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옥중기고] 나는 간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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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07-21 00:00 조회1,47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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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기고] 나는 간첩인가? - 민경우
민경우(통일연대 사무처장)님이 <민중의소리>로 옥중 기고문을 보내주셨습니다. 민경우 처장은 현재 국가보안법에 의해 간첩죄로 몰려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독자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실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간첩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나를 간첩이라 판결한 바 있고 지금 또다시 간첩 혐의로 재판 중이다. 이변이 없는 한 나는 또 다시 간첩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이 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보는 간첩은 무엇인가?
나는 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고 3때는 무작정 Marx에 대해 알고 싶었다. 84년에 대학에 입학해 당시의 학생들처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했다. 여러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되고 실제 구속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86년 무렵부터 학생운동권에는 반미와 통일문제가 급부상했다. 80년 광주학살에 미국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비교적 뚜렷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부터 나는 북의 주체사상이나 통일정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처지가 못 되지만 공안기관은 나를 골수 주사파 쯤으로 분류할 것이다.
나는 북의 통일정책을 상당부분 지지한다.
주한미군철수나 연방제 통일방안은 88년 이후 지금까지 내가 통일운동을 하면서 유지했던 기본 노선이다. 40살이 된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나 연방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사상과 노선을 갖고 있는 것이 내가 간첩이 된 이유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은 어떤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을 집행하는 공안기관. 검찰. 재판부가 사람을 판단하는 일차적 징표도 그 사람의 사상이다.
위 기관들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아무나 잡아넣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특별히 선별하여 구속한다. 내가 위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간첩은커녕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이비 간첩이다
90년대의 한국은 탈 이념의 시대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미련스러운 어느 30대는 끝나지 않은 변혁과 통일을 위해 공장과 농촌, 거리에서 그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범민련이었다. 이적단체의 표본쯤으로 간주되는 이 조직의 특징은 조국통일에 뜻이 있으면 남북해외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범민련이 북의 조종을 받는 단체라고 규정하지만 통일운동의 입장에서 북한 동포와 대화. 접촉하는 것은 당연했다.
△민경우처장은 간첩혐의로 10년형이 구형되었다ⓒ민중의소리 자료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조종이나 받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북관계의 독점권은 정부에게만 있어야 했다. 남북을 연결하는 정부이외의 또 다른 선이 있다는 것은 정부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금단의 영역에 도전한 결과는 가혹했다. 범민련 사람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 집 드나들 듯 감옥을 오갔다.
정부는 어느 순간부터 범민련 사건을 이적단체 수준을 넘어 간첩 혐의와 연결시키기 시작했고 나는 97년 6. 20 연행되어 98년 4월 항소심에서 간첩 판결을 받았다. 나는 순진하게도 간첩하면 북에서 남파된 대남공작원을 지칭하는 용어로만 알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북에서 남파된 오리지널 간첩은 몇 명 없거나 아예 감옥에 오지 않는다. 90년대 후반 발생한 간첩 사건의 대부분은 나처럼 북한과 적당히 연관된 "사이비 간첩"이다.
99년 8월 나는 2년 4개월의 징역을 살고 다시 범민련에 가담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민간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남북을 오가고 서로 만나기를 바랬다. 남북을 중계하는 일이야 범민련의 특기이자 본성이므로 우리는 오랜만에 일다운 일을 많이 했다.
나는 일본의 범민련 조직을 통해 범민련 북측조직과 200번쯤 전화, 팩스,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재야 운동가들이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들이 남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한번도 북에 가보지 못했고 북한 사람을 만나본 일도 없다.
범민련이 이적단체라는 이유로 모든 남북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나는 2003.12.1 또 다시 연행되어 2004. 5.24 1심 재판에서 간첩이라고 판결 받았다. 2심, 대법원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의 특징은 검찰이 기소하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 난다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를 판사가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간첩인가?
내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방안을 지지 한다고 해서 간첩인가? 그러면 당신의 주장은 무엇인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감옥에 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신의 사상은 무엇인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마르크스를 알았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반미주의자였으며 40이 된 지금까지 그렇다. 이 땅의 이른바 386이 비슷한 과정을 밟았고 개중의 상당수는 아직도 거리와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나는 간첩인가? 나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가?
내 사상의 출처는 고난의 길을 헤쳐 온 80년대 학생운동이고 그런 사상을 배태시킨 것은 제국주의 미국의 만행이며, 90년대 투쟁의 길을 선택한 전투적인 386의 일원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들이고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했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조국이란 남과 북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7천만 모두의 함께하는 하나의 조국이라는 것이다. 이 발상과 생각이 당신과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간첩으로 몰지 말라.
나는 북한과 직접 연계를 시도했던 범민련의 일원이다. 우리는 남북이 실제로 함께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우리는 민족자주와 단결의 차원에서 남북이 함께 협력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비밀리에 관철할 마음은 없었다.
우리는 서울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공개적으로 북과 접촉하고 협력하고자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북한동포와의 접촉과 만남은 정부만 해야 하는가? 북한 동포와 만날 때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북한 동포와 만날 때 노동자와 농민은 자제해야 하는가? 당신이 주장하는 남북간 만남은 이산가족끼리 또는 교양있는 사람들만이 이른바 “순수하게” 만나야 하는가?
우리는 그런 식의 만남에 반대한다. 그리고 만남이 계속될 때마다 남북의 만남이 깊어지길 바란다. 어제 만남이 함께 공을 차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고 내일은 미국의 만행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합치기를 바란다.
어제 지식인과 종교인이 만났으면 오늘은 노동자와 농민이, 내일은 국민 모두가 만나기를 바란다. 무엇이 간첩인가? 정부의 허락 없이 북과 연락한 것이 간첩인가? 남북간의 만남을 정치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의도가 간첩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남북의 만남은 무엇인가? 공을 차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동포애를 나눈 후 당신이 북한당국, 주민과 진정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함께 싸우고 싶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간첩이 된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
[출처; 민중의 소리 7-7-04]
민경우(통일연대 사무처장)님이 <민중의소리>로 옥중 기고문을 보내주셨습니다. 민경우 처장은 현재 국가보안법에 의해 간첩죄로 몰려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독자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실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간첩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나를 간첩이라 판결한 바 있고 지금 또다시 간첩 혐의로 재판 중이다. 이변이 없는 한 나는 또 다시 간첩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이 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보는 간첩은 무엇인가?

어려서부터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고 3때는 무작정 Marx에 대해 알고 싶었다. 84년에 대학에 입학해 당시의 학생들처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했다. 여러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되고 실제 구속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86년 무렵부터 학생운동권에는 반미와 통일문제가 급부상했다. 80년 광주학살에 미국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비교적 뚜렷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부터 나는 북의 주체사상이나 통일정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처지가 못 되지만 공안기관은 나를 골수 주사파 쯤으로 분류할 것이다.
나는 북의 통일정책을 상당부분 지지한다.
주한미군철수나 연방제 통일방안은 88년 이후 지금까지 내가 통일운동을 하면서 유지했던 기본 노선이다. 40살이 된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나 연방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사상과 노선을 갖고 있는 것이 내가 간첩이 된 이유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은 어떤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을 집행하는 공안기관. 검찰. 재판부가 사람을 판단하는 일차적 징표도 그 사람의 사상이다.
위 기관들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아무나 잡아넣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특별히 선별하여 구속한다. 내가 위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간첩은커녕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이비 간첩이다
90년대의 한국은 탈 이념의 시대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미련스러운 어느 30대는 끝나지 않은 변혁과 통일을 위해 공장과 농촌, 거리에서 그 시절을 보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범민련이었다. 이적단체의 표본쯤으로 간주되는 이 조직의 특징은 조국통일에 뜻이 있으면 남북해외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범민련이 북의 조종을 받는 단체라고 규정하지만 통일운동의 입장에서 북한 동포와 대화. 접촉하는 것은 당연했다.
△민경우처장은 간첩혐의로 10년형이 구형되었다ⓒ민중의소리 자료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조종이나 받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북관계의 독점권은 정부에게만 있어야 했다. 남북을 연결하는 정부이외의 또 다른 선이 있다는 것은 정부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금단의 영역에 도전한 결과는 가혹했다. 범민련 사람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 집 드나들 듯 감옥을 오갔다.
정부는 어느 순간부터 범민련 사건을 이적단체 수준을 넘어 간첩 혐의와 연결시키기 시작했고 나는 97년 6. 20 연행되어 98년 4월 항소심에서 간첩 판결을 받았다. 나는 순진하게도 간첩하면 북에서 남파된 대남공작원을 지칭하는 용어로만 알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북에서 남파된 오리지널 간첩은 몇 명 없거나 아예 감옥에 오지 않는다. 90년대 후반 발생한 간첩 사건의 대부분은 나처럼 북한과 적당히 연관된 "사이비 간첩"이다.
99년 8월 나는 2년 4개월의 징역을 살고 다시 범민련에 가담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민간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남북을 오가고 서로 만나기를 바랬다. 남북을 중계하는 일이야 범민련의 특기이자 본성이므로 우리는 오랜만에 일다운 일을 많이 했다.
나는 일본의 범민련 조직을 통해 범민련 북측조직과 200번쯤 전화, 팩스,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재야 운동가들이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들이 남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한번도 북에 가보지 못했고 북한 사람을 만나본 일도 없다.
범민련이 이적단체라는 이유로 모든 남북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나는 2003.12.1 또 다시 연행되어 2004. 5.24 1심 재판에서 간첩이라고 판결 받았다. 2심, 대법원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의 특징은 검찰이 기소하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 난다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를 판사가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간첩인가?
내가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방안을 지지 한다고 해서 간첩인가? 그러면 당신의 주장은 무엇인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감옥에 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신의 사상은 무엇인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마르크스를 알았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반미주의자였으며 40이 된 지금까지 그렇다. 이 땅의 이른바 386이 비슷한 과정을 밟았고 개중의 상당수는 아직도 거리와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나는 간첩인가? 나는 감옥에 있어야 하는가?
내 사상의 출처는 고난의 길을 헤쳐 온 80년대 학생운동이고 그런 사상을 배태시킨 것은 제국주의 미국의 만행이며, 90년대 투쟁의 길을 선택한 전투적인 386의 일원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들이고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했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조국이란 남과 북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7천만 모두의 함께하는 하나의 조국이라는 것이다. 이 발상과 생각이 당신과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간첩으로 몰지 말라.
나는 북한과 직접 연계를 시도했던 범민련의 일원이다. 우리는 남북이 실제로 함께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우리는 민족자주와 단결의 차원에서 남북이 함께 협력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비밀리에 관철할 마음은 없었다.
우리는 서울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공개적으로 북과 접촉하고 협력하고자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북한동포와의 접촉과 만남은 정부만 해야 하는가? 북한 동포와 만날 때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북한 동포와 만날 때 노동자와 농민은 자제해야 하는가? 당신이 주장하는 남북간 만남은 이산가족끼리 또는 교양있는 사람들만이 이른바 “순수하게” 만나야 하는가?
우리는 그런 식의 만남에 반대한다. 그리고 만남이 계속될 때마다 남북의 만남이 깊어지길 바란다. 어제 만남이 함께 공을 차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고 내일은 미국의 만행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합치기를 바란다.
어제 지식인과 종교인이 만났으면 오늘은 노동자와 농민이, 내일은 국민 모두가 만나기를 바란다. 무엇이 간첩인가? 정부의 허락 없이 북과 연락한 것이 간첩인가? 남북간의 만남을 정치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의도가 간첩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남북의 만남은 무엇인가? 공을 차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동포애를 나눈 후 당신이 북한당국, 주민과 진정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함께 싸우고 싶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간첩이 된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
[출처; 민중의 소리 7-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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