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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애국지사 김병권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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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5-09-23 03:09 조회2,7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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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권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 21일 오후 2시께 향년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김 고문은 평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김 고문은 1998년 출소 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생활을 해왔다.

<##IMAGE##>고인은 1921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일제의 징병을 거부하며 만주로 건너간 후 45년 조국 광복과 동시에 고국으로 돌아와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61년 남북학생회담 추진과 관련해 첫 옥고를 치른 고인은 이후 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등으로 장기간 투옥되었다가 88년 형집행정지로 출소 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에서 활동을 했다.

고인은 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돼 3년 6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98년 형집행정지로 나왔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범민련과 통일연대 고문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동한 고인은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생활을 해오다 이날 강남 삼성병원에서 타계했다.

고인의 장례는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지며, 장례위원장은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과 남민전 관련 인사를 대표한 안재구 선생, 한상렬 통일연대 상임대표가 맡고, 호상은 전창일 선생이 맡는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박윤수 씨와 아들 정호 씨, 딸 미희, 경희, 난영 씨, 손자 민과 완이 있다.

고인의 별세 소식을 접한 각계 인사들과 북.해외 동포들의 조문과 조의 표명이 잇따르고 있다. 범민련 북측본부와 공동사무국, 재일 조선인본부, 재중 조선인총연합본부 등에서 조사가 발표되었으며, 국내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 장례일정: 발인 및 영결식 (23일 오전 11시, 강남 삼성병원 영결식장)
- 빈 소: 강남 삼성병원 지하 1층 16호실(지하철 3호선 일원역 1번 출구, 셔틀버스)
- 문 의: 범민련 남측본부 02)712-8603/ 강남삼성병원02)3410-3151~3

<영결식 순서>

_ 추모의례
_ 고 김병권 선생 약력 소개
_ 조사: 안재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_ 추도사: 이규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_ 추도사
_ 추도시: 이학영 전국 와이엠시에이 사무총장
_ 조가: 노래패 <휘파람>
_ 유족인사
_ 호상인사
_ 분향 및 헌화

<고인의 약력>

1921. 12. 5 경북 대구시 동구 두산동에서 태어남
1935. 5. 3. 대구 수창 보통학교 졸업-봉화군 춘양 우편국 근무
1937. 전기 통신사 검정시험 합격
1938.2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긴자 우편국 근무
1942-45.8 일본에서 강제징집을 피해서 민주로 건너감
만주 신경소재 금구 제작소, 액체연료 주식회사 등 근무
1945.10 조국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옴
1946.3. 대구 대중일보 기자
1946 쌀공출등 부당성기사와 관련 미군정과 대립하다 폐간 당함.
1946 대구 10.1 항쟁 등을 통해 점령군으로서 미군에 대한 적개심 갖게 됨
박윤수 씨와 결혼
1960. 4.19혁명 후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
1961.5. 남북학생회담 추진 시민결의대회 조직 관련 박정희 군사정권에 체포, 특별범죄처벌에 관한 임시조치법(국가보안법 대행이었음)으로 구속되었으나 6개월 만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
1964. 이른바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수배
1968.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권재혁 동지들과 체포, 징역 5년 선고
1973. 9.5 만기출소
1975. 사회안전법 발효로 신형식 동지들과 지하활동
1976. 2.29 이재문, 신향식 동지와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1976. 3. 3. 반공법위반으로 체포, 징역 3년 선고
1979. 4. 12. 형기만료 되었으나 사상전향 거부로 청주감호소에 감호 처분
1979. 10. 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감호소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
1980. 12. 대법원에서 15년형 확정 판결
1988. 12. 21. 대통령 특별사면 형집행정지로 출소
1989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에 적극 참여
1993. 12.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준비위 가입
1994.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준비위 실행위원
1995. 2.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중앙위원, 재정위원장
1995. 11. 2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사건으로 구속- 3년 6월 선고
1998. 8. 15 형집행정지로 출소
2002. 6.15공동선언실현과 한반도 평화를위한 통일연대 고문
2003.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고문
2003. 뇌졸증으로 쓰러져 입원 치료
2004. 안산 행복의 집에서 투병
2005. 9. 21 오후 2시 30분에 타계, 향년 84세.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추도사>

통일애국지사 고 김병권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우리는 깊은 슬픔 속에 통일애국지사 고 김병권선생을 보냅니다.
조국통일의 길에 아로새겨진 선생의 피와 땀, 범민련 남측본부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헌신과 노고를 기억하기에 그 애석함은 더욱 크기만 합니다.

고 김병권선생께서는 미국과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한생을 조국통일운동, 범민련운동에 헌신해오신 참된 애국지사이셨습니다.

선생께서는 61년 5.16군사쿠데타로부터 76년, 79년 남민전을 경과하며 무려 30여년에 걸친 혹독한 고문과 투옥의 세월 속에서도 자주통일의 신념을 결코 놓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의 신념은 조국통일운동의 구심체, 범민련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범민련 결성초기부터 지금까지 선생의 범민련운동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95년 범민련 성원 전원구속이라는 어려운 고비로 또다시 투옥되었으나 선생께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범민련 사수, 강화를 위해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하셨습니다.

참으로 선생께서 걸어오신 길은 수난의 길이자 희망의 길이었으며 통일의 길이자 범민련의 길이었습니다.

김병권 선생이시여!

이제 선생께서 그토록 바라던 6.15시대, 자주통일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모든 민족구성원들이 ‘우리민족끼리’의 기치 아래 반미의 기치 아래 굳게 뭉치고 있습니다.

승리는 우리 민족의 것이며, 패배는 미국의 것임이 더욱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석함을 뒤로 한 채, 선생께서 한 몸 바쳐온 자주통일의 길을 기필코 실현하기 위한 굳은 각오를 다집니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해, 선생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범민련 강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김병권 선생이시여, 연방통일조국에 부활하소서.


안재구 장례위원장 <조 사 >

오늘 우리는 우리 통일운동의 선배이시고 언제나 우리들의 투쟁의 앞장에서 서 계시며 젊은 후배들에게 이신작칙 하시던 김병권 동지를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보내는 고인의 영결식에 서 있습니다.

동지는 1921년 대구시에서 가난한 도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시대에 청소년의 세월을 자라오셨습니다. 8.15해방을 맞아 자주독립의 새로운 희망을 안으리라는 꿈에 부풀기도 했지만 일제를 대신하여 들어온 미제의 새로운 모양의 식민지의 대리정권인 이승만의 예속정권에 의한 칼바람의 독재 폭압이 판을 치는 세상으로 바뀌어버리자 모든 희망을 접고 그저 가난한 서민의 삶 속에서 부모와 가족을 지키는 가난한 서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미제 식민지정책의 본질에서 나오는 부패, 부정, 빈곤, 폭력으로 우리민족의 삶이 만신창이로 찢겨져나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 대한 다할 수 없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가슴 두드리고 살아오던 중에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동지가 살던 대구시 남산동 바로 곁 당시 대명동 사거리로 모여든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 동지가 내면 깊이 잠재해 오던 정의감에 불을 댕기기 시작했으며, 이 투쟁은 마침내 3.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의 시위로 이어가고 마침내 4.19의 봉기로 이어나갔습니다. 경무대 앞 효자동 거리의 이승만의 경찰과 폭력깡패들의 무자비한 살인 만행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항거하던 10대 청소년의 항쟁을 보고 동지는 결연히 일어나 민주주의를 위한 4월의 민중봉기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미제는 당황하여 친미 숭미의 사대주의자 허정을 내세워, 그에게 과도정권을 맡기고 급히 선거판을 벌여 민주당 정권을 만들어 일단 이승만의 폭력정치를 뒤로 물리고 일정정도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정치가 보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맞아 김병권 동지의 정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4.19시대를 맞아 초기에 사회대중당에 참여하면서 그의 정치적 의식이 급성장하였고, 우리민족의 불행에서 그 최대근원은 미제의 예속정권에 의한 식민지통치이며 그 물리적 역량이 이른바 주한미군이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의 분열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의 최대불행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김병권 동지는 당시 최백근 동지가 지도하는 「사회당」에 참여하여 대구지부에서 활동했으며 그리고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창하는 조국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제는 4.19민중봉기 이후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 밑에 「학생민통련」 등을 비롯한 여러 통일운동단체가 조직되고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이 거세차게 확산되자 그들이 몰래 키우던 일제 때 일제의 독립운동 학살에 참가했던 친일역적 박정희를 내세워 이른바 5.16쿠데타를 일으켜 우리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군사정권을 만들어내고 통일운동가, 민주운동가, 인권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여 이른바 혁명재판이라는 재판놀음을 벌였습니다. 이때 김병권 동지도 체포되어 처음으로 반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병권 동지는 투쟁의 불길이 한번 붙자 그가 원래 지녔던 정의감의 기름에 번져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미제의 부추김 밑에 이른바 「한ㆍ일회담」이라는 놀음을 벌여 나라의 역사를 팔아넘기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인 「6.3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의 실패를 바라보게 된 동지는 앞으로의 투쟁을 위하여 튼튼한 지도부를 형성하고 광범한 통일전선을 구축해야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였고, 동지의 이러한 인식은 곧 실천으로 이어져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나 이들 활동이 초기에 발각되어 1968년 7월에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들의 실체를 밝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석방하지 않고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없는 조직을 조작하여 동지와 그 일동에게 중형을 들씌웠습니다. 김병권 동지는 여기에서 5년의 그 무지막지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1973년에 감옥을 나온 동지는 그때부터 직업적 혁명가로 살았습니다.

오직 민족해방과 민중해방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이었으며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숨 쉬는 것도 오직 이에 대한 일념이었습니다. 이로써 동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삶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정신을 놓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도, 그 죽음이라는 뜻도 모르고 계시는 동지의 사랑하는 아내의 병환은 이러한 우리 혁명가, 통일운동가들의 고난을 보는 하나의 표상이라 하겠습니다. 큰 딸 미희, 둘째 딸 정희, 셋째 딸 난영, 이들 세 딸은 아버지의 이러한 삶에서 소녀의 꽃다운 삶을 접어야 했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또한 얼마나 소외면서 자랐겠습니까. 하나 아들인 정호는 항상 학비를 구하기 위해 애쓰시는 어머니의 주름을 보고 얼마나 애달파하면서 자랐겠습니까.

동지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질긴 인연의 끈으로 맺어졌다고 하면서도 여기 모인 아버지의 동지들인 우리들 또한 감옥살이 하느라고 이들 4남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주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 모두 학업을 닦고 열심히 성장하여 이제 모두 든든하고 아리따운 짝을 찾아 우리 사회의 튼튼한 일군으로 되었으니 여기 서 있는 아버지의 동지들은 마음 든든합니다.

조사를 읽는 저는 김병권 동지와는 좀 늦게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준비위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남민전」은 이재문 동지를 필두로 하여 고 김병권 동지, 신향식 동지 세 분이 1976년 2월 29일에 결성하였습니다. 결성 직후 얼마 안 되어 동지는 피검되어 반공법으로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4월에 이재문 동지를 만나 「남민전」에 관한 토의를 하고 김병권 동지에 관한 일 그리고 피검되었다는 일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9월에 입회 서약을 하고 동지의 후임으로 중앙위원으로 피선되고 이때부터 저도 직업적 혁명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동지는 3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우리들은 1979년 9월에 출소할 날을 헤아리며 기다렸으나 이른바 「사회안전법」으로 청주감호소로 구금되어 감옥 밖에서 만나지 못하고, 우리 「남민전」이 노출되어 우리들이 모두 구금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온 재판정에서 첫 대면을 했습니다. 마침 우리 둘은 모두 중앙위원 급이라 바로 곁에 있어서 동지의 손을 처음으로 굳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적이 감시하는 중이라 말소리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수정을 찬 손으로 굳게 잡은 손을 통하여 흐르는 동지적 혈류를 느끼며 반가운 미소로 눈길을 마주쳤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 없어 이제 유명을 달리하여 그 따순 손을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8년 12월에 모두 석방되어 다시 통일운동 선에서 같이 싸웠으나, 저는 다시 채포되어 5년의 감옥살이, 그래서 저와 김병권 동지와의 친교는 그리 오래지는 못했습니다만 재판정에서 그와 같은 만남 이후 동지는 나에게 언제나 형과 같은 인정을 베풀었고 저도 형과 같은 동지적 정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때로는 정세 해석에서나 방법에서 이견이 있어 다투기도 하고 뜻이 맞아 가가대소하기도 하며 짧은 세월을 참 서로 인정을 느끼며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인정은 이승에서는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그 인정이 더욱 아쉬워지겠습니다.

사랑하는 김병권 동지여, 이제 동지가 그처럼 분투노력하던 조국통일운동도 승리의 날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동지가 하시던 투쟁을 우리 모두가 나누어 맡을 것이니 이승의 모든 근심을 던져버리시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훗날에 통일동산에서 만나서 이승을 떠난 모든 동지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이승에서 못 다한 정을 나누면서 살날을 기리면서 그 떠남의 슬픔을 저의 곡에 담아 동지를 보냅니다.


범민련 북측본부 <조 사>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김병권선생이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뜻밖의 비보에 접한 우리 북측본부 전체 성원들은 애석한 마음을 금치못하고 있습니다.

통일애국의 선봉부대인 범민련의 준엄하고 간고한 투쟁의 길에 자신을 깡그리 불태우며 한생을 바쳐온 선생이 세상을 떠난것은 북과 남, 해외의 범민련 성원들뿐아니라 모든 통일운동가들의 커다란 슬픔으로 됩니다.

선생은 한생을 남측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범민련 결성 첫날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범민련의 강화와 통일위업에 모든것을 다 바친 참된 애국인사였습니다.

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조국통일위업에 바친 선생의 고귀한 넋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것입니다.

우리 범민련은 선생이 생전에 바라던 대로 절대로 주저앉지 않을 것이며 힘과 용기를 가다듬고 더욱 과감한 투쟁을 벌려나갈것입니다.

김병권선생의 령전에 다시한번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


재일조선인본부 <조 사>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신 김병권 선생님께서 오랜 투병 끝에 타계하셨다는 비보에 접하여 우리들은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선생님과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고 김병권 선생님께서 한평생을 남측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을 위하여 적극 기여하신 로고와 남기신 업적은 민족통일운동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제2의 6.15시대에 들어선 오늘 선생님께서 생전에 그렇게도 바라시던 조국의 자주통일은 우리민족끼리의 공조 밑에 현실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선생님께서 민족통일의 길에 남기신 자국과 뜻을 깊이 간직하여 련방제 통일실현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해 나갈 것 입니다.
선생님께서 고이 고이 잠 드시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사무국 <조 사>

신념의 강자, 투철한 신념가이신 통일애국투사 김병권 선생님이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한 투쟁의 한생을 바치시면서 범민련을 사랑하시고 범민련을 믿으신 죄로 옥고로 마다지 않으신 또 한 분의 범민련 투사를 떠나 보내야한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615시대를 열어낸 지금, 하나된 조국을 보시지 못하고 떠나셨으니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615공동선언의 발표와 실천으로 선생님이 그토록 애타게 바라시던 허리 잘린 조국의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에 선생님과의 이별이 더욱 아쉬워지기만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사회의 민주화와 변혁을 위해 투쟁하시고 조국의 자주통일을 실천과 모범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던 선생님의 생을 되돌아봅니다.
선생님은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셨습니다. 이 분단된 조국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을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며 통일의 새 세상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였습니다.

범민련이 어려움과 시련에 처했을 때 어려운 일을 맡아나셨던 김병권 선생님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6.15기치 높이 범민련의 민족대단결 정신과 6.15공동위원회의 우리민족끼리 이념으로 굳게 단합하여 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 3대 공조로 반미조국통일운동에 매진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바치신 고귀한 헌신을 사랑하셨던 조국통일 구심체, 범민련은 615공동선언 기치 따라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투쟁하겠습니다.

선생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조 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고문, 통일연대고문
고 김병권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우리 통일겨레는 또 한분의 의지이고 사람이며 존경인 김병권 선생님을 영결하는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한평생을 모순과 기만이 가득 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투쟁하신 거룩한 선생님의 생을 가슴에 새깁니다.

6.15공도선언 5돌, 조국해방 60돌 축전을 거족적으로 성공시킨 위대한 ‘민족공조’ 힘은 9월 19일. 우리민족이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던 자주, 평화, 조국통일의 대로! 핵도 외세도 없는 ‘우리민족끼리’ 나라로 가는 열쇠를 받아 낸 6자회담 ‘공동성명’은 전쟁을 반대하고 자주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온 겨레와 전 세계반전반핵민중들이 쟁취한 공동의 승리에 대한 감격과 감동에 찬 기쁜 소식은 한 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다 바치신 선생님께서 받으신 최고최대의 선물로 생각됩니다.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통일연대 고문!
김병권 선생님!

선생님께서 조국통일역사와 함께하신 통일애국의 충정, 살아남은 저희들이 이어나가 기필코 백두산반도금수강산삼천리에 명실공이 ‘우리민족끼리’의 꽃이 만발한 자주민족, 평화민족을 이룩하겠습니다.

범민련 통일애국 가슴에 영면하십시오.

통일연대 조국사랑 가슴에 영면하십시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조 사>

오늘 우리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신 김병권 선생님이 별세하였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였습니다.

고 김병권 선생님은 한평생을 남측사회의 민주화와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하여 온갖 로고를 다하였으며 범민련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투쟁하신 통일애국인사였습니다.

고 김병권 선생님의 별세는 범민련통일애국운동의 커다란 손실로 됩니다.
재중조선인총련합회와 전체 재중동포들은 범민련 남측본부와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합니다.

고 김병권 선생님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김학영 와이엠시에이 사무총장 <조 시>

여기 한 사람이 가는구나.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하얀 베잠방이 걸치고 맨몸으로 맨발로
평생을 민족의 해방, 민중의 해방을 위해 일하던
한 사람이 가는구나.
한평생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면서도
결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한 사람이 가는구나.

오호라, 그리하여 이제 한 시대가 가는구나
자신의 몸을 보시하여 세상을 구제하려던,
보살의 시대, 혁명가들의 시대가 가는구나.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돈의 권력 앞에서 모두가 부복하는 비루한 세상을 두고
성스러운 영혼들이 떠나가는구나

슬프도다
우리 언제 다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처럼 석가모니처럼 게바라처럼
돈보다 사람이 소중하고
돈보다 사랑이 소중하다고 외치며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불사를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 다시 이 땅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얀 순백의 영혼들이 가는구나
영혼 없는 세상의 적막함이여
사랑 없는 세상의 공허함이여
끝없는 욕망만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시대 한가운데서
우리 언제 다시 이렇듯 위대한 영혼들을 만날 것인가
위대한 변혁의 세기 혁명의 세기를 만날 것인가

슬프도다.
김병권 선생이시여, 정말 떠나시나이까
거리거리마다 우리 함께 쏟았던 땀과 눈물과 사랑의 기억들
그 모든 것들 위에 정성들여 가꾸어왔던 우리의 소망들
아직도 다 이루지 못한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차마 눈 밟혀, 어떻게 이렇듯 떠나가십니까

님이시여
이제 당신이 꿈꾸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꿈
자립된 평화의 나라를 만들려던 꿈
가난과 소외가 사라지는 해방된 사회의 꿈
우리가 대신 지고 가겠습니다.
위대한 당신들의 삶의 길을 따라
당신의 시대를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부디 편히 눈감으소서

힘들었던 이승의 기억은 모두 버리고
아름다웠던 기억만 꽃상여에 태우고
부디 편히 가소서


김남주 시인의 시집 <사상의 거처>(창비)에 수록된 "김병권 선생님"

영문도 모르는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도 받고 재판도 받고 징역도 한 오 년 받아 겨울이면
동태처럼 언 몸을 마른수건으로 녹이면서 징역살이하다가

만기 차서 담 밖으로 나와서 한두 해 집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불시에 찾아오는 형사들만 알게 살다가

그렇게 살면서 읽을 만한 책이 없어 마르크스를 읽다가
그게 들켜 그게 죄가 되어 그것도 역적죄가 되어
고문도 받고 재판도 받고 징역도 한 삼 년 받고 징역살다가

전향하라 전향하라 전향하라……
비녀꽂이 주리틀기 물먹이기 몽둥이찜질하기……
밥 먹듯이 매를 맞으며 살다가 그러는 사이에

사회안전법인가 뭔가가 생겨 만기 채우고도 집에 가지 못하고
집에 가서 그동안 삼 년 동안 자란 손주 한번 안아보지 못하고
쇠고랑 차고 오랏줄에 묶여 압송차에 실려 감호소에 가서 살다가

그렇게 살다가 또 밖에서 무슨 사건이 터져 거기에 연루되어
고문도 받고 재판도 받고 이번에는 징역보따리도 큼직하게 받아
15년짜리 보따리를 어깨 무겁게 짊어지고
이 감옥 저 감옥 전전하면서 살다가

이제 흰머리에 검은 머리 하나 없이 징역살이하시는 선생님
내일은 며늘아기가 손주놈 데리고 면회 온다 했다며
푸른 옷도 깨끗하게 빨아 입으시고
거칠거칠한 수염도 단정하게 다듬으시고
구매 시간 기다려 과자도 서너 봉지 사서 감방 아랫목에 묻어 두고
손주 볼 생각에 잠 못 이루시는 선생님 김병권 선생님



2005/09/22 [04:52] ⓒ참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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