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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촛불 든 광화문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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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7-01 00:00 조회1,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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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암 수술 후 되돌아온 광화문 할아버지

"우리는 이겨왔고, 이기고 있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4859-56.jpg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어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하얀 머리(그 독특한 머리스타일은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누구나 쉽게 깎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정된 것이라 한다.)에 한쪽 다리를 절며 마이크를 잡고 “효순이 미선이 문제는 빨갱이로 매도되는 이념문제가 아니라 가해자 피해자의 문제”라고 외치던 이관복(70)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광화문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이관복 선생이 대장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5일 퇴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입원해 있던 서울 보훈병원을 찾았다. 회복기간에 있는 선생의 얼굴은 약간 살이 빠진 듯 했지만 전체적으로 건강해 보였다.


처음 선생이 입원했을 때엔 한국전이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태반인 주변 동료환자들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다리를 심하게 저는 이유도 당시 고문 때문이라 함)로 입원해 들어왔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매도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차례 설전이 오고간 후로는 아무도 내색하지 않는다며 그간의 병원에서의 성과(?)를 전한다.

작년 11월 28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영하 20도에도 굴하지 않고 광화문 촛불을 묵묵히 지켰던 선생이 대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은 6월 1일. 올 2월부터 설사 증세가 잦아 소화기 질환을 의심했지만 이렇게 큰 병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생각보다 심각한 대장 암 수술 기적처럼 잘 끝나

수술 일은 원래 6월 5일이었으나 6월 2일 내시경 검사 도중 뜻하지 않게 대장이 터져 그날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들도 막상 복개를 해 놓고 보니 상태가 너무나 참담해 “자신이 없다”며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대장을 거의 다 드러내는 대 수술이 이어졌고 결과가 생각보다 좋아 담당 의사는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약 수술이 약 20분만 늦었어도 생명을 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종양이 두 군가 있었는데 거기서 더 이상 전이되지 않아 수술이 가능했다고 한다.

수술을 마친 선생의 눈을 보고 의사들은 “이 눈은 환자의 눈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라던 선생의 의지가 눈을 통해 나타났으리라. 부인 김학자 67세)씨의 말에 의하면 선생은 수술 후에도 지독하게 운동을 해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고 한다.

미군범죄 57년만에 꼬리를 잡혀


△광화문 할아버지 인형ⓒ민중의 소리
지난 13일은 효순이 미선이 1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던 날이다. 이날 선생은 광화문에 가려고 모든 준비를 다해놓고 있었는데 담당 과장이 회진을 돌던 중 “대통령이 나오라고 시켜도 나는 못 내보낸다”며 극구 반대를 해 결국 그날 주치의가 지키는 가운데 TV를 통해 추모행사를 봐야 했다고 한다. 환자의 건강을 염려한 의사의 마음도 미선이 효순이를 향한 이관복 선생의 마음도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관복 선생은 왜 그렇게 촛불에 애착을 갖고 지키려하는 걸까?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인해 57년만에 미군의 정체를 우리 동포들에게 말하는 게 먹혀들어갔어요. 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미군이 우리 땅에 들어와 있는 내면적 음모를 폭로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진지했지요.”

사실 이관복 선생이 미군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해방 이후 그가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이 들어왔는데, 해방군인 줄 알았던 미군에 의해 동료 여교사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자 선생은 미군이 우리 민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그가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인해 국민들이 미국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혹자는 반미를 위해 두 여중생의 죽음을 이용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관복 선생은 절대 이용한 게 아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미군범죄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몰라주었을 뿐이다.

일례로 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때도 선생이 나서서 이리 저리 알렸는데도 당시에 언론이나 대중들이 알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95년에도 미군들에 의해 기지촌 여성의 귀가 잘리고 눈이 빠져도 아무도 몰라주었단다. 당시 포주는 “지금 이 사건을 말하면 우리는 장사도 안되고 죽는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수첩 맨 앞에 적어 놓은 문구ⓒ민중의 소리
“미군범죄가 57년만에 꼬리를 잡혔어요. 더 이상 우리 동포들은 포악한 미군에게 방치되지 않아요. 제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개인의 사건의 돌리지 마세요. 남이 아니잖아요. 우리 동네 개가 다른 동네 개한테 다쳐도 쫓아가서 따지는 민족인데...”

촛불로 인해 몸도 상하고 수술 후 건강도 염려돼 이후부터는 촛불 지킴이를 그만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그러나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속도는 느리지만 계속 이겨왔잖아요. 3.15부정선거 이후 4.19,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 노태우의 군부 독재도 타도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힘은 약화되어 왔고...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기고 있고 앞으로도 이길 겁니다. 저는 미국이 한국에서 무너질 것을 내다봅니다.”

수첩 맨 앞에 “조국을 잃어버린 민족의 가슴속에 조국을 찾아주련다-새해아침”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선생에게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권유였다.

퇴원 하루 앞두고 광화문 찾아


25일 퇴원을 하루 앞두고 선생은 의사의 허락을 받았다며 광화문에 촛불을 밝히러 간다고 전했다. 환자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던 선생은 “수술로 인해 병원에 있는 동안 이렇게 됐다”며 넉넉해져버린 바지의 허리춤을 보여준다. 그래도 촛불을 지키러 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척 가볍고 힘차 보였다.

운동을 해야한다며 7층 병실에서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아랫배가 조금 당기긴 하지만 큰 무리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왠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렵게 회복됐는데...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광화문에는 2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 참석해 211일차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자봉단, 613준비위원, 한얼이, 한얼이 아버지, 진관스님... 이관복 선생은 한사람 한사람 손을 잡으며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전한다. 심지어 포장마차 아주머니에게도 인사를 전한다. 인사를 나눈 사람들도 반가움을 전하며 선생의 건강을 염려한다. 어느새 한 식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진달래(직장인, 32)씨는 “비가 오지만 선생님이 오시니 힘이 난다”며 “촛불을 드는 이유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자주적인 삶을 위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약 한달 만에 마이크를 잡은 이관복 선생은 1주기 추모대회를 성황리에 이끌어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어렵고 속도는 느렸지만 우리는 이겨왔고 이기고 있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라고 말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오랜만에 나와 기분이 좋은 선생은 이날 참석한 사람들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약속하고는 근처 식당으로 가서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비록 노령에 나약한 육신을 가졌지만 분명히 이관복 선생의 존재는 광화문 촛불의 핵이었다. 앞으로 새로운 운동 전술을 고민하고 있는 선생의 의도대로 계속해서 미군의 실체가 대중 속에 확산되길 기대한다.


이관복 선생의 부인 김학자씨 인터뷰


△이관복 선생의 부인 김학자(67)씨ⓒ민중의 소리
▷ 처음 선생님의 병 소식을 들었을 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죠. 특히 수술 전 의사 선생님이 각오하라고 할 땐 온 식구가 다 울었다.

▷ 선생님이 광화문에 나가시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말렸지만 본인의 뜻이 워낙 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초기에는 충북 음성에서 첫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활동하다가 막차로 돌아왔다.

▷ 고생이 많았을 거 같은데..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생이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못 배운 애들 데려다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신 때 교과서 안 바꿨다고 옥고를 치른 후 나와서도 걸핏하면 데려가 고생을 시켰다. 신앙인으로서 나라의 도움이 되는 일이면 하나님이 잘 인도해주리라 믿고 이겨내 왔다.

▷ 자녀들(6녀 1남)이 원망도 많았을 텐데..
처음에는 ‘우리 아빠는 왜 그래’하며 원망도 했었지만 커가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더니 아무 말 안한다. 우리가 볼 때도 대단하다. 말릴 수도 없다. 사회가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이관복선생님 약력

- 1934년 8월 22일 충북 괴산군 증평읍 용강리 출생
- 1965년 숭실대학교 사학과 졸업
- 1956년 무극고등공민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여 1979년 유신반대 시국관 문제로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교사 생활 (대명농민학교장으로 퇴임)
- 1976년 학원설치법위반 불구속재판 6월 실형선고 복역
-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 구속재판 3년 실형선고 복역(1980년 만기출소)
- 1980년 5.17쿠데타 5.18 광주탄압 포고령위반 구속재판 6월 15일 복역
- 1990년 범민련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재판 3년징역, 5년집유, 5개월복역
- 1987년 충북 청주 갑구 13대 국회의원 출마 (평민당 후보) 낙선
- 1996년 충북 진천 음성 15대 국회의원 출마 (무소속 후보) 낙선
- 1985년~1993년 민통련 중앙의장 역임
- 1990년~1996년 충북 역사정의실천협의회장 역임
- 2001년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 현재
- 2002년 광주 민주유공자 확정
- 2002년 미군장갑차 신효순 심미선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고문 현재

장상종기자

[출처;민중의 소리 6-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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