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목사의 방북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03-12-06 00:00 조회1,43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조국방문기〉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 조국사람들
나는 25년전부터 후지산기슭에 종교법인 홍원사를 창설하여 일본정신장애자와 같이 살고있다. 2002년 10월에는 《종교법인 후지산홍원사 백두산성령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일본정부의 승인도 받았다. 별칭으로 《장애자궁전》이라고 부르고있다.
내가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리유는 분단된 조국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슬픔과 원한이 있었기때문이다. 그 슬픔과 원한을 풀고 역전시키는 열쇠를 세상에서 버림받는 정신장애자속에서 찾은것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올해 《조선신보》(4월 25일호)에 소개되였기때문에 여기서는 서술하지 않는다.
우리 장애자궁전은 3대헌장을 선포하고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국통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2. 세상의 정신장애자를 위하여 헌신한다.
3. 참다운 종교를 탐구체득하여 조국과 세계인류를 위하여 헌신한다.
이러한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변으로 된것은 2000년 6월 15일에 있었던 공동선언의 발표였다. 나는 조국통일성취를 위해 결사적으로 더욱 헌신하자고 결심하였다. 동시에 북반부 내 조국을 내 품에 꼭 끌어안고싶다는 생각이 불덩이처럼 솟아올랐다.
그리하여 제1차로 2001년 7월에, 제2차로 2002년 4월에 공화국을 방문하여 올해 7월 31일부터 8월 21일까지 3차로 방문하였다.
나는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백두산을 멀리 바라보는 함경북도 연사에서 성장하였다. 백두산의 정기를 마시면서 성장한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느끼고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평양, 함흥, 청진, 무산, 연사에 있는 혈족들과 만나는것이였다. 그속에서도 가장 중요한것은 연사에 있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것이였다.
나는 각지에서 아들, 딸, 조카, 누이동생, 동생, 며느리, 손자, 증손자들을 방문하였다. 한곳에서 2, 3일~4, 5일씩 숙식을 같이하면서 매일 밤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노래도 불렀다.
내가 조국에서 우리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것은 왜 이렇게도 명랑할가, 왜 저렇게도 효도정신이 강할가 하는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담력이 있고 례절이 밝고 희망에 넘쳐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체의식이 강하다는것이다. 그것은 나의 혈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였다.
내가 또 놀란것은 이번에 60명의 혈족들과 만났는데 노래 못하는 사람이 없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노래부르는 소리는 우렁차고 온 몸으로 부르기때문에 나도 81세가 아니라 거꾸로 18세 소년이 된 기분이 되고말았다.
또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것은 평양과 고향 연사의 생활수준을 비교해보아도 똑같다는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련일 북반부 내 조국을 비방중상하는 보도들이 홍수처럼 터져나오고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보도하는것과 내가 직접 조국에서 본 현실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과거의 침략에 대한 반성의 말은 한마디도 없는채 언제까지 악의에 찬 보도를 계속할것인가.
나는 이번에 조국을 방문하여 조국의 현실을 자기 눈으로 보고 통일의 새벽이 멀지 않아 온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리철 홍원사목사)
출처:조선신보 2003/12/02]
나는 25년전부터 후지산기슭에 종교법인 홍원사를 창설하여 일본정신장애자와 같이 살고있다. 2002년 10월에는 《종교법인 후지산홍원사 백두산성령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일본정부의 승인도 받았다. 별칭으로 《장애자궁전》이라고 부르고있다.
내가 이러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리유는 분단된 조국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슬픔과 원한이 있었기때문이다. 그 슬픔과 원한을 풀고 역전시키는 열쇠를 세상에서 버림받는 정신장애자속에서 찾은것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올해 《조선신보》(4월 25일호)에 소개되였기때문에 여기서는 서술하지 않는다.
우리 장애자궁전은 3대헌장을 선포하고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국통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2. 세상의 정신장애자를 위하여 헌신한다.
3. 참다운 종교를 탐구체득하여 조국과 세계인류를 위하여 헌신한다.
이러한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변으로 된것은 2000년 6월 15일에 있었던 공동선언의 발표였다. 나는 조국통일성취를 위해 결사적으로 더욱 헌신하자고 결심하였다. 동시에 북반부 내 조국을 내 품에 꼭 끌어안고싶다는 생각이 불덩이처럼 솟아올랐다.
그리하여 제1차로 2001년 7월에, 제2차로 2002년 4월에 공화국을 방문하여 올해 7월 31일부터 8월 21일까지 3차로 방문하였다.
나는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백두산을 멀리 바라보는 함경북도 연사에서 성장하였다. 백두산의 정기를 마시면서 성장한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느끼고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평양, 함흥, 청진, 무산, 연사에 있는 혈족들과 만나는것이였다. 그속에서도 가장 중요한것은 연사에 있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것이였다.
나는 각지에서 아들, 딸, 조카, 누이동생, 동생, 며느리, 손자, 증손자들을 방문하였다. 한곳에서 2, 3일~4, 5일씩 숙식을 같이하면서 매일 밤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노래도 불렀다.
내가 조국에서 우리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것은 왜 이렇게도 명랑할가, 왜 저렇게도 효도정신이 강할가 하는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담력이 있고 례절이 밝고 희망에 넘쳐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체의식이 강하다는것이다. 그것은 나의 혈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였다.
내가 또 놀란것은 이번에 60명의 혈족들과 만났는데 노래 못하는 사람이 없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노래부르는 소리는 우렁차고 온 몸으로 부르기때문에 나도 81세가 아니라 거꾸로 18세 소년이 된 기분이 되고말았다.
또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것은 평양과 고향 연사의 생활수준을 비교해보아도 똑같다는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련일 북반부 내 조국을 비방중상하는 보도들이 홍수처럼 터져나오고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보도하는것과 내가 직접 조국에서 본 현실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과거의 침략에 대한 반성의 말은 한마디도 없는채 언제까지 악의에 찬 보도를 계속할것인가.
나는 이번에 조국을 방문하여 조국의 현실을 자기 눈으로 보고 통일의 새벽이 멀지 않아 온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리철 홍원사목사)
출처:조선신보 2003/12/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