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하 평통 전수석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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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6-22 00:00 조회1,5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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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 있어도 전쟁과 봉쇄정책 안돼" 2003-06-10
<6.15 3돌 기획인터뷰1> 김민하 평통 전수석부의장
6.15 남북공동선언 3주년을 맞아 통일뉴스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고 지난 3년간의 남북관계를 평가해 보는 <6.15 3주년 기획인터뷰>를 마련했다.

김민하 전 수석부의장은 6.15 정상회담에 특별수행단 책임자로 참석한 산 증인이자, 본인이 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친형을 만나기도 한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기고 하다.
김민하 전 수석부의장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되며, 봉쇄정책도 안된다"며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면서 민족의 대도를 당당히 걸어가기 바란다"고 충언했다.
일시 : 2003년 6월 9일
장소 : 타워호텔 커피숍
대담 : 김치관 기자
정리 : 송정미 기자
사진 : 왕준영 기자
□ 통일뉴스 : 퇴임 후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텐데.
김민하 : 5월 20일경 퇴임했는데 그간 대과없이 중책을 수행하도록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한미관계, 특검문제, 북핵문제로 시국이 민감해서 인터뷰는 당분간 함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사양했다. 여러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쉬겠다고 했는데 인터넷신문 통일뉴스라고 하니 하기로 했다.
□ 6.15 남북정상회담 당시 참석한 것으로 안다.
특별 수행원단 책임자였다. 모든 회의에 대표로서 참여했다. 특별 수행원단은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로 구성됐고 재계에서는 구본무, 손길승, 정몽헌, 언론계에서는 박권상, 학계에서는 이종석, 문재인 등 20여명이 있었다.
한반도 분단 책임은 일본과 미국.소련 등 외세
□ 6.15 정상회담 당시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보면?
먼저 교육자이기 때문에 인터넷신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남북문제에 있어서 분단의 책임, 평화통일에 대한 역사적 의의 이 두 가지를 미리 알고 대화해야 한다.
분단문제는 첫째 책임은 외세에 있다는 것을 여야 모두를 불문하고 인식해야 한다. 외세에서 첫째는 일본 제국주의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분단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분단문제와 평화문제 해결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고 우리는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일본은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인식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미국과 소련이다. 1945년 8월 10일경 미소가 우리는 전승국, 해방국임에도 불구하고 양극체제와 군사상의 편의에 의해 일방적으로 분단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은 미소에 있다. 그래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지지하는 도덕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미소에 대해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우리 겨레에 있어 남북의 지도자와 8.15전후로 해서 살고 있는 기성세대는 외세에 의해 분단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득 가져야 한다. 민족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기성세대는 머리숙여야 한다.
분단 극복과 통일은 성스런 민족사의 엄숙한 소명이다. 여기에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 중도,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책임을 갖고 통일된 조국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자세로 평화통일운동에 나서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남북관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다시 6.15로 돌아와서 6.15 남북공동선언의 의미부터 평가한다면?
6.15공동선언이야말로 너무나 위대한 민족사의 금자탑이다. 그동안 역대정권들도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내외의 저항과 반대세력들 때문에 이룩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로소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자주가 들어있고 남북의 경제 협력, 화해협력, 평화정착을 통해 통일시키겠다는 굉장한 선언이 들어있는 민족사의 금자탑을 세웠다.
평양을 갔을 때 전 세계지도자와 전 세계의 학자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 것이 6.15공동선언이다. 기자들도 외신기자들까지 프레스룸에서 기립박수를 쳤다고 전해들었다.
□ 개인적으로도 이산의 아픔을 겪은 것으로 아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갈 때는 굉장히 흥분했다. 어릴 때부터 바랬던 것이고, 전 세계가 원했던 것이고, 북에 형님 둘, 누님 하나가 6.25때 행방불명됐는데 가슴이 설레였다. 같은 땅, 같은 하늘,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특히 내 경우는 혹시 북쪽에 형제가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쪽 정부와 저쪽 정부에 큰 민족의 문제로 가는 사람이 개인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과 과거 유사한 일로 지탄을 받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다. 중앙초대소에서 혼자 통곡했다. 그런데 나중에 갔다 와서 언론에 다 알려지게 됐다. 생사를 모르기에 희망은 갖고 있었다.
□ 직접 접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인사들에 대한 인상은?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의 정보를 알고 갔다. 스칼라피노 교수나 유럽기자 등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의 새로운 면, 긍정적인 면 등 거의 양측 면을 알고 갔기 때문에 거의 예상했던 대로였다.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고, 민족을 포용하고 전쟁을 막고 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쪽도 변하지 않았고 우리만 변했다는 일방적인 생각은 안된다. 사실 얘기해보니 저쪽도 상당히 변했다.

북 간부들 경직, 김정일 위원장이 더 융통성
□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일종의 쇼크를 받기도 했는데 직접 접해 본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예의 주시하며 살펴봤다는 김 전 수석부의장.
[사진 - 통일뉴스 왕준영기자]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융통성과 유연성을 강조했다. 오히려 간부들이 경직성을 가지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더 융통성이 있다. 예를 들면 직접 평양으로 날아오면 되는데 왜 서해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얘기하자, `옳습니다. 맞습니다. 인민군에서 군사기지를 촬영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인공위성에서 24시간 다 감시하고 있는데`라고 하더라.
또 소년단들이 교실에 태극기를 떼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겠다는 얘기에 대해서도 `우리한테 인공기를 떼라고 한다면 하겠냐, 남쪽에 가면 당연히 태극기를 달고 있는게 맞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얘기하기도 했다.
□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의 진전이 있었다고 보는가?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장관급회담, 특사회담, 적십자회담, 경추위 회담 등 다양한 대화가 이뤄졌다. 남북 분단 사상 처음으로 엄청난 대화가 진행됐다.
두 번째는 남북 공동의 경제 공동체를 마련했다. 경의선.경원선 철도연결,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육로관광, 임진강 수해방지, 경제합의서, 북한 경제 시찰단 남한 방문 등 이런 경제적인 협력 등이 분단 사상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런 교류와 공동사업이 이뤄질 때 남북간 군사상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세 번째는 평화와 화해분위기를 조성했다. 비무장지대의 지뢰제거, 직통전화, 남북간의 인적.물적 교류와 왕래가 있었고 이산가족 문제, 인도적 대북지원, 북한 이탈 주민 정착 지원, 부산아시안 게임 참여도 있었다.
네 번째는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다.
□ 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에서 문제점이 있었다면?
민족문제는 특정 정권이나 계층, 지역의 문제가 아닌 7천만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에 국민적 합의, 민족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야당과 반대세력의 합의도출이 미흡해서 남남갈등이 심해져 많은 차질이 빚어졌다.
내외의 평화통일의 반대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때문에 7천만 겨레와 세계가 기대했던 것처럼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두어 온 것은?
헌법정신에 투철하려 했다. 역대 수석부의장이 모두 정치권에서 들어왔고, 정부가 독점했다. 대학 총장인 교육자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내외의 자문위원들이 기대를 많이 했다. 그래서 학자적 양심과 교육자로서의 품위를 갖고 정치적 엄정중립을 계속 가지려 하고 헌법정신에 투철하려 했다.
자문위원에 보수와 진보를 고루 안배했다. 안보산업화세력을 많이 포용하려 했고 중도세력, 그리고 민주주의민족세력 즉 합리적인 진보세력을 대거 인입했다. 연령별로 노.장.청을 고르게 안배했고 남.녀 비율도 배려했다. 헌법에 의거해서 모든 정당에서 골고루 참여했다. 초당적, 초정파적, 범국민적, 범민족적 조직체로 구성하려 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연설할 때도 여야가 없었다. 한나라당이 많은 경상도지역에 가서 연설을 해도 박수를 받고 통일을 노래하고 내가 건배하며 `평화`하면 `통일`을 화답하기도 했다.
그동안 남북정상회담, 경의선 철도 기공식, 금강산 육로관광 기공식 등 큰 행사에는 다 참여해 통일을 얘기했던 것이 큰 보람이다.
DJ와 코드 맞아
□ 그동안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지역주의, 이데올로기 문제 등에 대해 주변 친구들이 지적할 때 답답했다.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이 경상도인데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일하는 것을 대구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많이 힘들었다. 설득하고 대화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해 갈 때 변화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황태성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고 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10월 달에 북한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 김일성 밀사로 왔다. 황태성은 소위 대구 10월사태 주동자로 월북했는데 연전을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27살 때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중앙대 시간 강사로 강단에 섰을 때 찾아와 평화를 위한 밀사로 왔다면서 박정희, 김종필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평화를 위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얘길 해서 박정희,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간접적으로 연락을 했다. 내가 대구 사범대 출신이라 박정희가 선배인데 선배들을 통해 연락을 했다.
지금도 김종필 총재는 만나면 얘기하고 미안하다고 한다. 간첩사건 방조죄로 무기 징역을 받고 감형이 돼 3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고 조국을 위한 일이었기에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간첩사건 방조죄로 기소됐는데 군사재판에 가서 간첩죄는 없어지고 방공법 7조 위반, 편의제공만 적용됐다. 신고를 다했기 때문에 법적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한민국 법체계를 봤을 때는 무죄고 간첩방조죄는 적용이 불가능했다.
황태성씨도 결국 간첩죄가 아니라 반공법상 불법으로 월경했다는 것으로 사형된 것이다. 이것으로 선거때 어머어마한 사상전이 벌어졌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 취임 3일전에 황태성씨 총살을 집행하고 취임했다. 일부에서는 살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처남이 직접 사체를 인수해 확인했다.
□ 그 사건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그후 무직자가 됐고 겨우 부산대 총장 비서관이라는 별정직으로 갔다. 그런데 1년도 안돼 언론에서 간첩 황태성과 방조죄 김민하가 보도되면서 또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나랑 가까이 하면 피해를 볼까봐 무서워 가까이 할 수 없는 살벌한 시대였다. 하꼬방에서 외롭게 살다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 67년에 중앙대 전임강사가 됐다.
그래서 정부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교육을 통해 후학들에게 평화통일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정부에 의해,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된 것은 민주평통이 처음이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이전에 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고 중용하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겁이 나서 임명을 못했다. 국가보안법 위반한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공직에 임명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대학 총장이 된 것도 처음이다.
□ 김대중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났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안보에 적극 동참했고 나중에 속았다는 것도 알았지만 7.4공동성명을 위해 적극 협력했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글도 쓰고, 연설도 하고.
1987년부턴 국민소득 5천불이 넘어섰다. 이제는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전두환 시절이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김대중씨가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해방될 때의 상황과 정치현상,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항일세력이 소외된 문제, 평화통일에 대한 생각도 얘기해보니 거의 비슷했다.
92년 대선에서 떨어지고 영국에 나가전에 단둘이 만나 두세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결론이 원로로서 연구소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영국갔다 와서 아태 평화재단을 만들었다. 그래서 거기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장을병, 송자 총장 등을 만나서 학생들도 통일운동에 나서는데 우리가 나서야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설득해 총장들을 대거 모셨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나에게 장관, 총리 등 여러 자리를 제안했지만 나는 학자고 정치에 뜻이 없다고 다 거절했다. 1년이 됐는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자리가 있으니 해달라는 얘기에 평화통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승낙했다. 이것이 정부로부터 받은 직책으로서는 처음이다.
□ 정부직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텁고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나서서 야당의 표적이 될 법한데.
3년동안 아무 문제없이 도와준 여야와 국회, 정부에도 고마움을 갖고 있다. 특히 언론에서도 좋은 측면만을 보도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 이는 교육계에서 생활해온 것이 동정을 받고 졸업생들이 도와준 덕이었을 것이다. 야당의 김용갑, 정형근 의원도 내가 과거 안보산업화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공격하지 않았다.
6.15 정상회담 직후에 박지원, 임동원 등 모두가 구설수에 올랐다. 다만 나는 과장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대로만 그대로 얘기했다. 기자들이 들어보니 그게 맞으니까.
교총 회장도, 평통 수석부의장도 무보수 명예직이고 비상근이지만 내가 성격이 부지런한 부분이 있다. 강행군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8시간을 상근을 했다.
노 대통령, 내외의 도전에 직면
□ 3차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혈육을 상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금강산에서 성하(둘째) 형님을 만났다. 북한의 간부들과 기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이다. 조금만 일찍이 됐더라면 어머님이 손이라고 잡고 했을텐데...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갑자기 육체적인 장애를 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 정신적으로 힘든 것은 갑작스런 이산의 고통이다. 갑자기 자식이 사라진 부모는 생명을 바꾸더라도 아들 소식, 딸 소식을 듣고 싶어했다. 이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 이런 가족이 1천만이 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런 일의 심각성을 보수도 여야도 알아야 한다.
만나는 순간 더 고통스러웠다. 그때 느꼈던 고통은 견딜 수가 없었다. 사흘 있다가 헤어지잖아. 헤어질 때 고통, 헤어진 후의 고통이 더 고통스럽다. 북한 기자들에게 그때 `우리 민족의 잔인한 비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들딸이 부모품에 들어가려는 것과 부모가 자기 자식을 찾아가려는 것을 누가 막느냐.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화해 협력의 정책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 평통에서 일해서 혜택을 받았다는 주위의 곱지않은 시선은 없었나?
없었다. 그런 오해가 있었는데 나중에 다 해명됐다. 이쪽에서 했다면 있을 수도 있지만 북한측 명단에 형님이 포함돼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김성하가 살아있다, 명단에 있다 해서 기자들이 민주평통에 몰려와서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눈물을 흘리려 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때 사진이 모든 언론에 보도됐다.
북한에 행방불명됐던 2남 1녀가 다 살아있고 일본에 두 명도 살아있어 10남매가 다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됐는데 이것은 기적이다.
북한에 있는 누님은 일제시대 숙전을 졸업을 했는데 연전 나온 의사와 결혼하고 한달반 만에 6.25가 났다. 누님은 한달만에 생이별을 한 것이다.
□ 상봉당시 피리를 건네준 일화도 화제를 모았다.

□ 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했는데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한일정상회담을 보면서 실망하고 비판하는 분위기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이 화해와 협력 정책, 흔히 말하는 햇볕정책을 승계하고 보완한다고 했다. 한두번 한 게 아니고 여러번 말했다. 나를 포함해서 화해협력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폭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했다. 평화통일의 승계자가 돼야 하고 교류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게 나갈 것이라고 본다. 지금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면서 민족의 대도를 당당히 걸어가기 바란다. 민족의 대도, 대통령의 대도라고 본다. 평화와 번영 정책을 당당히 밀고 나가야 한다.
전쟁은 해선 안된다. 현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북을 공격하면 북은 남쪽을 공격하게 돼 있다. 엄청난 재앙이 온다.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분석으로 전쟁 초기에만 백만명 이상이 죽는다고 한다.
지나친 봉쇄정책, 압살정책도 전쟁에 못지 않게 일대 혼란을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갑자기 북이 붕괴됐을 때의 혼란, 북의 난민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봉쇄나 압살정책을 하려 한다면 사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대화를 통해 일괄타결, 총괄타결하는 방법밖에 없다. 북은 핵을 파기하고 미국과 우리는 북의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원자 개발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 지원, 경제적인 지원, 개방을 도와 국제 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해서 점진적으로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면서 통일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안보, 정체성에 주름살이 가지 않는 범위 속에서 대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야 한다. 서독은 1년에 32억불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비용으로 썼다. 우리는 1년에 1억불도 안된다. 한겨레끼리 미국도 도와주고, 일본도 도와주는데 우리 한 핏줄을 도와주는 데 왜 일부에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을 개발을 촉진시켜야 평화와 통일의 길이 앞당겨 진다.
특검, 겨레의 양심에 뭔가 답답
□ 한미,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추가적 조치와 북핵문제와 경제협력의 연계 등을 합의했다.
국제적인 외교 관계와 분위기 상 용어적인 것은 상황에 따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화해협력 정책을 넓혀가 남북간의 폭넓은 교류 협력을 기정사실화 할 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 특히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일괄타결이나 평화적 해결이 멀어지고 있는데.
제네바 협의를 미국도 북한도 지키기 바란다. 93-4년 북미 제네바협의가 있는데 그 속에 다 약속이 돼 있다. 미국도 지켜나가면서 보완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본다.
□ 북일 정상회담은 이루어졌지만 진전이 없다.
납치문제인데, 납치된 사람들을 일본에 보냈는데 다시 돌려보내지 않았고, 이를 가지고 여론을 조성하고 북핵문제가 터지니 북일 수교는 안하고 있다. 북한이 일본에 요청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36년간을 보상을 원했는데 북한은 36년과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분단고통을 보상하라는 것인데 이래서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렬됐고, 위기사항이 도래하니까 일본이 이용하고 있다.
□ 대북 송금 특검이 진행중이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텐데.
내 입장으로서는 아직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원칙적으로만 이야기하면 50년동안 닫혔던 문을 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 체제와 이데올로기 모든 생활 관행이 다른 폐쇄된 동포들이다. 대화노력, 평화통일 노력을 위해 엄청난 정신력, 물질력이 필요하다. 우리 안보와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한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평화통일, 안보 비용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대 정권의 지도자들이 남북협상과 회담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잘 안됐는데 이런 일련의 문제를 한국측의 눈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실질적으로 맞지 않다. 대통령의 헌법에서 보장한 통치행위이고 전 세계 평화애호세력이 지지, 기대하는 역사적 사건인데 관련 종사자를 줄줄이 죄인 취급하고 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겨레의 양심에 뭔가 답답함이 있다.
노 대통령의 말처럼 의혹은 풀되 남북협력과 민족의 대역사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최근 일부 우파에서 반핵반김(反核反金)을 주장하는 조류가 있다.
지난친 현실문제에 대해선 당분간 노 코멘트를 하려는 원칙이다. 너무 극단적으로 갈라져 남쪽내 분열을 만들면 안되다.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전쟁도 안된다, 봉쇄도 안된다는 입장이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국민이 선택하고 역사가 선택 할 것이다.
□ 향후 거취는?
연구소는 어려울 것 같고 집 서재를 사무실 삼아 평화와 통일 문제에 적극 협조할 것이다. 대안이 있으면 이메일, 팩스 등을 통해 적극 정부에 제안 할 생각이다. 평화와 통일대국 건설과 교육대국 건설에 남은 일생을 바칠 것이고 이 두 가지만 할 생각이다. 나머지는 천금을 줘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출처; 통일뉴스 6-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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