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민족언론상 수상자 강진욱기자</font>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4-04-01 00:00 조회1,61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인터넷 자주민보는 24일자 머릿기사에 <민족언론상 수상하는 강진욱 기자>라는 제목의 대담기사를 보도하면서 민족얼을 간직한 언론인이 겪어 온 사연들과 강기자가 갖고 있는 시국관 언론관을 설명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
“잘못된 세계관 버려야”
민족언론상 수상하는 강진욱 기자
이동원 기자
“더 큰 과제가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자리한 진보적 인터넷 언론인 민족통신에서 수여하는 제2회 민족언론상 개인상 부문 수상자로 지난 2월18일 선정된 연합뉴스 강진욱 기자(민족뉴스국 북한부 차장대우)가 수상의 변을 묻자 꺼낸 말이다.
제도권 언론사 기자로 있으며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다른 언론사와는 달리 북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북한부가 따로 있어서 오히려 배겨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북쪽 보도를 직접 접하며 뭐라 그러는지 있는 그대로 보도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그렇지만 사주가 있는 언론사였다면 아마 벌써...” 강진욱 기자는 웃으며 말했지만, 연합뉴스 기자로서의 업무 외에도 근 4,5년간 매년 수십 편씩의 논문발표와 토론회 및 강연 준비와 참여는 분명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처음 연락을 받고 내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그의 고민은 사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민족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자신의 저술 활동에 대한 보람을 떠나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회사내에서도 그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수상을 수락한다는 것은 이제 공식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활동이 회사내에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커밍아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할 벽이라 생각해 수락하게 됐습니다.”
민족통신은 강진욱 기자를 민족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강진욱 기자는 지난 15년 동안 언론생활을 하면서 민족문제에 관련하여 정론을 펴왔으며 특히 한국민권연구소의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정세동향자료집에 수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이 되어 온 본질적 문제들을 예리하게 파헤쳐 줌으로써 해내외 애국 동포들의 진로를 밝혀준 애국적 언론인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는 제도권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언론인의 양심을 간직하고 민족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주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한편 필요한 시기에 한반도 문제를 극복하는 주제강연들을 통하여 6.15시대의 앞길을 열어주는데 한 몫을 다 해 온 ‘실천하는 애국언론인’이었습니다...”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며
87년 졸업 후 한국경제신문사에 입사해 외신부에서 기자활동을 하던 강진욱 기자는 1994년 3월 연합뉴스 외신부로 옮기게 된다. 이후 경제부를 거쳐 97년 11월 민족뉴스국 남북관계부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쌓게 된다.
“통일부 출입을 하다 민간단체 쪽을 담당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때 홍근수 목사님도 처음 만나고 박세길씨도 자주 보게 됐지요. 특히 홍근수 목사님께는 ‘기자가 그런 것도 모르냐’고 혼도 많이 났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과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높아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강진욱 기자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시 장기수 선생들은 일반적으로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생각으론 ‘간첩’이었죠. 하지만 선생들을 만나며 저렇게 사는 양반들도 있구나 하며 많이 깨우치게 되더라구요. ‘내가 알고 있던 게 다가 아니구나’, 뭐 이런거였죠.” 당시 말지의 ‘통일기행’ 취재진과 함께 다니며 그는 많은 장기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기억에 남는 몇몇 선생들과의 소회를 떠올렸다.
장기수 선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은 감회는 글로 표현되기도 했다. 63명의 장기수 선생들이 송환되기 직전인 2000년 9월2일 연합뉴스에는 강진욱 기자 이름으로 작성된 ‘납북어부출신 장기수의 귀거래사’라는 제목으로 기사 네 편이 보도됐다. 그 주인공은 비전향 장기수 리재룡(당시 66세) 선생이었는데 그는 다른 장기수 선생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1967년 2월 꽁치잡이배(제 3용진호)를 탔다가 월선으로 북한에 나포된 후 1970년 6월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19일만에 붙잡혀 30년을 복역한 것이다. 리재룡 선생은 송환되기 직전 3년여에 불과한 북쪽 생활 후 전향하지 않고 30년의 수감생활을 이겨낸 이야기를 강진욱 기자에게 7시간에 걸쳐 증언했다.
인식의 지평 넓혀주고 의식 깨우쳐준 사람들
2000년 1월26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상임부의장 김양무 선생의 타계를 전한 제도권 언론은 거의 없었다. 강진욱 기자는 김양무 선생의 투병부터 타계, 장례투쟁의 과정과 그해 2월13일의 장례식까지 연합뉴스를 통해서만도 20여 편의 관련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1월26일자 기사 ‘타계한 김양무 범민련부의장’과 2월13일자 기사 ‘(기자수첩)언론서 외면한 김양무씨 장례식’ 등에는 통일운동을 바로 보고 일반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그의 의지와 집념이 담겨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모든 걸 바친 김양무 선생의 열정이 자신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한편 연합뉴스 내에서 이와 관련해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강진욱 기자는 어느 뜻있는 선배 기자의 도움도 컸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김양무 선생과 함께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으로 그는 박해전(인터넷뉴스 참말로 대표) 선생을 꼽았다. “박해전 선배는 당시 한겨레 기자로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구속되기도 했는데, 기자로서 또 다른 활동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또 조미평화센터 김명철 소장과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의 글들이 자신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한호석 소장의 글은 한때 걸어다니면서도 볼 정도였다고 전했다. 강진욱 기자는 그 외에도 정기열 목사 등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글 발표 직후엔 의문의 사건들이
“머리가 아주 짧은 외국인 청년 두 명이었습니다. 보통 외국인들은 복장이나 모양만 봐도 상사주재원인지, 관광객인지, 군인인지 금방 표가 납니다. 그런데 짧은 머리가 군인 같기는 한데 제복은 없고 가방이나 손에 쥔 것도 아무것도 없이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좀 쌀쌀해질 때였는데 딱붙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더라구요. 둘이 발을 맞춘 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강진욱 기자는 몇 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회사 골목을 들어설 때 한 번 마주친 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몇 달 뒤 집에 갈 때 다시 마주친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신변위협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01년, 겁 없이 글쓰던 때였죠.” 집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연속되는 일들이 솔직히 불안하게 느껴졌었다고 그는 말했다. 조금 다른 사례도 있다.
“2001년 12월쯤인가 한국민권연구소 정세동향자료집에 ‘황장엽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글을 썼었지요. 이한영 얘기도 썼었고, 당시 얘기가 되던 답방문제에 대해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가 안 된 상황에다 CIA, 모사드 등 온갖 정보기관 등이 암약하는 이남 땅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며칠 뒤였다.
“OO산업입니다. 그런 기사를 어떻게 쓰시게 됐나요?”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아주 정중하게 물어봅니다. 전 ‘공개된 것만 가지고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구요.” 강진욱 기자는 자신의 글이 체제의 ‘금기사항’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아 관련된 글을 보게 되면 모처에서 경고는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반응’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희 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나라다. 힘이 막강하고, 공작능력이 뛰어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나라다.’ 나 또한 미국의 실체를 알아 가면 알수록 불안감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과 기자들, 잘못된 세계관 버려야
강진욱 기자는 일반 지식인들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미국이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없다보니 대단히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것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우연한 기회였지만 연합뉴스에 있다보니 일반 지식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원천적 자료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최근 1,2년간 세계도처에서 미국이 하고 다니는 짓을 시시각각 분석하면서 ‘미국’을 여실히 알게 됐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나와 우리 국가의 운명과 어떤 관계에 있는 가를 알면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그는 2001년 9.11사건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높다. 여러 편의 글을 통해 9.11사건이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 질서’ 시나리오의 신호탄이었음을 분석한 바 있다. “9.11사건을 통해 미국의 실체를 여실히 보게 됐습니다. 미국이 저질러왔던 모든 악마적 역사가 9.11로 모두 표출된 것이죠. 미국 입장에서는 9.11이 묘책이었겠지만 패책이었습니다.”
북미간 핵공방에 대해서도 소위 한반도 전문가나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인식이 그 폭과 깊이, 무엇보다 질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단적인 예로 2002년 10월 켈리의 발언 이후 참과 거짓에 대한 판별력이 거의 없습니다. 1994년부터의 북미간 핵공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과거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미국의 주장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있죠. 미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사대주의가 아직 팽배해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명 바로 잡아야
“나의 글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기자는 실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은 막연한 중립을 객관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난 북을 편드는게 아니라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지요. 북미관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중립을 표방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정보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가공된 것들인 상황에서 결과는 중립도 아닌 미국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잘못된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글을 제대로 쓰면 이적행위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기존 제도권의 논리는 미국 중심의 권력에서 해오던 논리이고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식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나나 내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이 위태롭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는 기자나 지식인으로서의 글쓰기는 자신의 생명력을 발현시키는 계기라고 말하고 자신의 한계에 대해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을 보여야 한다고 덧붙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을 이었다. “이제는 글쓰기에 있어 효율성에 주안점을 둘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반향이 크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이나 강연이나 모두 반론과 반응, 공유의 폭을 넓혀갈 생각입니다.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글이 더욱 힘과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진욱 기자의 바람대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그의 애국적 문필활동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관심과 뜨거운 호응 속에 열띤 토론과 연구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제2회 민족언론상 선정위원회(노길남 위원장)는 개인상 부문의 강진욱 기자와 단체상 부문의 통일학연구소(한호석 소장)에 대한 시상식을 오는 5월9일 오후4시 미국 로스엔젤레스 가든 스위트호텔에서 개최되는 민족통신 창간 5주년 기념식장에서 주요행사로 진행할 예정이다.
강진욱 기자가 걸어온 길
학력:
서울에서 태어나(1964.5.3) 초-중-고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님.
최종학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1983년 3월 입학, 1987년 2월 졸업)
약력:
1987년 4월-10월 방위병 근무(6개월)
1987년 11월 (주)기아산업 입사
1988년 9월 금융증권일보 입사
1990년 1월 한국경제신문사 입사
1994년 3월 연합뉴스 입사(한국경제신문 외신부에서 연합뉴스 외신부로 옮김)
1995년 11월 경제부로 옮겨 2년 일했고
1997년 11월 민족뉴스국 남북관계부로 옮겨 3년 근무
이후 외신부에서 4개월, 여론매체부에서 8개월 일함
2001년 11월 민족뉴스국 북한부에 합류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음.
현재 민족뉴스국 북한부 차장대우
.....................................................................
*관련 보도자료 보기-여기를 짤각하세요*
.....................................................................
이동원 기자

제도권 언론사 기자로 있으며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다른 언론사와는 달리 북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북한부가 따로 있어서 오히려 배겨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북쪽 보도를 직접 접하며 뭐라 그러는지 있는 그대로 보도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그렇지만 사주가 있는 언론사였다면 아마 벌써...” 강진욱 기자는 웃으며 말했지만, 연합뉴스 기자로서의 업무 외에도 근 4,5년간 매년 수십 편씩의 논문발표와 토론회 및 강연 준비와 참여는 분명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처음 연락을 받고 내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그의 고민은 사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민족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자신의 저술 활동에 대한 보람을 떠나 보다 현실적인 문제였다. 회사내에서도 그의 활동에 대해 대부분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수상을 수락한다는 것은 이제 공식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활동이 회사내에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커밍아웃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할 벽이라 생각해 수락하게 됐습니다.”
민족통신은 강진욱 기자를 민족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강진욱 기자는 지난 15년 동안 언론생활을 하면서 민족문제에 관련하여 정론을 펴왔으며 특히 한국민권연구소의 객원 연구원 자격으로 정세동향자료집에 수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걸림돌이 되어 온 본질적 문제들을 예리하게 파헤쳐 줌으로써 해내외 애국 동포들의 진로를 밝혀준 애국적 언론인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는 제도권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언론인의 양심을 간직하고 민족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주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한편 필요한 시기에 한반도 문제를 극복하는 주제강연들을 통하여 6.15시대의 앞길을 열어주는데 한 몫을 다 해 온 ‘실천하는 애국언론인’이었습니다...”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며
87년 졸업 후 한국경제신문사에 입사해 외신부에서 기자활동을 하던 강진욱 기자는 1994년 3월 연합뉴스 외신부로 옮기게 된다. 이후 경제부를 거쳐 97년 11월 민족뉴스국 남북관계부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쌓게 된다.
“통일부 출입을 하다 민간단체 쪽을 담당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때 홍근수 목사님도 처음 만나고 박세길씨도 자주 보게 됐지요. 특히 홍근수 목사님께는 ‘기자가 그런 것도 모르냐’고 혼도 많이 났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과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높아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강진욱 기자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시 장기수 선생들은 일반적으로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생각으론 ‘간첩’이었죠. 하지만 선생들을 만나며 저렇게 사는 양반들도 있구나 하며 많이 깨우치게 되더라구요. ‘내가 알고 있던 게 다가 아니구나’, 뭐 이런거였죠.” 당시 말지의 ‘통일기행’ 취재진과 함께 다니며 그는 많은 장기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기억에 남는 몇몇 선생들과의 소회를 떠올렸다.
장기수 선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은 감회는 글로 표현되기도 했다. 63명의 장기수 선생들이 송환되기 직전인 2000년 9월2일 연합뉴스에는 강진욱 기자 이름으로 작성된 ‘납북어부출신 장기수의 귀거래사’라는 제목으로 기사 네 편이 보도됐다. 그 주인공은 비전향 장기수 리재룡(당시 66세) 선생이었는데 그는 다른 장기수 선생 가운데에서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1967년 2월 꽁치잡이배(제 3용진호)를 탔다가 월선으로 북한에 나포된 후 1970년 6월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19일만에 붙잡혀 30년을 복역한 것이다. 리재룡 선생은 송환되기 직전 3년여에 불과한 북쪽 생활 후 전향하지 않고 30년의 수감생활을 이겨낸 이야기를 강진욱 기자에게 7시간에 걸쳐 증언했다.
인식의 지평 넓혀주고 의식 깨우쳐준 사람들
2000년 1월26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상임부의장 김양무 선생의 타계를 전한 제도권 언론은 거의 없었다. 강진욱 기자는 김양무 선생의 투병부터 타계, 장례투쟁의 과정과 그해 2월13일의 장례식까지 연합뉴스를 통해서만도 20여 편의 관련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1월26일자 기사 ‘타계한 김양무 범민련부의장’과 2월13일자 기사 ‘(기자수첩)언론서 외면한 김양무씨 장례식’ 등에는 통일운동을 바로 보고 일반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그의 의지와 집념이 담겨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모든 걸 바친 김양무 선생의 열정이 자신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한편 연합뉴스 내에서 이와 관련해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강진욱 기자는 어느 뜻있는 선배 기자의 도움도 컸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김양무 선생과 함께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으로 그는 박해전(인터넷뉴스 참말로 대표) 선생을 꼽았다. “박해전 선배는 당시 한겨레 기자로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구속되기도 했는데, 기자로서 또 다른 활동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또 조미평화센터 김명철 소장과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의 글들이 자신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한호석 소장의 글은 한때 걸어다니면서도 볼 정도였다고 전했다. 강진욱 기자는 그 외에도 정기열 목사 등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글 발표 직후엔 의문의 사건들이
“머리가 아주 짧은 외국인 청년 두 명이었습니다. 보통 외국인들은 복장이나 모양만 봐도 상사주재원인지, 관광객인지, 군인인지 금방 표가 납니다. 그런데 짧은 머리가 군인 같기는 한데 제복은 없고 가방이나 손에 쥔 것도 아무것도 없이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좀 쌀쌀해질 때였는데 딱붙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더라구요. 둘이 발을 맞춘 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강진욱 기자는 몇 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회사 골목을 들어설 때 한 번 마주친 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몇 달 뒤 집에 갈 때 다시 마주친 뒤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신변위협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001년, 겁 없이 글쓰던 때였죠.” 집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연속되는 일들이 솔직히 불안하게 느껴졌었다고 그는 말했다. 조금 다른 사례도 있다.
“2001년 12월쯤인가 한국민권연구소 정세동향자료집에 ‘황장엽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글을 썼었지요. 이한영 얘기도 썼었고, 당시 얘기가 되던 답방문제에 대해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가 안 된 상황에다 CIA, 모사드 등 온갖 정보기관 등이 암약하는 이남 땅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며칠 뒤였다.
“OO산업입니다. 그런 기사를 어떻게 쓰시게 됐나요?”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아주 정중하게 물어봅니다. 전 ‘공개된 것만 가지고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구요.” 강진욱 기자는 자신의 글이 체제의 ‘금기사항’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아 관련된 글을 보게 되면 모처에서 경고는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반응’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희 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나라다. 힘이 막강하고, 공작능력이 뛰어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나라다.’ 나 또한 미국의 실체를 알아 가면 알수록 불안감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과 기자들, 잘못된 세계관 버려야
강진욱 기자는 일반 지식인들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미국이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없다보니 대단히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것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우연한 기회였지만 연합뉴스에 있다보니 일반 지식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원천적 자료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최근 1,2년간 세계도처에서 미국이 하고 다니는 짓을 시시각각 분석하면서 ‘미국’을 여실히 알게 됐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나와 우리 국가의 운명과 어떤 관계에 있는 가를 알면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그는 2001년 9.11사건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높다. 여러 편의 글을 통해 9.11사건이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 질서’ 시나리오의 신호탄이었음을 분석한 바 있다. “9.11사건을 통해 미국의 실체를 여실히 보게 됐습니다. 미국이 저질러왔던 모든 악마적 역사가 9.11로 모두 표출된 것이죠. 미국 입장에서는 9.11이 묘책이었겠지만 패책이었습니다.”
북미간 핵공방에 대해서도 소위 한반도 전문가나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인식이 그 폭과 깊이, 무엇보다 질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단적인 예로 2002년 10월 켈리의 발언 이후 참과 거짓에 대한 판별력이 거의 없습니다. 1994년부터의 북미간 핵공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과거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미국의 주장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있죠. 미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사대주의가 아직 팽배해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명 바로 잡아야
“나의 글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기자는 실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은 막연한 중립을 객관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난 북을 편드는게 아니라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지요. 북미관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중립을 표방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정보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가공된 것들인 상황에서 결과는 중립도 아닌 미국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잘못된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글을 제대로 쓰면 이적행위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기존 제도권의 논리는 미국 중심의 권력에서 해오던 논리이고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식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나나 내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운명이 위태롭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는 기자나 지식인으로서의 글쓰기는 자신의 생명력을 발현시키는 계기라고 말하고 자신의 한계에 대해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을 보여야 한다고 덧붙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을 이었다. “이제는 글쓰기에 있어 효율성에 주안점을 둘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반향이 크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글이나 강연이나 모두 반론과 반응, 공유의 폭을 넓혀갈 생각입니다.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글이 더욱 힘과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진욱 기자의 바람대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그의 애국적 문필활동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관심과 뜨거운 호응 속에 열띤 토론과 연구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제2회 민족언론상 선정위원회(노길남 위원장)는 개인상 부문의 강진욱 기자와 단체상 부문의 통일학연구소(한호석 소장)에 대한 시상식을 오는 5월9일 오후4시 미국 로스엔젤레스 가든 스위트호텔에서 개최되는 민족통신 창간 5주년 기념식장에서 주요행사로 진행할 예정이다.
강진욱 기자가 걸어온 길
학력:
서울에서 태어나(1964.5.3) 초-중-고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님.
최종학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1983년 3월 입학, 1987년 2월 졸업)
약력:
1987년 4월-10월 방위병 근무(6개월)
1987년 11월 (주)기아산업 입사
1988년 9월 금융증권일보 입사
1990년 1월 한국경제신문사 입사
1994년 3월 연합뉴스 입사(한국경제신문 외신부에서 연합뉴스 외신부로 옮김)
1995년 11월 경제부로 옮겨 2년 일했고
1997년 11월 민족뉴스국 남북관계부로 옮겨 3년 근무
이후 외신부에서 4개월, 여론매체부에서 8개월 일함
2001년 11월 민족뉴스국 북한부에 합류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음.
현재 민족뉴스국 북한부 차장대우
.....................................................................
*관련 보도자료 보기-여기를 짤각하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