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집은 5공의 조직적 ‘납치범죄’였다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5년 10월 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강제징집은 5공의 조직적 ‘납치범죄’였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06-03 03:31 조회1,880회 댓글0건

본문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을 딛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 그 서슬 퍼런 철권통치 시대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작정 군대로 끌려갔다. 1980년 9월과 81년 10월 포고령 위반자와 무림사건 관련자들이 학사징계를 받은 뒤 ‘특수학적변경자’로 분류돼 강제 징집됐다. 81년 12월부터는 학내 시위 참여·동아리 활동 등을 이유로 경찰서 유치장, 안기부 조사실에서 군 입대를 강요받았다. ‘특수자원자’ 명목이었다. 입영에 동의하면 내무부 소속 담당 형사가 군부에 직접 인계했고, 입대에 필요한 모든 절차는 문교부와 각 대학 당국, 병무청이 나서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부모에게 입영 사실을 알리고, 휴학 처리 등 학적을 변경하고, 시쳇말로 강제 징집은 ‘원스톱 행정 서비스’의 시초이자 총아였다.

그동안 공문서 공개 거부로 전모 규명 안돼

강제 징집된 ‘특수자원자’들은 예외 없이 GOP(일반전초·general outpost)나 백령도 등 최전방 도서벽지 부대로 끌려갔고, 보안사령부의 일상적 감시와 취조, 사상교육, 병영의 구타와 욕설 속에서 버텨내야 했다.

80~83년까지 정부가 인정한 강제징집자 수만 447명. 1천명은 족히 넘는다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다. 더욱이 82년 여름부터 군부대 화장실 등에서 전두환을 비방하는 낙서가 등장한 데 분개한 대통령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령부는 강제 징집 대상자들을 상대로 한 사상 개조인 ‘녹화사업’을 실행했다. 447명의 강제징집자 가운데 265명이 녹화사업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 품에 안겼다. 정성희(연세대·82년 7월23일 사망), 이윤성(성균관대·83년 5월4일 사망), 한영현(한양대·83년 7월2일 사망), 최온순(동국대·83년 8월14일 사망), 김두황(고려대·83년 6월8일 사망), 한희철(서울대·83년 12월11일 사망).

대한민국 대학생을 옥죄던 강제 징집과 녹화사업의 부조리는 그러나 아직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제1,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군 의문사와 함께 강제 징집과 녹화사업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두 차례나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관련자들의 파편적 진술, 대학 당국의 부역 행위를 방증하는 자료 등 간접 증거를 통해 정부 차원의 공모 사실이 단편적으로 드러났을 뿐, 전모를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강제 징집을 공모·계획·실행한 국가기관들이 관련 공문서 공개를 끝까지 거부한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최근 군 관련 과거사 규명을 위해 의욕적으로 자료를 발굴 중인 군 당국으로부터 80년대 초 젊은이들에게 ‘공포의 손길’을 뻗쳤던 강제 징집이 국방부, 내무부, 문교부, 보안사, 병무청, 안기부 등 전두환 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죄 행위였음을 입증하는 문서를 단독 입수했다.

<한겨레21>이 입수한 문서는 △국방부 장관이 내무부 장관에게 보낸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81년 12월1일) △이 방침을 각 부대에 하달한 육군본부의 군사대외비(81년 12월10일) △국방부 장관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핵심 관계자들의 사인이 담긴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 수정 하달 군사대외비(81년 12월16일) △국방장관이 보안사에 보낸 방침 수정 군사대외비(82년 1월29일) △징집 대상자 범위 검토 대책회의 소집 건의서(83년 12월14일) 등 모두 5건이다.

합법적 절차 없이 최우선적 입영 조치

먼저 81년 12월1일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서정화) 내무부 장관에게 보낸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인사 916,6-673)은 80년대 초반 자행된 강제 징집의 총체적 교본 성격을 띠고 있다. 운동권 학생을 ‘특수자원자’ 명목으로 강제 징집한 근거가 된 이 문건에는 목적, 대상, 부대 배치 기준, 배치 후 관리 방침뿐 아니라 정부 각 부처의 구체적인 역할 분담과 시행 절차까지 자세히 담겨 있다.

이 문서는 일단 특별조치 방침의 목적을 ‘학원소요 관련 대학생에 대하여 즉각 입영 조처함으로써 사회 안녕질서 유지에 기여한다’고 밝혔다. 입영 대상은 ‘대학(대학원 및 전문대학생 포함) 재학 중 내무부 장관이 결정한 소요 관련자 전원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전두환 정권 유지를 위해 경찰이 검거한 모든 대학생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킬 목적으로 추진된 정책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문서는 또 이 방침에 해당되는 입영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군 입대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징병적령(나이), 징병검사 실시 등 합법적인 절차, 군 면제사유에 해당되는 신체상해 여부, 수형사유 소집면제 여부 등에 ‘관계없이 최우선적으로 입영 조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 각 부처에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조직적인 납치 행위를 자행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80년대 초 강제 징집 과정에서 허약한 신체, 질병 때문에 현역으로 입대할 수 없는 대학생들이 무작정 군에 끌려간 것은 바로 이런 방침에 따른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문서는 강제 징집 대상자들에 대해 ‘육군은 전원 GOP 부대’, 해군은 ‘서해 5개 도서지역 및 함상’에 배치하고, 부대 배치 후 ‘별도 신원파악 및 복무태도를 관찰’ ‘법규 위반시, 군법회의 회부 처리’하라는 관리지침까지 포함돼 있다. 시위 관련 학생들은 모두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에 배치할 뿐 아니라, 병영 내부에서 상시적인 감시 체계가 가동됐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특히 그동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 진술 등을 통해 그 실체가 일부 드러난 정부 각 부처의 조직적·체계적인 강제 징집 공모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각 부서 시행절차’에 구체적인 임무와 역할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 시행절차에 따르면 내무부(장관 서정화)와 치안본부(본부장 유흥수)는 사실상 강제 징집의 최선봉이자 행동대로 최고의 악역을 도맡은 것으로 돼 있다. △입영 대상자의 신병 확보 △병무청에 군 입영 대상자 명단 및 입영 예정시기 통보 △입영 대상자를 국방부가 지정한 각 부대로 호송·인계하는 역할이 내무부에 부여된 것이다. 이 문서는 경찰이 강제 징집 대상자를 인계할 부대까지 명시해놓고 있다. 서울·인천-1, 3군 보충대, 경기-3군 보충대, 강원도-1군 보충대, 충청남·북도-32사단, 전북-32사단, 전남-31사단, 대구·경북-50사단, 경남-39사단, 부산-2관구, 제주·진주·마산·창원-해군 교육단으로 인계하라는 것이다.

내무부가 최선봉, 병무청은 연락책

특히 내무부가 시위 학생 조사 과정에서 입영 대상자로 분류된 자에 대해서 입영지원서를 받아 입영 부대에 제출’하고, ‘입영 대상자의 보호자에게 입영 사실을 통보’하는 임무까지도 부여했다. 학내 시위와 관련돼 경찰에 검거된 대학생의 경우 부모의 동의나 상의도 없이 조사 단계에서 입영지원서 작성을 강요해 곧바로 군부대로 끌고 간 뒤 보호자에게 알리는 ‘야만적 납치 방식’으로 강제 징집이 이뤄진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당시 강제 징집된 피해자들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해 치안본부, 시경, 각 경찰서 조직이 이 방침에 따라 조직적으로 납치형 강제 징집을 진행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병무청(청장 방경원)은 원활한 강제 징집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실무 및 연락 등 중계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내무부의 입영 대상자 명단 접수 즉시 국방부(인사국)에 입영 발생 지역, 인원 및 예정시기 통보 △국방부 지시에 따라 내무부(치안본부)에 입영 부대 및 일시 통보 △입영자 연명부 및 병적기록카드를 작성해 입영 부대에 인계하는 게 병무청의 핵심 임무로 부여된 것이다.

국방부는 병무청장으로부터 시위 학생에 대한 입영사유 발생 보고를 접수하는 즉시 육군 및 해군본부(인사참모부장)에 입영 부대, 인원 및 일시를 지시하고, 의무사령관은 입영부대장 요청 때 입영 대상자의 신체검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미 강제징집자들의 배치 부대까지 구체적으로 확정한 상태에서 요식행위로 신체검사를 진행한 점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보안사령부가 강제징집자 인수, 부대 배치 뒤 감시, 사상교육 등의 사후 통제 업무를 전담한 사실도 문서를 통해 명백히 확인됐다. 이 문서에에는 보안사령부가 △입영 부대에서 대상자 인수·인계시 입회해 입영 부대장 요청시 필요한 지원 △부대 배치 뒤 대상자의 동태 파악 및 배치 부대장에게 필요한 조언 등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81년 12월10일 작성된 육군본부 군사대외비 문서는 국방부의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이 육군본부 예하 연대단위 부대까지 하달됐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육군참모총장은 군사대외비로 분류해 국방부 특별조치 방침을 참모총장 서명관인 부관감 준장 박찬보 명의로 연대단위 부대에 하달하면서 ‘최우선책으로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학적변경 조치 등 담당한 문교부

<한겨레21>이 확보한 세 번째 문서는 81년 12월16일 국방부가 다시 장관 명의로 각 군부대 및 정부 부처에 12월1일 하달한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을 일부 수정해 내려보낸 것이다. 수정된 방침은 ‘특수자원자’로 강제 징집시킬 대상자를 확대하고 교육당국인 문교부에 강제 징집과 관련한 임무를 부여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문서는 일단 입영 대상자를 ‘대학(대학원 및 전문대학생 포함) 재학 중 관련부서장이 결정한 소요 관련자 및 병원집체훈련 중 소요 주모자 전원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내무장관이 강집 대상자를 결정하도록 한 12월1일 방침이 경찰에 연행된 시위 관련 학생으로 제한되는 데 따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강제 징집 대상자 결정권을 ‘관련 부서장이 결정한 소요 관련자 및 병영집체훈련 중 소요 주모자’로 넓힘으로써 문교부나 대학 당국자가 강제 징집 대상자를 물색해 보고하고, 대학생의 병영집체훈련을 떠맡은 관할 부대장, 시국 관련 구속자를 관할하는 법무부 당국자 등이 강제 징집을 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때문이다.

이 문서는 또 내무부가 입영 대상자의 신병을 확보해 문교부(장관 이규호)에 명단을 통보하면 문교부가 이들에 대한 학적 변경 조치를 취하고, 병무청에 군 입영 대상자 명단 및 입영 시기를 통보하도록 했다. 국가 교육정책을 책임진 문교부가 경찰서 조사실에서 강요에 못 이겨 입영지원서를 쓰고 군에 끌려가는 대학생들의 휴학서류 등 학적변경 조치를 취하는 반교육적 행위의 주구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방침은 당시 철저하게 실행됐다. 지난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강제 징집 등 학원 통제에 관한 대학자료 조사’ 결과 80년대 문교부는 이른바 ‘관계기관 학원대책회의’를 주관하고 전국대학 총학장회의, 교무·학생처 과장회의 등을 소집해 대학당국에 학생운동 관련자에 대한 징계 조치를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의문사위가 확보한 6만여쪽에 이르는 대학당국의 관련 문서에 따르면 문교부의 이런 통제에 따라 각 단과대-학과-지도교수 순으로 계통을 밟아 운동권 학생을 관리하고, 이른바 문제학생들을 A, B, C 등급으로 분류해 정보기관에 보고하는 등의 강제 징집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었다.

82년 1월29일 국방부 장관이 보안사 등에 보낸 네 번째 군사대외비 문서는 강제징집자들의 부대 배치 기준을 일부 변경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애초 ‘전원 GOP 부대로 배치’하는 육군은 ‘전원 GP(GUARD POST·감시초소) 및 GOP 부대’로, ‘서해 5개 도서 지역 및 함상 배치 도서지역 및 함상 배치’하던 해군은 ‘강화도 연안 함상 백령도, 연평도 지역’으로 배치 기준을 바꾼 것이다.

<한겨레21>이 확보한 또 다른 문서인 징집 대상자 제한범위 검토회의 문건은 전두환 정권이 청와대와 안전기획부까지 참여한 가운데 강제 징집 관련 대책회의를 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83년 12월14일 국방부 차관 주재로 국방부 316호 정책회의실에서 열린 회의 참석 범위가 육군·해군 인사참모부장 및 법무감, 병무청 징모국장, 국방부 인사국장과 특검단장, 합동참모본부 본부장뿐 아니라 청와대 관계자, 안기부 관계자, 보안사 관계자 등으로 돼 있다. 실제 이 회의에는 안기부 학원과장, 보안사 2처장, 그리고 청와대에서 박○○ 장군이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이규호 전 문교부 장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청와대·문교부·국방부뿐 아니라, 안기부·보안사·병무청 등이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구성했고, 특히 청와대 관계자와 안기부 1차장, 보안사 2처장, 치안본부장 등이 주도한 ‘5인위원회’가 학원통제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러나 조사 직후인 지난해 3월 이 전 장관이 사망했고, 이를 입증할 문서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군당국 핵심 관계자들의 서명 있다

한편, <한겨레21>이 확보한 4건의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 문서 가운데 이 문서의 작성과 배포·실행에 적극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국방부 인사국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핵심 관계자들의 서명이 담겨 있어 80년 강제 징집 정책 수립 및 시행 과정의 실체를 밝히는 데 상당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1, 2기 의문사위에서 강제 징집 및 녹화사업 조사에 참여했던 현정덕 전 조사3과 2팀장은 “의문사위 조사 당시 관련자 진술, 기무사(과거 보안사)의 요약보고서 등을 통해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문서 일체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사람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는 등의 이유로 끝내 공개를 거부했다”면서 “문서 기안 담당관 등 실무자들의 이름을 추적하면 진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진정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국방부가 주도하는 군 과거사위원회도 최근 자료 발굴 및 진상 규명에 발벗고 나섰다. 야만이 판친 ‘납치형 강제 징집의 시대’, 그 진실이 언젠가 만천하에 드러날 날을 기대하며 <한겨레21>은 관련자들이 제보와 고백에 나서는 용기를 보여줄 것을 호소한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