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사태 강건너 불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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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6-16 00:00 조회1,4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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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왜곡보도 반성없는 한국언론에
뉴욕타임스 사태는 강건너 불구경인가?
[취재수첩] NYT 편집인-편집국장 동반퇴진을 바라보며
한 기자의 "그릇된 글쓰기"에서 촉발된 뉴욕타임스(NYT) 사태가 지난 5일 편집인과 편집국장의 동반 사퇴로 막을 내렸다. 일선기자의 잘못에 대해 최고위 간부에게까지 책임을 물은 NYT 사태는 "80년대 왜곡보도"에 앞장선 언론인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우리 언론의 현주소와 큰 대조를 이룬다.
▲ 지난 5일 오전 뉴욕타임스 편집국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는 하월 레인스 전 편집인(마이크를 쥔 사람). 제럴드 보이드 편집국장(흑인)이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NYT는 지난 6일자에서 "하월 레인스 편집인과 제럴드 보이드 편집국장이 제이슨 블레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함께 업계 반응, 사설 등 4건의 기사로 소상히 전했다. "레인스 편집인이 퇴임사를 하는 동안 편집국의 많은 기자들이 소리내서 흐느꼈다"는 현장 분위기도 덧붙였다.
앞서 NYT 전국부에서 일했던 제이슨 블레어 기자는 1999년 입사 후 3년 반 동안 적어도 36건의 기사에서 취재원의 말을 작문하거나 다른 기사를 베낀 사실이 드러나 해고됐고, 이 같은 사실은 NYT 5월 11일자에 대서특필됐다.
블레어 사건으로 인해 사임한 레인스 편집인은 NYT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편집인 기용은 2001년 NYT가 단행한 파격 인사의 정점에 있었다.
그해 여름 칼럼니스트 게일 콜린스가 여성으로는 주필에, 정치담당 부국장 제럴드 보이드가 편집국장에 각각 임명됐는데, 이들은 모두 NYT에서 최초로 여성과 흑인이 해당보직에 임명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미국 남부의 앨러바마 주립대학을 나온 레인스 역시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NYT 동료들의 견제를 받았다.
2001년 8월 그가 편집인에 취임해 최초로 한 일은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을 기사화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동성애자 결혼"에 대한 법적 논란이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레인스가 내린 결정은 보수적인 독자들의 반발을 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세계무역센터 붕괴로 인해 뉴욕시내가 하루종일 어수선했던 2001년 9월11일 레인스는 편집국 기자들을 독려해 특별리포트 "도전받는 미국"을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다음해 NYT는 퓰리처상 언론부문 14개상중 7개를 싹쓸이했다. 한 언론사가 7개 부문을 휩쓴 것은 퓰리처상 제정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뉴욕타임스는 자사 편집인과 편집국장의 사임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그러나 "제이슨 블레어 사건"은 그의 명성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레인스 국장 자신은 블레어 사건 이후 열린 기자총회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앨라배마 출신 백인으로서 느낀 양심의 가책이 블레어에게 두 번, 세 번의 기회를 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 앨라배마는 인종차별이 팽배했지만, 대학시절 그는 흑인의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앨러배마 행진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5년 뒤 킹 목사가 암살되자 "남은 평생을 그와 함께 행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91년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본 흑인 보모의 인생 역정을 NYT 일요판에 기사화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거사를 돌아보면, 인종차별이 팽배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 등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했던 그의 "배려"가 자신의 불명예퇴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언론의 가치가 독자들의 신뢰에 기초한다는 대전제를 무너뜨릴 수 없는 법. NYT 발행인 아서 설츠버거 주니어도 "편집국의 도덕성은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뉴욕의 한 신문사"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세계적 권위지도 이런 실수를 하네"라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때로는 저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성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적인 시스템"에 범접하지 못하는 우리의 낙후한 현실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 3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발표한 "80년 신군부 부역언론인들에 대한 모니터보고서"에 나타난다. 1980년 5월 17일∼8월 31일까지 당시 6대 일간지(경향, 동아, 서울신문, 조선, 중앙, 한국일보)를 모니터한 보고서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폄하하고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찬양하는 언론인들의 명단이 들어있었다.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중 5월 광주를 "무정부 상태"로 묘사한 <조선일보> 김대중 기자의 예는 너무도 유명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조선일보>는 방우영 회장 자신이 국보위 위원으로 5공화국 출범에 직접 협조했으니 철저한 반성 없이는 언론 자유를 논할 자격도 없다고 하겠다.
<동아일보> 최규철 기자(현 논설주간)는 80년 8월 29일에 <새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찬양기사를 썼다. 기사에는 "정직·성실…평범 속의 비범 실천" 등의 부제가 붙어있다. 최 주간은 지금 자신의 기명칼럼을 통해 노무현 정부에 독설을 퍼붓고 있지만, 그 같은 기개를 젊은 날의 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앙일보> 고문으로 "옴브즈맨 칼럼"을 기고하는 성병욱 기자(현 세종대 석좌교수)는 80년 <합천에서 청와대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어제와 오늘> <“새 역사 창조에 신명 바치겠다”-전두환 대장 예편>라는 기사를 썼다. 성 교수가 자신의 옛 직장에 다니는 후배 기자들에 대한 옴브즈맨을 한다면서 "이 기사는 이렇다" "어떤 기사를 왜 안 썼냐"고 충고할 자격이 있는 지 의심스럽다.
방송이라고 다를 게 없다. 80년 당시 MBC 사장이었던 이진희씨는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그를 직접 만나 전씨를 추켜 올리는 대담을 방송했다. 이후 문공부 장관, 서울시장으로 승승장구한 그는 지금에 와서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한다.
81년 MBC 정치부 차장으로 근무하며 전씨의 소소한 부분까지 보도한 하순봉씨는 "언론계의 젊은피 수혈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된 그는 MBC 미디어비평의 후배기자가 "당시 상황에서 아쉬운 점이 없냐?"고 묻자 "내가 지금 되뇌일 입장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역시 "전두환 특집"으로 독재정권에 아부한 이원홍 당시 KBS 사장은 아예 "KBS가 그 시대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깝게는 각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경원하, 길재경 등 주요 북한인사들의 망명설이 사실무근이거나 신빙성이 떨어진 것으로 판명된 후에도 우리 언론들은 KBS, <경향신문> 정도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사과문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이슨 블레어 사건"으로 곤욕을 겪고 있는 NYT 사태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볼 수 있을 지 몰라도 NYT가 차츰 신뢰를 쌓아가는 사이에 우리 언론은 "동업자 눈감아주기" 속에 영영 제 자리 걸음을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회원사들에 대해 소극적인 제재에 그치고 있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위원장 안용득)의 기능 강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입만 열면 "자율개혁"을 얘기하는 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들이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는 지 모르겠다.
[번역- NYT 사설] 타임즈에서의 지도력 (2002.6.6)
누군가 NYT 직원들의 신문에 대한 공헌도를 측정한다면 제이슨 블레어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끼는 지가 아주 좋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번 주 하월 레인스 편집인과 제럴드 보이드 관리담당 편집국장은 블레어 사건의 여파로 인해 타임스가 요구하는 효율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제 그들은 사임했다.
레인스는 2년여 동안 편집국을 책임졌고, 그 기간동안 타임스는 8개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가 편집인이 된 지 불과 며칠 후에 테러리스트들이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했다. 그의 지휘하에 신문은 참사 이후에 대한 취재를 했고, 이는 타임스 152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중의 하나였다.
어제 아서 설츠버거 주니어 타임스 발행인은 두 사람의 빼어난 업적들을 열거하며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레인스는 편집인이 되기 전 사설란의 책임자였다. 그의 임기 동안 논설위원들이 회사 간부의 사임을 요구한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이들은 이미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인 경우도 있었고, 그들이 직접 하지 않은 일로 인해 사임을 요구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의 지휘권을 되찾으려는 싸움은 그가 이끌려는 공공조직의 활력을 잃게 할 수 있다. 한 거대한 조직의 번영은 항상 그것을 이끌려는 사람들의 경력보다 더 중요하다.
레인스와 보이드는 그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떠남을 선택했다. 2001년 편집인에서 물러난 조셉 렐리벨드가 새로운 편집진이 구성되기 전까지 임시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특정 공조직의 가치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달려있지만, 이는 동시에 독자들의 매체에 대한 확신, 해당 신문이 하루하루 옳은 일을 위해 강하게 싸워나가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확신에 달려있다.
언론은 인간사의 복잡성에 대해 파악하고 보도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비즈니스이다. 모든 회사들처럼 언론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러나 언론은 항상 완벽을 지향해야 한다.
제이슨 블레어 사건이 표면화된 후 타임스는 자기 반성을 강요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결국 유익한 것이 되리라. 일련의 눈부신 성공이 우리를 너무 건방지게 만들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내부규정과 구조 일부를 재검토하고 있다. 최근 몇 주간 타임스 내부 사람들, 기자와 편집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별로 즐거울 수 없었다. 레인스와 보이드는 타임스의 힘을 지키기 위해 떠났지만, 그들의 희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완벽한 보도라는 완전한 목표를 향해 일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줬다. / 번역 손병관 기자
[출처:오마이뉴스 2003/06/07]
뉴욕타임스 사태는 강건너 불구경인가?
[취재수첩] NYT 편집인-편집국장 동반퇴진을 바라보며
한 기자의 "그릇된 글쓰기"에서 촉발된 뉴욕타임스(NYT) 사태가 지난 5일 편집인과 편집국장의 동반 사퇴로 막을 내렸다. 일선기자의 잘못에 대해 최고위 간부에게까지 책임을 물은 NYT 사태는 "80년대 왜곡보도"에 앞장선 언론인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우리 언론의 현주소와 큰 대조를 이룬다.
![patrick21_116281_1[1].jpg](http://www.ohmynews.com/down/images/1/patrick21_116281_1%5B1%5D.jpg)
NYT는 지난 6일자에서 "하월 레인스 편집인과 제럴드 보이드 편집국장이 제이슨 블레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함께 업계 반응, 사설 등 4건의 기사로 소상히 전했다. "레인스 편집인이 퇴임사를 하는 동안 편집국의 많은 기자들이 소리내서 흐느꼈다"는 현장 분위기도 덧붙였다.
앞서 NYT 전국부에서 일했던 제이슨 블레어 기자는 1999년 입사 후 3년 반 동안 적어도 36건의 기사에서 취재원의 말을 작문하거나 다른 기사를 베낀 사실이 드러나 해고됐고, 이 같은 사실은 NYT 5월 11일자에 대서특필됐다.
블레어 사건으로 인해 사임한 레인스 편집인은 NYT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편집인 기용은 2001년 NYT가 단행한 파격 인사의 정점에 있었다.
그해 여름 칼럼니스트 게일 콜린스가 여성으로는 주필에, 정치담당 부국장 제럴드 보이드가 편집국장에 각각 임명됐는데, 이들은 모두 NYT에서 최초로 여성과 흑인이 해당보직에 임명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미국 남부의 앨러바마 주립대학을 나온 레인스 역시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NYT 동료들의 견제를 받았다.
2001년 8월 그가 편집인에 취임해 최초로 한 일은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을 기사화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동성애자 결혼"에 대한 법적 논란이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레인스가 내린 결정은 보수적인 독자들의 반발을 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세계무역센터 붕괴로 인해 뉴욕시내가 하루종일 어수선했던 2001년 9월11일 레인스는 편집국 기자들을 독려해 특별리포트 "도전받는 미국"을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다음해 NYT는 퓰리처상 언론부문 14개상중 7개를 싹쓸이했다. 한 언론사가 7개 부문을 휩쓴 것은 퓰리처상 제정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patrick21_116281_1[2].jpg](http://www.ohmynews.com/down/images/1/patrick21_116281_1%5B2%5D.jpg)
그러나 "제이슨 블레어 사건"은 그의 명성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레인스 국장 자신은 블레어 사건 이후 열린 기자총회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앨라배마 출신 백인으로서 느낀 양심의 가책이 블레어에게 두 번, 세 번의 기회를 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 앨라배마는 인종차별이 팽배했지만, 대학시절 그는 흑인의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앨러배마 행진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5년 뒤 킹 목사가 암살되자 "남은 평생을 그와 함께 행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91년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본 흑인 보모의 인생 역정을 NYT 일요판에 기사화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거사를 돌아보면, 인종차별이 팽배한 미국 사회에서 흑인 등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했던 그의 "배려"가 자신의 불명예퇴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언론의 가치가 독자들의 신뢰에 기초한다는 대전제를 무너뜨릴 수 없는 법. NYT 발행인 아서 설츠버거 주니어도 "편집국의 도덕성은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뉴욕의 한 신문사"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세계적 권위지도 이런 실수를 하네"라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고 때로는 저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성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적인 시스템"에 범접하지 못하는 우리의 낙후한 현실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 3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발표한 "80년 신군부 부역언론인들에 대한 모니터보고서"에 나타난다. 1980년 5월 17일∼8월 31일까지 당시 6대 일간지(경향, 동아, 서울신문, 조선, 중앙, 한국일보)를 모니터한 보고서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폄하하고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찬양하는 언론인들의 명단이 들어있었다.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중 5월 광주를 "무정부 상태"로 묘사한 <조선일보> 김대중 기자의 예는 너무도 유명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조선일보>는 방우영 회장 자신이 국보위 위원으로 5공화국 출범에 직접 협조했으니 철저한 반성 없이는 언론 자유를 논할 자격도 없다고 하겠다.
<동아일보> 최규철 기자(현 논설주간)는 80년 8월 29일에 <새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찬양기사를 썼다. 기사에는 "정직·성실…평범 속의 비범 실천" 등의 부제가 붙어있다. 최 주간은 지금 자신의 기명칼럼을 통해 노무현 정부에 독설을 퍼붓고 있지만, 그 같은 기개를 젊은 날의 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앙일보> 고문으로 "옴브즈맨 칼럼"을 기고하는 성병욱 기자(현 세종대 석좌교수)는 80년 <합천에서 청와대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어제와 오늘> <“새 역사 창조에 신명 바치겠다”-전두환 대장 예편>라는 기사를 썼다. 성 교수가 자신의 옛 직장에 다니는 후배 기자들에 대한 옴브즈맨을 한다면서 "이 기사는 이렇다" "어떤 기사를 왜 안 썼냐"고 충고할 자격이 있는 지 의심스럽다.
방송이라고 다를 게 없다. 80년 당시 MBC 사장이었던 이진희씨는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그를 직접 만나 전씨를 추켜 올리는 대담을 방송했다. 이후 문공부 장관, 서울시장으로 승승장구한 그는 지금에 와서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한다.
81년 MBC 정치부 차장으로 근무하며 전씨의 소소한 부분까지 보도한 하순봉씨는 "언론계의 젊은피 수혈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된 그는 MBC 미디어비평의 후배기자가 "당시 상황에서 아쉬운 점이 없냐?"고 묻자 "내가 지금 되뇌일 입장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역시 "전두환 특집"으로 독재정권에 아부한 이원홍 당시 KBS 사장은 아예 "KBS가 그 시대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깝게는 각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경원하, 길재경 등 주요 북한인사들의 망명설이 사실무근이거나 신빙성이 떨어진 것으로 판명된 후에도 우리 언론들은 KBS, <경향신문> 정도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사과문조차 발표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이슨 블레어 사건"으로 곤욕을 겪고 있는 NYT 사태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볼 수 있을 지 몰라도 NYT가 차츰 신뢰를 쌓아가는 사이에 우리 언론은 "동업자 눈감아주기" 속에 영영 제 자리 걸음을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회원사들에 대해 소극적인 제재에 그치고 있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위원장 안용득)의 기능 강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입만 열면 "자율개혁"을 얘기하는 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들이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는 지 모르겠다.
[번역- NYT 사설] 타임즈에서의 지도력 (2002.6.6)
누군가 NYT 직원들의 신문에 대한 공헌도를 측정한다면 제이슨 블레어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끼는 지가 아주 좋은 기준이 될 것이다.
이번 주 하월 레인스 편집인과 제럴드 보이드 관리담당 편집국장은 블레어 사건의 여파로 인해 타임스가 요구하는 효율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제 그들은 사임했다.
레인스는 2년여 동안 편집국을 책임졌고, 그 기간동안 타임스는 8개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가 편집인이 된 지 불과 며칠 후에 테러리스트들이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했다. 그의 지휘하에 신문은 참사 이후에 대한 취재를 했고, 이는 타임스 152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중의 하나였다.
어제 아서 설츠버거 주니어 타임스 발행인은 두 사람의 빼어난 업적들을 열거하며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다.
레인스는 편집인이 되기 전 사설란의 책임자였다. 그의 임기 동안 논설위원들이 회사 간부의 사임을 요구한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이들은 이미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인 경우도 있었고, 그들이 직접 하지 않은 일로 인해 사임을 요구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의 지휘권을 되찾으려는 싸움은 그가 이끌려는 공공조직의 활력을 잃게 할 수 있다. 한 거대한 조직의 번영은 항상 그것을 이끌려는 사람들의 경력보다 더 중요하다.
레인스와 보이드는 그것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떠남을 선택했다. 2001년 편집인에서 물러난 조셉 렐리벨드가 새로운 편집진이 구성되기 전까지 임시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특정 공조직의 가치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달려있지만, 이는 동시에 독자들의 매체에 대한 확신, 해당 신문이 하루하루 옳은 일을 위해 강하게 싸워나가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확신에 달려있다.
언론은 인간사의 복잡성에 대해 파악하고 보도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비즈니스이다. 모든 회사들처럼 언론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러나 언론은 항상 완벽을 지향해야 한다.
제이슨 블레어 사건이 표면화된 후 타임스는 자기 반성을 강요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결국 유익한 것이 되리라. 일련의 눈부신 성공이 우리를 너무 건방지게 만들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내부규정과 구조 일부를 재검토하고 있다. 최근 몇 주간 타임스 내부 사람들, 기자와 편집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별로 즐거울 수 없었다. 레인스와 보이드는 타임스의 힘을 지키기 위해 떠났지만, 그들의 희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완벽한 보도라는 완전한 목표를 향해 일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줬다. / 번역 손병관 기자
[출처:오마이뉴스 200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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