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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점령군과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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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1-07-25 16:03 조회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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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의 점령지 관할 합동 조율기구가 맥아더에게 친일파를 최단시간내 제거하라고 지침을 통해 명령했으나 무시하고 군정기간중 중용해서 제거됐어야할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지금까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얼마전 한 정치인의 발언으로 발단이 됐던 ‘점령군과 친일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현대사연구가 김태환회장의 기고 글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기고] 점령군과 친일파


글 : 김태환 (한국현대사연구가)



1. 미군은 점령군으로 진주했다 (미국의 모든 공식 기록에 나오는 표현)

2. 트루먼 대통령 해방직후 일제 관료 잔류 사과 성명 발표

3. 맥아더, 미국정부 지침무시 친일파 중용 미군은 점령군으로 진주했다


++++++


1. 미군은 점령군으로 진주했다 (미국의 모든 공식 기록에 나오는 표현)


1945년8월 15일 정오에 방송을 통해 일왕의 항복 선언이 있은 후 해방이 바로 독립인 줄 알고 조선인들은 기뻐했으나 그기간은 불과 20여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한국, 한국인 대신에 조선 조선인이라 표현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그대로 통용되어서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9월 8일에 인천을 통해 미국군이 한반도 북위38도선 이남에 진주함과 통시에 ‘포고령 1호’를 맥아더 장군의 이름으로 선포함으로써 일본을 대체하는 새로운 식민자가 등장한 것을 보고 그당시 우리 선조들의 들뜬 분위기는 착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포고문 (주 1: 전문은 아래에 첨부함)은 매우 위압적 용어를 사용했고, 특히 놀랍게 하는 사실은 공용어는 영어라고 못박았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우리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높았는데 하물며 영어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점령한다(OCCUPY), 내 명령에 복종하라(OBEY MY ORDERS), ~엄중 처벌( ~BE PUNISHED SEVERELY) 등등으로 선량한 조선인들을 마치 일제가 칼찬 순사들과 헌병들로 위압했던 것처럼 미국은 총칼 정도가 아니라 완전 무장한 군단 병력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맥아더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고 위반시에는 엄중히 처벌 받는다고 기를 꺾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포고문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자유롭고 독립국이 된다”는 카이로 선언 문구를 마지못해 적어 놓긴 했으나, 우리(미군)가 일본제국의 항복에 따른 일본군 항복문서 조항 이행을 위해 조선 남부를 “점령(OCCUPY)”하니 지금부터 내가 통치자이므로 내명령을 따라야하고 위반할 시에는 엄벌에 처한다고 하며 군정 실시를 공표하였습니다. 이처럼 군사 통치를 밝히는 군대가 점령군이 아니면 뭐라는 말입니까?


제2편의 트루먼 대통령의 사과문에도 미군을 “점령군(OCCUPYING FORCES)”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대주의자들은 이러한 명백한 점령군을 선조가 임진난때 원군으로 들어온 명군을 생각하듯이 천조국 상왕군대라 부르지 못해서 안달하는 듯 합니다.


혹자는 미국이 조선을 독립시키려했다고 합니다. (점령초기부터) 하지만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미국은 카이로 선언에서도 바로 독립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적당한 시기”는 “일정기간의 신탁통치 기간이 지나서”를 뜻하는 것으로, 미국은 당시 조선인들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해방후 약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말경 모스코바 3상회담에서 조선의 신탁통치 결정이었습니다.


신탁 통치 개념은 로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일관된 조선관련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상회담 발표가 나오자 소위 민족 신문으로 자처해온 동아일보가 신탁 통치안은 소련측 구상이라는 단군이래 최대의 오보를 냈는데도, 당시 정보의 근원이 매우 협소해서 그것이 의도된 오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수십년이 지나서였습니다.


***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종전이 되기도 전인 1945년 5월 28일 미국은 홉킨스 (Hopkins) 특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조선의 4개국 (미,소, 영,중) 신탁통치 의사를 전달하여 그의 동의를 얻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주 2: FRUS 1945 Korea P 1095 Item 4)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은 이승만 박사는 우리 민족이 깨어서 (각성되어서) 신탁통치가 필요 없다고 했으나, 당신이 집권하고는 백성들이 무식해서 자신이 맘대로 해야 된다는 식으로 독재를 했습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에 맞게 둘러치기를 해댔습니다.


미군의 한반도 이남 점령과 관련하여 미군의 필리핀 점령도 함께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간에 전쟁이 벌어져 미국이 승리해서 미국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고 태평양에서는 필리핀을 점령했습니다. 미국은 쿠바를 후에 독립시켜줬으나 푸에로토리코는 아직도 식민령(植民領)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식민국인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치루고 있었는데,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자 필리핀 독립군이 미군에 협조했습니다. 미국이 이기면 자신들을 독립시켜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승리하고도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독립군은 이번에는 총부리를 미국을 겨냥하고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독립투쟁 대표를 체포한 것으로 (1902년 7월 4일) 전쟁이 끝난 것으로 선포하였으나 나머지 병력이 게릴라 전투를 벌여서 싸움이 오래 계속되었고, 이로 인한 인명 피해가 적게는 20만명, 많게는 50만명이 넘는다고도 합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미국은 항상 자애로운 군대를 운용했다고 착각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와 같은 냉혹한 사실을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 독자분들 가운데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들어 보셨을텐데, 내용은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영향력 행사를 인정하고 동시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영향력 행사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미국이 한국에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미군이 필리핀을 실력으로 점거하고 있으면서 왜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이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일본은 국수주의자 일단 (주동자: 하라 데이 대위) 이 1899년 2월 4일 필리핀에 상륙해서 필릴핀 독립국 대통령 아귀날도 편에 가담해 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만을 영유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필리핀이 매우 가까워서 향후 일본인들의 필리핀 독립국 지원을 차단하려는 차원에서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에도 독립 전쟁을 수행한 필리핀에게 독립을 선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방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승인한 적이 없었고, 임정 간부와 광복군의 단체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것만 용인했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포고령 1호는 종전의 일제 식민체제에서 미국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식민 체제 출현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군정 기간중에,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은 것이 가장 잘못한 치적이지만,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신학기를 미국식으로 9월로 변경한 것입니다. 미국은 여름 휴가기간 (보통 6월 ~ 8월)이 길어서 9월 신학기가 이해되지만, 조선에서는 있는둥 마느둥한 여름 휴가 때문에 신학기를 9월에 한다는 것이 말도 되지않아서 정부 수립후 1950년에 신학기를 6월로 당겼고 그다음에 다시 4월로 옮겨서 원상 복귀시켰습니다.


이처럼 식민 통치자들은 현지 물정을 모른채 자기식으로만 생각해서 따라오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점령군 만세!

주 1: 포고령 1호

맥아더 포고령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것을 보장받는다.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제6조 -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2. 트루먼 대통령 해방직후 일제 관료 잔류 사과 성명 발표


한반도 남녘에 새로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는 포고령(布告令) 제 1호를 발표하여(1945년 9월 9일) 동 포고문 제2조에 일제 총독부 관리를 그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내, 35년에 걸친 일제의 압박이 일본왕의 항복 선언으로 해방 되었다고 기쁨으로 들떠 있던 조선 인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국을 해방시킨 미국과 미군에 감사하고 환영하지만, 조선 인민 압제의 상징인 일제 총독부 제도를 그대로 두고 총독을 위시한 일제 관료들을 잠정적으로라고 하지만 유지하겠다는 것을 사실상 일제 통치의 연장선으로 파악한 조선의 민중은 격렬한 반대 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 대행은 여론 악화를 방지하고 일인 관리 연임은 그들의 행정 관리 기술을 활용하여 조선 인민들과 점령군의 이익을 위해 시종/머슴 (Servants) 으로 부릴 뿐이며, 완전 독립까지 시일이 걸리므로 인내심을 보이길 바란다는 선언문을 작성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언했으며 (1945년 9월14일), 트루먼 대통령은 애치슨의 원안대로 정정 없이 그대로 발표하였다. (1945년 9월 18 일) * (주1) 전문 게재


이것은 한미 양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현직 대통령이 조선인에게 공표한 성명서로써 매우 값진 역사적 기록물이므로 우리 대한민국 관계 기관에서도 잘 보존되어야할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에 친일파와 그들의 잔재 세력이 아직까지 기세를 부리고 있는데 대한 근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사실상의 사과 성명서를 발굴했기 때문에 친일파 잔존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이 성명서 존재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더 살펴 보니 미 군정에 큰 책임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문제는 뒤에 다루기로하고, 여기서는 트루먼 성명이 나오게된 연유를 확인했으므로 그 배경부터 먼저 해설해 드린다.


해방 당시 미국/미군 측에서 조선의 현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통설이 지배적이었는데, 맥아더의 점령군 같은 투박한 포고문이 서울을 접수한 9월 9일에 공포되었는데, 미국에 있던 애치슨 장관 대행이 바로 닷새 뒤인 9월14일에 조선 인민들의 들끊는 분노를 어떻게 그토록 빨리 파악하고 진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즉 애치슨에게 누가 조선의 현황을 파악해서 수습책을 조언했는지가 필자의 초미의 관심사이었고 깊이 감사해야할 분이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필자의 끈질긴 탐색을 통하여 예상조차 못한 곳에서 미군이 제물포(인천) 에 상륙하기도 전에 마닐라 주재 미국 총영사인 스테인토프가 국무장관에게 전문을 보내서 (1945년 8월 26일 * 주 2) 자신의 휘하인 알렉시스 죤슨 (Alexis Johnson) 영사가 (앞으로 조선에서 실시할) 미군정이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본토내에서 일본 통치 기구를 활용하는 것처럼 조선에서도 그대로 활용하려는 계획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이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 바람직하지 않은 양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문제점 제기는 죤슨 영사 개인의 의견임을 부기했다.* 주2


해방 정국에서 조선인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한 미국 정부내에서 단 한명의 관리인 죤슨은 정부의 공식 입장과 다른 견해 표명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어떻게 감히 이러한 견해를 내놓을 수 있었을까가 다음번 의문이었다.


당시 죤슨은 마닐라 영사의 직책을 가지고 일본 주재 미국 정치 고문관실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그는 조선 인민들이 해방후에 미군이 진주하고도 일제 총독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마닐라에 있는 직속 상관 (스테인토프 총영사)을 통해 국무장관에게 그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 보고를 받는데다가, 조선내에서 여론이 악화되자, 애치슨 장관 대리 (번스 장관은 영국에 회담차 출장중)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여론 무마조로 사과 성명을 내도록 조언한 것이다.


* 주4 트루먼 성명서 전문


오래토록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이 (미국군에) 항복한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적인 조선 인민에게 해방의 낭보를 전해드린 것입니다. 일본 군벌에 의한 장기간에 걸친 잔인한 식민 지배하에서도 조선인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랑스런 문화 유산을 간직해오며, 여러분들의 민족적 자유를 찾는데 부단히 헌신해 왔습니다.


이제 일제의 압제는 끝났읍니다. 일제 군벌들은 제거되고 있읍니다. 지금 임시적으로 잔류하는 일본인 관료들은 그들의 기술적인 자격때문에 조선인 여러분들과 점령군 (미군)의 머슴으로 활용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해방의 순간에 우리(미국인) 들은 우리들 앞에 놓인 어려운 일들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읍니다. 조선이 자유롭고 독립되어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하는 미국, 중국, 영국 그리고 쏘련의 협조로 위대한 국가 (조선) 를 건립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인민 여러분들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조선인 여러분들의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 드리워졌던 일제의 잔재를 제거하는데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인내심이 따른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요. 목표는 눈 앞에 보입니다만, 이 목표를 신속히 달성하려면 조선인민 여러분들과 연합국들의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오랜 조선의 깃발인 태극기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에서 다시 나부끼므로 미국민들도 조선의 해방을 함께 기뻐해 마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

1945년 9월 18일


3. 맥아더, 미국정부 지침무시 친일파 중용 미군은 점령군으로 진주했다


맥아더는 미국 정부가 유능한 조선인을 발굴/훈련시켜 친일 관리 대체 지시에도 이를 무시하고 군정 기간내 친일파를 중용했고 정부 수립후 이승만 박사는 사실상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맥아더 인맥을 그대로 보존해 제거해야 마땅한 인사들과 그 일족들이 지금껏 득세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의 승기가 확실해진 1944년 12월에 독일등 추축국가들 (Axis Powers) 점령후에 군정 실시에 대비하여 군사 및 행정 관련 문제를 정부 부처간 의견 조율 기구로 ‘국무부-전쟁부-해군부 조정위원회’(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SWINK(스윙크)” 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아직 공군이 독립 군대 조직이 아니어서 육군 항공대 (Army Air Force) 로 불리웠다. 지금과 같은 국방부가 없었고, 전쟁부는 육군 담당이었고, 해군은 해군부 소속이었다.


상기 3부 합동 조정 위원회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SWINK” 이하 조정 위원회, 또는 스윙크로 줄여서 표시함>는 미국이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남조선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함에 따라 맥아더 장군에게 “조선의 미군 점령 지역 에서의 (군정하의) 민사 문제 실시에 관한 기본적인 제1차 행동 지침 (주1)을 태평양 지역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통보했다. (1945년 10월 17일)


이 지침은 무려 19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행동 강령으로 제1부 일반 및 정치 분야 (GENERAL & POLITICAL), 제 2부 경제 및 민수 보급 (ECONOMIC & CIVILIAN SUPPLY), 그리고, 제3부 재정 (FINANCIAL)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일상 생활 각분야를 모두 망라(網羅)하였다.


필자는 이글의 목적이 군정 기간에 일본인과 친일 관리를 조속히 배제하고 조선인들로 대체하라는 부분을 조명하려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만 관련 조항을 밝혀드린다.


우선, 서문 부분에 미 군정 기간을 일본의 항복 직후부터 ‘신탁통치’가 실시되기 직전까지로 한정해서 (주2) 미국은 그해 12월 말경에 모스크바 삼상회담에서 나오는 조선의 신탁통치 결정 발표가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신탁통치가 미국의 대 조선 기본 방침이었다는 점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이것도 몰랐던 조선인들은 그야 말로 미국을 신주단지처럼 우러러 보았으니 너무 어이가 없을 뿐더러, 그들에 대한 가여운 심경임을 금할 수 없다.


이 기본 지침서에 일본인과 친일 부역자 (Koreans collaborated with Japanese) 를 군정 부처에서 제거하라는 구절이 두군데에서 나와 있다.


첫번째는 제1부 5항 정치및 행정 분야의 B조에 ‘형사및 민사 재판부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에 이어서 “가급적 조속히 일본인 판사와 여타 일본인 법조계 인력과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As rapidly as possible, Japanese judges, other Japanese court personnel and Koreans who collaborated with the former will be removed.),


또한 F조에, 귀관 (General MacArthur)은 되도록 조속한 시일이내에 알맞는 (자격있는) 조선인들을 선발하여 훈련시켜서 (일본인과 조선인 부역자)의 후임으로 활용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you will make every effort to ensure the recruiting and training of suitable Korean replacements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이어 동 지침서는 “일본인이나 바람직스럽지못한 조선인 (친일 분자 지칭)을 활용하는 경우에는 그들의 활용은 임시적 사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조선인들에게 충분히 주지시켜야한다.”라고 부기하여서 일본인이나 부역자 활용은 유능한 자격있는 조선인을 선발해서 훈련 시켜서 후임으로 임명할 때까지 임시조처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 현직 대통령 트루먼이 일제 관료 잔류에 대 조선인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국무, 전쟁, 해군의 3개부처 합동 조정 위원회에서 조차 부역한 조선인 관료 척결을 지시했건만,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식으로 “알맞는/자격있는”조선인을 발굴해서 훈련 시키는 것보다 현직에 있는 친일 부역자를 부려먹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맥아더와 그의 현지 부하인 하지 중장은 자신등의 편의를 위해서 일제 부역자 퇴출을 외면했다.


신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는 원래 국내에 자기 세력이 없기 때문에 맥아더가 키운 부역자 집단을 자신의 후견 세력으로 활용하여 친일 부역자와 그들의 가족이 지금까지 떵떵거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기 한이 없다.


이처럼 미국 정부 기록과 관련자 증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에 불리한 발언은 사대주의적 언론과 학자들이 스스로 삼가하는 정도를 넘어 옹호하고 올바로 바른 발언을 하는 인사들에게 쌍심지 켜고 모략적 비난을 감추지 못하는 일이 오늘날까지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 한국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가될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다.


해방 정국 전후로 일어난 그 대표적인 예로,


1) 남북 분단은 소련이 했다? ( 사실은 미국이 먼저 38선을 그어서 소련에 승인을 요청했다: 딘 러스크 증언 (당시 육군 대령, 후에 국무장관일 때 문명자 기자에게 실토함)


2) 신탁통치 구상은 소련이 했다? (사실은 미국이 먼저 얄타회담 때 조선을 4대국이 일본 패망후에 신탁통치를하자고 소련에 제의하고,일본 항복전인 5월에 홉킨스 특사가 스탈린을 만났을 때 신탁통치안을 제기해서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또한 맥아더에게 보낸 SWNCC 기본 지침에도 군정기간은 일본 항복부터 위임통치가 시행될 때까지로 못박아서 신탁통치를 움직일 수 없는 정책임을 분명히 했다.)


끝으로, 맥아더 덕분에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는 정신 질환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비밀 특사를 이 박사에게 보내 은퇴를 종용했으나 씩 웃고 넘겼지만, 4.19가 난뒤 미국 대사관측이 강권하자 6개월전 특사 파견을 연상해 이미 미국 정부가 자신에 대한 신임 철회를 인식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고도 이화장에 칩거해 있으면서도 수많은 방문객이 몰려 그가 권토중래를 꾀하는 것으로 판단한 마샬 그린 (당시 대사관 제2인자)이 하와이 전지휴양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하와이 교포가 성금을 모아 전세기로 모셔가는 것처럼 공작을 했다. 그를 김포공항에서 태우고 간 비행기 CAT편은 교포들의 성금으로 보낸 전세기가 아니라 사실은 미 CIA가 운용하는 작전기여서 그는 자기 발로 탈 수는 있었으나, 두어달 후에 고국에 돌아 오고 싶었지만 발이 묶여 생전에 돌아 올 수 없었다. 한국에서 ‘망명’이라 부르지만 분명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납치’극인데도 입도 벙긋 못하고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시시비비를 가리고 바른 말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주 독립국이라 하겠다.


사대주의자들이 쌍심지 키고 발악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날이 오기는 먼 훗날의 일이 아닐까!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고 불과 약 4년 2 개월 정도 나치 치하에 살았지만 프랑스가 연합국의 도움으로 해방되자 그 기간동안 나치에 부역한 사람을 모두 처형,징역등으로 완전히 부역자를 척결했다. 약 35만명이 조사받았고 12만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최고 재판소는 필리프 페탱 비시 정부 수반과 피에르 라발 총리 등 18명에게 사형(페탱은 종신형으로 감형)을 선고했다. 부역자 재판소 등의 재판까지 포함하면 사형 집행한 인원은 약 1500명이다. 총 9만8000명이 유죄를 선고받아 3만8000여 명이 수감됐다.”

<조선일보 프랑스, 나치협력 1만여명 처형…>에서 전재


한국의 현실과 너무 대조가 된다.


결론적으로, 친일파는 미군정에 협조해서 맥아더 덕분에 회생하고 신생 대한민국 이박사의 수족으로 날개를 달았다. 한마디로 줄이면, 맥아더와 이박사가 친일파의 은인이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미군정 총책임자로서, 본국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친일분자 관계 축출)책임이 있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불이익과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정부는 미군정시기에 발생한 민사, 형사문제를 조사 연구하여 미국 정부에 배상청구를 하든지,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그 직계가족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보상을 하고 미국에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끝]


주 1: 공식 명칭은 (SWNCC 176/8)

이 문서는 초안은 1945년 9원 1일 작성되었으나, 수정을 거쳐서 10월 13일 최종 승인을 받아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17일이다.

주 2: ---the Policies which will guide you in the administration of Civil Affairs in Korea in the initial period after Japanese surrender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a trusteeship.



주 1: frus.frus1945v06.i0014.pdf P 1048 < 원문,한글 전문 별첨>

주 2: frus.frus1945v06.i0014.pdf P 1041 (스타인토프 서한 )

주 3 : 죤슨은 외교관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군축 전문가 그리고 국무 차관까지 지냈다.<사진 별첨>

주 4: frus.frus1945v06.i0014.pdfP 1046~1047 (애치슨 건의문 = 대통령 성명)

트루먼 대통령

Alexis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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