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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현대사]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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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6-18 01:39 조회7,5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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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현대사]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체포 전 이들의 직책은 이랬다.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 리승엽 당 비서 겸 인민검열위원장,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장, 림화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박승원 당 연락부 부부장, 리강국 조선수입상사 사장, 배철 연락부 부장, 윤순달 연락부 부부장, 리원조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백형복 (남쪽)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조용복 인민검열위 상급검열원, 맹종호 유격대 제10지대장, 설정식 인민군 총정치국 부원.




북에서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박헌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사건’과 ‘리승엽, 조일명, 림화, 박승원, 리강국, 배철, 윤순달, 리원조,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 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이다.

대부분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출신으로 당시 북에서 고위급이었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을 위한 간첩,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북 정권 전복 음모라는 놀라운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리승엽 등 12명이 1953년 3월5일 먼저 체포됐는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이 운명한 날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엿새 뒤인 3월11일 체포됐다.

재판은 리승엽 등 12명이 5개월 뒤인 그해 8월3~6일 먼저 받았고 박헌영은 2년여 뒤인 1955년 12월15~16일 받았는데 리승엽 등은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재판장 김익선 최고재판소장)가, 박헌영은 최고재판소 특별재판부(재판장 최용건 공화국 차수)가 맡았다. 박헌영의 재판이 늦어진 데 대해 이 사건 조사과정에 참여했던 박병엽 선생(1983년 귀순, 1998년 별세)은 “첫째, 박헌영이 끝까지 국가전복을 위한 폭동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간첩행위였다는 것을 시인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조선 혁명역량 파괴에 대해서는 그가 혁명을 잘 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어 결과적으로 역량이 파괴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었다는데 “박헌영 재판은 단순히 박헌영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국내)공산주의운동 전반에 대한 결산을 의미하였다. 그만큼 검토해야 할 사안이 많았고, 박헌영 스스로를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재판 결과는 윤순달(징역 15년)과 리원조(징역 12년)를 제외한 박헌영과 리승엽 등 11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기소된 13명은 모두 자기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으며 선고 결과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북의 재판기록에 담긴 사건의 개괄이다. 여기서는 박헌영의 간첩혐의를 중심으로 다룬다.

북에서는 이 사건을 처음엔 당내 알력 등으로 나타난 종파주의 문제로 봤던 것 같다. 그럴 만한 게 문제가 촉발된 시점이 남북의 노동당이 통합한 지 3년여밖에 안 된 때였다. 일제하 투쟁경험이나 노선 상의 차이가 커 구성원들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기엔 시간이 부족한 터였다. 게다가 전시 상황이었다. 또 종파주의는 1949년 6월30일 두 당이 통합할 때도 김일성 당위원장이 우려를 표했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당 조직부쪽으로 일부 남로당 출신 인사들에 관한 심상찮은 보고들이 있었지만, 전쟁 와중이었고 또 당내 분열을 막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 고질적 문제는 공개 비판하고 일부를 처벌하되 당원들을 정치적으로 교양하는데 더 무게를 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를 다루기 위해 애초 1953년 2월 열려던 당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를 3개월 앞당겨 52년 12월15일 개최한 건 사안의 심각성을 반영한 조치로 보인다.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위원장은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란 보고를 하면서 특히 “당원들의 당성을 강화하며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 잔재를 반대하여 견결히 투쟁”할 것을 강조했는데 방점은 종파주의에 찍혀있었다. 주목할 대목은 다음과 같다.

“종파주의 잔재의 또 하나의 표현으로서 당의 로선과 당중앙을 겉으로는 받들고 뒤돌아서서는 배반하며 입으로는 다 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꿈을 꾸며 대면해서는 의리를 지키는 척하고도 뒤에서는 딴 장난을 하는 현상이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량면주의 분자들과 단호한 투쟁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종파분자들의 이와 같은 행동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것이 자라서 분파적인 행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요소들을 더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자들은 당 앞에서 솔직히 고백하고 자기의 비당적 행동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미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과 가렬한 전쟁을 하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러한 종파적 행동을 추호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모든 혁명적 당들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만일 종파분자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들이 결국은 적의 정탐배로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최후통첩’이라 할만 했다. ‘정탐배(간첩)’ 전락 가능성까지 경고하며 먼저 자기비판하길 권했지만 남로당 출신 인사들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선로동당은 1953년 1월 중순부터 전당적인 5차 중앙위 전원회의 문헌토의사업에 착수했다. 문헌토의사업이란 모든 당원들이 당문헌에 입각해 각자의 당생활과 당성을 세포단위로 총화토록 하는 것이다. 당시엔 김일성 위원장의 보고와 결정서, 그리고 ‘전 당원에게 보내는 붉은 편지’ 3개 문헌이 제시됐는데 특히 결정서엔 남로당 출신 인사들의 문제 행동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됐다고 한다. 문헌토의사업은 두 차례(1차: 1953년 1~9월, 2차: 53년 11월~ 54년 5월)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 박헌영과 리승엽의 문제점들이 하나둘 드러났다고 한다.

특히 극적이었던 게 ‘경기도 민주여성동맹(여맹) 위원장 사건’이다. 북의 최고검찰소 검사로 일하다가 박헌영 사건 재판을 직접 방청했다는 김중종 선생(2000년 송환, 2009년 별세)이 1991년 <월간 말>과 인터뷰에서 공개한 것인데, 당중앙위 5차 전원회의 이후 당시 경기도 여맹위원장이 중앙당사로 급히 와선 살려달라고 애원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남사업 관계는 개성에서 남로당이 취급했는데 그 내부에서 사건이 들통 났던 것입니다. 해주에서 대남 연락부 인쇄소 사장으로 있었던 림화가 자신들의 죄과를 거론하는 경기도 여맹위원장 김경애를 죽이려 하자 중앙당에 긴급히 피신해 구명을 호소했었지요. 그러자 중앙당에서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했는지 임화를 불러 조사하니 이승엽, 이강국, 배철, 임화 등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김경애가 알고 있었기 때문임이 발각됐어요.”

여맹위원장이 알게 된 해주 대남사업담당 남로당 출신들의 간첩행위는, 남파되는 유격대와 공작원의 통로, 접선지, 명단 등을 미국 정보기관에 넘겨준 것이라고 한다. 이 일로 당 지도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심상찮은 사건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박헌영·리승엽 사건의 검사총장 리송운(북로당 출신. 1937년 갑산공작위원회 구속)이 직전 당 연락부 부부장 시절인 1951년 말 연락부 부장·부부장인 배철·윤순달·박승원(모두 혐의자)에게 배제돼 몰랐던 사실을 알아내 당 정치위원인 박정애에게 보고했다. 유격지도처(연락부 배속)가 황해도 상원군 등에서 임의로 새 유격대를 편성하고, 이남으로 공작원을 파견하면서 초대소에서 준비 없이 보내 다 붙잡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백형복그루빠(소조)가 엉뚱한 사람을 잡아 고문한 사실 등이 그것이었다.

1952년 들어선 이남 출신 만담가 신불출이 림화와 조일명을 사회안전성에 고발한 일이 있었다. 림화가 술자리에서 자기에게 “당신은 만담가이지만 예술가 아닌가. 내 밑으로 들어와라.… 우리는 남로당이니까 박헌영·이승엽 동지에게 의지해야 한다. 정부를 엎어버려야 한다. 박헌영을 밀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회안전성이 림화와 조일명을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또 그해 10월 말엔 연락부 책임지도원 조옥래가 연락부원 윤병삼(윤순달 부하)과 술을 마시다 싸웠는데 윤병삼이 취해 “이까짓 것 뒤집어 버려야지. 또 밀고 들어오면 가만 놔주지 않겠다”고 했단다. 조옥래가 “그럼, 미군 놈들이 밀고 오면 다시 쳐야지”라고 호응하자 윤이 “미국놈이 아니라 딴 놈 치자는 소리야”라고 했다. 깜짝 놀란 조가 “무슨 소리냐. 당신, 반혁명 반당분자 아니냐”라고 나무라자 윤이 “네가 당에 충실하면 얼마나 충실하냐”며 조를 때린 것이다. 이튿날 조가 윤의 발언 내용을 상급인 리송운에게 전하고 리는 이를 다시 박정애와 방학세 사회안전상(남쪽 경찰청장에 해당)에게 보고했다. 사회안전성은 이때부터 관련자들을 미행하고 그들 자택의 운전사나 가정부를 정보원으로 비밀리에 교체했다고 한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러 뭔가 심상치 않다 싶어 전쟁 발발 전후 적발한 미국 정보원 사건들을 재검토해보니 박헌영·이승엽 등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표 사례가 현앨리스와 리사민 사건이다. 미국 시민권자인 두 사람은 1950년 중반 북에서 체포됐는데 해방후 남쪽에서 2년 정도 머물며 미군정의 정보계통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뒤 1949년 1월 미국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북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는데 체코 정부도 북 내무성도 이들의 정체가 불분명해 수용 거부를 통보했다. 부모 고향이 북쪽이라는데 확인 결과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박헌영 외무상이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입국사증을 내줬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이 들어오자 외무성쪽이 환영행사까지 열었다는 것. 현앨리스는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에서 1949년 11월 외무성 조사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리사민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연구부 부부장을 맡았다는데 파격 대우였단다.

그런데 이들이 1949년 말부터 ‘이상행동’을 보였다. 두 사람이 인적 드문 곳에서 비밀리에 만나는 게 내무성에 잡혔다. 또 유럽에 편지를 자주 띄웠는데 답장은 한 번도 없었단다. 이들이 단파라디오를 듣는 사실도 포착됐다. 1950년에 들어 감시와 편지검열을 강화했는데 이들이 그해 3월 당국에 유럽 여행을 요청했다. 내무성이 불허했지만 박헌영의 외무성 측이 4월에 출국사증을 내줬다. 내무성 안전국이 이들을 계속 미행하다가 모스크바공항에서 붙잡아 몸과 가방을 수색해보니 군(軍) 관련 비밀을 포함해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강제 귀환됐고, 조사 결과 미국 정보기관의 임무를 띠고 침투한 요원임이 드러났다. 적발 당시엔 박헌영과의 연관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가 본격 사건이 터지자 재검토된 것이다.

박헌영은 체포된 뒤 조사에서 “1948년 6월 서울에 갔다 오는 서득은편을 통하여 하지(John R. Hadge)가 주는 지시를 전달받았는 바, 그 내용은 현앨리스를 비롯한 몇 사람의 미국 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조선에 파견하였으니 그들의 입국을 보장하여 주며 입국 후 당 및 정권기관의 중요 기밀을 수집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보장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그후 나는 현앨리스와 그에 따르는 미국 정보원들을 하지의 지령대로 입국시켰습니다”라고 진술했고 재판에서도 인정했다.

박병엽 선생에 따르면, 현앨리스와 리사민의 정체가 빨리 밝혀진 배경엔 ‘조창영 부부 사건’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연맹(재일총련의 전신)에서 활동했다는 조창영이란 사람이 1949년 11월 부인과 함께 중국을 거쳐 북에 들어왔는데 박헌영과 리승엽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단다. 조창영은 박헌영과 리승엽을 만났고 대외문화연락위원회에 배치됐다가 조국보위후원회로 옮겨 일했다. 그런데 부부가 북에서 살며 심리적 갈등을 겪었는지 1950년 3월 미국 정보원임을 자수한 것이다. 조사에서 조창영이 입북 뒤 현앨리스와 리사민을 2~3차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됐는데 “이러저러한 사람이 먼저 들어갔으니까 만나서 협력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조창영은 박헌영과도 여러 번 만났고 리승엽과는 수시로 접촉했음이 확인되었다.

김중종 선생은 월간 <말> 인터뷰에서 박헌영의 간첩혐의과 관련해 결정적 증거는 그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시설이었다고 전했다.

“전파탐지기를 설치하기 전에도 대남사업과 관련된 모든 무전은 내무성에 보고된 무전이 전부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비밀리에 전파탐지기를 설치하고 나니 승인되지 않은 무전이 계속 나가고 있음을 잡아냈지요.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됐습니다. 당시 박헌영이 거주하던 대성산 가옥 무전수는 나중에 조사해보니 49년 서울에서 치안국 대공 중앙분실장을 지냈던 백형복이라는 사람이었어요.”

백형복과 관련해 박헌영은 조사에서 “나는 1950년 4월에 평양 남산리 나의 집에서 안영달을 통하여 백형복을 처음 만나게 되였습니다. 백형복은 안영달과 같이 정탐기관의 간첩으로 활동한 자이며 그가 리승만 경찰에 있으면서 남조선 지하당을 파괴하는 일련의 중요한 활동을 감행하였음을 알고 나는 리승엽에게 그의 신변 보호를 맡기여주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박헌영의 혐의는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와 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행위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인용한 김남식·박병엽 선생의 저작을 참고하기 바란다.

박헌영은 1955년 12월15일 재판 초반 검찰의 기소 내용 가운데 “‘새 정부’와 ‘새 당’의 조직에 관한 것과 무장폭동 음모에 직접 참가하거나 그러한 범행을 조직, 지도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을 지기 곤란합니다. 기타는 전부 승인합니다”라고 일부를 부인했지만 최후진술에선 이를 번복해 혐의 모두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진술을 끝냈다.

“제가 미국 간첩들의 두목이고 그들을 나 자신이 희망하는 범죄를 감행하게끔 모든 것을 비호 보장하여 온 장본인인 까닭에 전적으로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 온 추악한 반국가적·반당적·반인민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여 매국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재판을 직접 본 김중종 선생은 월간 <말> 인터뷰에서 재판기록엔 없는 박헌영의 최후진술 내용을 소개했다. “내가 왜 일제 경찰의 앞잡이가 됐는가. 하도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서였다. 해방이 되고는 그것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미국이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된다.” 생의 회한이 느껴진다.

그럼 왜 그는 결국 후회할 길을 간 걸까? 김중종 선생의 추론은 이랬다.

“해방이 되어 과거를 털어버리고 공산주의자의 길로 나아가려던 박헌영 앞에 가로놓인 장벽은 미국 CIA가 일본 총독부로부터 입수한 바로 그 비밀 일제 첩보선 명단이었지요. 공산당 당수직을 버리고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거쳐 백의종군하느냐, 미국과 타협하느냐 갈림길에서 그는 뒷길을 택했던 셈입니다.”

북의 <조선전사>는 ‘박헌영·리승엽 사건’을 적발, 종결한 데서 긍정점을 강조했다. 즉 “박헌영 도당이 적발 숙청됨으로써 해방 전부터 오래동안 우리나라 혁명운동에 큰 해독을 끼쳐온 화요파 계렬의 악질적인 종파분자, 혁명의 배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청산되였으며 우리 당과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은 한층 더 강화되였다. 반면에 이 자들과 내통하고 있던 미제 침략자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였다”고 평가하곤 “박헌영 도당을 적발 숙청한 우리 당의 투쟁경험은 당원들의 당성 단련을 강화하고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튼튼히 꾸릴 때 그 어떤 종파, 암해분자들도 당 안에 배겨있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고 교훈을 찾았다.

출처 : 통일시대(http://www.tongil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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