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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형 송환장기수 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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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1-05-04 00:00 조회2,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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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규(34세, 여) 경남대 북한대학원 통일교육전공 책임교수가 김석형 송환장기수가 작년 9월2일 이북으로 떠나기 전에 두차례에 걸쳐 구술로 채록한 대담내용들을 그가 떠난뒤 책으로 발행해 화제가 되고 있다. 통일뉴스와 필자 이향규교수와의 대담내용을 전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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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향규 - 송환장기수 김석형 전생애 구술채록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6127_91.jpg작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그 중에 한 명인 김석형(88세)씨의 생애를 `자연수명`이 다하거나 북으로 송환된 다음에 글을 내는 조건으로 구술채록한 사람이 있다. 이향규(34세, 여) 경남대 북한대학원 통일교육전공 책임교수가 그이다.
우리 사회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은 오랜 시간 잊혀진 존재로 묻혀있다가 작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송환이 명시됨으로써 비로소 언론과 사회의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향규 교수는 이미 94년부터 김석형씨의 전생애를 구술받아 채록해 두었고, 김씨가 송환된 후 그 내용을 두꺼운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26일, 이 교수가 강의를 나가고 있는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책을 내게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문 : 김석형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 답 : 90년대 중반부터 사회과학분야에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94년 서울대 교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기말보고서 과제로 개인 구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김 선생님이 주저하시면서 두달여의 탐색기간이 있었습니다. 94년 10월에서야 첫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95년 4월까지 매주 한번씩 3시간 정도씩 진행했습니다.
그 뒤 선생님과 친해진 뒤로 98년 2월부터 98년 6월까지 2차 구술 채록 작업을 했습니다.

■ 문 : 구술 채록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 답 : 제일 어려운 건 녹취 풀기죠. 녹음된 테이프 양이 100시간쯤 됐으니 이것을 푸는데 약 400시간쯤 걸렸습니다. 한번 구술한 내용을 풀어서 다음 인터뷰를 갈 때 3,40쪽 분량의 전번 내용을 갖다드리고 검토를 받곤 했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실존적인 고민도 깊어지게 됐죠.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 김일성 주석의 3년상을 치르고 그 기간 동안 이발도 하지 않는 모습이라든지, 이 구술의 맨 마지막에 이 글을 김 주석께 바친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아직도 내가 이 분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했지요. 이런 이해하기 힘든 멘털리티가 가장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 문 : 이런 생애사 구술 작업의 사례들이 있나요?
□ 답 : 김진계 옹의 구술을 현장문화사에서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상하권을 낸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은 비전향 장기수는 아니고 좌익수이고, 글도 소설적 형식을 빌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의 전 생애를 구술로 채록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 문 : 구술 채록 작업을 하시면서 새로이 눈에 들어온 대목들이 있다면 좀 소개해 주시죠.

6127_89.jpg□ 답 :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하지만 선생님의 삶은 식민지 지식인의 삶, 45~61년까지의 북한사회, 62년 이후의 30년간의 감옥 생활 등 그 자체가 역사였죠. 특히 45~61년의 북쪽에서의 삶은 북한 사회주의 형성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 반공 삐라가 뿌려졌는데 어떻게 처리했는지, 새로 바뀐 교과서를 가르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심지어 토지개혁을 하는데 정말 열심히 일해서 땅을 모은 지주가 가까이에서 자살하는 사례 등 살아있는 삶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 선생님은 정보계통에 계속 종사하셔서, 우리가 그냥 생각하기에는 해방후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으로 아는데 실제로는 미국과 남측의 파괴 공작 등이 상당히 심했다는 사실을 많이 구술해 주셨습니다.

■ 문 : 구술의 내용이 방대한데 어떻게 그 많은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는지요.

□ 답 : 구술 내용은 총 1,200여쪽에 달하는데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내용을 빼고 약 750여쪽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기억력은 아주 정확하여 초등학교때 같은 반 여학생의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그 집 어머님이 만두가게를 하신 것까지 알고 계셔요.
감옥생활에서 새로이 변화된 내용을 집어넣어 기존의 생각을 바꾸려는 교도소측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 뿐 아니라 다른 장기수 분들도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도 빼놓을 수 없죠.
선생님은 인터뷰 전에 늘 글로 말씀하실 부분을 정리해 오셨어요. 번호까지 매겨가며 꼼꼼이 챙기고 기억나지 않은 부분은 기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죠. 이 육필 메모들을 보세요. 이면지를 많이 사용하셨고 뒷면도 비워두시는 법이 없어요. 북쪽에서부터 생활화가 되셨다고해요.

■ 문 : 김 선생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죠.

▶다시 만나 북에서의 삶을 채록해 전생애

□ 답 : 사실 제일 어려운 독자가 선생님이시죠. 선생님이 책을 남기신 걸 후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가감없이 구술을 그대로 적었지만 독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많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책 제목을 `겨레의 넋을 찾아 반백년`이라고 정해주셨지만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라는 제목으로 바꿨어요. 이 제목이 훨씬 더 선생님의 삶을 잘 표현해 준다고 봅니다.
다시 뵙고 싶어요.
그리고 욕심이 있다면 다시 만나 북에서의 삶을 채록해 선생님의 전생애를 채록하고 싶습니다.

■ 문 : 출판 계획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 답 : 책은 서울대학교 한국교육사고 자료총서의 하나로 선인문화사에서 5월 20일경에 한권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참고로 선생님에 대한 모든 자료, 사진, 친필원고 등은 선생님의 뜻에 따라 모두 서울대 사범대학의 한국교육사고에 기증됩니다.

■ 문 : 독자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죠.
□ 답 : 책을 사서 봐주시면 좋겠어요.(웃음)
독자들이 아무 편견없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반북도 친북도 반정부도 친정부도 아닌 정치적 편가름 없이 사람의 이야기로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글 속에는 마음 아픈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남쪽에 남게되신 분, 감옥에서 돌아가신 분, 가족과 친구 등...

■ 문 : 김 선생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는데요. 선생님을 한마디로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 답 : 정치적으로는 훌륭한 정치공작원이세요. 감옥에서도 전향공작에 흔들림이 없으셨고 오히려 각 교도소 마다 교양을 주도하시기도 했지요. 감옥안에서는 속옷 빨아입는 것까지도 함께 결정해 실천할 정도로 조직적 생활을 했다고 해요. 출소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셔서 송환 직전까지 매주 두 세차례 이상 집회나 행사에 참가셨는가 하면, 북으로 올라가실 때도 북쪽에 필요할 지 모른다고 슈퍼마켓 영수증까지 꼼꼼히 챙겨가신 분이죠.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감동적인 분이세요. 섬세하고 고상한 배려를 할 줄 아시는 분이시죠. 제가 한번은 커피를 찾자 원래 커피를 드시지 않아 없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다음번에 찾아뵈니 물이 끓고 있고, 커피와 프림과 설탕이 놓여있었죠.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저를 맞으셨죠. 소년같은 면모와 공작원으로서의 면모가 함께 있으신 분이죠. 그 분을 좋아합니다.



[김석형 연표]

1세 1914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에서 출생
5세 1918-1922 서당교육
9세 1922 보통학교 입학
14세 1927 결혼
15세 1928-1930 신의주 삼무학교 수학
17세 1930-1931 고향에서 곡상. 견심청년단조직, 야학할동
19세 1932-1933 민주 신경 실무학교
21세 1934-1936 야학활동, 견심청년단 활동, 농사
24세 1937-1945 박천군 수리조합 공수
32세 1945.8 해방, 덕안면 치안유지
33세 9146.3 조선공산당 덕안면당위원회 위원장
33세 1946.9 조선공산당 박천군당위원회 노동부장
33세 1946.12-47.2 평안북도 도당학교 학생
34세 1947.2 평안북도 희천군 보안서 문화부장
평안북도 보안부 도강계 (신의주)
평안북도 정주군 보안계장
평안북도 강계군 보안계장
35세 1948.3 내무부 38경비대대 정보계 (해주)
35세 1948.9 38여단 정보과 (사리원)
35세 1948.11-1950.10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제1과장
37세 1950.10-53.7 전쟁중 중국지원군 전투지원
40세 1953 조선공업기술연맹 함남도위원회 위원장 (함흥)
42세 1955 조선국제여행사 함흥안내소 소장
45세 1958.4 조선국제여행사 중앙위원회 평양상점 부지배인
48세 1960.7 남파
49세 1962.12 체포
49세 1962.12-64.2 서울구치소: 조사, 고문, 재판, 형확정 (무기징역)
51세 1964-1970 대전교도소
57세 1970-1987 대구교도소
74세 1987-1992 대전교도소
79세 1992.12.24 출소 (만 30년)
80세 1992-93.3 아산요양소
81세 1993.4-94.9 서울 봉천동 거주
81세 1994.9-2000.2 서울 낙성대 만남의집 거주
81세 1994.10-1995.4 생애사 구술채록 (1차)
85세 1998.2-1998.6 생애사 구술채록 (2차)
87세 2000.9.2 귀향

[출처:통일뉴스 2001-04-27]
김치관 기자(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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