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임시정부의 방송인 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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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룡 작성일04-12-12 00:00 조회1,3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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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과 통일의 노전사 고 정명 선생님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바치며 정명 선생님의 생전 활동을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지난 2001년 5월 로스앤젤레스의 청년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 나성포럼>이 소식지에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란 연재의 첫호로 정명선생님을 만나 인터뷰했던 내용을 보내왔다. 그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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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의 방송인 정명
<통일을 여는 사람들> 연재의 1호 주인공을 누구로 선정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최근 정명 선생님이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일제의 중단되지 않는 만행에 전 민족이 분노하고 있고 더구나 자신의 친일적 행적을 반성하지 못하고 나성지역에서 사회인사로 자처하던 인간들이 민족애국자인양 날뛰고 있는 판에 중경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정명 선생님이 절실히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은 정명 선생님이 어느 해 생신때 손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항상 묵묵히 통일운동을 해오시고 누구 못지 않는 애정으로 청년활동을 지지해주시는 선생님은 우리 청년들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으신 독립운동의 증언자로 각인 되어 있고 오랜 전부터 한번 만나 뵙고 당시의 활동들을 듣고자 했던 바였다.
처음 전화로 인텨뷰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아픈 몸을 들어 일언지하에 거부를 하셨다. 그러나 한번도 청년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적이 없는 선생님이신지라 몇 차례의 집요한(?) 시도 끝에 선생님은 그날 병원 가셔야 되는 것도 뒤로하고 인텨뷰에 응해 주셨다.
사실 편찮으신 선생님을 괴롭혀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런 맘이 없진 않았다.
인텨뷰 전 인사말 겸해서 미주의 친일분자문제를 꺼내려고 "선생님은 김구선생님을 모시고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요..." 하자 선생님은 손을 내저으며 " 내가 무슨 한일이 있다고... " 하시며 겸양의 서두로 인텨뷰는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1922년 청천강 하류인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셨다. 개성중을 졸업하고 동경으로 가서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 하셨다. 원래는 정치외교과를 원했지만 당시 정치외교과는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다 한다.
이 시절 유학온 고향사람들과 <청천강회>를 조직하였는데 주머니에 항상 먹과 벼루를 갖고 다니다 일본 각 대학 화장실에 "일본은 망한다", "조선은 독립한다"는 낙서를 하고 다녔고 동경 신바시의 미군포로 강제노동소에 몰래 숨어 들어가 담배갑에 영어로 "일본은 망한다, 너희들은 곧 집으로 돌아간다, 조선은 독립한다"는 쪽지를 전달하기도 하셨단다.
1944년 1월 졸업과 동시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2월 중국 서주 남방의 숙현에 있는 일본군 사단에 배치 되었다. 이때 일본군에서 통역사로 있던 허씨가 자신의 방으로 선생님을 자주 초대했는데 그 방에는 일본군대 주변의 중국군 배치도가 있어 틈틈이 천인침(千人針: 배에 감고 다니던 천으로 무운을 비는 뜻에서 천 사람이 실로 수를 놓은 것이라 함)에 지도를 그렸고 마침내 6월 네 사람의 동료와 함께 목숨건 탈출을 감행한다.
북두칠성을 방향 삼아 사흘을 꼬박 걸어 허점의 중국 중앙군의 전초기지에 달했다. 이때 선생님이 탈출하면서 서주 근방의 일본군 배치상황이 중앙군에 알려졌고 이를 통해 중앙군이 일본군 철도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6개월간 남양의 중국 중앙군의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른 일본군부대로부터 탈출해 오신 장준하선생, 전 고려대 총장이셨던 김준엽선생, 그리고 오늘날까지 절친한 친우가 되신 뉴욕 민족통일학교의 윤영무선생님을 만나 교분을 나누게 된다.
당시 그곳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일제의 잔학과 조선독립을 주제로한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곳의 중국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며 선생님은 그 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 듯 하였다.
그후 중군군의 협조하에 44년 11월 22일 장준하선생, 김준엽씨등의 학병출신과 일반독립운동가 53인이 남경을 떠나 72일간의 장정 끝에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된다. 이날이 45년 1월 31일.-정명선생님외 두명의 동지분들이 편집인이 되어 <장정 육십리 한광반(韓光班) 학병 33인의 항일투쟁기>이란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그 속에 당시의 활동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임정에서 "주석 판공실 서기"의 직책을 맡으시고 외교문서 전달작업과 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을 주로 하셨다. 당시 중국 중앙방송의 통신선을 빌어 우리말로 북경, 상해, 남경등지에 방송을 했는데 주된 내용은 태평양전쟁의 속보와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알려 조선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독립운동에 한층 일어설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었다 한다.
방송도중 감정이 북받쳐 방송이 중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다.
임정시절도 같이 지내며 장준하, 김준엽선생과 꾸준히 친분을 나누고 격없는 사이가 되셨다며 장준하선생과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까끔씩 만나 정치에 대해 토론하셨고(이때 감시를 피해 계동의 어느 뒷골목에서 만나 그냥 선 채로 한시간 가량 이야기하다 헤어지곤 하셨다한다) 작년엔 한국에 나가 김준엽선생을 만났는데 김씨가 대한민국이 임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하여 화가 나서 논쟁을 하기도 하셨다 한다.
김구선생의 인상에 대해 육중한 체구에 항상 과묵하시며 위엄으로 여러 사람을 압도하셨다면서 그분은 조국의 독립이 되면 조국의 문지기라도 되겠다던 분이셨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임정의 선발대가 되어 귀국을 위해 9월 30일 중경을 떠나 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했는데 양쯔강의 기뢰 제거작업으로 인해서 곧장 오지를 못하고 그곳에 남아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장군의 부관이 되어 상해지역 조선동포들의 안보와 교민업무등을 돌보다가 46년 3월 2일 미군 배를 타고 마침내 3월 10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귀국하여 경교장에 계시던 김구선생의 비서로 지냈고 이승만과 김성수의 친일세력들의 득세에 대항코자 여운형, 김규식선생의 좌우합작위원회에 깊이 관계하다가 여운형, 김구선생의 암살, 이승만의 집권등으로 정치를 그만두셨다 한다.
53년경 부터는 사업을 시작, "잘 나가는" 원목 수입회사를 운영하시다 60년 부동항으로 믿었던 인천항이 결빙되면서 10척의 원목 실은 배가 묶이는 바람에 당시 돈 10만불의 손실로 순식간에 사업체를 날리고 그 후 박정희의 폭압정치에 대한 혐오등으로 1979년 미국으로 오시면서 통일운동에 관여하게 되었고 통협을 거쳐 재미동포 서부연합 회원으로 계시지만 요즘은 몸이 불편하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셨다.
미주운동과 6.15선언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 IMF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사회개혁적으로 미비한 김대중정부가 6.15라는 이정표를 세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지금 미국은 힘의 논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나 이제는 그것이 먹혀들어 갈 시대는 아니라고 하면서 어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남북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여러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그 모든 것이 해방직후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하면서 남북의 칠천만이나 되는 인구는 세계적으로 보아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라면서 역사가 뚜렷하고 우수한 두뇌를 갖고 있고 외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족혼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힘으로 뭉쳐야 하고 그때는 조국통일을 방해할 자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끝으로 나성포럼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리자 국내에서도 한총련을 비롯 청년운동이 앞장서 나가면 안되는 일이 없듯이 미주에서도 나성포럼이 일을 해가는데 따라 미주운동의 미래가 걸렸다고 말씀하시고 특히 6.15이후의 시점에서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의 자주적 교류가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주역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알고 질문을 던졌더니 그냥 남들 TV보고 여가를 즐기듯이 자신 개인의 즐거움을 느껴 주역을 공부하신다면서 문장이나 언어적감각, 중국역사등에 대해 흥미가 있으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구적 환경오염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시기도 하셨다.
은근히 청담(淸談)을 즐길량으로 주역 공부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신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선생님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르치시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하신다.
그 액자에는 청무성 관무상(聽無聲 觀無象)이라 쓰여 있었다. <소리 없음도 듣고 사물 없음도 본다.> "인간이 지르는 온갖 소리와 인간이 창조한 어떤 형태와 모습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속에 흐르고 있는 본질과 이치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노라‚ 이런 뜻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자 선생님은 그냥 웃으신다.
인텨뷰 내내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신 선생님을 괴롭히는 것 같아 서둘러 정리하고 나오며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선생님이었는데 지금 저렇게 편찮은 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무심했던 마음이 부끄럽게 밀려왔다.
선생님 하루빨리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출처:통일맞이 나성포럼 소식지 200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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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의 방송인 정명
<통일을 여는 사람들> 연재의 1호 주인공을 누구로 선정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최근 정명 선생님이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일제의 중단되지 않는 만행에 전 민족이 분노하고 있고 더구나 자신의 친일적 행적을 반성하지 못하고 나성지역에서 사회인사로 자처하던 인간들이 민족애국자인양 날뛰고 있는 판에 중경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정명 선생님이 절실히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항상 묵묵히 통일운동을 해오시고 누구 못지 않는 애정으로 청년활동을 지지해주시는 선생님은 우리 청년들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으신 독립운동의 증언자로 각인 되어 있고 오랜 전부터 한번 만나 뵙고 당시의 활동들을 듣고자 했던 바였다.
처음 전화로 인텨뷰를 요청하자 선생님은 아픈 몸을 들어 일언지하에 거부를 하셨다. 그러나 한번도 청년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적이 없는 선생님이신지라 몇 차례의 집요한(?) 시도 끝에 선생님은 그날 병원 가셔야 되는 것도 뒤로하고 인텨뷰에 응해 주셨다.
사실 편찮으신 선생님을 괴롭혀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런 맘이 없진 않았다.
인텨뷰 전 인사말 겸해서 미주의 친일분자문제를 꺼내려고 "선생님은 김구선생님을 모시고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요..." 하자 선생님은 손을 내저으며 " 내가 무슨 한일이 있다고... " 하시며 겸양의 서두로 인텨뷰는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1922년 청천강 하류인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셨다. 개성중을 졸업하고 동경으로 가서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 하셨다. 원래는 정치외교과를 원했지만 당시 정치외교과는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다 한다.
이 시절 유학온 고향사람들과 <청천강회>를 조직하였는데 주머니에 항상 먹과 벼루를 갖고 다니다 일본 각 대학 화장실에 "일본은 망한다", "조선은 독립한다"는 낙서를 하고 다녔고 동경 신바시의 미군포로 강제노동소에 몰래 숨어 들어가 담배갑에 영어로 "일본은 망한다, 너희들은 곧 집으로 돌아간다, 조선은 독립한다"는 쪽지를 전달하기도 하셨단다.
1944년 1월 졸업과 동시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2월 중국 서주 남방의 숙현에 있는 일본군 사단에 배치 되었다. 이때 일본군에서 통역사로 있던 허씨가 자신의 방으로 선생님을 자주 초대했는데 그 방에는 일본군대 주변의 중국군 배치도가 있어 틈틈이 천인침(千人針: 배에 감고 다니던 천으로 무운을 비는 뜻에서 천 사람이 실로 수를 놓은 것이라 함)에 지도를 그렸고 마침내 6월 네 사람의 동료와 함께 목숨건 탈출을 감행한다.
북두칠성을 방향 삼아 사흘을 꼬박 걸어 허점의 중국 중앙군의 전초기지에 달했다. 이때 선생님이 탈출하면서 서주 근방의 일본군 배치상황이 중앙군에 알려졌고 이를 통해 중앙군이 일본군 철도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6개월간 남양의 중국 중앙군의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른 일본군부대로부터 탈출해 오신 장준하선생, 전 고려대 총장이셨던 김준엽선생, 그리고 오늘날까지 절친한 친우가 되신 뉴욕 민족통일학교의 윤영무선생님을 만나 교분을 나누게 된다.
당시 그곳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일제의 잔학과 조선독립을 주제로한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곳의 중국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며 선생님은 그 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 듯 하였다.
그후 중군군의 협조하에 44년 11월 22일 장준하선생, 김준엽씨등의 학병출신과 일반독립운동가 53인이 남경을 떠나 72일간의 장정 끝에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된다. 이날이 45년 1월 31일.-정명선생님외 두명의 동지분들이 편집인이 되어 <장정 육십리 한광반(韓光班) 학병 33인의 항일투쟁기>이란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그 속에 당시의 활동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임정에서 "주석 판공실 서기"의 직책을 맡으시고 외교문서 전달작업과 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을 주로 하셨다. 당시 중국 중앙방송의 통신선을 빌어 우리말로 북경, 상해, 남경등지에 방송을 했는데 주된 내용은 태평양전쟁의 속보와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알려 조선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독립운동에 한층 일어설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었다 한다.
방송도중 감정이 북받쳐 방송이 중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다.
임정시절도 같이 지내며 장준하, 김준엽선생과 꾸준히 친분을 나누고 격없는 사이가 되셨다며 장준하선생과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까끔씩 만나 정치에 대해 토론하셨고(이때 감시를 피해 계동의 어느 뒷골목에서 만나 그냥 선 채로 한시간 가량 이야기하다 헤어지곤 하셨다한다) 작년엔 한국에 나가 김준엽선생을 만났는데 김씨가 대한민국이 임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하여 화가 나서 논쟁을 하기도 하셨다 한다.
김구선생의 인상에 대해 육중한 체구에 항상 과묵하시며 위엄으로 여러 사람을 압도하셨다면서 그분은 조국의 독립이 되면 조국의 문지기라도 되겠다던 분이셨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임정의 선발대가 되어 귀국을 위해 9월 30일 중경을 떠나 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했는데 양쯔강의 기뢰 제거작업으로 인해서 곧장 오지를 못하고 그곳에 남아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장군의 부관이 되어 상해지역 조선동포들의 안보와 교민업무등을 돌보다가 46년 3월 2일 미군 배를 타고 마침내 3월 10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귀국하여 경교장에 계시던 김구선생의 비서로 지냈고 이승만과 김성수의 친일세력들의 득세에 대항코자 여운형, 김규식선생의 좌우합작위원회에 깊이 관계하다가 여운형, 김구선생의 암살, 이승만의 집권등으로 정치를 그만두셨다 한다.
53년경 부터는 사업을 시작, "잘 나가는" 원목 수입회사를 운영하시다 60년 부동항으로 믿었던 인천항이 결빙되면서 10척의 원목 실은 배가 묶이는 바람에 당시 돈 10만불의 손실로 순식간에 사업체를 날리고 그 후 박정희의 폭압정치에 대한 혐오등으로 1979년 미국으로 오시면서 통일운동에 관여하게 되었고 통협을 거쳐 재미동포 서부연합 회원으로 계시지만 요즘은 몸이 불편하여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셨다.
미주운동과 6.15선언 이후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 IMF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사회개혁적으로 미비한 김대중정부가 6.15라는 이정표를 세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지금 미국은 힘의 논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나 이제는 그것이 먹혀들어 갈 시대는 아니라고 하면서 어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남북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여러번 강조하셨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그 모든 것이 해방직후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하면서 남북의 칠천만이나 되는 인구는 세계적으로 보아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라면서 역사가 뚜렷하고 우수한 두뇌를 갖고 있고 외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족혼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힘으로 뭉쳐야 하고 그때는 조국통일을 방해할 자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끝으로 나성포럼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리자 국내에서도 한총련을 비롯 청년운동이 앞장서 나가면 안되는 일이 없듯이 미주에서도 나성포럼이 일을 해가는데 따라 미주운동의 미래가 걸렸다고 말씀하시고 특히 6.15이후의 시점에서 남,북,해외 청년학생들의 자주적 교류가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주역에 많은 관심이 있음을 알고 질문을 던졌더니 그냥 남들 TV보고 여가를 즐기듯이 자신 개인의 즐거움을 느껴 주역을 공부하신다면서 문장이나 언어적감각, 중국역사등에 대해 흥미가 있으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구적 환경오염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시기도 하셨다.
은근히 청담(淸談)을 즐길량으로 주역 공부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신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선생님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르치시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하신다.
그 액자에는 청무성 관무상(聽無聲 觀無象)이라 쓰여 있었다. <소리 없음도 듣고 사물 없음도 본다.> "인간이 지르는 온갖 소리와 인간이 창조한 어떤 형태와 모습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속에 흐르고 있는 본질과 이치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노라‚ 이런 뜻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자 선생님은 그냥 웃으신다.
인텨뷰 내내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신 선생님을 괴롭히는 것 같아 서둘러 정리하고 나오며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선생님이었는데 지금 저렇게 편찮은 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무심했던 마음이 부끄럽게 밀려왔다.
선생님 하루빨리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출처:통일맞이 나성포럼 소식지 200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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