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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관광; 평화자동차 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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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09-12 00:00 조회1,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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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성락, "북녘 동포들의 삶의 모습 볼 수 있다"
평화항공여행사, 15일부터 평양,백두산 여행 시작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다오."

고(故) 늦봄 문익환 목사가 통일을 꿈꾸며 간절히 소망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평양과 백두산을 둘러보는 관광길이 열려 오는 15일 첫 관광단 110명이 북측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으로 향한다.

35141_4.jpg꿈만 같던 일을 성사시킨 회사는 의외로 현대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평화자동차 자회사 격인 `평화항공여행사`이다.

5일 서울 마포 도원빌딩 사무실에서 만난 평화자동차 조성락(51세) 이사는 북측과의 오랜 `신뢰`가 이번 일을 가능케 했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정주로 가는 평양-남포간 1번국도를 달리며 북녘 동포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 이사는 특히 94년 김 주석 사망 당시 조문은 정부측과 `반드시` 사전 교감이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북측은 지금 "남쪽으로부터 도움 받기를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 북한 관광의 정식 명칭은 무엇인가?

그냥 단순한 관광이 아니고 통일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통일기원 평양관광`이라고 작명했다. 평양만이 아니라 백두산, 정주, 남포도 가게 된다.

□ 언제부터 평양관광이 준비되었나?

이번 사안은 지난 4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지만 대북 경협사업을 시작한 것은 91년부터니까 10년이 넘은 셈이다.

□ 첫 관광단은 언제 몇 명이 떠나게 되나?

9월 15일 1진 110명 정도가 4박 5일 일정으로 다녀오게 된다. 올해 안에 2천명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매회 100명 가량으로 보면 20회 가까이 돼야 한다.

□ 현대아산 측에서 대북사업 독점권과 관련해 문제제기를 했는데.

구체적으로 제약받는 것은 아니다. 현대도 의도적으로 준비한 내용은 아니고 돌출성 발언으로 생각한다. 일부 현대 임원의 경우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앞뒤 정황 상으로 볼 때 계산된 발언 같지는 않고 큰 지장은 없을 것으로 본다.

□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것은 어떻게 성사시켰느냐다.

한마디로 신뢰의 문제다. 북쪽이 개방하는 것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하고, 한다 하더라도 철저한 계획 속에서 되는 것인데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준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배후에는 10여년 간의 역사가 있고, 그동안 통일그룹과 북쪽 당국이 여러 사업에서 상호 형성된 신뢰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 북측과 협의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물론 과정 하나하나를 협의했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북측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또는 외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을 감수하면서 공개했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다.

□ 관광 코스에 평양과 백두산 외에도 정주, 남포 등이 들어 있는데 정주가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정주는 통일그룹의 문선명 총재의 생가가 잘 보존돼 있다. 의외로 현장 그대로 원형자체가 보존돼 있다. 그쪽 당국에서 성의껏 관리, 보수해주고 있다.

또한 세계의 신도들이 총재의 세계평화 정신의 뜻을 기려서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자는 결의가 있어 각 국의 신도들이 헌금을 모아 부지를 할애받아 장차 건립할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주 가는 길은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1번 국도인데 우리와 달리 비포장길이고 외부에 공개가 안된 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갖는 각별한 의미 때문에 열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공개 모객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문 총재를 평소에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가는 길, 오는 길이 바로 북녘 동포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 소달구지 끄는 사람, 들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경치만 볼 수 있는데 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북녘 동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스스로 통일에 대한 절박한 마음이라든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느껴, 말하지 않아도 한번 갔다오면 교육이 되는 것이다.

□ 남포는 평화자동차공장 때문인가?

물론 평화자동차종합공장이 있기 때문이다.

남포는 얼마전 준공된 평양-남포간 왕복 10차선 고속도로가 있는데 아주 장관이다. 50Km에 달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과정이 시.군.구별 청년돌격대들이 구역을 할당해 건설했는데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장면이 많았다. 중장비도 없이 손망치로 바위를 깨고, 마대자루 아니면 웃저고리를 벗어서 흙을 퍼날라 사람의 힘에 의지해서 만든 도로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이 청년영웅도로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북 정권의 하나의 의지이다. 뭔가 항구인 남포를 개발해 중국과의 교역이나 나아가 외국과의 교역을 기대하는 정책적 배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지금 가면 우리 차만 가지 다른 차가 많지 않다.

자동차공장은 청년영웅고속도로 남포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아주 통쾌한 평화자동차공장이라는 간판이 얼마나 크게 붙어있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간판 크게 거는 것도 간단치 않다. 정치선전 구호나 지도자 관련 구호 외에 기업소는 간판을 붙이지 않고 건물 호수를 따져 다닌다.

"백두산 관광 독점권은 없다"

□ 백두산 관광이야말로 북한 관광의 꽃인데.


백두산 코스를 남쪽 손님한테는 많이 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광사업을 하려면 해야한다.

북측에서는 자랑하는 많은 명승지가 있는데 북쪽 사람들은 금강산이나 묘향산보다 칠보산을 가장 많이 꼽는다. 그런데 접근성이 떨어지고 불편해서 아직은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지 못하다.

백두산은 이미 삼지연 공항이 있고 버스로 꼭대기까지 가니까 부담없이 1박 2일 코스로 다녀올 수 있다. 아시다시피 일기변화가 난측이니까 일기를 따라 우선 스케쥴을 조정한다.

□ 백두산 관광에 대한 독점권 같은 것이 있나?

북쪽 사람들이 남쪽 기업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독점을 좋아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보기엔 우리 기업들이 가서 투자를 하는 조건을 지렛대로 삼아 뭔가 투자 이익을 보장받으려는 것인데 우리 쪽 상식에서 보면 대단히 당연한 것인데 북쪽에서는 독점이라는 것을 이해를 못한다.

우리가 독점한다든지 우리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오히려 저쪽에서 상대를 정할 때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볼 것이고, 당분간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을 통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외화가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관광을 하지만 관광이라는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제의 문제다. 돈벌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체제에 부담이 되거나 근본적이 위협이 된다면 그 순간 문을 닫을 것이다.

□ 현대의 금강산 관광이 독점권의 대가로 뒷돈이 오가서 문제가 되고 있다. 평양관광은 정부보조나 뒷돈 문제가 없는가?

통일부와 국정원, 재경부 등 관련부처가 전부 합의해 정식 남북협력사업자로 승인해줬다. 물론 먼저 북과의 합의서를 제출했고, 북측과의 협의에 의해 결정된 가격을 근거로 해서 참가비를 결정했다. 정부측에서도 초기단계니까 영리적인 면은 최소화 해달라고 요청했다.

노파심에서 얘기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분위기도 그렇고, 저쪽과의 사업 외에 다른 거래로 돈이 가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그 조건을 다 충족했기 때문에 승인이 난 것이다.

□ 관광객들이 부담해야 하는 관광비용이 적지 않은데.


4박 5일에 220만원이고 백두산 코스는 70만원이 추가돼 290만원이다.
아직은 조금 비싼데 저쪽에 이유가 있다. 저쪽에서 직항로를 이용해 북측 비행기를 가지고 들어오는데, 앞으로는 우리 비행기도 반반씩 할 것이다. 그게 남북경협이다. 먼저 저쪽에서 가지고 오겠다는데 그 비용이 국내 비행기보다 비싸다.

조금 부담이 되고 그런 만큼 참여계층도 제한된다는 현실적인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국가보조는 있을 수 없고, 우리도 자선사업 단계가 아니다.

□ 북한을 많이 다녀온 것으로 안다.

세계일보 근무당시 박보희 사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보희 사장은 문선명 총재를 모시고 91년 방북 때부터 방북 실무책임을 했고 나도 그때부터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후속 실무협상을 위한 방북이 안되다가 94년 1월 박보희 사장이 방북할 때 수행해 처음으로 방북했다. 그때 금강산 개발계획서에 김 주석이 직접 친필사인했다.

94년 7월에 김 주석이 사망해 조문사건이 났을 때 내가 박 사장을 수행해 조문했는데 남쪽에서는 두 사람만이 조문했다. 저쪽에서는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한다.

"김 주석 조문, 정부와 반드시 교감"

□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문선명 총재가 90년대 초에 방북하고 조문사절까지 보낸 것은 쉽게 이해가 안 간다.

문 총재 하면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 반공을 넘어 승공운동 지도자이다. 특히 북한은 철천지 원수다. 문 총재 스스로가 북한 공산치하에서 마지막 1.4후퇴 때 해방돼 나올 때까지 흥남질소비료공장 감방에 죄수로 있었다. 흥남비료공장하면 산지옥이다. 비료가 아주 독하기 때문에 작업을 하다 보면 6개월을 넘기기 힘든데 문 총재는 2년 8개월을 거기서 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깨지면서 나왔다.

38선을 넘어오면서 내가 다시 38선을 넘을 때는 남북통일에 정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다짐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했다고 들었다.

91년 처음 갔을 때 북한에서도 사실 놀랐다. 테크노크라트들은 통일교의 기반이나 실력, 또 동포니까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고 군부를 비롯한 보수진영은 하필 저 양반이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문 총재의 입장에서 제일 마음속에 어려웠다는 점은 어떻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김 주석을 만날 수 있을까를 결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 총재의 철학인 참사랑 외에는 북한 공산주의의 증오의 철학을 풀어낼 길이 없다. 구약성경의 애서와 야곱처럼 형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야 한다. 그럴 때 화합이 벌어지고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문 총재의 철학적 기반이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문 총재가 가서 형과 아우의 포옹이 벌어졌다. 그렇게 하고 돌아오고 94년에 또 우리가 가서 후속작업을 다하고 왔는데 김 주석이 갑자기 죽었다. 문 총재의 입장에서는 참사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원수의 개념이 없어진다. 김 주석이 전범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난 것이고 북한 체제의 수령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고 슬픔에 잠겨있는데 정치인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로서 이럴 때 따뜻한 참사랑의 메시지를 갖고 조문해야겠다고 해서 박보희를 보냈다. 국가보안법 차원이 아니다.

그쪽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다른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다시 형성할 기회가 없는 신뢰를 쌓았다.

□ 다녀와서 조사는 안 받았나.

나는 주가 아니니까 약식 조사는 했지만, 정부와 어떤 교감 없이 간 것이 아니고 반드시 교감이 있는 상태에서 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 여론이 이상하게 돌아가니까 정부가 겁을 먹고 한쪽으로 편승해서 일이 좀 왜곡된 것이다.

□ 그 이후에도 북쪽과 사업을 계속해왔나?

수십번 북에 다녀왔다. 고 김 주석과 문 총재의 합의내용을 실천해온 과정이었다.


문화교류로 98년 5월 리틀엔젤스 방북공연이 있었고 2000년 5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에 왔다. 요즘들어 북에서 발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측 입장에서는 김 주석의 유훈 사업이므로 반드시 실천한다.

특히 99년부터 평화자동차 상무이사로 직접적으로 실무를 담당해 통일부에 사업승인 과정부터 진행했다. 실무가 복잡하다.

□ 북한은 변화하고 있는가?

변하지 않는 것은 죽지말고 살아나 강성대국을 건설해 조국통일을 완수하자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경제적인 현실적 요구에 따라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몇 달만에 가도 차이가 보일 정도다.

가장 최근인 작년 11월에 갔을 때는 경제사정이 안 좋았다. 조총련 헌금도 형식적 수준이고 미사일이나 무기 수출이 막혀있고 남쪽 기업의 기부도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지금은 핵문제로 국제사회의 봉쇄와 압박이 가해져 살길이 없다.

그래서 남북경협 쪽으로 민족공조를 들고 나오면서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 실익을 챙기면서 명분도 챙기다보니 앞뒤가 안 맞고 억지만 부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속내는 남쪽으로부터 도움 받기를 원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전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북쪽은 언제든지 전쟁할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춰진 체제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주거나 여건을 조성하면 다른 길로 갈 길이 없다. 앉아서 죽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항거하겠다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다 죽고 산업기반이 파괴되고 설령 통일이 되더라도 의미가 없다.

김치관기자

[출처; 통일뉴스 200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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