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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rown>[대담]한통련 곽동의 상임고문</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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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4-10-27 00:00 조회1,5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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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포민족민주운동의 등불역할을 해 온 재일 한국민족통일운동연합(한통련)의 상임고문이자 해외운동의 지도자인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은 44년만에 남부조국을 방문하며 감회깊은 일정들을 보내고 있다. 그는 민중의 소리와 가진 대담을 통해 "광복 60년을 맞아 통일준비기구를 만들자"고 제언했다. 이 대담 내용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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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44년만에 고국땅 밟은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
"광복 60년 맞아 통일준비기구 만들자"

임은경 기자

14595-2HAN_6246.jpg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갈 수 없는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 재일 한국민족통일운동연합 회원 150여 명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작년에는 30여명, 올해는 150명. 작년에는 그저 ‘여행허가증’을 들고 온 불안정한 방문이었던 데 반해 올해는 정식 여권을 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한 조국방문.

조국 한국에 온 한통련 회원들의 감회는 말로 다하기 어렵겠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방문을 한 이가 있다. 작년까지 4대 한통련 의장직을 맡고 있던 곽동의 상임고문(74).

1960년 5.16. 군사쿠데타가 터진 이후 한국 입국을 금지당한 곽 고문은 꼭 4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한통련의 방한이 성사된 첫해인 작년 9월, 곽 고문은 방한단이 출발하던 날 아침 심장질환이 발작하는 바람에 꿈에 그리던 조국 방문을 한해 뒤로 미루어야 했다.

숙소인 장충동 타워 호텔에서 만난 곽 고문은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4.19. 기념탑, 5.18. 망월동 묘역을 방문한 데 이어 이날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참여연대 방문에 나서는 길이었다.

“조국을 방문하게된 것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개무량합니다.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딜 때 동포들이 얼마나 뜨겁게 환영해 주던지 그때 받은 감동 또한 잊지 못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정식 여권을 받아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국이 그만큼 민주화된 증거라고 생각하고,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기쁩니다.”

곽 고문은 공식 방문 일정을 마치고 오는 16일 고향인 경남 남해에 내려가 조부모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성묘할 예정이다. 4.19. 혁명 때부터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여해온 곽 고문의 운동 인생은 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승만이 만든 대한 청년회 단장이 나였습니다. 당시 일본 단체들 사이에서 4.19.를 학생들의 폭동으로 보느냐, 민주화 운동으로 보느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었죠. 한청은 지지성명을 내고 민단은 반대 성명을 냈어요.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고, 그러다 1년도 못가서 5.16.이 터졌죠.”

4.19. 혁명을 훼손하고 통일의 흐름을 차단하는 명백한 반민족적인 이 군사 쿠데타에 일본에서도 다들 격분했다. 곽 고문 등은 ‘군사 쿠데타 세력은 빨리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고 원대 복귀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그것으로 고국 방문의 길도 차단되고 말았다.

그가 겪은 어려움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관변단체인 민단 내에는 5.16. 군사정권을 맹종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곧 곽 의장에게 정치적인 박해가 떨어졌다. 그해 5월 민단 회장선거를 통해 당선된 친일 검사 출신 권일 회장은 “반 권일은 반 정부, 반 박정희, 반 국가”라는 구호를 들고 나와 민단 내 목소리가 다른 세력들을 잘라내기 시작했고, 그 1호가 곽 고문이 되었다.

이듬해인 62년에는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삼선개헌 반대, 7.4. 남북공동선언 발표 지지 및 실천 운동 등 곽 고문의 운동 인생도 계속되었다.

“60년 10월에 ‘재일 조선 청년들을 개혁하자’는 기치를 들고 결성한 재일한국청년동맹은 지금 한통련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와서도 4.19. 묘지를 제일 먼저 찾았습니다. 4.19. 정신이 우리 운동의 출발이었기 때문이죠.”

14595HAN_6280.jpg한국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은 세상이 바뀌자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었지만 타국 땅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온 한통련에게 돌아온 보상이라고는 방문 여권 발급조차 망설이는 정부의 냉대뿐이었다. 그러나 곽 고문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초연한 듯 보였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가면 국회도 그만큼 민주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예전보다 민주화되었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여권을 안 내주는 문제는 독재 정권 하에서는 당연히 그러려니 했어요.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한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우리 스스로 여권을 찢는 운동도 했었으니까요.”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고국 왕래를 불허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그나마 작년 첫 방문은 약식 여행증명서로 오던 것을 올해는 정식 여권으로 고국에 올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명예회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당한 평가를 해준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곽 고문은 말했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없으시냐고 물었더니, 곽 고문은 조국이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고 말했다.

“사실 지금도 민주화는 진행형입니다. 지난 4.15. 총선에 민주노동당이 약진한 것은 좋은 예지요. 어느 선까지 되면 민주화라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말 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곽동의 상임 고문은 14일 김대중 도서관을 찾아 김 전 대통령도 만났다. 한통련은 김 전 대통령이 유신 시절 일본에서 납치되었을 때 범인이 중앙정보부라는 것을 폭로하고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였었다.

한통련의 활동이 기폭제가 되어 김대중 구명운동은 더욱 크게 확대되었고, 하마터면 꽁꽁 묶여 수장당할 뻔했던 김대중 씨는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당시 병 치료 차 일본에 왔다가 유신을 맞은 김대중 씨는 유신이라는 박정희 영구집권체제 획책 음모에 맞서 해외에서라도 단호히 싸우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김대중 씨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이 감동한 곽 고문 등은 그와 뜻을 함께 할 것을 결의했고, 마침내 김대중 씨를 초대 회장으로 한 한통련을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동포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펜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엄혹한 독재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럼 해외에서 먼저 나서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정식으로 출범하기 보름 전인 73년 7월에 열린 준비위원회 참석을 마지막으로 초대 김대중 회장은 한국 정부에 의해 납치되고 말았고, 한통련은 적극적인 구명 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살아난 김대중 씨는 대통령이 되어 마침내 우리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치르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우리 민족 정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공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죠. 따지고 보면 한통련이 고국 방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6.15. 공동선언에 힘입은 바가 크지요.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중에 우리 문제를 풀지는 못했지만 6.15. 공동선언이 만들어 낸 민주화 분위기가 그 역할을 한 겁니다. 또 남북의 대립, 대결 관계가 공동선언을 계기로 명실공히 화해, 협력의 관계로 전환되지 않았습니까.”

14595-1HAN_6254.jpg한통련은 앞으로 한반도 전쟁을 막고 통일에 기여하는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곽 고문은 말했다.

“밖에서 한국 사회를 볼 때는 민주주의도 크게 진전되었고, 통일도 훨씬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의 먹구름 역시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민주주의도 없고 통일도 없죠. 지금 현재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을 막고 민족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막으려면 온 겨레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전 평화 운동에 온 힘을 실어야합니다.”

우리 나라가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내년 광복 60돌을 어떻게 맞는가도 중요하다. 내년에 통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60이라는 햇수는 중요한 고비이기 때문에 ‘우리는 통일 반드시 한다’ 하는 성명이라도 발표해야 한다고 곽 고문은 생각한다.

“광복 60년을 맞아 남북이 참여하는 통일 국가를 준비하는 기구를 세웠으면 좋겠어요. 해외 참여는... 단체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할 수 있죠. 우리는 응당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한 단체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지만 그것은 논의의 여지가 더 있을 것 같네요.”

곽 고문은 마지막으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그 나라는 흥하는 나라가 된다”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가보지도 못하는 조국을 위해 칠십 평생을 바치고도 조국이 잘 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깨끗해 보였다.


[출처:민중의 소리 2004년10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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