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흠 선생, <체 게바라 생애와 사상> 서부연합회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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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7-08-27 11:44 조회3,0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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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이용식 민족통신 편집위원] 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이신 박천흠 선생(81)은 26일 밤 재미동포서부지역연합회(김현환 회장)서 가진 8월 월례회 강좌에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인물, <체 게바라의 생애와 사상>을 발표했다. 그는 이날 발표를 통해 "게바라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변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고 압제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과 실천은 단지 소위 운동을 하거나 변혁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신은 이른바 청년정신이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지도정신이다."라고 강조했다. 박 천흠 선생의 발표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체 게바라의 생애와 사상 *발표:박천흠(서부연합회 고문) <##IMAGE##>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는 1928년 6월 14일일 출생하여 1967년 10월9일에 생애를 마친 남미의 신화적 인물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여나 부에노스아리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쿠바혁명에 기여한 혁명가이며 정치인이다. 그는 쿠바 산업부장관, 쿠바 중앙은행 총재, 쿠바 라카바니아 요새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비교적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두 살 때 발병한 천식이 그의 일생을 괴롭히지만 그는 운동과 여행을 아주 좋아했다.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부를 만큼 시에 심취하여 로르카, 네루다. 베를렌, 보들레르를 암송하기도 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전문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의사가 된 후 23살 때 그는 브라질, 페루, 칠레, 볼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전 대륙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는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제국주의의의 식민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혁명의 첫 과업을 시도하기 위하여 과테말라에 간 체 게바라는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과테말라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확실하게 깨닫는다.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웠던 그는 적들의 총구를 피해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과테말라에서 탈출한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로 가서 운명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이 무렵 게바라는 쿠바의 망명동지들에 의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체"는 본래 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간투사인데, 그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라고 한다. 카스트로와의 첫 만남을 게바라는 이렇게 묘사했다. " 나는 밤새워 피델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쿠바 원정대의 의사로 등록했다. 독재에 맞서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를 출발한 82명의 대원 가운데 크리스마스까지 쿠바의 거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집결한 사람은 15명 뿐이었다. 그중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들어 있었다. 1959년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게바라는 의사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으며, 특히 그가 지휘한 산타 클라라 기지의 전투는 바티스타 독재를 전복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게바라의 대략적인 역정이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진다. 모든 혁명 일세대가 파괴와 전복의 과정을 통해 혁명을 시작하지만 새로운 건설의 과정에서의 혁명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듯이 게릴라들도 혁명성공 이후 온갖 악전고투를 겪는다.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장관(1961년-1964년)을 지내면서 고립무원의 쿠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게바라는 보장된 명예와 안전을 버리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는 요지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긴 채로 그는 큐바를 떠났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제국주의와 정부군에 맞서 투쟁하던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과의 교전 끝에 생포되어 그를 죽이려는 미국의 지시에 의해 사살된다. 그를 체포한 볼리비아 장교가 생포 직전 총구를 겨누며 물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중이오" 그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일에 대해 마지막까지도 굳건한 믿음을 보낸 그런 사람이었다. <##IMAGE##> 게바라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변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고 압제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과 실천은 단지 소위 운동을 하거나 변혁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신은 이른바 청년정신이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지도정신이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지극히 순진무구했다. 그의 일기와 그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끊임없는 도전의 자세는 어쩌면 그가 자기 내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한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일종의 반전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그를 영웅으로, 전설과 신화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게바라를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많은 열사가 전설이 아닌 투쟁과 전진의 살아있는 북소리로 부활할 때 단순한 "추모"를 넘어서는 "계승"을 통한 더 많은 열사로 우리가 거듭나듯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살다간 게바라에게도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장교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게바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가 마지막까지 생명을 바쳐가며 온갖 지위와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려가며 부여잡고자 했던 그것은 바로 혁명에 대한 불멸성이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지나치게 가볍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 말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갈 인생의 거시적 목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는 23세에 라틴아메리카를 횡단하며 민중의 삶을 보고 느꼈으며 26세에 과테말라에서 총을 들고 제국주의와 싸웠으며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쿠바로 떠나는 혁명가들의 배에 몸을 싣고 서른한 살이 되던 59년에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겨우 서른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신념을 위해 싸웠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움켜쥐고 갈 무기와 신념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월례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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