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4선 의원의 진검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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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3-10-02 00:00 조회1,5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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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주인되는 정치를 일군다"
재벌 4선 의원과 벌이는 진검승부
[4.15총선기획1] 울산 동구-민주노동당 김창현 위원장
편집자주 = 민중의소리는 내년 4.15 총선을 준비하며 현장에서 발로 뛰고 있는 진보,개혁성향의 정치신인들을 발굴해 연속보도를 합니다. 그 첫번째로 울산동구에서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김창현 지구당위원장을 만났습니다.

이런 울산이 최고로 자랑하는 것은 현대 그룹이 아닌 조직력과 투쟁력에서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현대의 노동자들이다. 이곳 노동자들은 노동자 출신 구청장과 시,구의원을 만들어내며 스스로가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고 있다.
"울산은 변화가 있고 살아있는 곳입니다. 노동자의 폭발적인 힘이 느껴지죠. 정치의식이 깨어있는 진보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여년간 이곳 울산에서 노동자,서민을 위한 정치를 일궈온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장이 말하는 울산은 변혁운동의 중심지다.
노동자들의 희망과 눈물로 현대 아성에 도전한다
그러나 변혁운동의 중심지 울산에서도 아직 현실정치의 벽은 높다. 현대그룹의 정몽준 의원이 4선의원으로 16년째 변함없는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 동구지역만해도 현대 중공업이 있고, 현대 재단의 초,중,고가 6개가 있고, 울산 과학대, 울산대병원등 다른 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현대와 연관이 있다.
현대계열에 다닌다고 현대를 찍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다. 그러나 서울과 달리 울산은 그렇게 쉽게 현대라는 존재를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민주노총출신 후보들이 목소리 높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외치고 노동자들과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더라도 결국 개표를 하고 나면 언제나 현대에서 미는(?) 사람이 당선되곤 하는게 이 지역의 정치다. 선거는 조직력이라고 하지 않던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달리 있겠는가.
현대중공업의 관리자 수천명과 그 부인이 선거운동원이 되고. 울산대 병원의 의사들도 적극적인 운동원이 된다. 또 현대 재단 학교 선생님들의 숫자와 학부모들, 하청업체 관리자들과 현대 근처의 상가 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현대를 위한 선거운동원이 될 수 밖에 없다. 현대가 지역에서 십년넘게 운영해온 주부대학 졸업생들도 적극적인 정몽준 의원의 선거운동원들이다.
이런 지역 정서에서 정몽준 의원을 상대로 당당히 도전장을 낸 김창현 위원장. 지금 울산은 현대의 아성을 깨고 노동자,서민의 정치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을 것인가.
노동자, 서민을 위한 정당을 표방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첫 원내진출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도시인 울산에서 당선되야 한다는 상징성에서도 울산 동구의 선거는 모두의 관심사다.
그러나 그 상대가 금력과 조직력을 앞세운 4선의원 정몽준 의원이다. 과연 김창현위원장은 현대재벌 4선 의원의 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조직력으로 따지면 상대가 될 수 없죠. 하지만 전 확신합니다. 노동자들 가슴속에 타고 있는 분노와 진보에 대한 열망, 분노,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눈물과 땀을 모아낸다면 반드시 이깁니다."
그의 눈은 확신으로 넘쳐났다.
"이제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바꿔보자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고 정 의원을 심판해야 한다는 개념도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
단순히 후보예정자의 호기는 아니다.
민주노동당 울산지구당은 작년 여중생투쟁과 함께 올해 815 반전평화투쟁,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과 학교급식에 이르기까지 지역현안과 정치사안을 가지고 매일같이 주민을 만나왔다.
1인시위와 집회, 시장선전전, 출퇴근 선전전, 간담회, 각종 설명회등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여년동안 줄기차게 진행해왔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 울산 동구지구당은 현재 10개동의 분회가 건설되어 있고 현재 자발적인 당원확대 릴레이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매일같이 노동자,서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투쟁해온 김창현 위원장은 울산 최연소 도의원, 최연소 구청장을 지내는 등 지역에서 현실정치의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개척해왔으며 이제 최초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기성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민조직을 일궈온 김창현 위원장의 정치활동을 점검해봤다.
지역주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일궈온 지난 10년
87년 노동자 대투쟁.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그 시기에 김 위원장은 <남노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힘을 느낀 김 위원장은 이듬해 출소후 바로 부모님이 계신 울산으로 내려갔다.
노동운동을 하려했으나 이미 지역에서 전력을 알고 받아주는 공장이 없자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자 교육을 시작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김위원장은 뒤이어 중고생 학원을 차렸다. 학원에 왔던 아이들 모두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 재밌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고 김위원장은 회상한다.
"그때 아이들이 커서 벌써 시집,장가간 아이들도 많죠. 지금도 길 가다보면 "선생님"하고 뛰어오는 애들이 있어요"
당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울산으로 모여들었던 전국의 수백명 활동가들이 대부분 떠나간 뒤에도 그는 꾸준히 지역에 남아 지역민들과 함께 했다. 학원을 중심으로 주부학교, 좋은 아버지 모임, 노래패등을 만들어 지역주민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김 위원장의 울산지역 정치활동은 시작되었다.
"실패도 많고 깨달음도 많았죠.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오다 보니 우리 정치의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과 대중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서로 잘 융합되고 있죠."
이런 주민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90년대 초 그는 "변혁적 지역운동론"을 제기했다.
활동가들은 노동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그는 지역에서 주민들을 주인으로 내세우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0년대 중반, 진보정당 건설운동이 제기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지역에서 주민조직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시작한 주부학교는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가 세운 주민조직은 수도 없이 많다. 주부노래패, 풍물패, 한글교실, 주민회....
주민들과 함께 정치를 일궈온 그가 본격적인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95년 6월 도의원선거를 통해서다.
도의원시절의 김창현위원장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기 전인 95년 첫 지자체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그는 교육문제, 여성문제, 육아,보육복지에서 두각을 보였다. 당시 학생수에 비해 턱없이 학교가 부족했던 울산에 고등학교를 설립했고 비평준화지역이던 울산을 평준화시켰다.
현재는 어디에나 있는 여성발전위원회도 당시 김위원장이 전국에서 최초로 제기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크고 작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지역민들에게 그를 강하게 인식시킨 것은 그가 도의원중 유일하게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의원이라는 점이다.
"선거때 공약이었어요.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가는 거니까 세금을 헛되이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죠. 실제로 나중에 임기를 마치고 보니 94명 의원중 저 혼자만 안다녀왔더라고요. 지금도 그 점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그의 도의회 활동은 지역민에게 진보정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기회였다.
도의원으로서 지역을 바꾸는데 한계를 많이 느꼈던 그는 초대 민선 구청장 선거에 동구청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 구청장이 재선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른바 "정몽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창현 선본의 새로운 선거운동은 지역민심을 움직였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상해보라. 백여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선거는 단순히 표가 아니라 대중을 의식화, 조직화 하는 공간입니다. 또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활동을 총화하는 자리고 중요한 정치 투쟁의 자리입니다. 상대는 엄청난 금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해야합니다. 민중들이 아파하는 곳을 투쟁으로 끌어내서 정치적 지지로 바꿔내는 것이죠"
공약을 남발하고 돈봉투를 쥐어주던 기성정치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선거운동을 펼치는 김창현 선본 운동원들의 헌신적인 모습과 노동자를 향한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기 전이었던 그때 당의 도움도 없었고, 누구처럼 갑부의 아들도 아닌 김창현 후보에게 백여명의 선거운동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일상에서 만들어진 거죠. 선거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활동은 일상이니까요. 그때 제일 열심히 도와주셨던 분들이 환경미화원분들이셨습니다. 청소하면서 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그 모습에 유권자들이 감동했죠. 환경미화원분들이 노조 만들 때 함께 먹고 자면서 힘을 쏟았던 일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거죠."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자기 신명으로 뛰어다닌 선거운동원은 노동자, 서민들과 일상을 함께 해온 김 위원장의 정치 철학이 선거라는 장에서 표출된 결과물이다.
주부들과 함께 교육문제, 지역현안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같이 놀고 웃고,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는 같이 뒹굴면서 함께하는 그런 일상속에서 그에 대한 신뢰와 진보정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구청장으로 당선된 김위원장은 새로운 정치를 채 펼쳐보기도 전에 영어의 몸이 되었다. 일명 <동창회>사건이라고 하는 <영남위 조직사건>으로 구속된 것이다.
주민들의 믿음이 보여준 재보궐 선거의 신기록
96년.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전국을 휩쓸던 당시 현대는 만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겠다고 선포했다. 당시 동구청장이었던 김위원장은 당연스레 노동자들의 투쟁대열에 합류했다.
"노동자에게 있어 해고는 사형선고다. 만명이나 사형선고를 내리는 정권은 학살정권이다"며 현대자동차 정문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이틀만에 김 위원장은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국정원에서 10년넘게 준비해온 조직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이 사건은 정황상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막기위한 수단으로 해석된다. 노동자의 힘으로 당선된 최초의 민선 구청장이 노동자들 편에 선 행정을 펼치는 것이 불안했을 터이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 사건은 오히려 주민들의 투쟁에 불을 지피는 결과를 낳았다. 주민들은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시작했고 재보궐선거에 나온 김 위원장의 부인 이영순씨는 50%에 가까운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 재보궐 선거도 한국 정치사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구청장 석방투쟁을 대중적으로 벌이고 있었지만 실형을 언도받은 상태에서 문제는 재보궐선거에 누구를 후보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역내 여러 논란을 잠재운 것은 김위원장의 편지 한 통.
"단순히 김창현의 아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투쟁을 이미 일년동안 선봉에 서서 해왔던 사람이 제 부인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의 상징적인 인물이고 투쟁에 선봉에 서있었던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당선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아내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편지를 동지들에게 보냈었죠"
김 위원장의 선택은 옳았다. 한번도 대중앞에 서본적이 없던 이영순씨는 남편에 대한 의리와 동지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재보궐 선거 당일 투표소 앞에서는 투표를 하기 위해 늘어선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과 이 날 선거는 보통 30%를 넘지 않는다는 재보궐선거 투표율의 관성을 깨고 60%가 넘는 투표율을 보였으며, 이영순씨는 김창현 위원장의 득표율보다 10%나 더 받은 50%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쾌거를 낳았다.
당시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 위원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뛰어준 부인과 지지를 보내준 지역민들에게 뜨거운 눈물로 답했다.
이 선거는 단순히 이영순후보의 승리만은 아니였다. 당시 구청장의 구속에 분노한 주민들은 자발적인 자원봉사단을 꾸려 선거운동을 했으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국가보안법 철폐 서명과 구청장 석방 서명을 받았다.
동구 유권자 12만명중 5만명이 구청장 석방 서명에 참여했다. 동구지역에 있는 모든 집들을 두 번 이상 방문할 정도 꼼꼼히 방문, 서명을 받고 거리실천을 하던 1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진보진영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당선후 자신없어 하던 부인에게 위원장은 민중을 생각하라는 말로 격려했다.
"행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단체장은 철학과 소신이다. 행정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네 주변에 널려있다. 구청직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판단하면 된다. 단 당신은 언제나 민중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면 된다. 걱정말고 열심히 해라"
그런 남편의 충고를 잊지 않은 이영순씨는 임기내내 여성특유의 섬세함으로 새로운 동구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영순씨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나는 황처가(?)

"어렵고 힘들 때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아내였어요. 감옥살이 세 번에, 군대 징집 3년, 수배가 세 번이었으니 사실 결혼 생활 17년중에 10년은 떨어져 살았던 거죠. 그런데도 아내는 한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늘 "당당해라. 믿고 존경한다"는 말을 해줬어요."
때는 거슬러 올라가 81년, 두 사람은 고려대 문과대 인문계열 동창생으로 만났다. 같은 학과 여학생중 한 명이었던 이영순씨가 운명의 상대로 다가온 것은 83년 어느날이었다.
"3학년때 수배중이었을 때 도망다니던 중 우연히 둘이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서로 친하긴 했지만 단 둘이 만난 적은 없었죠. 젊은 청춘이 단 둘이 마주 앉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됐죠. 수배기간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러면서 보니 다르게 보이는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귀자고 프로포즈를 했죠"
학생운동을 하던 두사람은 데이트 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잠깐씩 짬을 내서 하는 데이트의 맛이 더 감칠 났다고 김 위원장은 회상했다.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을 했던 부부는 부모가 살고 있는 울산으로 내려와 울산지역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20년이 넘도록 부부는 동지로 살아왔다.
아내를 볼 때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에게 아내가 가장 큰 감동의 물결을 전해 준 것은 <소위 영남위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다.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죄로 기소되었던 터라 다들 최소 10년형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때 그를 찾아온 아내는 남들처럼 눈물바람을 하지는 않았다.
"진짜 눈물 한방울 안보이드라구요. 당당하고 힘차게 투쟁하라면서 자기도 밖에서 투쟁할거라더군요. 민해는 잘 키우겠다고.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기다릴테니 걱정말고 열심히 투쟁하라는 말을 하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항상 옆에서 든든한 동지가 되어준 부인에게 언제나 황송한 마음이 든다는 김 위원장.
가족이야기가 나오자 김 위원장도 별수 없는 한국남성이 된다. 부인자랑은 딸 자랑으로 이어진다. 김 위원장 부부사이에는 민해라는 고운 이름을 가진 고1 딸이 있다.
"딸이 커가니까 더 남녀평등을 주장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제 딸이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거든요.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사회에서 불평등해진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거 같아요. 그래서 더 남녀평등을 생각하게 되죠."
지금은 수배도 구속도 아니지만 주민활동으로 서로 바쁜 부부는 가끔 지역행사가 있을 때 얼굴을 마주한다고 한다.
딸과 함께 수다떠는 것을 좋아하는 김 위원장은 올해 고등학교로 진학한 딸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몹시 서운하다. 서울에 올라올 때면 새벽 늦게까지 딸과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김 위원장은 천상 좋은 아빠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이다" - 김창현의 정치 철학
"저 관광버스 춤 잘 춥니다."
인기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온 황당한 답이다.
김 위원장은 논쟁에 붙어서는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을 정도로 논쟁에 강한 정치인이다. 누구보다도 냉철한 사고와 논쟁에 강한 김 위원장과 관광버스춤은 사실 잘 어울려보이지 않는다.
지역에서 10년 넘게 정치를 해오면서 그가 깨달은 원칙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우리 사상과 이념을 숨겨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철저히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의 정치활동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는 주부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할 때도 비디오자료를 통해 남편들이 현장에서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 나라 노동현실이 어떤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이들에게도 우선적으로 노동자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육을 한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이런 어려운 구호보다 그는 자연스러운 생활언어로 다가간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유독 아줌마부대(?)가 많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입니다. 나는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큰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합니다. 미국에 짓눌리고 예속되어 있는 현실, 노동자 민중들이 신음하는 모습,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정치입니다. 난 그걸 하고 싶다고 주민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들도 모두 정치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렇게 그는 주민들을 정치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 왔다. 최근 그가 열심히 하는 정치활동은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과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이다.
하루 다섯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 출근 선전, 주민 설명회, 시장선전전등 하루내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한다. 학교급식 서명에 지장을 찍은 손으로 악수를 청해오거나 싸인을 요청해올 때 기분이 좋다는 그의 정치는 책상머리가 아니라 거리에, 주민들의 일상속에 자리잡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그가 특별한 준비를 따로 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한국의 주권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학교급식 조례제정운동을 계속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김창현 위원장은 원내진출을 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다.
4년전과 지금은 매우 다르다. 민주노동당이 건설되었고, 당을 중심으로 지역 노동자와 진보세력들이 결집되어 있다. 또한 김창현 위원장이 10여년동안 다져온 지역 주민조직들은 그 주변에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실제 이 지역민들은 정몽준 의원과 김창현 위원장의 박빙승부라고 점치고 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는 후보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으며 가능성이 높은 쪽과 연합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읽혀지고 있다.
실제 정몽준 의원측에서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선거때도 지역에 잘 가지 않았던 정 의원은 요즘 울산지역에서 살다시피하며 경로잔치를 벌이거나 시장방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요즘엔 자주 보여요. 얼마전에는 주부대학 사람들도 호텔에 모여서 식사를 했어요. 뭐 우리가 돈을 내긴 했지만 먹은 밥값에 비해선 턱도 없죠. 뭐 뻔하잖아요"
이름을 밝히긴 어렵다는 주부대학 출신 주부는 정몽준 의원측이 벌써부터 여러 바닥조직을 바쁘게 점검하고 있다고 조심스레 전했다.
두사람 모두 인지도는 100%에 가깝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직력의 차이가 당락을 결정한다.
올해 초 조사에 따르면 정몽준 의원이 김창현 위원장보다 두배이상의 득표가 예상되었으나 얼마전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이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정 의원측 관계자는 전했다.
아직 후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25%정도의 사람들이 어느 후보쪽으로 마음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최종 결정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지도가 하락하고 있는 정 의원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지지도가 상승하고 있는 김창현 위원장. 더군다나 지난 대선당시 정 의원의 실책은 지역내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당원배가 릴레이운동으로 당원들의 기세가 높아지고 있는 민주노동당 울산동구지구당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만들고 있다.
조바심이 난 기성정치와 희망과 확신에 찬 젊은 정치인. 승리의 결과는 이미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정미기자
[출처; 민중의 소리 9-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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