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재미동포연합 함성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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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8-28 00:00 조회1,5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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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김영희 편집위원]
미주 한인들의 본격적인 통일운동은 80년 광주봉기가 출발점이 되었다. 그 전까지 미주 한인들의 대개 운동은 남한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던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차원이었다. 광주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군사정권의 비호세력으로 미국정부가 그 뒤에 있었음을 간파한 미주 한인들은 남북의 화해와 자주평화통일이 없는한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고 파악했다.
재미동포연합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친북목사와 친북인사들의 단체, 혹은 ‘빨갱이’라는 이름까지 때로 들어가며 한인들이 굳굳하게 펼쳐 온 미주통일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중의 하나이다. 지난 6월말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한 동연합의 회장이며 미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전 총무인 미주의 원로 통일운동가 함성국목사(74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민족; 우선 개인적인 소개를 좀 해주십시요.
함목사; 평양교외에 있는 삼정리라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부친 존함은 함상관. 모친 존함은 박윤관이고 손 아래로 누이동생 성애가 있었습니다. 부친은 동네에서 양국과 양봉을 하셨고 모친은 주로 집안에서 살림을 하셨어요. 또 저희는 3대가 기독교집안으로 삼정감리교회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입니다.

민족; 함목사님도 이산가족이신가요?
함목사; 그렇습니다. 87년에 미 교회협의회 (National Christian Council)의 일원으로 북에 처음 가서 6남매의 어머니가 된 여동생 성애를 만났습니다. 요즘은 은퇴했지만 당시 여동생은 삼정리 고향근처에 있는 역포농장에서 유치원선생을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 가시자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58년에 그 아버지마저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성애는 계모밑에서 4년을 살다 19살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민족; 어떻게 남한으로 혼자 넘어 오셨습니까?
함목사; 50년 12월 1.4후퇴때 성화신학교 친구들 7-8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당시 저는 성화신학교에 재학중이었는데, 함께 남하한 친구중에는 동기인 이승만목사도 있었어요. 그 땐 사리원쯤 갔다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로스엔젤레스의 허선규목사, 현 동포연합의 유태영목사는 성화신학교 후배들이기도 합니다.
민족; 남하하신 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습니까?
함목사; 부산에 내려가 해병대에 입대해서 전쟁에 나갔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반공주의자가 된셈인데, 사실 그 땐 정치의식도 없고,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한다니까 반공을 한 거지요.
민족; 미국에는 어떻게 오셨고, 주로 어떤 공적 활동을 하셨습니까?
1956년에 제대를 하고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웨스리안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1970년에 보스턴 신학대학에서 구약성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10여년간 (1961-1971)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시무도 봤으니까 목회하면서 공부를 한 셈이지요.
71년부터 76년까지는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구약을 강의했고, 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미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에서 아시아및 태평양지역 담당 총무역할을 맡았습니다. 현재 선교부에서 총무로서는 은퇴했지만 상담자(Consultant)의 직분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의견은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
민족; 구약을 전공하셨는데, 구약의 입장에서 북을 평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함목사: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의 차이가 큽니다. 북조선은 제가 보기에는 빈부의 차이가 거의 없고 평등한 사회입니다. 현재 경제난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평등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지도층, 종교지도자들이 일반 국민들을 착취할 때 사회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아모스서, 미가서 등 예언서에서 보면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즉 예언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즉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구약의 예언서가 실천되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어요.
민족; 일부 극우익 기독교세력은 여전히 반북대열에 앞장서고 있지 않습니까?
함목사; 민주사회에서 기독교가 보수, 중간, 진보등으로 나누어지는 건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만, 보수기독교는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편협한 신앙입니다.
민족;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등이 모인 초종파적인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활동은 요즘 반전평화운동을 통해 특히 두드러지고 있는데요…
함목사; 여러 종교들이 모여 공동의 목표로 함께 활동하는 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만이 종교활동은 아니니까 기독교가 폭 넓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민족; 1997년에 재미동포연합이 창립된 이후 계속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동연합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북과의 교류사업을 위한 대표적인 민간창구로 알려졌는데 그 활동을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요.
함목사; 근래의 주된 사업으로는 이산가족 상봉, 예술문화교류, 그리고 실업인, 과학자, 의료인, 청년학생, 종교인, 여성등 다양한 분야의 미주한인들과 미국인들의 북한방문을 주선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평양에서 열렸던 아리랑 대축전때는 미주에서 150여명의 관람단을 모으기도 했지요.
지난 20여년간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만여명의 동포가 북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났습니다. 근래에는 조미간 정세가 나쁜데다가 이산가족 1세대들이 그동안 고령화되어 예전만큼 활발치 못합니다.
북한에는 지금까지 20여차례 다녀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있어서도 북의 경제는 근래에 와서 나아졌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힘듭니다. 북의 경제난은 근본적으로 조미간, 남북간의 어떤 정치적 해결이 선행되야 풀리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제원조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미국의 종교단체나 여성단체들을 통해서 의약품전달이나 어린이, 임신부를 돕는 일등 여러가지 프로젝도 실천해 왔습니다.
북과 교류사업도 하고 소식지도 발간하고 인터넷에 홈 페이지도 설치하면서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중의 하나는 북을 올바르게 알리자는 것입니다. 북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악의 축이 절대 아니고, 북한인민들은 어떤 면에서는 당신들보다 더 순수하다…이러며 북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일은 사랑하며 같이 살아야한다는 기독교정신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저희를 친북단체니 뭐니 하면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번 뿌리 내린 증오심은 동족간에도 뽑아내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민족; 한때는 반공주의자이셨는데 어떤 계기로 북을 새롭게 보게 되셨습니까?
함목사; 저도 남쪽과 미국생활의 산물이므로 암암리에 반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1989년부터 북조선을 방문하면서 계속 우리 민족의 화해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화해 문제를 생각하면서 반공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통일운동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일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은 연합감리교 세계선교부에서 일할 때부터 시작하여 이제 20여년이 지났습니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재미동포전국연합회에서 일하면서부터 통일운동에 한층 더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가족소개 좀 해주세요.
함목사; 아내 임병대는 동포들을 상담하는 카운슬링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공인 법정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아들 하나, 딸 둘로 아들 영환(David)이는 엔지니어로 실리콘 밸리에 살고 있고, 큰 딸 영혜(Grace)는 결혼해서 아들 둘을 키우고 있으며, 작은 딸 영미(Susan)는 오랫동안 메릴 린치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민족;재미동포연합회 일 이외 다른 특별한 활동을 하고 계신지요?
함목사; 근래에 와서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에서 제가 맡은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은퇴하면 성서신학, 특히 <시편> 연구에 힘을 쏟으려고 합니다.
민족; 조미관계 개선을 위해 동연합과 회장님에 대한 기대가 무척 큽니다. 고맙습니다
미주 한인들의 본격적인 통일운동은 80년 광주봉기가 출발점이 되었다. 그 전까지 미주 한인들의 대개 운동은 남한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던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과 연대하는 차원이었다. 광주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군사정권의 비호세력으로 미국정부가 그 뒤에 있었음을 간파한 미주 한인들은 남북의 화해와 자주평화통일이 없는한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고 파악했다.
재미동포연합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친북목사와 친북인사들의 단체, 혹은 ‘빨갱이’라는 이름까지 때로 들어가며 한인들이 굳굳하게 펼쳐 온 미주통일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중의 하나이다. 지난 6월말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한 동연합의 회장이며 미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전 총무인 미주의 원로 통일운동가 함성국목사(74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민족; 우선 개인적인 소개를 좀 해주십시요.
함목사; 평양교외에 있는 삼정리라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부친 존함은 함상관. 모친 존함은 박윤관이고 손 아래로 누이동생 성애가 있었습니다. 부친은 동네에서 양국과 양봉을 하셨고 모친은 주로 집안에서 살림을 하셨어요. 또 저희는 3대가 기독교집안으로 삼정감리교회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입니다.

민족; 함목사님도 이산가족이신가요?
함목사; 그렇습니다. 87년에 미 교회협의회 (National Christian Council)의 일원으로 북에 처음 가서 6남매의 어머니가 된 여동생 성애를 만났습니다. 요즘은 은퇴했지만 당시 여동생은 삼정리 고향근처에 있는 역포농장에서 유치원선생을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 가시자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58년에 그 아버지마저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성애는 계모밑에서 4년을 살다 19살에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민족; 어떻게 남한으로 혼자 넘어 오셨습니까?
함목사; 50년 12월 1.4후퇴때 성화신학교 친구들 7-8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당시 저는 성화신학교에 재학중이었는데, 함께 남하한 친구중에는 동기인 이승만목사도 있었어요. 그 땐 사리원쯤 갔다가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로스엔젤레스의 허선규목사, 현 동포연합의 유태영목사는 성화신학교 후배들이기도 합니다.
민족; 남하하신 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습니까?
함목사; 부산에 내려가 해병대에 입대해서 전쟁에 나갔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반공주의자가 된셈인데, 사실 그 땐 정치의식도 없고,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한다니까 반공을 한 거지요.
민족; 미국에는 어떻게 오셨고, 주로 어떤 공적 활동을 하셨습니까?
1956년에 제대를 하고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웨스리안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1970년에 보스턴 신학대학에서 구약성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10여년간 (1961-1971)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시무도 봤으니까 목회하면서 공부를 한 셈이지요.
71년부터 76년까지는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구약을 강의했고, 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미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에서 아시아및 태평양지역 담당 총무역할을 맡았습니다. 현재 선교부에서 총무로서는 은퇴했지만 상담자(Consultant)의 직분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의견은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
민족; 구약을 전공하셨는데, 구약의 입장에서 북을 평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함목사: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의 차이가 큽니다. 북조선은 제가 보기에는 빈부의 차이가 거의 없고 평등한 사회입니다. 현재 경제난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평등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지도층, 종교지도자들이 일반 국민들을 착취할 때 사회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아모스서, 미가서 등 예언서에서 보면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즉 예언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즉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구약의 예언서가 실천되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어요.
민족; 일부 극우익 기독교세력은 여전히 반북대열에 앞장서고 있지 않습니까?
함목사; 민주사회에서 기독교가 보수, 중간, 진보등으로 나누어지는 건 있을 수 있는 현상이지만, 보수기독교는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편협한 신앙입니다.
민족;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등이 모인 초종파적인 종교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활동은 요즘 반전평화운동을 통해 특히 두드러지고 있는데요…
함목사; 여러 종교들이 모여 공동의 목표로 함께 활동하는 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만이 종교활동은 아니니까 기독교가 폭 넓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민족; 1997년에 재미동포연합이 창립된 이후 계속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동연합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북과의 교류사업을 위한 대표적인 민간창구로 알려졌는데 그 활동을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요.
함목사; 근래의 주된 사업으로는 이산가족 상봉, 예술문화교류, 그리고 실업인, 과학자, 의료인, 청년학생, 종교인, 여성등 다양한 분야의 미주한인들과 미국인들의 북한방문을 주선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평양에서 열렸던 아리랑 대축전때는 미주에서 150여명의 관람단을 모으기도 했지요.
지난 20여년간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만여명의 동포가 북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났습니다. 근래에는 조미간 정세가 나쁜데다가 이산가족 1세대들이 그동안 고령화되어 예전만큼 활발치 못합니다.
북한에는 지금까지 20여차례 다녀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있어서도 북의 경제는 근래에 와서 나아졌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힘듭니다. 북의 경제난은 근본적으로 조미간, 남북간의 어떤 정치적 해결이 선행되야 풀리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제원조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미국의 종교단체나 여성단체들을 통해서 의약품전달이나 어린이, 임신부를 돕는 일등 여러가지 프로젝도 실천해 왔습니다.
북과 교류사업도 하고 소식지도 발간하고 인터넷에 홈 페이지도 설치하면서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중의 하나는 북을 올바르게 알리자는 것입니다. 북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악의 축이 절대 아니고, 북한인민들은 어떤 면에서는 당신들보다 더 순수하다…이러며 북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일은 사랑하며 같이 살아야한다는 기독교정신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저희를 친북단체니 뭐니 하면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번 뿌리 내린 증오심은 동족간에도 뽑아내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민족; 한때는 반공주의자이셨는데 어떤 계기로 북을 새롭게 보게 되셨습니까?
함목사; 저도 남쪽과 미국생활의 산물이므로 암암리에 반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1989년부터 북조선을 방문하면서 계속 우리 민족의 화해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화해 문제를 생각하면서 반공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통일운동에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일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은 연합감리교 세계선교부에서 일할 때부터 시작하여 이제 20여년이 지났습니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재미동포전국연합회에서 일하면서부터 통일운동에 한층 더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가족소개 좀 해주세요.
함목사; 아내 임병대는 동포들을 상담하는 카운슬링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공인 법정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녀는 아들 하나, 딸 둘로 아들 영환(David)이는 엔지니어로 실리콘 밸리에 살고 있고, 큰 딸 영혜(Grace)는 결혼해서 아들 둘을 키우고 있으며, 작은 딸 영미(Susan)는 오랫동안 메릴 린치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민족;재미동포연합회 일 이외 다른 특별한 활동을 하고 계신지요?
함목사; 근래에 와서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에서 제가 맡은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은퇴하면 성서신학, 특히 <시편> 연구에 힘을 쏟으려고 합니다.
민족; 조미관계 개선을 위해 동연합과 회장님에 대한 기대가 무척 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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