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대담]송교수 부인 정정희씨</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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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10-19 00:00 조회2,01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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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그는 누구인가. 부인 정정희씨는 "남편은 책 보고 연구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를 통해 송교수와 그의 가정얘기를 들어본다. 이 자료는 여성신문 747호(2003-10-10)에 실린 기사를 오마이뉴스 11일자가 보도한 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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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책 보고 연구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
[인터뷰] 송 교수 부인 정정희씨의 "37년만에 돌아온 조국"
![han_134203_1[154111].jpg](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han_134203_1%5B154111%5D.jpg)
[사진]▲ 지난 2일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와 그의 부인 정정희씨. 정씨가 송 교수를 부축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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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박광수 여성신문 편집국장. 정리=임인숙 기자
본지(여성신문) 박광수 편집국장이 송두율 교수의 부인인 정정희씨를 만났다.
정정희씨는 현재 송교수에 대해서 국정원의 조사에 이어 검찰수사가 한창 진행중인 까닭에 인터뷰를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7년간의 타국생활에 대해, 그리고 멀리 돌아온 귀국 소감에 대해 차분하게 얘기를 들려줬다.
정씨는 본인이 갖고 있는 현대사에 대한 생각과 남편인 송두율 교수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현재 송두율 교수의 난감한 상황 때문에 본지에 그 내용을 전면 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씨의 얘기가 아무런 곡해 없이 본지에 실릴 때가 오기만을 기대한다.
사진]송두율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는 남편때문에 독일대학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되는 입장인데 그만 송교수 사건때문에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다.
- 이렇게 어려우리라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로지 공부만 할 사람이 이런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이 든다. 귀국하기 몇 주전부터 한국 취재진들의 관심으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고, 한국에 와서는 시차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휴식을 거의 취하지 못하고 있다."
- 가족이 모두 함께 입국했다.
"우리들만큼 아이들도 한국에 많이 오고 싶어했다. 아이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수차례 아버지가 한국을 갈 수 있을 것 같다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을 봐왔다. 이삼년 전에 남편이 한국의 어떤 단체로부터 초청 받게 됐을 때 둘째 아이는 자기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를 배우겠다고 일년 정도로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았다.
그런데 또 한국의 초청이 무산됐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보면 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물론 우리가 오기 전에 아이들만 올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오고 싶어하는 조국인 것을 알기에 자기들만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그래서 언젠가 함께 가자고 했고, 이번이 그 기회였다."
-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들었다.
"과찬이다. 특별하게 해준 것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책밖에 없으니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게 도와줬다. 아이들도 책보는 것에 쉽게 재미를 들였다. 그래서 여행을 갈라치면 가방 한가득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만 가지고 간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정연하게 사고를 풀어가는 습관이 몸에 배인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 집에서 늘 한국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룬트슐레(우리로 치면 초등학교에 해당한다)에 갔을 때 독일아이들보다 어휘가 풍부하다는 말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아이들도 본인들이 독일 애들보다 독일 점수를 더 잘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고 했다."
- 아이들을 특별하게 키우려고 애를 썼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았다. 70년대 독일에 오신 많은 분들이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이 몹시 높아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까지 사립학교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남들하고 똑같이 평범한 학교에 다니기를 바랐다. 어릴 때 엘리트의식을 생기게 하는 것보다 평범한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독일에서는 7학년에 김나지움이라는 중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큰 아이인 준의 경우에 학교에서 5학년 때 연락이 왔다. 일종의 월반인 셈인데, 처음에 거절을 했다.
그러나 학교교사로부터 준이를 계속 그룬트슐레에 두게되면 학업에 대한 재미가 떨어질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고, 조금 특별한 과정을 밟게 됐다. 뒤이어서 둘째인 린이도 학교에서 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독일 땅에 적응을 하던 70년대에는 검은머리를 가지고 있는 동양인이 몹시 적었을 때인데, 우리 두 아들은 공부를 좀 잘 한다는 이유로 얼굴 빛 다른 사회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내가 손이 모자라 떨어진 바지를 그저 잘라서 입혀보내면 다른 아이의 엄마가 그 옷을 어디서 샀냐고 자기 아이도 입고 싶어한다고 말해줘서 많이 웃었던 기억도 있다."
- 아이들 교육문제를 송교수와 많이 의논하는 편인가?
"(웃음) 송교수는 많이 바빴다. 그리고 많은 문제를 주변 선후배와 의논하려고 했고, 자연히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연년생인 아이 둘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는데, 웬 할머니가 아이들한테 사탕을 사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애 과부가 되었냐고 물었다. 과부 아니라고 했더니, 산책길에서 자주 나와 아이들을 봤는데 아버지란 사람을 한번도 못보셨다고. 그 정도로 아이들을 챙기고 가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었다."
- 무심한 남편이라고 보면 되나?
"(웃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 함께 있는 시간에 나는 운전담당이고 남편은 요리담당이다. 나는 혼자 유학하는 시절에도 요리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남편은 열심히 한국음식을 해 먹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곧잘 요리를 하면서 "요리에는 판타지가 필요하다"면서 요즘으로 치면 퓨전요리 같은 것을 잘 했다. 브로콜리를 고춧가루를 넣고 무치기도 하고 초밥도 잘 만든다."
- 아버지에 대한 조사가 한창 진행될 때 두 아들이 모두 미국으로 출국했다.
"큰 아이는 막스프랑크 연구소에서 일을 했고 이번 가을에 미국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게 된다. 둘째는 독일과 미국의 소아과의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고, 역시 이번 가을부터 미국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그 일정 때문에 둘 다 미국으로 서둘러 가게 됐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 가까이서 지켜본 송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송교수를 알게 된 것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였다. 나는 도서관학을 전공했고 대학도서관에서 실습 중이었다. 송교수는 내가 다니던 그 대학에서 가장 책을 열심히 빌려 읽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한국학생이 베를린 전체에 7명 정도 밖에 없을 때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책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책을 보고 연구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이다."
- 오랜 타향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한국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밖에 못해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말로 전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우리 역시 어떻게 보면 그리움만 있지 한국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한국 책들을 구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친화력은 대단했다. 둘째가 다섯 살 때쯤 공원인가에서 길을 잃었는데, "5세 한국아이"가 엄마를 찾는다고 방송이 나왔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도 본인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들이 동화책에서 "떡"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며칠을 떡을 사달라고 졸랐다. 미국 만해도 어렵지 않게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지만, 30년 전 독일은 그렇지 못했다. 김치 맛을 제대로 내는 한국배추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거의 80년대가 되어서니까. 하도 졸라서 궁여지책으로 일본 모찌를 사줬는데, "내가 책에서 본 것은 이 맛이 아니야"라고 했다. 한번도 먹어보지도 못한 떡 맛을 자기들이 어떻게 알겠냐마는….
그래서 한국요리 하려고 애 많이 썼다. 미국 동생네 집에 갔을 때 쑥이 있길래 한뿌리 얻어다가 발코니에 심었다. 조금씩 자랄 때마다 잘라서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가 명절 때 떡을 만들었다. 물론 기후가 맞지 않으니 한 2년 있다가 죽어버렸다."
- 귀국하고 벌써 보름이 훨씬 지났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드는가?
"한국 정서를 익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30여년간 고국 한국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먼 이국 땅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며 다른 나라 음식으로 몸을 채우며 살았음을, 지금 이순간 절절하게 느낀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말로 된 단어보다 독일말로 된 단어가 툭 튀어나올 때의 당혹감이 이런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통감한다. 내가 독일에서 느꼈던 것은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완전히 다르게 느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차이를 없애려고 애를 많이 쓴다. 가장 어렵다."
- 10월 중순에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들었다.
"10월 13일부터 대학으로 출근해야한다. 그러나 남편을 그냥두고 혼자 갈 수는 없다. 대학에 이메일을 보내 설명을 했는데 아직 답을 받지는 못했다. 조만간 전화를 걸어 상황 설명을 하고 휴가를 받아야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후기
늦은 시간 조그만 식당에서 만난 그녀는 마실나온 이웃집 언니 같았다. 이 시국에 이래도 되나 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그저 남편을 깊이 신뢰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기자회견에서 피곤에 지쳐 걸음마저 휘청이던 송 교수를 단단하게 지키는 누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족을, 남편을 지켜내던 강인한 여성 한 사람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서적으로 독일여성에 가까웠다. 옆집 여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애를 써야 이해를 했다. 왜 송교수에 대한 조사가 오래가는지 왜 자신들이 이야기가 한국 전체를 들썩일 정도로 크게 다루어지는지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37년간의 시간이 차이 그것은 꼭 그만큼의 감각의 차이로 돌아왔다.
본 기사는 여성신문 747호(2003-10-10)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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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송교수 서울대 철학과 동기동창의 눈물겨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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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책 보고 연구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
[인터뷰] 송 교수 부인 정정희씨의 "37년만에 돌아온 조국"
![han_134203_1[154111].jpg](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han_134203_1%5B154111%5D.jpg)
[사진]▲ 지난 2일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와 그의 부인 정정희씨. 정씨가 송 교수를 부축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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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박광수 여성신문 편집국장. 정리=임인숙 기자
본지(여성신문) 박광수 편집국장이 송두율 교수의 부인인 정정희씨를 만났다.
정정희씨는 현재 송교수에 대해서 국정원의 조사에 이어 검찰수사가 한창 진행중인 까닭에 인터뷰를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7년간의 타국생활에 대해, 그리고 멀리 돌아온 귀국 소감에 대해 차분하게 얘기를 들려줬다.
정씨는 본인이 갖고 있는 현대사에 대한 생각과 남편인 송두율 교수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현재 송두율 교수의 난감한 상황 때문에 본지에 그 내용을 전면 싣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씨의 얘기가 아무런 곡해 없이 본지에 실릴 때가 오기만을 기대한다.
![han_134203_1[154112].jpg](http://image.ohmynews.com/down/images/1/han_134203_1%5B154112%5D.jpg)
- 이렇게 어려우리라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로지 공부만 할 사람이 이런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이 든다. 귀국하기 몇 주전부터 한국 취재진들의 관심으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고, 한국에 와서는 시차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휴식을 거의 취하지 못하고 있다."
- 가족이 모두 함께 입국했다.
"우리들만큼 아이들도 한국에 많이 오고 싶어했다. 아이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수차례 아버지가 한국을 갈 수 있을 것 같다가 번번이 좌절되는 것을 봐왔다. 이삼년 전에 남편이 한국의 어떤 단체로부터 초청 받게 됐을 때 둘째 아이는 자기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를 배우겠다고 일년 정도로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았다.
그런데 또 한국의 초청이 무산됐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보면 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물론 우리가 오기 전에 아이들만 올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오고 싶어하는 조국인 것을 알기에 자기들만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그래서 언젠가 함께 가자고 했고, 이번이 그 기회였다."
-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들었다.
"과찬이다. 특별하게 해준 것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책밖에 없으니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게 도와줬다. 아이들도 책보는 것에 쉽게 재미를 들였다. 그래서 여행을 갈라치면 가방 한가득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만 가지고 간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정연하게 사고를 풀어가는 습관이 몸에 배인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 집에서 늘 한국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룬트슐레(우리로 치면 초등학교에 해당한다)에 갔을 때 독일아이들보다 어휘가 풍부하다는 말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아이들도 본인들이 독일 애들보다 독일 점수를 더 잘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고 했다."
- 아이들을 특별하게 키우려고 애를 썼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았다. 70년대 독일에 오신 많은 분들이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이 몹시 높아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까지 사립학교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남들하고 똑같이 평범한 학교에 다니기를 바랐다. 어릴 때 엘리트의식을 생기게 하는 것보다 평범한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독일에서는 7학년에 김나지움이라는 중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큰 아이인 준의 경우에 학교에서 5학년 때 연락이 왔다. 일종의 월반인 셈인데, 처음에 거절을 했다.
그러나 학교교사로부터 준이를 계속 그룬트슐레에 두게되면 학업에 대한 재미가 떨어질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고, 조금 특별한 과정을 밟게 됐다. 뒤이어서 둘째인 린이도 학교에서 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독일 땅에 적응을 하던 70년대에는 검은머리를 가지고 있는 동양인이 몹시 적었을 때인데, 우리 두 아들은 공부를 좀 잘 한다는 이유로 얼굴 빛 다른 사회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내가 손이 모자라 떨어진 바지를 그저 잘라서 입혀보내면 다른 아이의 엄마가 그 옷을 어디서 샀냐고 자기 아이도 입고 싶어한다고 말해줘서 많이 웃었던 기억도 있다."
- 아이들 교육문제를 송교수와 많이 의논하는 편인가?
"(웃음) 송교수는 많이 바빴다. 그리고 많은 문제를 주변 선후배와 의논하려고 했고, 자연히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연년생인 아이 둘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는데, 웬 할머니가 아이들한테 사탕을 사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애 과부가 되었냐고 물었다. 과부 아니라고 했더니, 산책길에서 자주 나와 아이들을 봤는데 아버지란 사람을 한번도 못보셨다고. 그 정도로 아이들을 챙기고 가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었다."
- 무심한 남편이라고 보면 되나?
"(웃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면 함께 있는 시간에 나는 운전담당이고 남편은 요리담당이다. 나는 혼자 유학하는 시절에도 요리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남편은 열심히 한국음식을 해 먹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도 곧잘 요리를 하면서 "요리에는 판타지가 필요하다"면서 요즘으로 치면 퓨전요리 같은 것을 잘 했다. 브로콜리를 고춧가루를 넣고 무치기도 하고 초밥도 잘 만든다."
- 아버지에 대한 조사가 한창 진행될 때 두 아들이 모두 미국으로 출국했다.
"큰 아이는 막스프랑크 연구소에서 일을 했고 이번 가을에 미국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게 된다. 둘째는 독일과 미국의 소아과의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고, 역시 이번 가을부터 미국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그 일정 때문에 둘 다 미국으로 서둘러 가게 됐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 가까이서 지켜본 송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송교수를 알게 된 것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였다. 나는 도서관학을 전공했고 대학도서관에서 실습 중이었다. 송교수는 내가 다니던 그 대학에서 가장 책을 열심히 빌려 읽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한국학생이 베를린 전체에 7명 정도 밖에 없을 때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책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책을 보고 연구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이다."
- 오랜 타향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한국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밖에 못해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말로 전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우리 역시 어떻게 보면 그리움만 있지 한국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한국 책들을 구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친화력은 대단했다. 둘째가 다섯 살 때쯤 공원인가에서 길을 잃었는데, "5세 한국아이"가 엄마를 찾는다고 방송이 나왔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도 본인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들이 동화책에서 "떡"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며칠을 떡을 사달라고 졸랐다. 미국 만해도 어렵지 않게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지만, 30년 전 독일은 그렇지 못했다. 김치 맛을 제대로 내는 한국배추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거의 80년대가 되어서니까. 하도 졸라서 궁여지책으로 일본 모찌를 사줬는데, "내가 책에서 본 것은 이 맛이 아니야"라고 했다. 한번도 먹어보지도 못한 떡 맛을 자기들이 어떻게 알겠냐마는….
그래서 한국요리 하려고 애 많이 썼다. 미국 동생네 집에 갔을 때 쑥이 있길래 한뿌리 얻어다가 발코니에 심었다. 조금씩 자랄 때마다 잘라서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가 명절 때 떡을 만들었다. 물론 기후가 맞지 않으니 한 2년 있다가 죽어버렸다."
- 귀국하고 벌써 보름이 훨씬 지났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드는가?
"한국 정서를 익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30여년간 고국 한국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먼 이국 땅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며 다른 나라 음식으로 몸을 채우며 살았음을, 지금 이순간 절절하게 느낀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말로 된 단어보다 독일말로 된 단어가 툭 튀어나올 때의 당혹감이 이런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통감한다. 내가 독일에서 느꼈던 것은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완전히 다르게 느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차이를 없애려고 애를 많이 쓴다. 가장 어렵다."
- 10월 중순에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들었다.
"10월 13일부터 대학으로 출근해야한다. 그러나 남편을 그냥두고 혼자 갈 수는 없다. 대학에 이메일을 보내 설명을 했는데 아직 답을 받지는 못했다. 조만간 전화를 걸어 상황 설명을 하고 휴가를 받아야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후기
늦은 시간 조그만 식당에서 만난 그녀는 마실나온 이웃집 언니 같았다. 이 시국에 이래도 되나 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그저 남편을 깊이 신뢰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기자회견에서 피곤에 지쳐 걸음마저 휘청이던 송 교수를 단단하게 지키는 누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가족을, 남편을 지켜내던 강인한 여성 한 사람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서적으로 독일여성에 가까웠다. 옆집 여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애를 써야 이해를 했다. 왜 송교수에 대한 조사가 오래가는지 왜 자신들이 이야기가 한국 전체를 들썩일 정도로 크게 다루어지는지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37년간의 시간이 차이 그것은 꼭 그만큼의 감각의 차이로 돌아왔다.
본 기사는 여성신문 747호(2003-10-10)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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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송교수 서울대 철학과 동기동창의 눈물겨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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