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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김동수 박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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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1-05-13 15:01 조회792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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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김동수 박사 별세


고인의 생전 모습


미국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거주 김동수 박사가 지병으로 지난 10일 오전에 운명하였다. 향년 85세. 고인은 29일 응급실에 들어갔다가 혈액암 말기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국제평화운동가로서 조국평화통일을위한 활동을 하였고,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한반도평화를 모색하는 길’이란 주제로 ‘미국장로교 한반도평화네트워크’ 회원 대상으로 Zoom 강연을 했다.


가족관계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백하나 교수와 결혼하고 슬하에 두 딸이 있다.

[약력과 활동]


1936년 평안남도 덕천 출생

1961년, 미국에 유학하고 시카고대학교 철학 박사

미국 테네시대학교, 노폭주립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

한동대학교 (1년)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교 객원교수 역임 (2년)

남녘의 모교 숭실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4년)


미국 대학에서 (31년간) 부인 백하나 교수 (20년 대학에서 사회복지) 2015년에 같이 은퇴


2019년 6월, ‘버지니아 리치몬드’로 돌아와 생활

버지니아주 대법원 공인중재사 (Certified Mediator)가 되어 갈등과 분쟁에서 고통받는 가족들의 화해 자원봉사


1981년 3월, 워싱턴 ‘해외동포민족통일모임’에 유럽동포들이 참여하였고,11월에는 비엔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기독자대화’에 15명의 북측의 관료/학자들과 미국. 카나다, 유럽동포 학자와 종교인들과 토론 모임에 활동


1983년, 평양에서 열린 ‘북과 북미학자의 대화’에서 “평화 통일문제“에 대해 발표


1984년, 양은식박사에 의해 출판된 ‘분단을 뛰어넘어’에 북부조국의 주체철학을 최초로 소개


고인의 부모(김예진 목사-1898-1950 , 한도신 권사-1895-1986)에 대한 영문 자서전 출판


고인의 부모 두분은 일제강점기에 항일투쟁을 해온 민족주의 계열 애국자들로서 1962년과 2018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은바 있다.


[장례 일정]


날짜 : 15월 토요일 오후4시(동부시간)

장소 : Lord Jesus Korean Church, 10201 Robious Road, N Chesterfield, VA 2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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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편집실님의 댓글

편집실 작성일

아직은 쓸 만한 김 선배님
오 인 동

김동수 교수의 활동을 듣게된 것은 1990년대 중반 내가 모국의 통일문제에 눈뜨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유럽의 동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의 해외동포학자와 종교인들은 통일을 위해 북녘 사람들과 유럽에서 만나 대화하고 북에도 다녀온 놀라운 사실들이었다. 이런 활동에서 김 교수도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을 알게 된 것은 2008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그를 만나서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행동가로 사상했었는데 그의 몸 가짐과 말씨에서 성실과 겸손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1961년 미국에 유학와서 사회복지학 박사로 Norfolk대학 교수에서 은퇴뒤엔 조국의 숭실대학에서 또 가르쳤다. 김 교수는 자신의 유별난 삶의 조각들을 재미있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써 내는 수필가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병합되었던 시절에도 일본유학생들이나 재미동포들도 조국을 위해 나섰던 역사의 기록들을 보며 외국에서 살다보면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 하게 된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 그 기운이 민족통일운동으로 번져가기 시작했지만 남의 군사정권은 통일활동가들을 빨갱이로 몰던 시절이었다. 김 교수가 도쿄에서 열리는 <김대중선생 구출 국제위원회>의 긴급회의에 참석차 서울에 들렸을 때도 그는 공항에서 안기부 직원들에 유치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시절 재미동포학자 선우학원, 김동수, 김현환 등이 1981년 3월 워싱턴에서 [해외동포민족 통일 심포지움]을 열었다. 미국, 카나다와 유럽의 교수,목사,지성인 60명이 참석한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은 분단극복을 위해서 북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해  11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기독자대화]를 4일 동안 가졌다. 15명의 북 관료/학자들과 30명의 북미주와 유럽동포학자와 종교인들이 만나 대화하고 토론했다. 남녘 사람들이었다면 보안법에 걸려 곧 투옥되었을 이런 만남이 분단 36년만에 처음 유럽의 중립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뒤 김동수 교수는 1983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북과 북미학자의 대화>에서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해 발표도 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인식된 북녘을  다녀온 해외동포들의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가 1984년,해외에서 출간되었다. 이 기념비적 저서는 남녘 지하에서도 출판되어 북 바로 알기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동포사회에서 친북인사로 비난받으면서도 모국의 통일을 추구하는 남편의 위태로운 행보를 가슴 조이며 보아온 부인 백하나 교수도 1984년 비엔나에서 열린 <북과 해외동포의 대화>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 북에서는 려연구(여운형의 따님), 안경호 박사등 40명 그리고 북미주와 유럽의 해외동포 53명이 참석했다. 김 교수는 북의 안 박사와 회의공동문건 작성위원으로 활약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백하나 교수의 회의참관기 <첫 경험> 끝 부분에,

“1981년 빈에서 처음 북과 해외동포의 대화를 가졌을 때 서로 서먹서먹하고 불안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조용히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를 부르자 한 둘이 따라 부르다가 모두가 합창하게 되었단다.  부르고 또 부르며 서로 손 잡고 눈물을 흘리며 껴안게 되었다고 한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 놓았는가? 우리는 왜 우리 형제를 서로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우리도 3년 전 그 회합 때를 회상하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굳이 닦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길고 차가운 분단사에 진정 화해의 봄은 언제나 오려나?  민족의 숨결이 입에서 입으로, 민족의 피가 손과  손에서 흘렀다. 나는 생전 처음 뜨거운 동포의식을 느꼈다. 감격이 벅찼다. 나는 나를 다시 찾은 것이다.“

이 노래는 1928년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안기영 이화여전 교수가 작곡한 <그리운 강남>으로 일제강점에서 독립의 봄을 그리던 겨레의 한과 소망이 담긴 아리랑이었다. 그가 1950년 전쟁때 월북한 뒤 이 노래는 남에서 금지되었는데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8 년 말에야 풀렸다. 30여년 동안 땅 속에 묻혔던 노래가 소리꾼 장사익에 의해 <강남 아리랑>으로 되살아나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2007년 장사익 미국 순회 마지막 공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공연의 끝을 아쉬워하는 3천여 관중들의 빗발치는‘한 곡 더!’ 재창에 답해 그가 “강남 아리랑”을 선창하자 모두 일어나 함께 불렀다.“…. 또 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그렇다, 아리랑 가락에 남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리랑 노랫말을 뇌이다 보면 우리의 목은 메인다. 그밤 나는 쉬이 잠들 수 없어 <정 이월 다 가고>를 썼다. 미주 중앙일보에 발표한 글을 귀국하는 장사익 소리꾼에 건네며 이 노래에 얽혀있는 가슴시린 사연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한편 나는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학술교류방문단의 권유로 처음 평양에서 인공고관절 수술강연을 하며 모국의 통일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남북이 화해.협력.교류.왕래하기 시작한 조국을 해외동포들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이 6.15선언을 무력화하고 남북왕래를 중단하자 나는 인공관절수술과 관절기 제작을 돕기위해 매해 평양의학대학병원을 방문했다. 2010년 방문 때는 2006년 6.15기념 광주대회에서 만난 6.15선언 북측 안경호 위원장과 평양 초대소에서 다시 만났다. 1984년 비엔나에서 함께 했던 김동수 교수 얘기를 했더니 안 위원장은 너무나 반가워 했다. 김 교수의 안부를 물으며 조국 방문을 꼭 해주시면 좋겠다고 전해 달라했다. 그가 잠시 옛날을 회상하는 듯 고개를 들더니, 자신은 이제 8순이 되었다고 조용히 말했다. 귀국뒤 김 교수에게 안 위원장과의 만남을 알렸다.
   
김 교수 부부는 2015년 가을, 북의 어린이들을 돕는 목사부부와 함께 북에 갔다. 안경호 박사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다음해 1월, 안 위원장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북에
조의를 전했다. 이제 김 교수는 55년, 나는 45년 미국을 살고 있다. 김 교수님은 사회복지학을
미국과 남녘에서가르치실 만큼 가르치셨습니다. 김 선배님, 남과 북에 사회복지도 만발할 한
나라로 함께 사는 세상을 마련해줄 통일의 길에 더욱 열정을 보태주세요. 요사이 모국에서는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가 인기있다네요. 그러고 보니 김 선배님은 이제 겨우 8순이 됐네요.
“아직은 쓸 만한” 나이래요. 그리고 내겐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네요.

iemily님의 댓글

iemily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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