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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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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6-15 02:31 조회2,0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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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그동안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수난을 받아 온 나라들 가운데
무려 87개국을 상세히 소개하는 글들을 발표하여 해내외 동포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중 일부는 "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1)"라는 제목으로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했고, 오는 9월께 그 두번째 책이 출판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가해자로 알려진 나라들과 함께 그 가해자들과 결탁한 종교계에 대해
집필중에 있다. 두번째 글로 "중세기 로마 기독교제국의 붕괴와 비잔티움 제국의 창건, 동서로 분렬된 로마
캐톨릭 교회와 비잔틴 동방교회"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2]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글: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중세기 로마 기독교제국의 붕괴와 비잔티움 제국의 창건
동서로 분렬된 로마 캐톨릭 교회와 비잔틴 동방교회


<##IMAGE##>로마 제국은 BC 753년에 건국되여 AD 1476년 까지 2,200년 동안 유럽의 중심이 되여 존속한 나라이다. 로마라고 하는 옛날 작은 도시에서 출발하여 융성했던 도시국가로 발전하였으며 그후 로마 제국이 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여 그때 당시 로마 제국이 내외로 당면하고 있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가 통치할 때 로마제국은 또 다시 분렬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데오도시우스 1세는 392년에 그때 당시 로마 제국의 당면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런데 데오도시우스 1세는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물려주는 큰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로마 제국의 령토를 동서로 양분하여 서로마 제국은 그의 장남 아르키디우스에게 주고, 동로마 제국은 그의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나누어 주었다.

데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에 두 아들이 동서로 분리된 로마 제국을 제각기 통 치를하게됨으로서 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에 창건된 후1145년만에 동서로 분렬되는 비운에 처했다.

분렬된 로마 제국은 다시 통합되지 않었으며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분렬됬다. 분렬된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리였다.

로마 제국이 둘로 분렬되였지만 분렬된 두 개의 제국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이여 받았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분렬은 곧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황청”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로마 캐톨릭 교회도 “서로마 캐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티움 동방교회”로 분렬되였으며 동방 비잔티움 교회는 그 후에 “그리스 정교회”라고도 불리어졌다.

분렬된 양진영의 교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로마 캐톨릭 교회의 “교황청”의 정통성을 이여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의 원인


로마 제국에 대한 그 당시 유럽인들의 동경은 막강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엄청난 정치력을 쏟아 부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상”은 최고의 상징이되여 나폴레옹을 비롯하여 유럽 각국에서 국가의 문장으로 채택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독수리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것 처럼 그당시 정치력과 교통망은 신화적인 것이였으며 가히 영원히 번영할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서구 열강들의 역사속에 오늘도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이 왜 비참하게 쇠퇘하고 멸망했을까?

신성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대한 원인 분석이 너무나도 방대하다. 종교와 문화와 인종 문제 그리고 정치와 경제등 다양한 관점에서 멸망의 역사적 원인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제3세계 눈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의 원인을 간략하게 살펴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ㄱ. 종교적으로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로마의 전통적인 많은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일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을 황제의 법령으로 기독교화 한것이 멸망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이교도의 교사인 조지무스는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부들은 반론을 제기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게르만 족의 침입을 비롯하여 여러 만족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한것이 멸망의 원인이며 동시에 오히려 로마의 시민들이 기도교를 진실히 믿지 않은 이교도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오직 신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서로 관심을 끌던 중세의 종교적 론쟁이 바로 로마 제국의 멸망의 원인으로 여기고 있다.

ㄴ. 17세기에 이르러 439년에 제정된 법전이 발견되였는데 그 법전이 말 해주는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사회상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됬다. 로마 제국의 말기 현상으로 과중한 세금, 관료의 타락, 중간계층의 몰락 그리고 농노들의 반란으로 인한 경작지의 황페등을 멸망의 요인이라고 전해 주고 있다.

ㄷ.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멸망의 요인을 밝히고 있다.

로마 제국에 침입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게르만족의 침입이며 또 하나는 기 독교의 침입을 지적한다. 특히 기독교의 침입에 대하여 무기력한 황제가 기독교를 수용하여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은 점과 그당시 로마 제국의 수준으로 볼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독교가 비대해진 점을 지적했다.

ㄹ. 로마 제국의 농장 제도에 큰 변화의 문제가 발생했다. 농장의 노예들의 공급은 주로 전쟁을 통해서 이였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그것은 노예 공급의 끝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때 황제에게 충성하던 군대의 충성심 약해짐으로 황제는 과다한 세금을 강요하여 군부를 지원했다.

이로 인하여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과 민심의 혼란이 날이 갈수록 심화 됐던 것이다. 이와같은 이유와 원인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쇠퇴와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부터 출발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것이 로마 제국 역사의 제1단계 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곧 지중해 연안 전체를 정복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전 유럽을 점령했으며 동쪽으로는 그 당시 오리엔트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세계를 정복한 화려한 신성 로마 제국은 그 화려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의기양양했던 로마인의 기질이 어느새 부정적인 파도에 밀려서 끝내 쇠퇴와 멸망에 이르렀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렬되는 운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이 분리되여 떨어져 나간후에 남아 있던 서로마 제국은 어떻게 됐나?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허울 좋은 존재로 전략하고 그대신 군벌의 지도자들이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영향권안으로 들어 갔으며 게르만족의 군인들은 서로마 제국의 군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의 최후의 붕괴에 대하여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으나 결정적 이유는 야만의 대거 침입과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유럽 세계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수없이 많은 왕국들이 우후죽순 모양으로 창건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통적인 양상은 이 모든 신생 국가들이 기독교의 영향권하에서 로마 교황청의 통치권과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 했지만 그러나 로마 캐톨릭 교황청은 여전히 건재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313년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후부터 476년까지 163년 동 안 로마 캐톨릭 교황청의 권위는 유럽 전역에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이미 기독교화가 완전히 되여 있었고 게르만족의 기독교화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 전역에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이미 강력한 지배세력으로 뿌리를 깊이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세속 황제는 몰락했지만 로마 교황청에는 하등의 동요가 있을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유럽 전역에서 크고 작은 민족 국가들이 우후죽순 모양으로 창설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신설 국가들이 로마 캐톨릭 교회의 영향권하에 있었으면서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으니 캐톨릭 교회는 지상에서 신의 통치권의 대행자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로마 캐톨릭 교회에 고질적인 어려운 문제로 등장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상 숭상과 예베”의 문제이었다. 예수상,성모 마리아상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성상 숭상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에 절대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론쟁은 수 세기 동안 로마 캐톨릭 교회 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 성상 숭상예배 문제로 야기되는 분쟁은 종교적 분쟁 뿐만 아니라 정치적 분쟁으로까지 확대되여 유럽 전역에서 수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성상 숭배문제는 드디어 특히 동방 교회 진영에서 “성상 파괴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여 전개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도원제도 문제를 비롯하여 “예수의 양성론과 단성론” 문제는 수세기 동안 유럽 세게를 온통 분렬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유럽 세계에서 막강한 통치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 케톨릭 교회는 “기독교 교리”싸움으로 전유럽을 갈기갈기 분렬시키고 있었다.

로마 케톨릭 교황청은 줄곳 “성상 숭상과 예배” 를 지지하는 쪽을 기울어 지고 있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 진영과 비잔틴 교회는 “성상 숭상과 예배”를 적극 반대하여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서로마 캐톨릭 교회와 정면 대립의 두각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2.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간추린 역사


동서로 분텰된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제국으로서 476년에 창건하여 1453년까지 978년 동안 존속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6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전의 로마적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그리스 문화가 널리 보급됐으며 그리스어가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됐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옛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기독교와 헬레니즘을 국가의 권위와 토대로 삼았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건축, 희화, 조각 등의 모든 예술적 양식에는 반드시 기독교적 상징을 나타내야 한다고 강요했다. 모든 예술과 문학활동에 있어서 비잔틴의 종교적 이념과 배치되는 것은 금지됐으며 이러한 종교적이며 정치적 요구는 수세기 동안 계속됐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은 그 무엇이든지 야만인의 것으로 취급됐다.

8세기와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권위와 안전에 대하여 세 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1) 그리스적 요소의 우월성 2) 정치적인 안전성 3) 기독교적인 통일성

그때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하여 “예수에 총실한 종”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비잔틴 제국은 명실 공히 기독교국이 되고 있었다.

기독교가 국교인 비잔틴 제국에서 총주교의 임명권이 황제에게 있었다. 황제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직접 나온다는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지고 있었다.

총대주교의 선거가 교구내에 진행되고 있다할지라도 최종 승인은 반드시 황제에게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와 종교의 밀착은 자연히 종교의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비잔틴 동방교회의 부패에 대하여 한 수도사가 맹렬히 비난하고 있는 글을 소개한다.

“…오, 허영된 것들의 허영됨이여, 아니 차라리 어리석음이여; 교회는 구석구석 번쩍이는데 가난한 자들은 굶주리는도다. 교회의 담장은 금으로 뒤덮여 있는데 어린 아이들은 벌거승이로다”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호화로운 허영의 것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갖다 바치도록 만드는 법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부가 번듯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기꺼히 갖다바친다. 휘황찰란하게 치장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거룩하게 보이는 성직자와 성녀들을 그들은 아름다운 형상으로 만든다”

1054년에 로마 캐톨릭 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는 완전히 최종적 결별을 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476년에 신성 로마제국이 정치적으로 동서 제국으로 분렬된 후에도 그러나 다행한 것은 로마 캐톨릭 교회만은 분렬되지 않고 동서 교회가 오직 하나의 ”교황”의 통치하에 놓여져 있었다.

서로마 교회는 “교황”이라는 칭호 사용했고 동방 비잔틴교회에서는 “총대주교”라고 하는 칭호를 각각 578년동안 사용하면서 동서 진영의 교회들이 교황의 통치권하에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1054년에 이와같은 동서 교회의 관계마져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의 이유와 원인은 무엇이였는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황제의 권한으로 비잔틴 교회의 “총대주교”로 포티오스를 임명했다. 로마 교황 니콜라우스는 비잔티움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한데 대하여 노발대발하여 교황의 권한으로 비잔팉움 황제가 임명한 포티오스 총대주교를 파면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로마 교황청과 비잔틴 동방 교회 사이에는 오랜 역사의 유대에도 불구하고 1054년에 완전히 분렬되고 말았다.

사실에 있어서 서구의 기독교 세계의 내부에는 이러한 갈등과 분렬의 싹이 이미 장기화되고 있었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와같은 동서 교회의 분렬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여겨질 뿐이었다.

하지만 동서 제국은 분렬후에 로마 캐톨릭 교회의 주선으로 재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1274년에 양편 제국의 교회들이 통합 시도에 합의를 했다.

1439년에는“통합선언문”을 작성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동방 비잔티움 측에서 대규모 통합 반대운동이 전개됨으로 결국 통합시도는 165년동안이나 계속했지만 결국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3.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멸망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은 한 때 북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 드넒은 터키의 중부 평원에서 농산물이 넘처나는 비옥한 땅, 발칸반 등을 점령하여 강대국으로 번창하고 있었다.

하지만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말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됬다. 천년왕국 비잔티움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때 당시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점령을 당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한 오스만 투르크 세력 앞에서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은 7,000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에 2,000명은 용병이었다. 이에 맞서는 오스만 투루크 제국의 병력은 200,000명 정도이었다. 다소 과장된 수의 표현일지라도 어쨋던 병력이 턱없이 쇠약한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정면적인 공격을 절대로 당해낼 수 없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구스 11세는 황제의 상징인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지고 병사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오스만 제국의 군인들과 혼전에 함류하여 싸웠다. 하지만 7,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비잔틴 제국의 운명을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전투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을 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구스 11세의 모습을 다시 본 사랍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약 4만명이었는데 전쟁으로 4,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동방 비잔틴 교회의 대표적 성당인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개조됬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포위되여 멸망에 직면하고 있을 때 유럽에 그 많은 기독교 국가들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무슬림과 싸워야만할 절박한 현실을 호소하면서 원조를 간청했다. 비잔틴 제국의 위신이 아주 말이 아닐 때였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의 원조 간청에 대하여 유럽의 반응은 절망적이었다. 먼저 영국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저 위대한 기독교 제국의 군주가 오스만 사라센인들에게 떠밀려 저 동방 끝에서 이 먼 서방 끝의 섬나라까지 찾아와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가 됬으니, 오호 통재라…”

사실에 있어서 비잔틴 제국의 절박한 원조 호소에 대하여 유럼의 영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이태리의 여러 도시국가들 모두는 싸늘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 당시 유럽의 사정은 백년 전쟁, 흑사병과 기근등 여러가지 악조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 사라센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는데 대하여 그렇게도 냉담했던 것은 그 당시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황금시대를 과시하고 있었다. 멀리는 오스트리아, 항가리 평원, 발칸반도전역, 북아프리카, 이란, 메소포다니아, 페르시아만, 터키중부 평야 그리고 소아시아등 그야말로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통치하는 막강한 제국으로 군림했다.

기독교의 성지이며 신약 성경의 주요 무대였던 소아시아 터어키 땅이 완전히 이슬람들이 지배하는 땅으로 뒤바꿔지고 말었다.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 성당이었던 웅장한 소피아 성당 내부에 가득한 기독교의 성화들을 이슬람들이 회색으로 지우고 모스크로 바꾸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 포기하고 그후 박물관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날의 영광 스럽던 비잔틴 교회의 모습은 사라져 없어졌고 오직 옛날의 역사적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콘스탄티노블의 함락은 중세기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있다.

또한 유럽의 종교적 전통과 정치적 통치력의 종말이 화약과 대포등의 등장으로 인한 필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제3세계의 눈으로 보는 서구 열강들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종교가 정권과 밀착하여 정권을 지배하든지 혹은 종교가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고 사탄이며 썩어가는 신의 시체이다. 제3세계의 눈을 통하여 사탄이 되고 썩어가는 신의 시체를 서구 유럽의 역사속에서 발견한다.

최소한 종교는 정권의 문밖에 처해 있으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여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주시하는 파수군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가? 서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부패했던 교회의 모습을 오늘 한국 교회에서 다시 발견한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예수를 고급 세단 차에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한 교회로 모신다. 주일마다 돈을 계산하고 더 크고 더 화려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예수를 건축가로 만든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중세기 유렵의 기독교의 전통을 그 대로 이여 받은 예수의 원수들이다.

제3세게의 진지한 기독교인들이 부패한 기독교를 추방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그 추방을 당한 기독교를 다시 부흥시키고 있다. 제3세계에서 서구 유럽의 “신은 죽었다”라고 신의 죽음을 선언했는데 그 죽은 신이 한국에서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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