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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대담]빨치산 박선애,순애 자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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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01-30 00:00 조회1,2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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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항상 20대 청춘인데 몸이 이제는 말이 안들어. 그래도 뭔가 해야 할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으니 청년들한테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야.”

박선애, 박순애 선생은 겨울만 되면 언제나 목에 수건을 감고 계신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 대비만 하면 겨울을 지낼 만 했는데 이제는 쉽지가 않으시단다. 작년 연말 동생 되시는 박순애 선생이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이후로는 박선애 선생은 동생을 한 시도 혼자 두지 못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고, 박순애 선생은 갑자기 나타나는 마비증세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기침으로 몸을 가누기도 어렵다.

b_P1220005-1.jpg [사진은 작년 10월 제주도 학살지답사를 다녀오신 박선애(왼쪽) 박순애 선생. 사진 뒤에 펼쳐진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3백여 명의 제주도민이 산 채로 수장당했다고 한다]

모든 장기수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박선애, 박순애 선생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를 견뎌야 했다. 언니되는 박선애 선생은 도합 두 번 20여 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박순애 선생은 10여 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52년 회문산 빨치산 활동 중 생포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후 서울, 대전, 광주 등 전국의 감옥을 전전해야 했던 두 분의 건강이 좋을 리 없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 박순애 선생은 혹독한 고문의 결과 복막염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기도 했다. 산송장이 되어 감옥에서 나온 박순애 선생은 아버지의 극진한 간병으로 3개월여 후에 겨우 몸을 추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다시 형무소에 끌려가야 할 상황, 박순애 선생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른 새벽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뒤로 하고 고향 임실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어.”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박순애 선생은 안 해본 일이 없다. 소쿠리를 이고 시골마을을 다니며 수저에서부터 냄비까지 안 팔아 본 것도 없다. 더구나 경찰의 눈까지 피해 다녀야 했으니 말로는 이루 다 하지 못할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잡혀갔을 때 동생이 여섯 살짜리 내 딸을 데려다 키웠어.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끌려간 것을 봤을 어린 것이 얼마나 충격이 컸겠어. 그 아이의 그늘까지 걷어 주려고 동생이 가난한 살림에도 정말 자기 딸처럼 극진히 우리 딸을 키웠지.”

그래서인지 박선애 선생은 아픈 동생의 모습이 더욱 안쓰러우시단다.

2001년 윤희보 선생이 북으로 송환되신 후 동생이 아프면 언니가, 언니가 아프면 동생이 서로서로를 돌봐주며 살아가고 있는 박선애, 박순애 선생. 두 분에게 가장 아쉬운 것은 예전처럼 현장에서 청년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란다.

b_P1220004-1.jpgcolor=blue>[사진은 6.15공동선언 때문에 금강산에도 가봤다며 기뻐하는 박순애 박선애 선생. 사진은 김정숙휴양소 앞에서 인민군포로 신분이 인정돼 곧 송환되실 방장련 선생과 함께]

“예전에는 아파도 윤 선생이 침을 놔주고는 해서 곧잘 밖에 나가 활동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도 못해. 그게 제일 답답하고 고통스러워.”

그래도 6.15공동선언이 나온 후 금강산에도 다녀오고 제주도에도 다녀왔다며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시며 사연을 이야기해주신다.
“이제는 미국 나쁘다고 소리쳐 말할 수 있잖아. 우리 때는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말이야. 새별이 돋고 먼동이 터오고 있으니 곧 태양이 솟을거야”라며 미래를 낙관하시는 두 선생에게 올해 소망은 “당연히 통일”이었다.

“통일되면 더 좋지. 새해에는 통일이 빨리 오게끔 다리를 빨리 놔야 해. 기차도 가고 사람도 가고 버스도 가게 빨리 빨리 다리를 놔야 해. 어떤 장애물도 뚫고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해. 그걸 청년학생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 물론 7천만이 다 나서야 하지만 그 앞장에는 청년학생이 있어야 해.”

올해로 일흔여덟이 되는 박선애 선생은 요즘 들어 부쩍 산에서 죽은 동지들 생각이 많이 나신단다. 그 중에는 선생의 남동생도 있다. 연락병이었던 남동생이 전투 중 사망했을 때 나이가 열일곱. 잡히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동생을 생각하는 선생의 눈가에 이슬과 웃음이 함께 맴돈다.

“한 동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해. 이름도 성도 모르는데 총을 딱 메고 맨 앞장에 서서 ‘노래를 부릅시다. 빨치산 노래를…’ 하고 선창하던 그 모습. 나도 따라 불렀지. 그 사람은 전투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했어. 우리에겐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그 사람들의 어머니 아버지는 얼마나 기다리겠어. 어디서 죽은지도 모르고…. 독방에서 답답하고 힘들 때면 먼저 떠나간 동지들을 생각하며 견뎠지. 그들이 무엇을 부탁했느냐를 잊을 수가 없어.”

먼저 간 동지들의 부탁은 생생하고, 마음속에는 여전히 ‘붉은 피’가 맥박치고 있어 함께 손잡고 싸워야 할텐데 싸우지도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슴아픈 박선애, 박순애 선생은 그저 청년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뿐이다. 두 분은 통일이 새해 소망이고 그저 청년학생들이 함께 싸움도 하고 어울려 이야기도 하는 것이 바람이시란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청년학생들의 소망, 먼저 떠난 두 분의 수많은 동지들이 바라는 것은 ‘통일된 그 날, 건강한 모습으로 환히 웃으실 두 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박준영 기자

[출처:인터넷 자주민보 1/2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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