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은택 고문 한통련장으로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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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02-24 22:08 조회1,9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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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을 자주민주통일운동에 바치다 4일 병환으로 68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김은택 고문의 장례식이 지난 11일 도쿄도 아라카와구 마치야에서 한통련장으로 엄수되었다. 장의에는 각지에서 한통련 회원, 한청과 민주여성회, 학생협 회원들이 참가했으며 고인과 친분이 있던 일본인 등이 다수 참석하여 고인과 마지막 작별을 했다.
<##IMAGE##> 경력 소개를 한 후 곽동의 상임고문은 "고 김은택 동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 조직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이며 강한 신념을 가진 투사"였다고 말하고 "투쟁의 업적은 한통련과 한청, 그리고 우리민족 통일운동사에 새겨져 후배들에게 전해질 것이다"라고 조사를 했다.
김지영 민주여성회 회장, 문세현 한청 중앙본부 위원장이 회원단체를 대표하여 조사를 했다.
일본인 우인을 대표하여 요시마츠 시게루 목사는 김 고문과 군사문제 연구회를 함께 한 것을 회상하면서 너무나 빠른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에는 미국, 유럽을 비롯하여 일본각지에서 보내온 추도문과 조전이 소개되었으며 고인의 인맥의 넓음을 보여주었다.
참가자들은 김 고문에 흰 카네이션을 헌화하고 명복을 빌었다.
마지막에 유족을 대표하여 장남 김영찬씨, 장의위원장 김정부 한통련 의장이 참례자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를 했다.
곽동의(한통련 상임고문)
고 김은택 동지! 사람의 수명은 다 같지는 아니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내가 동지의 영정 앞에서 고별사를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소.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고 너무나 애석하고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동지의 영정을 바라보니 왕년의 동지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동지는 재일한국청년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아온 청년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한청 오사카본부위원장을 맡았던 1960년대 초반부터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그 기간은 폭풍우가 연속 휘몰아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자주 민주 통일의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여 한일회담 반대투쟁, 반독재 민주화투쟁, 3선개헌반대투쟁, 입관법반대투쟁 등을 과감히 벌여 그 투쟁 속에서 많은 청년들을 애국자로 키워내었습니다.
특히 동지는 역사적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그 성명을 지지 환영하는 대회를 조청과 함께 도쿄를 비롯한 일본각지에서 개최하여 재일동포사회에 통일기운을 높이는데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지의 애국심과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은 한민통 한통련의 핵심간부로 사업하면서부터는 더욱 강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동지는 한민통의 사무차장, 조직국장, 선전국장, 편집국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 구출운동을 비롯하여 반독재 민주화와 반미반전 평화옹호를 위한 투쟁을 정열적으로 벌여 민족민주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한민통이 한통련으로 개편된 뒤에는 사무총장과 부의장이라는 더 무거운 직책을 맡아 통일의 시대를 개척하는데 구슬땀을 흘렸으며 마침내 역사적인 6·15시대가 열리게 되자 동지는 불편한 몸을 돌보지 않고 통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참으로 고 김은택 동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 조직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강한 신념을 가진 투사였습니다.
그러한 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동지는 멀리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들은 동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동지가 남긴 투쟁업적은 한통련과 한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아로새겨져 후대들에게 길이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동지는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이제 조국통일은 거역할 수 없는 민족사의 흐름으로 되고 있으며 통일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동지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통일축제를 거족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고 김은택 동지! 이제는 모든 괴로움 다 털어 버리고 고이고이 쉬십시오.
2005년 2월 11일
<##IMAGE##> 경력 소개를 한 후 곽동의 상임고문은 "고 김은택 동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 조직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이며 강한 신념을 가진 투사"였다고 말하고 "투쟁의 업적은 한통련과 한청, 그리고 우리민족 통일운동사에 새겨져 후배들에게 전해질 것이다"라고 조사를 했다.
김지영 민주여성회 회장, 문세현 한청 중앙본부 위원장이 회원단체를 대표하여 조사를 했다.
일본인 우인을 대표하여 요시마츠 시게루 목사는 김 고문과 군사문제 연구회를 함께 한 것을 회상하면서 너무나 빠른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에는 미국, 유럽을 비롯하여 일본각지에서 보내온 추도문과 조전이 소개되었으며 고인의 인맥의 넓음을 보여주었다.
참가자들은 김 고문에 흰 카네이션을 헌화하고 명복을 빌었다.
마지막에 유족을 대표하여 장남 김영찬씨, 장의위원장 김정부 한통련 의장이 참례자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를 했다.
곽동의(한통련 상임고문)
고 김은택 동지! 사람의 수명은 다 같지는 아니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내가 동지의 영정 앞에서 고별사를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소.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고 너무나 애석하고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동지의 영정을 바라보니 왕년의 동지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동지는 재일한국청년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아온 청년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한청 오사카본부위원장을 맡았던 1960년대 초반부터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그 기간은 폭풍우가 연속 휘몰아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자주 민주 통일의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여 한일회담 반대투쟁, 반독재 민주화투쟁, 3선개헌반대투쟁, 입관법반대투쟁 등을 과감히 벌여 그 투쟁 속에서 많은 청년들을 애국자로 키워내었습니다.
특히 동지는 역사적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그 성명을 지지 환영하는 대회를 조청과 함께 도쿄를 비롯한 일본각지에서 개최하여 재일동포사회에 통일기운을 높이는데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지의 애국심과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은 한민통 한통련의 핵심간부로 사업하면서부터는 더욱 강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동지는 한민통의 사무차장, 조직국장, 선전국장, 편집국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 구출운동을 비롯하여 반독재 민주화와 반미반전 평화옹호를 위한 투쟁을 정열적으로 벌여 민족민주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한민통이 한통련으로 개편된 뒤에는 사무총장과 부의장이라는 더 무거운 직책을 맡아 통일의 시대를 개척하는데 구슬땀을 흘렸으며 마침내 역사적인 6·15시대가 열리게 되자 동지는 불편한 몸을 돌보지 않고 통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참으로 고 김은택 동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 조직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강한 신념을 가진 투사였습니다.
그러한 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동지는 멀리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들은 동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동지가 남긴 투쟁업적은 한통련과 한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사에 아로새겨져 후대들에게 길이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동지는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이제 조국통일은 거역할 수 없는 민족사의 흐름으로 되고 있으며 통일의 새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동지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통일축제를 거족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고 김은택 동지! 이제는 모든 괴로움 다 털어 버리고 고이고이 쉬십시오.
2005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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