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태영 목사: 칠레의 진보여성 대통령-바첼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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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7-03-15 19:11 조회3,9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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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민족통신 종합]유태영 목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이며 범민련 재미본부 고문)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니콰라과에 이어 칠레의 진보여성 대통령 바첼레트에 대해 민족통신에 특별기고했다. 그는 "제국주의 본질을 캐면 우리나라 문제도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는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제국주의 세력은 작은 나라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지배해 왔는가를 파헤치기 위해 남미지역의 진보적 지도자들과 그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을 다뤄오면서 남미의 진보인물들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연재물로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 기고한 칠레 바첼레트 여성대통령과 칠레에 대한 이야기를 전재해 소개한다.[편집실]
91세의 생일을 맞은 피노체트 독재자 전 칠레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시절에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재임 기간에 발생한 모든 행위에 대해 정치적 책임이 있다“
<##IMAGE##> 그러나 피노체트는 자신이 저지른 반역적 유혈 쿠테타로 인하여 발생한 “죽음의 행렬” 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말이 없었다.
칠레대학의 정치학자 리카르도 교수는 “그의 이러한 책임 시인은 권좌에 있을 때 했어야 했다. 그는 완전한 책임을 느끼고 있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피노체트는 민선으로 당선된 아옌데 대통령을 쿠테타로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1974년부터 1990년 까지 무서운 독재를 했다. 그가 재임 기간 17년 동안에 저지른 학살 만행을 조사한 발표에의하면 실종된 1,000명을 포함해 모두 3,197 명이 살해 됐고 30,000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서 해외로 도피한 자들의 수는 70,000명에 이르렀다.
2006년 12월 10일에 91세의 나이에 피노체트는 사망했다. 피노체트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칠레 민중의 가슴에 쌓인 처절한 상처를 그대로 남겨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처렴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그저 떠나 가고 말었다. 피노체트의 사망소식이 보도되자 두 시간도 되기 전에 산디아고 시내에 있는 이탈리아 광장에 3,000 명 군중들이 단숨에 집결하여 축하의 환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와는 아주 정 반대로 대조되는 현상이 일어 났다. 3,000명이 모인 이탈리아 광장에서부터 약 2 km 떨어져 있는 다른 한 장소에서는 2,000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독재자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애도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노체트의 장례 절차에 대해서도 민심은 양분되었다. 1,600만 칠레 인구중에서 55% 는 피노체트의 장례를 국장 으로 치루는 것을 결사 반대 했다. 민족 반역자이며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응분의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영국으로 도망가 호화롭게 살다가 돌아 온 민족의 배반자를 어찌하여 국장으로 대우를 해야하는가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45%의 수구 친미 보수적인 칠레인들은 딴소리를 했다. 전직 대통령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이 온당하다 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신임하고 후원을 해준 반공주의 대통령이 아니었는가? 어찌하여 그의 공로를 무시하려 하는가 라고 하면서 국장으로 모실것을 주장 했다.
축하와 애도,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칠레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독재정권이 남긴 상처의 후유증이다 아물지 못 하고 아직도 민중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기야 그 후유증의 근원은 바로 미국 아닌가? 미국이 여전히 칠레에 뻗치고 서 있는 한 절대로 그 후유증은 아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보는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부족하면 퇴행적인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처럼 주어진 기회 마저도 놓처 버리고 만다.
칠레의 입장이나 한국의 입장은 비슷하다. 한국에서 아직도 그 옛날의 독재자 “ P 사모회” 또 무슨 “ C 사모회” 같은 것이 여전히 있는가하면 또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 기념관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한국이 칠레 처럼 아직도 70년대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을 아직도 그냥 앓고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피노체트에 의하여 살해된 칠레의 공군 준장 알베르또 바첼레트 장군의 딸인 바첼레트 여사가 3명의 후보자들을 모두 다 물리치고 칠레 역사상 뿐만 아니라 남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 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피살 당할 때 21세 였던 바첼레트는 어머니와 함께 쿠테타 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여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세월은 어느 덧 33년이 흘러 갔다. 아버지를 살해한 민족반역자 피노체트는 영국에서 편안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미국의 암묵적 보호를 받으면서 가택연금하에 살고 있었는데 피노체트는 칠레 민중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피노체트가 살해한 바첼레트 장군의 딸이 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막 집권하게된 바첼레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독재자 피노체트의 사망과 관련해 그의 장례 절차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세상이 된 것을 그저 우연한 일 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피노체트가 살아 간 한 시대의 역사는 칠레 민중들이 그 오랜 400년 역사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탄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투쟁한 칠레 민중의 처절한 역사의 그림자를 생생히 반영 해주고 있는 것 같다.
1. 스페인 식민시대 300년
<##IMAGE##> 스페인 식민지 역사는 1541년 2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선구자 발디비아 가 산디아고에 정착하여 많은 원주민 인디언들을 설득하여 개척에 착수 했다
하지만 인디언 마푸췌 부족은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완강한 부족이다. 1553년에 비타협적인 마푸췌 부족의 추장 라우타로와 스페인 침략의 선구자 발티비아가 정면 대결하여 한판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물론 한편은 총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은 활을 가지고 있다. 싸움은 어떤 모양으로 대결이 됬는지 알수 없으나 결과는 상상 밖이다. 총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 선구자는 인디언 추장에게 붇잡혀 죽게되었다.
이로인하여 라우타로 마푸췌 추장의 명성은 인디언들에게 수세기동안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푸체 부족은 스페인 침략 300년 역사에서 줄곧 독자적 영토를 확보하고 싸우면서 오늘까지도 백만의 부족이 칠레와 인근 지역에서 명성을 보존하고 있다.
칠레의 사회적 구성은 대략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 유럽 태생 백인들과 현지에서 태여난 백인 후손들이다.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지 행정부나 스페인 황제에게 충성하는데 아무 변화를 원하지 않었다.
둘째, 유럽 백인들과 인디언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태여난 혼혈족들이다.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하여 불평을 표시했다.
세째, 인디언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흑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칠레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계층으로는 하급에 속하여 있음으로 생존을 위한 방도에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구조를 지탱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버팀 목이 되는것은 역시 Catholic 교회였다. 칠레의 Catholic 교회는 멕시코나 페루처럼 막강한 재산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나 제도적 권위를 행사 하는데 있어서는 당당했다. Catholic 교회는 침략자들의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백인들 편에 서서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칠레는 남태평양 해변으로 영국과 독일등의 해적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16세기 부터 강한 군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남미에서 제일 강한 군대였다. 스페인 식민지 300년 역사에 있어서 칠레의 침략자들이 초기에 획득할 수 있는 자산은 오직 농업과 목축뿐 이었다. 광업은 처음에 소규모였으나 후대에 구리를 많이 생산했다.
악착같은 스페인 침략자들 이지만 칠레의 토착 원주민 마푸췌 부족을 가히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멸종 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스페인 침략자들은 잡혼과 혼혈 그리고 문화변용의 길을 선댁하여 점진적인 동화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2. 독립과 격동의 한 세기
1400년대에 있어서 스페인 식민지 침략자들의 명제는 "골드 러쉬”이었다. 하지만 1800년대 초에 이르러서 라틴아메리카를 완전히 점령한 스페인 침략자들의 후예들이 부르짖던 명제는 골드가 아니라 “독립 러쉬 ” 이었다. 남미의 모든 나라들이 스페인 주둔군을 몰아 내고 스페인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을 부르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칠레도 1817년에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을 선포한 칠레는 히낀스 를 제1대 대통령으로 세웠다. 하지만 정권을 확립하는데 실패하고 곧 추방 당했다. 완전한 자주적 독립을 주장하는 자유파와 향수에 빠저 스페인 황제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보수파로 갈라졌다.
어느 파에 속하던 수습하기 골란했다. 독립아란 말 뿐 이었고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고 갈등만 계속되었다. 칠레의 정치적 맥락은 처음부터 자유파와 보수파 두 줄기로 시작되었다. Catholic 교회는 보수파 진영에서 지주적 역할을 했다. 빈부로 갈라진 양편에서 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빈자라는 말은 토착 원주민이나 혼혈족이나 흑인들을 가리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백인 사회 내부에서 특정 엘리트 구릅과 대지주들이 한편이고 그렇치 못한 일반 가난한 백인 구릅으로 양분 되여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백인들 저들 끼리의 빈부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원주민이나 혼혈인들이나 흑인들은 그들이 어느 편에도 대상에 들지 못했다.
아무튼 칠레는 독립 초창기 1817년 부터 1830년까지 13년 동안 양편으로 분열되여 서로 싸웠다. 그후에 밭에서 해마다 이랑과 고랑이 교대되는 것처럼 다음 60년동안은 두개의 양진영이 서로 서로 교대 하면서 장기 집권을 했다. 보수진영 집권 1830년 -- 1861년, 자유진영 집권 1861년 -- 1891년.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190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섰다. 세기가 교차되는 중요한 시기에 칠레에서 매우 특이한 정치적 제도가 새로 등장했다. 소위 “의회공화국” 이라는 청치 제도를 새로 창안해 냈다. 이 제도는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서 의원들이 나라의 수반을 선출한다.
그런데 그 의원들은 누구들인가? 대부분 지주들과 엘리트 구릅을 대표하는 자들로 구성된 의회였다.
“그러한 제도는 나라를 망치는 제도이다. 그런 제도가 선출한 수반은 허수아비 아니면 흐리멍덩한 사람이다” 라고 민중은 비웃었다. 왜냐하면 교활한 엘리트들은 흐리멍덩한 사람을 형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앞에 내세워 놓고 저들은 뒤에서 저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었던가?
어쨌던 불안전하고 불공정한 부자들과 엘리트 중심의 “의회 공화국” 시대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드디어 칠레 에서도 1920년대를 전후하여 자유선거와 정당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불공정한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정당정치 제도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스페인 식민통치에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 한 후에 칠레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당과 개혁당 두개의 정당이 출현했다.
민주당은 주로 도시노동자와 기술노동자 운동에 뿌리를 내렸다. 이와 반면에
개혁당은 주로 도시 중간층과 지방 엘리트 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이 두 정당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대와 열정에 고무되여 있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정당은 빠르게 성장하여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후 계속해서 칠레에서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흘러 넘처서 여러 정당들이 합치기도하고 또 개편도 하면서 발전해 나아갔다. 사회노동당 (POS 1912 년), 칠레공산당 (PCCh 1922년), 칠레사회당(PSCh 1933년), 기독교민주당(PDC 1957 년) 등 여러 정당들이 칠레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3. 불안한 미국 흔들리는 칠레
미국은 1900년대에 들어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물결이 파도 치고 있는것을 바라보면서 불안해 하고 있었다. 특히 칠레에서 급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파급적으로 성장하는데 대하여 미국은 당황하고 긴장했다.
<##IMAGE##> 헨리 키신저는 당황하여 이렇게 말했다.“남미의 한 나라가 공산화 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
미국은 칠레에서 급진적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방지하고 저지시키기 위하여 묘한 방안을 고안해 냈다. 그것이 소위 “전진을 위한 동맹” 이라고 하는 이론적 방안이다.
“너무 빨리 가려고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함께 가자” 라고 하면서 좋은 말로 붓잡는다. 하지만 천천히 가는것이 아니라 결국 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만든다.
미국이 저개발 국가들에게 개발을 못하도록 항상 써먹는 상습적인 수단이다.
이 수단에 걸려 든 것이 바로 칠레의 기독교 민주당 (PDC) 이었다. 민중들이 듣기 좋은 온갖 문귀를 다 이용하면서 민중을 유혹했다. 온건 개혁, 자유주의 개혁, 자유안에서 혁명, 중도정치와 온건개혁등 그럴듯한 모든 좋은 구호들을 외치면서 선거공약으로 내 놓았다.
1964년 칠레 총선에서 기독교 민주당 프레이와 칠레 사회당 아옌데 두 사람이 대결하는 양당 대결의 투표를 하게 되었다. 독립 이래 처음 있는 민주적 선거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은 적극적으로 지지 환영했다.
그래놓고 미국은 앞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뒤에서는 돈으로 비민주주의 적 모략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은 온건개혁 중도 노선을 주장하는 기독교 민주당 후보자 프레이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2천만 딸러를 비밀로 제공했다.
같은 해인 1964년에 미국에서는 죤손과 골드워러가 대결하는 선거가 있었다. 미국에서 두 후보자가 선거전에서 사용한 돈의 액 수 보다 칠레 에서 CIA 가 프레이를 당선 시키기 위하여 재공한 돈의 액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이것은 두 나라의 인구 비례의 기준에 따라서 계산한 것이다)
또한 미국이 지원하는 선거 전략은 종교적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을 직접 대립시켰다. 쏘련은 무신론 나라이고 미국은 유신론 나라이다라는 단순한 론리를 선거 전략으로 사용했다. 천사와 마귀 어느것을 택하겠는가? 이런 선전효과로 인하여 프레이 후보자가 여성들의 표를 훨씬 많이 받음으로 선거에 승리 한 것으로 조사분석 되었다.
선거 결과는 뻔한것, 프레이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프레이 대통령이 한 일이 무엇인가? 선거 공약은 미국의 간섭때문에 손도 댈수가 없었다. 농지 개혁도 13%에 그쳤으니 농민들이 개혁의 실감을 느낄 수 가 없었다. 구리산업도 큰소리로 공약을 했으나 운영권의 회수와 소득 분활을 위한 타협에 은행들은 절대로 응하지 않고 요지부동 이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주장한 온건 개혁은 사실상 공염불이 되고 말었다. 미국 제국주의 독점 자본들은 무제한적인 투자만 계속 늘여만 갔다. 칠레의 노동자들과 근로 대중은 이전 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공약한 온건중도 정책이란 하나의 위장이였으며 신자유주의 착취와 수탈을 허용하는 결과만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신식민지 체제만 칠레에서 심화 되고 있을 뿐이었다. 5년동안 경제 성장은 5%에 머물었고 통화팽창은 해마다 30%까지 늘어 났다. 무능한 기독교 민주당 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밖에서 보다 오히려 안에서 부터 먼저 일어 났다.
청년 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일반 당원들도 탈당하는 비상 사태가 벌어저도 집권당 으로 별 대책은 없고 그저 수구 정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일부 당원들이 “기독교 좌익운동” 이라고 하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 하여 분당 사태에 까지 이르게 됬다.
4. 아옌데 대통령 당선과 운명의 9/11
1964년 대선에서 미국 CIA 의 방해 공작 때문에 낙선 했던 아옌데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재출마 했다. 아옌데는 1970년9 월 4일에 당선 되었으며 11월에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아옌데가 재출마 하여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칠레 사회당, 칠레 공산당, 인민독립행동, 인민일치행동운동, 급진당, 사회민주당 등 6개의 사회주의 지향 적인 여러 개혁적 진보 정당과 단체들이 연합하여 “ 인민의 단결” 이라고 하는 연합체를 결성허여 이 단체의 추천을 받아 단일 후보자로 출마 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아옌데가 재출마하여 당선 되었다는 사실과 대통령에 취임 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닉슨 대롱령은 본노하여 “ 그 x같은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라고 소리 쳤다. 닉슨 대통령 뿐만 아니라 경악하고 분노한 사람 두 사람이 또 있었다. 세사람은 급히 백악관에 모여서 비밀회의를 했는데 닉슨 대통령, 헨리 키신저 그리고 CIA 국장 헴스 이었다.
이 세사람이 모여 비밀 회의를 하였던 날은 1970년 9월14일 이었다. 비밀 회의에서 다음과 갈이 결의 했다.
1) 아옌데 대통령의 기능를 마비시키는 비밀공작비 1 천만 달러 확보.
2) 비밀행동대원 40명 조직과 위원장 키신저로 확정.
3) 암살 대상자 우선 대통령 측근자 쉬나이더 육군대장으로 결정.
4) 쿠테타 계획 ( 이 계획은 1973년 9월 11일에 결국 실시 했다).
그 당시 칠레의 ITT 회장은 키신저와 헴스에게 약속하기를 아옌데 대통령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돈 1백만 달러를 기증할 것을 약속 했다.
아옌데가 선거에 승리하여 당선이 확인된지 3일 후에 미국 CIA 간부들은 다음과 같은 토론을 했다. “ 미국은 칠레에서 큰 이익 추구나 군사적 위협 같은것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칠레가 좌경화 하게되면 남미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크게 작용 할 수 있을 것이니 절대로 좌시 할수 없다”.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 바로 몇일전인 1970년 11월 어느날 미국 CIA
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까밀로 라는 육군 장성은 아옌데 대통령을 암살 하려고 미행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 했다는 사실이 후에 폭로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비록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할지라도 대통령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비운은 벌서 이미 결정 이 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권 초기 부터 군부의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 했으며 의회의 장악도 불안한 상태였다. 노동계급과 농민 근로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아옌데 대통령의 터전은 벌서부터 미국 CIA 의 공작으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 했다.
그 당시 칠레의 농민 노동자 근로 계급의 위력은 남미 어느 나라 보다 강력 했으며 탄탄한 “중앙노동연합” (CUT) 이 존재 하여 아옌데 대통령의 튼튼한 기반이 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CIA 는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라는 어용 노조를 급히 창설하여 칠레의 노조 활동을 마비 시킬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은 칠레의 노조 간부들에게 반공주의 교육을 시키고 친미사상을 주입 시키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과 돈을 투자 했다. 그리하여 아옌데 정권과의 유대를 단절시켜서 오히려 반정부 세력으로 육성 시키고 있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선거 공약을 실천 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다. 칠레의 중요 산업들의 국영화를 감행하여 일부 추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경영권만 법적으로 국가에 귀속 시켰을 뿐 기업의 자산은 여전히 자본가의 손에 남아 있는 불완전한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혁이었다.
농지 개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업인구 70만중에서 90% 가 영세농민과 토지 없는 농민들인데 처음 일차적 몰수를 강행 하였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은 태산 같은데 헤택을 받은 농민의 수는 7% 도 미치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의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농민은 농민대로 지주는 지주대로 아옌데 대통령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아옌데 대통령은 의회를 완전히 장학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민의 요구를 원만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한때 대통령을 열열히 지지하고 동정하던 도시 중산층도 점점 반정부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루에 1$ 식 돈을 받는 난동꾼들은 직장과 학원과 길거리에서 질서 파괴 행동을 일년 내내 하도록 미국의 더러운 공작은 게속 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보도하여 민심을 동요시킨다.
운수기업이나 기타 대형 공장이나 사업체의 노조간부들을 매수하여 파업을 전국적으로 일으켜서 나라는 마비와 혼란으로 더욱 불안해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사건들은 미국 CIA 작전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다음은 키신저가 위원장으로 있는 40인 위원회가 3년동안 추진한 비밀 행동계획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이것은 킅린톤 대통령의 명령으로 CIA 가 할수 없이 일부를 비밀문건 해제 함으로 폭로된 내용들이다.
1. 40인 위원회는 8백만 달러의 자금으로 운영을 했다.
2. 경제파탄이 행동의 제일 우선이다.
3. 언론매수에 돈을 투자한다.
4. 반정부 행동 단체들에게 재정지원하다.
5. 정부단체들에 깊이 들어가 분렬 작전을 전개한다.
6. 뉴욕, 워싱톤에 있는 칠레 공관들을 관리한다.
7. 친미적인 기독교 민주당을 적극 지원한다.
8. 경제봉쇄를 하여 칠레의 목을 조인다.
9. 구리산업을 망치기 위해서 구리값을 떨어 뜨린다.
10. 좌익으로 가장한 난동꾼들을 항상 동원한다.
11. 각종 작장에서 파업조장한다.
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쿠테타로 정권을 퇴진 시킨다.
위의 공작들은 여러 가지 문건들 중에서 중요한 건수들을 간추린 것이다.
1973년 6월29일에 제1차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아옌데 대통령을 지지하는 군부세력과 충돌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73년 9월에 다시 시도한 쿠테타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지원을 해 줌으로 마치 전쟁을 시작한 선전포고 와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 편에는 헨리 키신저가 총 지휘를 하고 있었고, 칠레에는 숨어서 지휘하는 피노체트 군총사령관이 있었다.
9월11일 오전6시부터 쿠테타 군부는 행동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제공한 공군기 32대와 미국 해군 구축함과 잠수함등이 칠레 해안에서 모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비 하고 있었다.
9/11, 오전 11시경에 쿠테타군 500 명이 대통령 궁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민의 단결” 국회에서는 쿠테타 군 에게 일절 대항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
쿠테타군은 아옌데 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준비해 놓았으니 빨리 행동 할것을 제안 하면서 재촉 했다. 하지만 아옌데 대통령은 쿠테타군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남아 있던 호위병들과 대통령 궁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서 속히 피신하라고 호소했다.
9/11, 오전 11시 52분 칠레 공군은 미국이 제공한 공대지 로켓으로 대통령 궁을 포격하여 불길속에 휩싸이게 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로 연결된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음성은 이렇게 전달 되었다. “ 나는 항복 하지 않고 이 나라 역사의 이 준엄한 순간에 나는 우리 인민에게 내 목숨을 바친다. 나는 나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
아엔데 정권이 무너진 그날 싼디아고 중앙 경기장에는 포악한 쿠테타군에게 5,000 명이 붇잡혀 왔다. 팔이 부러지고 창자가 터지고, 목이 짤려 죽었다.
하지만 피를 철철 흘리는 민중은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그 날에”
를 부르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 까지 항거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 17년의 “죽음의 행렬” 은 바로 그날 그곳에서 시작 되었다.
1973년 9월 11일과 2001년 9월11일은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마이클 무어 (www.michaelmoore.com) 의 책 “이봐 내나라를 돌려줘” 에 의하면
두 9/11 사건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음모는 미국인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것 이라고 핑게하는 허위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는 동일한 악마적 음모라고 단언했다. 마이크 무어는 단호히 이 두 번의 9/11사건의 음모는 모두 다 백악관에서 미국 제국주의 자들이 조작 해낸 자작극 일뿐이고,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시간과 장소가 다른것 뿐 이었다고 했다.
5. 노출된 피노체트와 키신저
피노체트는 극악한 독재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정체에 대하여 정치 심리학적 비판을 한 Saul Landau 에 의하면 피노체트는 외향으로는 무척 부드럽고 무난한 사람처럼 언제나 보인다.
그의 군인 생활은 항상 중간파의 역할을 하면서 일평생 군복을 입고 살았다.
사회주의 지향의 정권하에서도 오래 동안 군 장성으로 복무했으며 1970년에 아옌데 정권하에서도 군 총사령관 이었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드러나지 않게 뒤에 숨어서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는 쿠테타의 총지휘자 이었으며 이제는 미국이 제일 신임하는 친미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피노체트는 아옌데 대통령이 힘드려 이룩한 모든 사회 개량적 공헌을 전부 무효화하여 공장과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피노체트는 칠레의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미국의 독점 자본을 끌어 드림
으로 근로 대중과 노동자들을 외국 저본에게 착취를 당하게 만들었다. 피노체트는 정권의 안전과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비밀정보국(DINA) 를 창설 했다. 이 비밀정보국은 국가안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은 투옥 고문 학살을 자유로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했다. 피노체트는 이 권한을 악용하여 17년 집권기간 에 27,300 명을 고문했고 3,197명을 살해했다.
1976년 6월에 키신저가 칠레를 방문하였다. 키신저는 피노체트에게 “ 미국은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만족한다”라고 칭찬했다. 그후 1976 년 9월에 칠레의 비밀공작원은 아옌데 정권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레테리어를 암살 했다. 레테리어는 양심적인 사회주의 신념의 사람이며 피노체트의 독재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했다.
미국 워싱톤 시내에서 그의 승용차 밑에 폭탄을 가설하여 폭파하여 죽였다.암살 뒤에 피노체트가 있고 피노체트 뒤에는 키신저가 있다는 사실은 미국 CIA 는 다 잘 알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1991년에 17년 독재정치를 끝내고 물러났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칠레의 군총사령관의 통수권은 내놓치 않았다. 1997년 까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98년에 군총사령관의 자리 마져 다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피노체트는 자기가 미리 만들어 놓은 법을 이용하여 “ 종신 상원의원” 이라고 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종신상원위원이 되면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피노체트는 칠레에서 재판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적으로 불안 함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전 영국 총리 대쳐여사 및 여러 정계 인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뒤 늦게나마 피노체트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가 요란하게 제기 되었다. 종신 상원의원이라는 면죄법 때문에 국내에서가 아닌 국외에서 국제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여 스페인으로 출두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건강상 핑개로 피노체트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고 영국에서 가택연금이라는 눈가림으로 처리하여 끝까지 피노체트를 옹호했다.
그후 다시 영국의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이번에는 노쇠병으로 건강 문제를 핑개 삼아 스페인이 아니라 칠레로 돌려 보냈다.
칠레에 돌아 왔지만 라고스(Lagos) 대통령은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지연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양론으로 갈라진 민심과 여론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직까지도 피노체트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위협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노체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달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칠레의 민중은 아우성쳤다. “늦었지만 좋다. 건강이 나빠도 좋다. 앉아서라도 전범 제판은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이 원한의 아우성 소리를 또 못 들은 척하고 또 다시 피신하여 멀고 먼곳으로 떠나 갔다. 결국 독재자의 전범재판은 그곳에서 받게 될것 이다.
6. 베첼레트의 날개는 어느 쪽으로?
칠레 뿐만 아나라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2006년 3월에 여성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베첼레트는 33년전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자기자신도 고문을 당했던 산디아고 중앙 경기장에서 53%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베첼레트 대통령은 행정부 조각에서 여성 장관 10명을 등장 시킴으로서 확실히 진보적 개혁주의 대통령 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선거 공약에서 민주와 인권, 근로자 복지 그리고 원주민 보호를 강조 한 것으로 보아 피노체트가 망친 칠레를 다시 회복 시킬 대통령 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베첼레트의 날개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날아 갈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속단 할 수 없으며 염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첫째, 뿌리 깊은 군사독재 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암묵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지원을 받으면서 칠레에서 활보하고 있다.
둘째, 전임 대통령 라고스(Lagos)가 피노체트에 대한 재판을 10여년 동안이나 실현 하지 못한것은 미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와 같은 압력은 비첼레트 대통령 에게도 예외가 될수 없다고 염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세째,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여 과거에 경험한 분열을 극복하여 비첼레트 정부와 일체를 이루어 전적으로 대통령을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실현되기 바라고 있지만 아직은 미지수 이다.
네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 axis od good” 좌경화 운동에 칠레와 이웃 나라 볼리비아, 브라질, 베네수엘라, 쿠바등 여러 나라들과 굳건한 연대 를 맺는 방향 설정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의 결과과 주목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섯째, 피노체트 독재정권 하에서 희생된 민중의 한과 현재 백만이 되는 인디언 마푸췌 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제는 비첼레트 대통령이 감당하기 너무나 힘든 과제로 진단되고 있다. 하지만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여섯째, 칠레 인민이 가기로 선택한 반제 반미 사회주의 건설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렬된 노동계급과 각계 각층 이 정치적으로 반드시 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 정당들도 연합전선을 강화 하여 비첼레트 태통령을 지원해 주는 정치력이 되여야 한다.
끝으로 다른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꼭 중요하다.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무기와 유혹은 실용주의이다. 이 실용주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처방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이 주장하는 남미에서 단합된 내부적 실용주의는 참 좋
은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침략을 막는 방법은 이론보다 실용주의가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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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진보지향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과 지도자들]
(1) *[특별기고]*남미의 해방자-우고 차베스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2)*[특별기고]*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사회주의로 안정기반---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3)* [특별기고]시민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에콰도르 코레아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4)*[특별기고]민족해방 지도자-니콰라과 오르테가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칠레의 사회주의 신봉자 여성 대통령 피노체트가 망친것 바첼레트가 회복 *글: 유태영 목사 |
91세의 생일을 맞은 피노체트 독재자 전 칠레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시절에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재임 기간에 발생한 모든 행위에 대해 정치적 책임이 있다“
<##IMAGE##> 그러나 피노체트는 자신이 저지른 반역적 유혈 쿠테타로 인하여 발생한 “죽음의 행렬” 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말이 없었다.
칠레대학의 정치학자 리카르도 교수는 “그의 이러한 책임 시인은 권좌에 있을 때 했어야 했다. 그는 완전한 책임을 느끼고 있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피노체트는 민선으로 당선된 아옌데 대통령을 쿠테타로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1974년부터 1990년 까지 무서운 독재를 했다. 그가 재임 기간 17년 동안에 저지른 학살 만행을 조사한 발표에의하면 실종된 1,000명을 포함해 모두 3,197 명이 살해 됐고 30,000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서 해외로 도피한 자들의 수는 70,000명에 이르렀다.
2006년 12월 10일에 91세의 나이에 피노체트는 사망했다. 피노체트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칠레 민중의 가슴에 쌓인 처절한 상처를 그대로 남겨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처렴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그저 떠나 가고 말었다. 피노체트의 사망소식이 보도되자 두 시간도 되기 전에 산디아고 시내에 있는 이탈리아 광장에 3,000 명 군중들이 단숨에 집결하여 축하의 환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와는 아주 정 반대로 대조되는 현상이 일어 났다. 3,000명이 모인 이탈리아 광장에서부터 약 2 km 떨어져 있는 다른 한 장소에서는 2,000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독재자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애도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노체트의 장례 절차에 대해서도 민심은 양분되었다. 1,600만 칠레 인구중에서 55% 는 피노체트의 장례를 국장 으로 치루는 것을 결사 반대 했다. 민족 반역자이며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응분의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영국으로 도망가 호화롭게 살다가 돌아 온 민족의 배반자를 어찌하여 국장으로 대우를 해야하는가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45%의 수구 친미 보수적인 칠레인들은 딴소리를 했다. 전직 대통령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이 온당하다 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신임하고 후원을 해준 반공주의 대통령이 아니었는가? 어찌하여 그의 공로를 무시하려 하는가 라고 하면서 국장으로 모실것을 주장 했다.
축하와 애도,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칠레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독재정권이 남긴 상처의 후유증이다 아물지 못 하고 아직도 민중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기야 그 후유증의 근원은 바로 미국 아닌가? 미국이 여전히 칠레에 뻗치고 서 있는 한 절대로 그 후유증은 아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보는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부족하면 퇴행적인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처럼 주어진 기회 마저도 놓처 버리고 만다.
칠레의 입장이나 한국의 입장은 비슷하다. 한국에서 아직도 그 옛날의 독재자 “ P 사모회” 또 무슨 “ C 사모회” 같은 것이 여전히 있는가하면 또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 기념관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한국이 칠레 처럼 아직도 70년대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을 아직도 그냥 앓고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피노체트에 의하여 살해된 칠레의 공군 준장 알베르또 바첼레트 장군의 딸인 바첼레트 여사가 3명의 후보자들을 모두 다 물리치고 칠레 역사상 뿐만 아니라 남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 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피살 당할 때 21세 였던 바첼레트는 어머니와 함께 쿠테타 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여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세월은 어느 덧 33년이 흘러 갔다. 아버지를 살해한 민족반역자 피노체트는 영국에서 편안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미국의 암묵적 보호를 받으면서 가택연금하에 살고 있었는데 피노체트는 칠레 민중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피노체트가 살해한 바첼레트 장군의 딸이 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막 집권하게된 바첼레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독재자 피노체트의 사망과 관련해 그의 장례 절차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세상이 된 것을 그저 우연한 일 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피노체트가 살아 간 한 시대의 역사는 칠레 민중들이 그 오랜 400년 역사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탄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투쟁한 칠레 민중의 처절한 역사의 그림자를 생생히 반영 해주고 있는 것 같다.
<##IMAGE##> 스페인 식민지 역사는 1541년 2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선구자 발디비아 가 산디아고에 정착하여 많은 원주민 인디언들을 설득하여 개척에 착수 했다
하지만 인디언 마푸췌 부족은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완강한 부족이다. 1553년에 비타협적인 마푸췌 부족의 추장 라우타로와 스페인 침략의 선구자 발티비아가 정면 대결하여 한판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물론 한편은 총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은 활을 가지고 있다. 싸움은 어떤 모양으로 대결이 됬는지 알수 없으나 결과는 상상 밖이다. 총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 선구자는 인디언 추장에게 붇잡혀 죽게되었다.
이로인하여 라우타로 마푸췌 추장의 명성은 인디언들에게 수세기동안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푸체 부족은 스페인 침략 300년 역사에서 줄곧 독자적 영토를 확보하고 싸우면서 오늘까지도 백만의 부족이 칠레와 인근 지역에서 명성을 보존하고 있다.
칠레의 사회적 구성은 대략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 유럽 태생 백인들과 현지에서 태여난 백인 후손들이다.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지 행정부나 스페인 황제에게 충성하는데 아무 변화를 원하지 않었다.
둘째, 유럽 백인들과 인디언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태여난 혼혈족들이다.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여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하여 불평을 표시했다.
세째, 인디언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흑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칠레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계층으로는 하급에 속하여 있음으로 생존을 위한 방도에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구조를 지탱해 나아가는데 있어서 버팀 목이 되는것은 역시 Catholic 교회였다. 칠레의 Catholic 교회는 멕시코나 페루처럼 막강한 재산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나 제도적 권위를 행사 하는데 있어서는 당당했다. Catholic 교회는 침략자들의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백인들 편에 서서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칠레는 남태평양 해변으로 영국과 독일등의 해적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16세기 부터 강한 군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남미에서 제일 강한 군대였다. 스페인 식민지 300년 역사에 있어서 칠레의 침략자들이 초기에 획득할 수 있는 자산은 오직 농업과 목축뿐 이었다. 광업은 처음에 소규모였으나 후대에 구리를 많이 생산했다.
악착같은 스페인 침략자들 이지만 칠레의 토착 원주민 마푸췌 부족을 가히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멸종 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스페인 침략자들은 잡혼과 혼혈 그리고 문화변용의 길을 선댁하여 점진적인 동화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1400년대에 있어서 스페인 식민지 침략자들의 명제는 "골드 러쉬”이었다. 하지만 1800년대 초에 이르러서 라틴아메리카를 완전히 점령한 스페인 침략자들의 후예들이 부르짖던 명제는 골드가 아니라 “독립 러쉬 ” 이었다. 남미의 모든 나라들이 스페인 주둔군을 몰아 내고 스페인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을 부르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칠레도 1817년에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을 선포한 칠레는 히낀스 를 제1대 대통령으로 세웠다. 하지만 정권을 확립하는데 실패하고 곧 추방 당했다. 완전한 자주적 독립을 주장하는 자유파와 향수에 빠저 스페인 황제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보수파로 갈라졌다.
어느 파에 속하던 수습하기 골란했다. 독립아란 말 뿐 이었고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 되고 갈등만 계속되었다. 칠레의 정치적 맥락은 처음부터 자유파와 보수파 두 줄기로 시작되었다. Catholic 교회는 보수파 진영에서 지주적 역할을 했다. 빈부로 갈라진 양편에서 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빈자라는 말은 토착 원주민이나 혼혈족이나 흑인들을 가리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백인 사회 내부에서 특정 엘리트 구릅과 대지주들이 한편이고 그렇치 못한 일반 가난한 백인 구릅으로 양분 되여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백인들 저들 끼리의 빈부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원주민이나 혼혈인들이나 흑인들은 그들이 어느 편에도 대상에 들지 못했다.
아무튼 칠레는 독립 초창기 1817년 부터 1830년까지 13년 동안 양편으로 분열되여 서로 싸웠다. 그후에 밭에서 해마다 이랑과 고랑이 교대되는 것처럼 다음 60년동안은 두개의 양진영이 서로 서로 교대 하면서 장기 집권을 했다. 보수진영 집권 1830년 -- 1861년, 자유진영 집권 1861년 -- 1891년.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190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섰다. 세기가 교차되는 중요한 시기에 칠레에서 매우 특이한 정치적 제도가 새로 등장했다. 소위 “의회공화국” 이라는 청치 제도를 새로 창안해 냈다. 이 제도는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서 의원들이 나라의 수반을 선출한다.
그런데 그 의원들은 누구들인가? 대부분 지주들과 엘리트 구릅을 대표하는 자들로 구성된 의회였다.
“그러한 제도는 나라를 망치는 제도이다. 그런 제도가 선출한 수반은 허수아비 아니면 흐리멍덩한 사람이다” 라고 민중은 비웃었다. 왜냐하면 교활한 엘리트들은 흐리멍덩한 사람을 형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앞에 내세워 놓고 저들은 뒤에서 저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었던가?
어쨌던 불안전하고 불공정한 부자들과 엘리트 중심의 “의회 공화국” 시대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드디어 칠레 에서도 1920년대를 전후하여 자유선거와 정당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불공정한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정당정치 제도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스페인 식민통치에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 한 후에 칠레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당과 개혁당 두개의 정당이 출현했다.
민주당은 주로 도시노동자와 기술노동자 운동에 뿌리를 내렸다. 이와 반면에
개혁당은 주로 도시 중간층과 지방 엘리트 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이 두 정당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기대와 열정에 고무되여 있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정당은 빠르게 성장하여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후 계속해서 칠레에서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흘러 넘처서 여러 정당들이 합치기도하고 또 개편도 하면서 발전해 나아갔다. 사회노동당 (POS 1912 년), 칠레공산당 (PCCh 1922년), 칠레사회당(PSCh 1933년), 기독교민주당(PDC 1957 년) 등 여러 정당들이 칠레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미국은 1900년대에 들어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물결이 파도 치고 있는것을 바라보면서 불안해 하고 있었다. 특히 칠레에서 급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파급적으로 성장하는데 대하여 미국은 당황하고 긴장했다.
<##IMAGE##> 헨리 키신저는 당황하여 이렇게 말했다.“남미의 한 나라가 공산화 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
미국은 칠레에서 급진적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방지하고 저지시키기 위하여 묘한 방안을 고안해 냈다. 그것이 소위 “전진을 위한 동맹” 이라고 하는 이론적 방안이다.
“너무 빨리 가려고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함께 가자” 라고 하면서 좋은 말로 붓잡는다. 하지만 천천히 가는것이 아니라 결국 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만든다.
미국이 저개발 국가들에게 개발을 못하도록 항상 써먹는 상습적인 수단이다.
이 수단에 걸려 든 것이 바로 칠레의 기독교 민주당 (PDC) 이었다. 민중들이 듣기 좋은 온갖 문귀를 다 이용하면서 민중을 유혹했다. 온건 개혁, 자유주의 개혁, 자유안에서 혁명, 중도정치와 온건개혁등 그럴듯한 모든 좋은 구호들을 외치면서 선거공약으로 내 놓았다.
1964년 칠레 총선에서 기독교 민주당 프레이와 칠레 사회당 아옌데 두 사람이 대결하는 양당 대결의 투표를 하게 되었다. 독립 이래 처음 있는 민주적 선거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은 적극적으로 지지 환영했다.
그래놓고 미국은 앞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뒤에서는 돈으로 비민주주의 적 모략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은 온건개혁 중도 노선을 주장하는 기독교 민주당 후보자 프레이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2천만 딸러를 비밀로 제공했다.
같은 해인 1964년에 미국에서는 죤손과 골드워러가 대결하는 선거가 있었다. 미국에서 두 후보자가 선거전에서 사용한 돈의 액 수 보다 칠레 에서 CIA 가 프레이를 당선 시키기 위하여 재공한 돈의 액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이것은 두 나라의 인구 비례의 기준에 따라서 계산한 것이다)
또한 미국이 지원하는 선거 전략은 종교적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을 직접 대립시켰다. 쏘련은 무신론 나라이고 미국은 유신론 나라이다라는 단순한 론리를 선거 전략으로 사용했다. 천사와 마귀 어느것을 택하겠는가? 이런 선전효과로 인하여 프레이 후보자가 여성들의 표를 훨씬 많이 받음으로 선거에 승리 한 것으로 조사분석 되었다.
선거 결과는 뻔한것, 프레이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프레이 대통령이 한 일이 무엇인가? 선거 공약은 미국의 간섭때문에 손도 댈수가 없었다. 농지 개혁도 13%에 그쳤으니 농민들이 개혁의 실감을 느낄 수 가 없었다. 구리산업도 큰소리로 공약을 했으나 운영권의 회수와 소득 분활을 위한 타협에 은행들은 절대로 응하지 않고 요지부동 이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주장한 온건 개혁은 사실상 공염불이 되고 말었다. 미국 제국주의 독점 자본들은 무제한적인 투자만 계속 늘여만 갔다. 칠레의 노동자들과 근로 대중은 이전 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프레이 대통령이 공약한 온건중도 정책이란 하나의 위장이였으며 신자유주의 착취와 수탈을 허용하는 결과만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신식민지 체제만 칠레에서 심화 되고 있을 뿐이었다. 5년동안 경제 성장은 5%에 머물었고 통화팽창은 해마다 30%까지 늘어 났다. 무능한 기독교 민주당 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밖에서 보다 오히려 안에서 부터 먼저 일어 났다.
청년 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일반 당원들도 탈당하는 비상 사태가 벌어저도 집권당 으로 별 대책은 없고 그저 수구 정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일부 당원들이 “기독교 좌익운동” 이라고 하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 하여 분당 사태에 까지 이르게 됬다.
1964년 대선에서 미국 CIA 의 방해 공작 때문에 낙선 했던 아옌데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재출마 했다. 아옌데는 1970년9 월 4일에 당선 되었으며 11월에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아옌데가 재출마 하여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칠레 사회당, 칠레 공산당, 인민독립행동, 인민일치행동운동, 급진당, 사회민주당 등 6개의 사회주의 지향 적인 여러 개혁적 진보 정당과 단체들이 연합하여 “ 인민의 단결” 이라고 하는 연합체를 결성허여 이 단체의 추천을 받아 단일 후보자로 출마 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아옌데가 재출마하여 당선 되었다는 사실과 대통령에 취임 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닉슨 대롱령은 본노하여 “ 그 x같은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라고 소리 쳤다. 닉슨 대통령 뿐만 아니라 경악하고 분노한 사람 두 사람이 또 있었다. 세사람은 급히 백악관에 모여서 비밀회의를 했는데 닉슨 대통령, 헨리 키신저 그리고 CIA 국장 헴스 이었다.
이 세사람이 모여 비밀 회의를 하였던 날은 1970년 9월14일 이었다. 비밀 회의에서 다음과 갈이 결의 했다.
1) 아옌데 대통령의 기능를 마비시키는 비밀공작비 1 천만 달러 확보.
2) 비밀행동대원 40명 조직과 위원장 키신저로 확정.
3) 암살 대상자 우선 대통령 측근자 쉬나이더 육군대장으로 결정.
4) 쿠테타 계획 ( 이 계획은 1973년 9월 11일에 결국 실시 했다).
그 당시 칠레의 ITT 회장은 키신저와 헴스에게 약속하기를 아옌데 대통령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돈 1백만 달러를 기증할 것을 약속 했다.
아옌데가 선거에 승리하여 당선이 확인된지 3일 후에 미국 CIA 간부들은 다음과 같은 토론을 했다. “ 미국은 칠레에서 큰 이익 추구나 군사적 위협 같은것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칠레가 좌경화 하게되면 남미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은 크게 작용 할 수 있을 것이니 절대로 좌시 할수 없다”.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 바로 몇일전인 1970년 11월 어느날 미국 CIA
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까밀로 라는 육군 장성은 아옌데 대통령을 암살 하려고 미행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 했다는 사실이 후에 폭로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비록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할지라도 대통령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비운은 벌서 이미 결정 이 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권 초기 부터 군부의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 했으며 의회의 장악도 불안한 상태였다. 노동계급과 농민 근로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아옌데 대통령의 터전은 벌서부터 미국 CIA 의 공작으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 했다.
그 당시 칠레의 농민 노동자 근로 계급의 위력은 남미 어느 나라 보다 강력 했으며 탄탄한 “중앙노동연합” (CUT) 이 존재 하여 아옌데 대통령의 튼튼한 기반이 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CIA 는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라는 어용 노조를 급히 창설하여 칠레의 노조 활동을 마비 시킬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은 칠레의 노조 간부들에게 반공주의 교육을 시키고 친미사상을 주입 시키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과 돈을 투자 했다. 그리하여 아옌데 정권과의 유대를 단절시켜서 오히려 반정부 세력으로 육성 시키고 있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선거 공약을 실천 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다. 칠레의 중요 산업들의 국영화를 감행하여 일부 추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경영권만 법적으로 국가에 귀속 시켰을 뿐 기업의 자산은 여전히 자본가의 손에 남아 있는 불완전한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혁이었다.
농지 개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업인구 70만중에서 90% 가 영세농민과 토지 없는 농민들인데 처음 일차적 몰수를 강행 하였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은 태산 같은데 헤택을 받은 농민의 수는 7% 도 미치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의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농민은 농민대로 지주는 지주대로 아옌데 대통령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아옌데 대통령은 의회를 완전히 장학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민의 요구를 원만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한때 대통령을 열열히 지지하고 동정하던 도시 중산층도 점점 반정부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루에 1$ 식 돈을 받는 난동꾼들은 직장과 학원과 길거리에서 질서 파괴 행동을 일년 내내 하도록 미국의 더러운 공작은 게속 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보도하여 민심을 동요시킨다.
운수기업이나 기타 대형 공장이나 사업체의 노조간부들을 매수하여 파업을 전국적으로 일으켜서 나라는 마비와 혼란으로 더욱 불안해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사건들은 미국 CIA 작전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진행 되고 있었다.
다음은 키신저가 위원장으로 있는 40인 위원회가 3년동안 추진한 비밀 행동계획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이것은 킅린톤 대통령의 명령으로 CIA 가 할수 없이 일부를 비밀문건 해제 함으로 폭로된 내용들이다.
1. 40인 위원회는 8백만 달러의 자금으로 운영을 했다.
2. 경제파탄이 행동의 제일 우선이다.
3. 언론매수에 돈을 투자한다.
4. 반정부 행동 단체들에게 재정지원하다.
5. 정부단체들에 깊이 들어가 분렬 작전을 전개한다.
6. 뉴욕, 워싱톤에 있는 칠레 공관들을 관리한다.
7. 친미적인 기독교 민주당을 적극 지원한다.
8. 경제봉쇄를 하여 칠레의 목을 조인다.
9. 구리산업을 망치기 위해서 구리값을 떨어 뜨린다.
10. 좌익으로 가장한 난동꾼들을 항상 동원한다.
11. 각종 작장에서 파업조장한다.
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쿠테타로 정권을 퇴진 시킨다.
위의 공작들은 여러 가지 문건들 중에서 중요한 건수들을 간추린 것이다.
1973년 6월29일에 제1차 쿠테타를 시도 했으나 아옌데 대통령을 지지하는 군부세력과 충돌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73년 9월에 다시 시도한 쿠테타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지원을 해 줌으로 마치 전쟁을 시작한 선전포고 와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 편에는 헨리 키신저가 총 지휘를 하고 있었고, 칠레에는 숨어서 지휘하는 피노체트 군총사령관이 있었다.
9월11일 오전6시부터 쿠테타 군부는 행동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제공한 공군기 32대와 미국 해군 구축함과 잠수함등이 칠레 해안에서 모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비 하고 있었다.
9/11, 오전 11시경에 쿠테타군 500 명이 대통령 궁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민의 단결” 국회에서는 쿠테타 군 에게 일절 대항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
쿠테타군은 아옌데 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준비해 놓았으니 빨리 행동 할것을 제안 하면서 재촉 했다. 하지만 아옌데 대통령은 쿠테타군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남아 있던 호위병들과 대통령 궁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서 속히 피신하라고 호소했다.
9/11, 오전 11시 52분 칠레 공군은 미국이 제공한 공대지 로켓으로 대통령 궁을 포격하여 불길속에 휩싸이게 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로 연결된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음성은 이렇게 전달 되었다. “ 나는 항복 하지 않고 이 나라 역사의 이 준엄한 순간에 나는 우리 인민에게 내 목숨을 바친다. 나는 나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
아엔데 정권이 무너진 그날 싼디아고 중앙 경기장에는 포악한 쿠테타군에게 5,000 명이 붇잡혀 왔다. 팔이 부러지고 창자가 터지고, 목이 짤려 죽었다.
하지만 피를 철철 흘리는 민중은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그 날에”
를 부르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 까지 항거했다. 피노체트 독재정권 17년의 “죽음의 행렬” 은 바로 그날 그곳에서 시작 되었다.
1973년 9월 11일과 2001년 9월11일은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마이클 무어 (www.michaelmoore.com) 의 책 “이봐 내나라를 돌려줘” 에 의하면
두 9/11 사건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음모는 미국인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것 이라고 핑게하는 허위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는 동일한 악마적 음모라고 단언했다. 마이크 무어는 단호히 이 두 번의 9/11사건의 음모는 모두 다 백악관에서 미국 제국주의 자들이 조작 해낸 자작극 일뿐이고,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시간과 장소가 다른것 뿐 이었다고 했다.
피노체트는 극악한 독재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정체에 대하여 정치 심리학적 비판을 한 Saul Landau 에 의하면 피노체트는 외향으로는 무척 부드럽고 무난한 사람처럼 언제나 보인다.
그의 군인 생활은 항상 중간파의 역할을 하면서 일평생 군복을 입고 살았다.
사회주의 지향의 정권하에서도 오래 동안 군 장성으로 복무했으며 1970년에 아옌데 정권하에서도 군 총사령관 이었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드러나지 않게 뒤에 숨어서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옌데 대통령을 살해하는 쿠테타의 총지휘자 이었으며 이제는 미국이 제일 신임하는 친미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피노체트는 아옌데 대통령이 힘드려 이룩한 모든 사회 개량적 공헌을 전부 무효화하여 공장과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피노체트는 칠레의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미국의 독점 자본을 끌어 드림
으로 근로 대중과 노동자들을 외국 저본에게 착취를 당하게 만들었다. 피노체트는 정권의 안전과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비밀정보국(DINA) 를 창설 했다. 이 비밀정보국은 국가안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은 투옥 고문 학살을 자유로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했다. 피노체트는 이 권한을 악용하여 17년 집권기간 에 27,300 명을 고문했고 3,197명을 살해했다.
1976년 6월에 키신저가 칠레를 방문하였다. 키신저는 피노체트에게 “ 미국은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만족한다”라고 칭찬했다. 그후 1976 년 9월에 칠레의 비밀공작원은 아옌데 정권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레테리어를 암살 했다. 레테리어는 양심적인 사회주의 신념의 사람이며 피노체트의 독재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했다.
미국 워싱톤 시내에서 그의 승용차 밑에 폭탄을 가설하여 폭파하여 죽였다.암살 뒤에 피노체트가 있고 피노체트 뒤에는 키신저가 있다는 사실은 미국 CIA 는 다 잘 알고 있었다.
피노체트는 1991년에 17년 독재정치를 끝내고 물러났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칠레의 군총사령관의 통수권은 내놓치 않았다. 1997년 까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98년에 군총사령관의 자리 마져 다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피노체트는 자기가 미리 만들어 놓은 법을 이용하여 “ 종신 상원의원” 이라고 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종신상원위원이 되면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피노체트는 칠레에서 재판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적으로 불안 함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전 영국 총리 대쳐여사 및 여러 정계 인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뒤 늦게나마 피노체트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가 요란하게 제기 되었다. 종신 상원의원이라는 면죄법 때문에 국내에서가 아닌 국외에서 국제 재판에 회부하도록 하여 스페인으로 출두 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건강상 핑개로 피노체트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고 영국에서 가택연금이라는 눈가림으로 처리하여 끝까지 피노체트를 옹호했다.
그후 다시 영국의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이번에는 노쇠병으로 건강 문제를 핑개 삼아 스페인이 아니라 칠레로 돌려 보냈다.
칠레에 돌아 왔지만 라고스(Lagos) 대통령은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지연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양론으로 갈라진 민심과 여론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직까지도 피노체트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위협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노체트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달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칠레의 민중은 아우성쳤다. “늦었지만 좋다. 건강이 나빠도 좋다. 앉아서라도 전범 제판은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이 원한의 아우성 소리를 또 못 들은 척하고 또 다시 피신하여 멀고 먼곳으로 떠나 갔다. 결국 독재자의 전범재판은 그곳에서 받게 될것 이다.
칠레 뿐만 아나라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2006년 3월에 여성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베첼레트는 33년전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자기자신도 고문을 당했던 산디아고 중앙 경기장에서 53%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베첼레트 대통령은 행정부 조각에서 여성 장관 10명을 등장 시킴으로서 확실히 진보적 개혁주의 대통령 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선거 공약에서 민주와 인권, 근로자 복지 그리고 원주민 보호를 강조 한 것으로 보아 피노체트가 망친 칠레를 다시 회복 시킬 대통령 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베첼레트의 날개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날아 갈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속단 할 수 없으며 염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첫째, 뿌리 깊은 군사독재 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암묵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지원을 받으면서 칠레에서 활보하고 있다.
둘째, 전임 대통령 라고스(Lagos)가 피노체트에 대한 재판을 10여년 동안이나 실현 하지 못한것은 미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와 같은 압력은 비첼레트 대통령 에게도 예외가 될수 없다고 염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세째,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여 과거에 경험한 분열을 극복하여 비첼레트 정부와 일체를 이루어 전적으로 대통령을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실현되기 바라고 있지만 아직은 미지수 이다.
네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 axis od good” 좌경화 운동에 칠레와 이웃 나라 볼리비아, 브라질, 베네수엘라, 쿠바등 여러 나라들과 굳건한 연대 를 맺는 방향 설정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의 결과과 주목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섯째, 피노체트 독재정권 하에서 희생된 민중의 한과 현재 백만이 되는 인디언 마푸췌 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제는 비첼레트 대통령이 감당하기 너무나 힘든 과제로 진단되고 있다. 하지만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여섯째, 칠레 인민이 가기로 선택한 반제 반미 사회주의 건설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렬된 노동계급과 각계 각층 이 정치적으로 반드시 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 정당들도 연합전선을 강화 하여 비첼레트 태통령을 지원해 주는 정치력이 되여야 한다.
끝으로 다른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꼭 중요하다.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무기와 유혹은 실용주의이다. 이 실용주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처방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이 주장하는 남미에서 단합된 내부적 실용주의는 참 좋
은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침략을 막는 방법은 이론보다 실용주의가 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끝)
(1) *[특별기고]*남미의 해방자-우고 차베스 대통령---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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