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신 박순경교수와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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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4-03-03 00:00 조회8,1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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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민족통신 김영희 편집위원]외모로는 마냥 가냘픈 여성의 체구를 가진 박순경교수, 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어 놓은 행동의 통일신학과 민족사상의 체계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일반적인 성의 분별을 단번에 뛰어 넘게 한다.
민족통신은 최근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한 통일연대 학술위원회의 박순경교수와 11일 메트로폴리탄호텔 숙소에서 약 두시간의 인터뷰를 갖고 그의 학문의 역정, 현 통일운동의 문젯점, 민족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들의 역할등에 대해 답을 들었다.
올해 82세의 박교수는 시간차가 심한 장거리여행중임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없이 마치 처음 강단에 선 열정적인 젊은 교수처럼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외모로는 마냥 가냘픈 여성의 체구를 가진 박순경교수, 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어 놓은 행동의 통일신학과 민족사상의 체계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일반적인 성의 분별을 단번에 뛰어 넘게 한다.
민족; 교수님께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만나야 한다는 주제로 평생 신학을 해오시며 분단시대 행동하는 통일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아직 교수님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그 학문의 역정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주십시요.
박 순경 교수; 일제시대 민족독립운동의 선두에서 항일운동을 한 여운형선생, 이동휘선생 모두 기독교인이었지만 사회주의 영향-특히 러시아 사회주의-을 받아 그 차원을 포섭하며 운동을 했습니다. 저는 1944년에 여운형선생을 만나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지요.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자 기독교가 얼마나 반공인지…민족문제에 빛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사회주의와 반목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만나야 한다.”는 말이 내게서 직감적으로 떠 올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떠 올랐는지, 당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숙제를 안고 신학을 시작했어요.
민족문제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존재의 문제도 내가 신학을 시작한 강한 동기였어요. 20대 초에 연세대 간호대 전신인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를 다니며 죽음을 많이 접했고, 특히 1944년, 45년에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시자 허무감에 빠지면서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고민을 깊게 했습니다.
존재문제, 그리고 기독교, 민족, 사회주의는 종합이 되어야한다는 과제를 갖고 1946년에 당시 전문학교였던 감신대에서 신학을 시작했는데, 해도 해도 뭔지 모르겠고 구름 잡는 일을 하는 것 같아(웃음) 서울대 철학과 2학년으로 편입을 했습니다. 철학도 어려워서 56년에 다시 신학으로 돌아와 미국의 에머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거기서 철학강의를 함께 들으며 그때까지 제가 공부한 것이 정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머리대학과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고 두르대학에서 전액장학금을 받아가며 박사학위를 끝나칠 수 있었습니다.
66년에 귀국해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88년에 65세로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88년부터 목원대 대학원의 초빙교수로 있었는데 91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자 해직되었습니다.
한편, 1972년에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아차 내가 늦었구나 그러나 때가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보류해왔던 민족문제를, 막스주의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74년부터 76년 봄까지 안식년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떠나 대학들과 도서관에서 새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학문을 돌이켜 보면 한국신학, 민족신학, 통일신학, 여성신학을 동격으로 놓고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어요.
민족; 통일강연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박 교수; 76년부터 통일문제를 신학적으로 풀어놓기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교회협의회(KNCC)를 비롯한 기독교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반북, 반공이었습니다. 제가 강연을 시작하니까 입 딱 다물고 “박순경 너무 잘 모른다. 순진하다.” 이러는거예요. 그래도 지금 96세이시고 범민련 명예회장, 통일연대 명예대표이신 신창균장로님같으신 분은 제 강연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민족;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에서 통일이 큰 주제로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박 교수; 기독교가 큰 폭으로 달라진 때는 80년대 초반부터 입니다. 한국교회협의회(KNCC)에 통일위가 생기고 저도 소속했어요. 80년대 후반에는 교회여성협위회에 통일위가 생기고 여신학자협의회에는 통일반이 생겼어요, 통일논의가 시작되었는데, 기독교가 분단에 책임지지 않고 반공노선을 걸어온 것을 회개해야한다는 자아비판과 함께 반공, 반북이 희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회개가 철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는 KNCC를 중심으로 한 통일운동의 전성기였어요. 미주의 한인기독교인들이 헬싱키, 비엔나등지에서 북한기독교인들을 만나 대화를 시작한 것도 당시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선의의 경쟁심까지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89-91년에 동구의 사회진영이 붕괴되면서 95년을 전후해 KNCC에 보수주의 진영이 많이 들어왔어요. 개인들은 살아 있었지만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특별한 행사가 별로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미국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이라크를 공격하니까 우리 북한이 당하는 것 같고, 우리 민족도 제가 해온 통일신학도 다 끝장나는 것 같아 위기감, 허무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민족; 남북통일에서 기독교의 제일 큰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기독교에는 아직도 반공 반북의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의식을 청산하지 않는 한 통일에 절대 기여할 수 없습니다. 또 이데올러기의 대립을 넘어 서고 자본주의도 넘어서야 합니다.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물신숭배, 황금만능주의 이런 것이 자본주의의 원리인데 남한교회는 이걸 모르고 미국 자본주의의 품안에 안주해 왔어요. 또 자본주의에 안주할수록 미국에 종속되는 반공, 반북이 되어 분단상황을 굳혀 왔고요. 이러니까 또 반민족적이 되고요. 자본주의, 반민족은 의로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적 구원과 상반됩니다.
다행히 민족통일 의지가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교회지도자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이 남한교회 개혁의 누룩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또 보수든
진보든 북한 선교계획하면서 북에 경제지원도 하고 있고, 남의 감리교가 경비를 대어 북의 그리스도연맹에 신학원을 세우고 있는데 이런 지원사업들은 남한교회에 잠재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민족; 북을 밤문했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북한은 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며 주체적으로 평등사회를 이룬 나라, 물질적으로 결코 풍부하지 못해도 자본주의의 사회악이 없는 나라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북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가 임한 나라라는 평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평을 들으면 신이 없어도 잘 살아가는 나라에 구태어 선교을 해야 하는가하는 의문도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개인보다 민족, 통일이 우선이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주체사상으로 혁명을 이룬 북한에 왜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인데, 저는 아무리 의로운 사회도 하나님이라는 긍국적인 빛, 신앙이 없이는 인간성의 성취를 달성할 수 없다고 봅니다.
주체사상 혹은 민족의 영원성, 지도자의 영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토대는 의로운 하나님으로 부터 시간이 역사사회에 주어졌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아무리 사상적, 민족적으로 정의를 실현한다해도 역사사회는 상대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의로운 사회가 영원히 보장된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정의는 긍국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북에 가면 말끝마다 김정일장군님 은총으로…이러니까 다변화된 개인주의사회의 남한 종교인들은 우상화라고 비난하는데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인민들의 단결을 위해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강대국에 둘러쌓인 북에 강력한 구심점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민족; 현단계 통일운동에서 외적, 내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극복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박 교수;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의 경제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제교류를 하면서 남이 도와야 하고, 그러러면 철도도 도로도 뚫어야 하는데 미국이 핵문제랑 들고나와 방해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남이 미국을 이기고 독자적으로 북과 교류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1년간 해놓은게 없어요.
내적으로는 남에서 민족대단결이 않된다는 점입니다. 6.15, 8.15, 10.3을 주축으로 통일운동이 확산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남의 의식구조에는 차이가 많아서 기독교를 비롯해서 반공,반북 보수세력이 아직도 강합니다. 미선, 효순이 추모시위를 하는 시청앞 광장에서 기독교 보수세력이 성조기를 들고 대규모의 친미반북시위를 하는 실정입니다. 남남통일이 되어야 남북통일도 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해요.
민족; 해외동포들이 남북통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박 교수; 민족대단결을 위해 두가지의 큰 구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방안’이고 또 하나는 ‘민족사회의 폭’입니다.
‘통일방안’으로는 북에서 나온 1국가 2체제의 연방제가 있고 남에서 나온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교류하자는 연합체가 있는데 양쪽이 서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연방제와 연합체를 절충하는 낮은 단계의 통일방안이 나왔습니다. 남의 통일운동권도 타협하여 이 절충안으로 집중하고 있지요.
6.15공동선언에도 언급됐듯, 민족대단결의 폭은 남북을 주축으로 한 해외동포들의 참여까지 포함합니다. 남북이 해외동포를 끌어 안아야 우리 국력이 더커지고, 곧 1억을 바라보는 우리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세계적 대공동체를 이룰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주동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북남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면서 다른 해외동포들에게 민족통일의식을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주요역할을 미주동포들이 담당해서 세계에 흩어진 동포들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묶으며 폭넓고 원만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사는 도시인 로스엔젤레스 동포들이 경제기반도 있고 지리적으로 남북교류에도 좋으니 그 중심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죽기 전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미주동포가 중국의 조선족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가 끌어 안아야 우리 동포가 사는 땅이 우리 땅, 하나님땅이 됩니다. (미국땅도 앵글로 색슨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입니다.) 중국은 요즘 민족정책에 의해 고구려사를 왜곡시켜 자신들의 변방사로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만주땅은 원래 고구려땅이었죠. 옛역사에서 잃어버린 만주땅에 사는 조선족과 정치, 경제, 문화교류를 하면서 미주동포들이 서로의 민족동질성을 찾기 바랍니다.
미주동포들을 보고 싶어 10년만에 다시 미국에 왔어요. 마지막 말일지도 몰라-하나님이 모두 결정하는 일이자만- 미주동포들에게 민족대단결을 역설하고 싶었지요. 통일신학강의는 취소되어 아쉬웠지만 대신 동포들을 만나 많은 격려를 받고 즐거웠습니다.
민족; 9.11이후 전세계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이 일어나며 미국의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인류사회의 화두는 모든 나라가 평등한 자주권을 가졌다…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미국에 대항하는 인류사회의 이런 흐름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신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떠들지는 않지만 근래의 세계적인 항거운동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징조라고 봅니다. 너의 모습, 나의 모습 모두 다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예정대로 의로운 인간성을 성취해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불평등한 역사를 그냥 그대로 진행되게 하지 않습니다.
민족; 요즘 일과를 소개해 주세요.
박 교수; 아침 5시쯤 일어나서 간단한 침대운동을 하고 여름같은 여름에는 6시 반쯤, 요즘같은 겨울에는 7시쯤 내가 사는 아파트 뒤에 있는 관악산 남쪽에 올라가 두시간쯤 보냅니다. 제가 본래부터 꽃, 나무, 바위같은 자연을 좋아했어요.
요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이라는 연재글을 쓰고 있는데, 주체사상등 북쪽재료를 많이 이용합니다. 지나해 허리가 부러졌는데 수술하고 많이 나았어요. 집회와 시위에도 가끔 나가고, 효순 미선 추모집회에 나가서 결의문도 낭독했습니다.
민족; 부디 건강하셔서 민족과 신앙을 위해 청년같은 활동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사진은 방미중인 박순경 교수(가운데), 김애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필자가 잠시 기념촬영한 장면
*박 순경 박사의 논문, <<통일신학의 회고와 전망>> 보기는 여기를 짤각해 열람하세요

올해 82세의 박교수는 시간차가 심한 장거리여행중임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없이 마치 처음 강단에 선 열정적인 젊은 교수처럼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외모로는 마냥 가냘픈 여성의 체구를 가진 박순경교수, 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어 놓은 행동의 통일신학과 민족사상의 체계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일반적인 성의 분별을 단번에 뛰어 넘게 한다.
민족; 교수님께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만나야 한다는 주제로 평생 신학을 해오시며 분단시대 행동하는 통일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아직 교수님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그 학문의 역정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주십시요.
박 순경 교수; 일제시대 민족독립운동의 선두에서 항일운동을 한 여운형선생, 이동휘선생 모두 기독교인이었지만 사회주의 영향-특히 러시아 사회주의-을 받아 그 차원을 포섭하며 운동을 했습니다. 저는 1944년에 여운형선생을 만나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지요.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자 기독교가 얼마나 반공인지…민족문제에 빛이 되어야 할 기독교가 사회주의와 반목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와 만나야 한다.”는 말이 내게서 직감적으로 떠 올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떠 올랐는지, 당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숙제를 안고 신학을 시작했어요.
민족문제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존재의 문제도 내가 신학을 시작한 강한 동기였어요. 20대 초에 연세대 간호대 전신인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를 다니며 죽음을 많이 접했고, 특히 1944년, 45년에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시자 허무감에 빠지면서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고민을 깊게 했습니다.
존재문제, 그리고 기독교, 민족, 사회주의는 종합이 되어야한다는 과제를 갖고 1946년에 당시 전문학교였던 감신대에서 신학을 시작했는데, 해도 해도 뭔지 모르겠고 구름 잡는 일을 하는 것 같아(웃음) 서울대 철학과 2학년으로 편입을 했습니다. 철학도 어려워서 56년에 다시 신학으로 돌아와 미국의 에머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거기서 철학강의를 함께 들으며 그때까지 제가 공부한 것이 정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머리대학과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고 두르대학에서 전액장학금을 받아가며 박사학위를 끝나칠 수 있었습니다.
66년에 귀국해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88년에 65세로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88년부터 목원대 대학원의 초빙교수로 있었는데 91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자 해직되었습니다.
한편, 1972년에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아차 내가 늦었구나 그러나 때가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보류해왔던 민족문제를, 막스주의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74년부터 76년 봄까지 안식년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떠나 대학들과 도서관에서 새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학문을 돌이켜 보면 한국신학, 민족신학, 통일신학, 여성신학을 동격으로 놓고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어요.
민족; 통일강연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박 교수; 76년부터 통일문제를 신학적으로 풀어놓기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교회협의회(KNCC)를 비롯한 기독교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반북, 반공이었습니다. 제가 강연을 시작하니까 입 딱 다물고 “박순경 너무 잘 모른다. 순진하다.” 이러는거예요. 그래도 지금 96세이시고 범민련 명예회장, 통일연대 명예대표이신 신창균장로님같으신 분은 제 강연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민족;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에서 통일이 큰 주제로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박 교수; 기독교가 큰 폭으로 달라진 때는 80년대 초반부터 입니다. 한국교회협의회(KNCC)에 통일위가 생기고 저도 소속했어요. 80년대 후반에는 교회여성협위회에 통일위가 생기고 여신학자협의회에는 통일반이 생겼어요, 통일논의가 시작되었는데, 기독교가 분단에 책임지지 않고 반공노선을 걸어온 것을 회개해야한다는 자아비판과 함께 반공, 반북이 희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회개가 철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는 KNCC를 중심으로 한 통일운동의 전성기였어요. 미주의 한인기독교인들이 헬싱키, 비엔나등지에서 북한기독교인들을 만나 대화를 시작한 것도 당시 남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선의의 경쟁심까지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89-91년에 동구의 사회진영이 붕괴되면서 95년을 전후해 KNCC에 보수주의 진영이 많이 들어왔어요. 개인들은 살아 있었지만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전체적으로 약화되어 특별한 행사가 별로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미국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이라크를 공격하니까 우리 북한이 당하는 것 같고, 우리 민족도 제가 해온 통일신학도 다 끝장나는 것 같아 위기감, 허무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민족; 남북통일에서 기독교의 제일 큰 사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기독교에는 아직도 반공 반북의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의식을 청산하지 않는 한 통일에 절대 기여할 수 없습니다. 또 이데올러기의 대립을 넘어 서고 자본주의도 넘어서야 합니다.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물신숭배, 황금만능주의 이런 것이 자본주의의 원리인데 남한교회는 이걸 모르고 미국 자본주의의 품안에 안주해 왔어요. 또 자본주의에 안주할수록 미국에 종속되는 반공, 반북이 되어 분단상황을 굳혀 왔고요. 이러니까 또 반민족적이 되고요. 자본주의, 반민족은 의로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적 구원과 상반됩니다.
다행히 민족통일 의지가 청년학생들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교회지도자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이 남한교회 개혁의 누룩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또 보수든
진보든 북한 선교계획하면서 북에 경제지원도 하고 있고, 남의 감리교가 경비를 대어 북의 그리스도연맹에 신학원을 세우고 있는데 이런 지원사업들은 남한교회에 잠재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민족; 북을 밤문했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북한은 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며 주체적으로 평등사회를 이룬 나라, 물질적으로 결코 풍부하지 못해도 자본주의의 사회악이 없는 나라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북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가 임한 나라라는 평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런 평을 들으면 신이 없어도 잘 살아가는 나라에 구태어 선교을 해야 하는가하는 의문도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개인보다 민족, 통일이 우선이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주체사상으로 혁명을 이룬 북한에 왜 신앙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인데, 저는 아무리 의로운 사회도 하나님이라는 긍국적인 빛, 신앙이 없이는 인간성의 성취를 달성할 수 없다고 봅니다.
주체사상 혹은 민족의 영원성, 지도자의 영원성을 생각할 수 있는 토대는 의로운 하나님으로 부터 시간이 역사사회에 주어졌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아무리 사상적, 민족적으로 정의를 실현한다해도 역사사회는 상대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의로운 사회가 영원히 보장된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정의는 긍국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북에 가면 말끝마다 김정일장군님 은총으로…이러니까 다변화된 개인주의사회의 남한 종교인들은 우상화라고 비난하는데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인민들의 단결을 위해 구심점이 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강대국에 둘러쌓인 북에 강력한 구심점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민족; 현단계 통일운동에서 외적, 내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극복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박 교수;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의 경제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제교류를 하면서 남이 도와야 하고, 그러러면 철도도 도로도 뚫어야 하는데 미국이 핵문제랑 들고나와 방해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남이 미국을 이기고 독자적으로 북과 교류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1년간 해놓은게 없어요.
내적으로는 남에서 민족대단결이 않된다는 점입니다. 6.15, 8.15, 10.3을 주축으로 통일운동이 확산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남의 의식구조에는 차이가 많아서 기독교를 비롯해서 반공,반북 보수세력이 아직도 강합니다. 미선, 효순이 추모시위를 하는 시청앞 광장에서 기독교 보수세력이 성조기를 들고 대규모의 친미반북시위를 하는 실정입니다. 남남통일이 되어야 남북통일도 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해요.
민족; 해외동포들이 남북통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박 교수; 민족대단결을 위해 두가지의 큰 구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방안’이고 또 하나는 ‘민족사회의 폭’입니다.
‘통일방안’으로는 북에서 나온 1국가 2체제의 연방제가 있고 남에서 나온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교류하자는 연합체가 있는데 양쪽이 서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연방제와 연합체를 절충하는 낮은 단계의 통일방안이 나왔습니다. 남의 통일운동권도 타협하여 이 절충안으로 집중하고 있지요.
6.15공동선언에도 언급됐듯, 민족대단결의 폭은 남북을 주축으로 한 해외동포들의 참여까지 포함합니다. 남북이 해외동포를 끌어 안아야 우리 국력이 더커지고, 곧 1억을 바라보는 우리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세계적 대공동체를 이룰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주동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북남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면서 다른 해외동포들에게 민족통일의식을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주요역할을 미주동포들이 담당해서 세계에 흩어진 동포들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묶으며 폭넓고 원만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사는 도시인 로스엔젤레스 동포들이 경제기반도 있고 지리적으로 남북교류에도 좋으니 그 중심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죽기 전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미주동포가 중국의 조선족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가 끌어 안아야 우리 동포가 사는 땅이 우리 땅, 하나님땅이 됩니다. (미국땅도 앵글로 색슨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땅입니다.) 중국은 요즘 민족정책에 의해 고구려사를 왜곡시켜 자신들의 변방사로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만주땅은 원래 고구려땅이었죠. 옛역사에서 잃어버린 만주땅에 사는 조선족과 정치, 경제, 문화교류를 하면서 미주동포들이 서로의 민족동질성을 찾기 바랍니다.
미주동포들을 보고 싶어 10년만에 다시 미국에 왔어요. 마지막 말일지도 몰라-하나님이 모두 결정하는 일이자만- 미주동포들에게 민족대단결을 역설하고 싶었지요. 통일신학강의는 취소되어 아쉬웠지만 대신 동포들을 만나 많은 격려를 받고 즐거웠습니다.
민족; 9.11이후 전세계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이 일어나며 미국의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인류사회의 화두는 모든 나라가 평등한 자주권을 가졌다…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미국에 대항하는 인류사회의 이런 흐름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교수; 신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떠들지는 않지만 근래의 세계적인 항거운동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징조라고 봅니다. 너의 모습, 나의 모습 모두 다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예정대로 의로운 인간성을 성취해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불평등한 역사를 그냥 그대로 진행되게 하지 않습니다.
민족; 요즘 일과를 소개해 주세요.
박 교수; 아침 5시쯤 일어나서 간단한 침대운동을 하고 여름같은 여름에는 6시 반쯤, 요즘같은 겨울에는 7시쯤 내가 사는 아파트 뒤에 있는 관악산 남쪽에 올라가 두시간쯤 보냅니다. 제가 본래부터 꽃, 나무, 바위같은 자연을 좋아했어요.
요즘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이라는 연재글을 쓰고 있는데, 주체사상등 북쪽재료를 많이 이용합니다. 지나해 허리가 부러졌는데 수술하고 많이 나았어요. 집회와 시위에도 가끔 나가고, 효순 미선 추모집회에 나가서 결의문도 낭독했습니다.
민족; 부디 건강하셔서 민족과 신앙을 위해 청년같은 활동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사진은 방미중인 박순경 교수(가운데), 김애영 교수(오른쪽) 그리고 필자가 잠시 기념촬영한 장면
*박 순경 박사의 논문, <<통일신학의 회고와 전망>> 보기는 여기를 짤각해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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