름 짓는 것부터 어깨가 무겁다. 축하의 마음이 고마운만큼 민족적 기대에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이 커진다.

- 오랜만에 아내를 만났을텐데 아내에게도 한마디 부탁한다
= 산후조리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밝으니까 참 좋다. 작년에 민(큰딸)이 낳고는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도 애기 낳고 2주만에 얼굴 봤는데 보자마자 펑펑 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같이 2주만에 보는 건데 얼굴도 좋아보이고 활짝 웃고 있어서 많이 고맙다.

- 오늘 둘째는 못봤다. 민이랑 둘째를 언제 볼지 예정이 없는데, 마음이 어떤가
= 오늘 사진으로 우리 민이도 봤는데 둘째랑 첫째랑 둘 다 너무 보고 싶다. 특히 민이는 볼 때마다 쑥쑥 커서 마음이 조급해 진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눈에 밟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 딸은 평양에서 태어나고 아빠는 국가보안법 수배자라는 현실이 그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다가올 것 같다
= 이번에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7천여 명의 남측 사람들이 방북했고 우리 둘째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보안법이 존재하고 수배자가 있다는 것은 모순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모순이다. 이제는 보안법과의 싸움을 매듭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잘 싸워서 끝장을 볼 결심이다. 우선 오는 11월6일에 있는 국가보안법 대시민선전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향후에도 여론사업에 집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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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산원에서 개원이래 첫 남녘아기 출생
동포녀성이 통일옥동녀를 안고 남조선으로 돌아갔다


【평양 10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민족의 국보적걸작인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기 위하여 《평양참관단》으로 왔다가 평양산원에서 해산한 남조선동포녀성이 25일 아기와 함께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여 남조선으로 돌아갔다.

<##IMAGE##>온 나라가 크나큰 환희와 격정속에 휩싸여있던 지난 10월 10일 저녁,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대표로 1998년 평양을 방문한바 있는 남조선의 황선(통일련대 대변인)녀성은 공연을 관람하던중 갑자기 오는 진통으로 하여 평양산원에 구급으로 입원하였다.

산원의료집단은 긴급의사협의회를 가지고 위급한 상태에 있는 남조선녀성이 순조롭게 해산하도록 하기 위한 대책들을 면밀히 세우면서 긴장한 전투를 벌렸다.

이곳 의료일군들의 정성에 의해 그는 입원한지 한시간도 못되여 밤 10시에 딸(몸무게 3. 36kg)을 순산하였다.

전체 의사, 간호원들은 평양산원에서 통일옥동녀가 태여났다고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다.

평양산원에서 개원이래 처음으로 남조선동포녀성이 옥동녀를 낳았다는 소식은 삽시에 각지에 전해졌다.

온 겨레가 평양에서 첫 고고성을 울린 통일동이의 미래를 축복해주었다.

남조선의 한 방송도 보도를 통해 남녘동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평양산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황선녀성은 무상치료제의 혜택으로 산후치료는 물론 종합적인 의료봉사와 함께 모든 산모들이 다같이 받아안는 산꿀과 귀중한 보약재들, 영양제들을 공급받았다.

산모의 건강상태와 아기의 발육상태는 대단히 좋다.

평양산원에서 보낸 보름동안의 나날들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귀여운 딸을 안고 퇴원하는 황선녀성의 눈가에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어려있었다.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과 관심을 돌려준 평양산원 의료일군들의 뜨거운 환송속에 산원 문을 나서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뜻밖의 행운으로 평양산원에서 몸을 풀고 귀한 통일동이를 받아안게 되였다.

꿈만 같은 오늘의 이 경사를 안아온 6. 15에 감사를 드린다.

6. 15는 민족통일의 현실도 반드시 안아올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동포애의 정으로 저와 딸애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돌보아준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원들에게 저의 진심으로 되는 인사를 드린다.

황선녀성은 이날 낮 12시 평양산원 의료일군들의 배웅을 받으며 판문점을 통과하였다.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판문점에 나와 산모와 아기를 마중하여갔다.

주체94(2005)년 10월 26일 《로동신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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