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중)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5년 10월 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중)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8-09 12:10 조회3,246회 댓글0건

본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지배 당해 온 나라들이나 혹은 지금도 제국주의 나라에 의해 주권을 빼앗겨 온 나라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고 침략하여 온 역사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제 40년,
미제국주의자의 지배를 받아 온 남한 같은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고 더욱 철저하게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이들 세력은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깨닫지 못하고
제국주의자의 공작을 <선물>로 착각하고 있는 양상을 띄고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민족통신 연재기고를 통하여
지금까지 <남미 나라들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하여 다루어 왔다. 이번에는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나라들을 어떻게
지배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고찰(2)해 보려고 한다.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중)




<##IMAGE##>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지배 당해 온 나라들이나 혹은 지금도 제국주의 나라에 의해 주권을 빼앗겨 온 나라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고 침략하여 온 역사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제 40년, 미제국주의자의 지배를 받아 온 남한 같은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고 더욱 철저하게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이들 세력은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깨닫지 못하고 제국주의자의 공작을 <선물>로 착각하고 있는 양상을 띄고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민족통신 연재기고를 통하여 지금까지 <남미 나라들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하여 다루어 왔다. 이번에는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나라들을 어떻게 지배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고찰(2)해 보려고 한다.



2. 노예무역 시대


유럽인들은 15세기 초에 ‘대 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아프리카 해안 지대에서 향료무역과 다이아몬드와 금등에대한 무역을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적극적
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점령하고 광산개발과 농업 플렌테이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노동력’ 이 금보다 더 귀하게 되었다.

이때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에서 ‘노동력’이 엄청나게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착안한 것이 바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노예제도’ 였으며 노예들의 노동력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 와 ‘노예무역’ 방안을 창안 해 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등 유럽 여러 나라들은 앞을 다투어 가면서 아프라카 ‘노예무역’ 에 착수 했다.

노예무역의 규모에 대하여 통설로는 1500만 -2000만 아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위스콘신대학의 역사학 교수 커틴 박사는 보다 정확한 과학적 통계자료를 제시했다.

노예무역의 시대별 수출은 다음과 같다.

1451-1600년27만4900명, 1601-1700년134만1100명, 1701-1810년
605만1700명, 1811-1870년189만8400명으로 커틴 박사는 제시했다.

결국450년 동안 계속된 노예무역의 규모는 956만6,100명으로 집계 되었다.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인들은 450년동안 상상을 초월한 비극과 고난과 공포속에서 살았으며 아프리카 인구가 격감하는 비운에 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인들이 그 많은 노예들을 붙잡는 방법은 어떤 방법 이었을까?

그때까지만해도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부 지역까지 깊숙히 침입 해 들어 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었다. 아프리카의 내부 지방의 사정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예들를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백인들은 옛날부터 연약한 타민족을 이용하고 매수하는데 명수였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지역에 있는 부족들을 매수하여 총과 화약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들이 아프리카 내부지역으로 깊숙히 침입해 들어가서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시작 하게 하여 많은 전쟁 포로를 붙잡아 이끌어 오도록 유도했다.

메수된 해안지대의 부족들은 무상으로 제공받은 신기한 총과 칼과 화약을 손에 들고 아프리카 내부 지역 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 가 타부족들을 쉽게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부족들끼리 싸움을 하여 붙잡아 온 포로들을 백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 주었다.

포로들을 붙잡아 오는데 대한 보상은 무엇이였나?

물론 아프리카인들에게 처음 만저 보는 신기한 총과 칼 그리고 화약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는것 자체가 큰 보상 이였다.

그 외에 아프리카인에게 매우 신기하게 보이는 유럽의 여러가지 종류의 직물과
장식품들 그리고 사치품 (손수건) 등과 약품들 이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 중에서 해안가에 살고 있는 다호메 부족과 오요부족은 유럽인들에게 매수되고 유럽인과 결탁하여 노예산양에 가담한 대가로 얻은
이익으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발전하고 부강한 부족이 되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한편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것이 영국의 이른바 ‘아프리카 기독교 선교’ 정
책 이었다. 1788년에 영국은 아프리카 ‘내륙탐험협회’ 를 창설하여 막대한 재정적 지원으로 탐험가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를 내륙지방으로 깊숙히 들여 보냈다.

‘런던 전도회’ 는 리빙스턴을 아프리카 초대 선교사로 파송했다. 리빙스턴의 그 유명한 ‘아프리카 탐험기’ 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신비로운 강과 호수 그리고 산과 계곡에 대하여 낱낱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과 포교의 방법에대하여 기술하였다.
리빙스톤의 ‘아프리카탐험기’ 는 영국의 침략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
었으며 침략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포교와 함께 교육에 공헌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인들의 손에 성경책을 전달하는 순간 아프리카인들
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럽 침략자들에게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와 금은 보화를 이미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순박한 아프리카인들은 성경책과 다이아몬드를 맞바꾸는 꼴이 되고 말었다.

한국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개화운동에 앞장 서는 사이에 미국과 일본은 가쯔라-테프트 조약을 맺음으로 일본이 마음 놓고 ‘한일합방’ 을 추진시킨 것은 아프리카의 경우와 꼭 같은 수단방법 이었다.

지금 아프리카의 54개의 나라들 중에서 콩고와 수단, 짐바브웨, 그리고 에티오피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부족들간의 적대심으로 내전을 계속하고 있다.

수십만의 아프리카인들이 해마다 희생되고 있으며 나라와 부족들간에 그 비극적 인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근본적 원인은 무었일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과 미국이 그 옛날에 아프리카를 무력과 종교로 침투하
여 침략하고 지배한 그 낡은 방법들을 지금도 조금도 변함 없이 그대로 사용하면
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부족들을 매수하여 상호간에 ‘이해타산’ 에 얽혀서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아프리카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노예’ 로 사로 잡혀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어느때 어떻게 끝 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유럽의 인도주의자들이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의 죄악성
을 깨닫고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예무역폐지협회”를 1787년에 설립 했으며 1823년에 ‘반노예제협회’ 를 조직하여 영국 의회에 출두 하기도 했다.

1807년에 영국 정부는 노예무역을 폐지한다고 형식상으로 발표를 했다. 하지만 노예제도로 이익을 보고 있던 상인들과 미국의 대지주들의 거센 반대로 인하여 영국정부의 발표는 말 뿐이요 아무 실효가 없었다.

1833년에 영국은 또다시 노예제도 ㅍ기를 선포하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게도
동조할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실제로 노예무역이 완전히 끝난것은 인도주의자들이 노예무역 반대운동 을 시작한 1787년 부터 약90여년이 지난 후 1870년대에 들어 서서야 드디어 그 죄악의 노예무역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3.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분할정책


아프리카 노예무역 제도가 폐기 되기는 했지만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착취
행위를 포기한 것은 절대로 아니였다.

유럽인들이 1870년대에 ‘노예무역 포기’ 를 선언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선언은 1870년대 부터 ‘제국주의 경재침략’을 또 다시 새로 시작 한다고 하는 것을 선포
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선언’ 외에 아무 의미도 없는것 이었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 공업제품의 원료를 확보하고 금은 보석과 농산물을 회득 하기위하여 ‘노예무역’ 대신 제국주의적 ‘식민 통치’ 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새로 시작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식민통치의 시작과 그 방법은 이른바 열강들의 ‘분할정책’ 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등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에서 ‘상업적 영향력’ 과
‘군사적 기지 확보’ 를 목표로 하여 서로가 날카로운 영토 쟁탈전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의 쟁탈전의 결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바로 ‘식민지 분할정책’ 이었다.
쉽게 말하면 ‘땅 나눠 먹기’ 쟁탈전 외에 아무것도 아니였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많은 나라들의 국경선이 거이 가 다 ‘일직선’ 으로 그어저 있는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땅을 나누어 가지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국경선을 ‘일직선’ 으로 그어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등 국가별 땅의 소유권을 확실히 밝히기 위함 이었다.

한 예를 들어 본다.

‘일직선’ 으로 그어진 국경선 양쪽에는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는 물론이고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한개의 단일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열강들이 제멋대로 그어 놓은 ‘일직선’ 으로 인하여 서로가 갑자기 외국인들이 되고 말었다.

열강들이 편리하게 그어 놓은 ‘일직선’ 으로 인하여 같은 혈통을 이어 받은 같은 부족들이 ‘너는 영국에 속 하고 나는 프랑스에 속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분열
되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통치 초기에 열강들이 제멋대로 그어 놓은 국경선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이 먼 훗날에 독립할 때도 그 ‘일직선’ 이 그대로 유지 되였고 또 독립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도 그 ‘일직선’ 이 아프리카인들을 갈라 놓는 국경선에 의해 부족간의 분쟁으로 작용하였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국경선으로 인하여 부족과 부족끼리, 나라와 나라들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그 근본적 이유는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악랄한 열강들이 심어 놓은 분열의 씨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깊이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오늘 한반도의 38선으로 인하여 북과 남이 분열되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이유는 아프리카의 분열과 분쟁과 일맥상통 하는 근원적인 원인을 공유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들어서서 열강들의 이익을 위하여 약소국들이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도 강대국들의 분열정책에 의한 결과라고 본다.

우리는 아프리카 인들의 그 무시무시한 부족들간의 분쟁을 비난하거나 미개한 나라들의 행동 이라고 쉽게 정죄할 자격이 우리 에게는 없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식민분할정책’과 한반도의 ‘냉전분할정책’이 일점일획도
다를바 없는 동질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냉철하게 깨닳아야 한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편이상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구분 할 수 있다.

ㄱ)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내왕시기 15세기-17세기
ㄴ)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탐험과 노예무역시기 1450- 1870년
ㄷ)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착취와 분할 정책시기 1870- 1885년
ㄹ)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분할 완료시기 1885- 1914년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땅 나누어 먹기’ 쟁탈전의 양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
한 현상이 장기간 벌어졌기 때문에 일일히 기술하기가 매우 어렵다.그럼으로 열강들의 ‘분할조약’ 들에 대한 것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 간단히 기술
하는것으로 대신 하겠다.

1876년에 프랑스-벨기예 사이에 맺은 ‘국제아프리카협회’.

이 협회는 프랑스와 벨기예 두 나라가 중앙 서아프리카와 콩고 분지등을 분할 소유를 하기위한 협회 이었다.

1884년에 영국과 포루투갈 사이에 맺은 ‘영국-포루투갈 협정’.

이 협정은 포루투갈이 콩고 하구 영유권을 임이 소유하고 있음으로 영국은 그곳에서 자유교역권을 행사 할 수 있다는 협정 이었다.

1886년에 ‘영-독협정’.

이 협정은 영국과 독일이 동아프리카 내륙부분을2등분 하여 서로 영유권을 소유한다는 협정 이었다.

1889년에 ‘영-프랑스협정’.

이 협정을 맺음으로 두 나라는 나일강 수원과 우간다, 진지바르와 소말릴란드등 여러 지역을 3분활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이 분활하여 소유 한다는 협정 이었다.

1890년에 ‘영국-포루투갈협정’.

이 협정을 맺음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벌어지고 있던 로디지아, 잠비아, 말라위, 모잠비의 소유권을 위한 복잡한 대립전을 끝장내기 위한 협정이었다.

그 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장관J. 체임벌린을 파송하여 남아프리카 보어인 공화국과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의 승리로 인하여 반세기 동안의 길고 긴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경쟁은 사실상 완료되고 끝이 났다. (다음에 계속…)



[유태영 박사]아프리카를 침략 해 온 제국주의자들(상)

*필자의 다른 논문보기---아래를 짤각하세요!

[유태영]미국의 멕시코 침략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역사적 교훈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