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 수구세력 횡포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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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4/14/2001 작성일01-04-18 00:00 조회1,60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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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수구세력 반격 우려
송두율 교수, 수구세력 반격 우려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宋斗律) 독일 뮌스터대학 교수는 13일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경색되고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수구세력의 반격이 우려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최근 한나라당과 수구 언론이 자신의 한겨레 신문 칼럼을 구실로 `색깔론 논쟁"을 제기하는 것은 `햇볕정책"으로 어렵게 조성된 남북간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수구세력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자신은 이미 수많은 국내 언론매체에 기고해 왔으며 10여권의 저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바 있다고 밝히고 현시점에서 `한겨레" 기고만을 문제삼는 것은 의도적 도발의 혐의가 짙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과 일부 언론이 칼럼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기고한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말로는 언론자유를 외치면서 스스로 언론자유에 반하는 주장을 펴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시대적인 틀에 묶여 있는 정치나 언론이 있는한 한국 사회의 변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정치가 권력투쟁의 게임으로만 머물 경우 국민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송 교수는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 대해 이미 모든 해명, 반박 자료를 다 제출했다고 밝히고 이 재판이 2년 6개월 동안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가정보원측이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7년 망명한 황씨는 자신의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서 송 교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송 교수는 지난 67년 독일에 유학온 이후 한번도 남한을 방문하지 못했으나 지난 9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10여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송 교수는 지난해 2차례 고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나 당국이 준법서약서 제출 등을 요구하자 귀국을 포기했다.
송 교수는 지난 95년부터 남북한 학자와 해외에 머물고 있는 한민족 학자들이 모이는 `남북한 및 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선해오고 있다.
기사 = 연합뉴스 제공
1.송두율 교수 경력 및 활동
학력
○ 1951∼57 : 광주 중앙국민학교
○ 1957∼60 : 광주 서중학교
○ 1960∼63 : 서울 중동고등학교
○ 1963∼67 :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 1967년 7월 : 서독 유학
○ 1969년 6월 : 서독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박사(지도교수 : 하버마스)
○ 1982년 1월 :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교수 자격 취득
경력
○ 1972∼77 : 서독 뮌스터대학 사회학 조교수
○ 1977∼83 : 서독 베를린 자유대학 조교수
○ 1984년 이후 :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과 교수
○ 1988년 :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
○ 1994∼97 :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 교수
○ 1998년 이후 : 뮌스터대 사회학과 교수
※ 기타 초빙교수로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스웨덴 스톡홀롬 대학 등지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했고 1991년 1년 동안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초빙교수로서 초청을 받았으나 관계기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주요 학술활동
○ 철학과 사회학 관련 6권의 독일어 저서와 현재 출간 준비중인 영어단행본이 있으며 50여편의 영어, 독일어 논문이 다수 있다. 우리말 저서로서는 "계몽과 해방", "소련과 중국", "현대와 사상", "전환기 세계와 민족지성",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역사는 끝났는가", "21세기와의 대화" 등 7권이 있고 근 100편의 논문과 글이 발표되었다.
○ 1991년 5월 3주간 북한 사회과학원의 초청으로 사회과학원과 주체과학원 그리고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현대철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강연을 했다. 1995년부터는 매해 북경에서 열린 [남, 북, 해외 학자 통일회의]를 주도하여, 남북한간의 "학문공동체"를 실현시키는데 힘쓰고 있다.
해외에서의 민주, 통일운동
○ 1974년 3월 1일 유신독재철폐를 위한 운동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약칭 "민건")에 주도적으로 참여, 초대회장("74)과, 2대("75), 5대("78), 6대("79) 회장을 역임했다. 발기인 55명으로 시작된 "민건"은 국내의 유신반대 투쟁을 지원하고, 해외에서 이를 지지하는 연대운동을 벌여왔다. 이 단체는 80년대 중반까지 적극적으로 활약하다가 다수 회원의 귀국으로 그 이후는 활동이 한동안 정지되었다.
○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김대중씨 구명운동으로 고 윤이상 선생과 함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국제적 지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87년대선 이후에는 주로 저작, 학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송교수는 남북간의 학문 교류가 장기적으로 건강한 상호이해의 토대를 마련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남북간의 학문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의 도움을 얻어 1995년에 남북해외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북경회의"를 추진하였으며, 현재까지 이 행사는 매년 진행되고 있다. 현재 남북한 학자 연인원 150여명이 이 행사에 참가하였다. 이 행사에 참여한 남측의 주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구성준(제주대) 구영록(서울대) 권만학(경희대) 길승흠(전 서울대) 김경량(강원대) 김기정(연세대) 김연각(서원대) 김정기(한국외대) 김태일(영남대) 문정인(연세대) 민병석(명지대) 박건영(카톨릭대) 박기덕(세종연구소) 박명림(고려대) 백영철(건국대) 손호철(서강대) 신욱희(서울대) 심지연(경남대) 안석교(한양대) 오기평(서강대) 이정복(서울대) 이종석(세종연구소) 임용순(성대) 임혁백(고려대) 장공자(충북대) 장달중(서울대) 전홍택(KDI) 정영길(동국대) 정운찬(서울대) 정진위(연세대) 조동호(KDI) 지병문(전남대) 최장집(고려대) 하영선(서울대) 한배호(고려대) 외
2. 송두율 교수가 전해온 귀국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
○ 황장엽씨 망명 이후 1년이 넘고서야 발설된 "노동당 비밀당원 김철수=송두율"이라는 논란으로 현재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중이지만 아직까지는 별 진전이 없는 상태다. 이 문제로 그는 조국방문과 관련하여 홍역을 더 치루고 있는데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실이 규명될 것으로 믿고 있다.
○ 그는 이번에 귀국하게 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부친 성묘를 할 생각이고(지난 96년 당시 부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려 했으나 당국에 의해 귀국을 거부당하였다), 그가 추진해온 남북학문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국내의 학자들과 논의하고 아울러 학계의 동향도 둘러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주를 비롯하여 조국의 주요 도시를 방문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 그는 귀국할 경우 귀국성명 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소회(所懷)와 향후 계획에 대해 일반에 밝힐 예정이다. 그는 이 성명 혹은 회견을 통해 비록 많은 오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걸어온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임을 밝힐 것이다.
3. 송두율 교수 귀국 건의서 : 조건 없는 귀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2000년 7월)
우리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들은 현재 독일에 20여년 이상 머무른 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송두율 교수(독일 뮌스터대)가 올해 8.15 55주년을 기념하고 제2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대회"에 아무런 제약 없이 귀국할 수 있도록 당국이 협조해주실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송두율 교수는 멀리 해외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업적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어온 큰 학자입니다. 우리는 만약 송두율 교수가 자유로이 귀국하게 되면 당사자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송두율 교수는 본인의 뜻과는 달리 오랫동안 입국이 금지되어왔지만 이번 귀국을 통해 조국으로부터의 소외감을 털고 동포애의 따뜻함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20여 년만에 귀국했던 홍세화씨는 자신의 강연에서 "프랑스가 제2의 고향으로 느껴지는지"에 대한 한 젊은이의 질문에 "프랑스는 내게 너무나 잘 해준다. 그러나 내게 그곳이 제2의 고향이라는 느낌이 든 적이 한번도 없다. 프랑스 사회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나는 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가족 친지 이웃은 물론 우리 문화와 떨어진 채 타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정신적 어려움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화해를 추구하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천년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송두율 교수 등에 대해 조국이 따뜻함을 배려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송두율 교수의 귀국은 당사자 개인의 명예회복은 물론 과거 갈등에서 생긴 고통을 치유하고 화합을 도모하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 뿐 아니라 많은 해외인사들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군부독재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이들의 삶을 왜곡하여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였습니다. 이제 정부가 앞서서 마땅히 이들의 삶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훼손된 개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한편으로는 과거 비민주적 사회의 갈등과 대립문화를 청산하여 서로 존중하는 화합의 문화를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새로운 세기 제2의 건국을 위해 노력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국민의 정부의 취지에도 부합하는 일입니다.
셋째,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갖고 있음에도 반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그 동안 비민주적 정권아래에서 귀국할 수 없었던 송두율 교수가 귀국하게 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고 있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확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도 국제사회 기준에는 충분치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만일, 송두율 교수의 입국을 자유로이 허용한다면 한국 정부의 민주발전과 인권신장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천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당국이 충분히 고려해주기를 바랍니다.
넷째, 송두율 교수의 귀국 허용은 냉전구조 청산과 민족의 화해를 추구하는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대북 포용정책과 민족화해 정책의 출발은 순수하게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 과거 냉전시대와 독재정권의 왜곡 때문에 지게된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곧 인위적으로 만든 냉전문화를 청산하고 민족의 화해와 남북이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올해 6.15일 남북정상이 만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허심탄해 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올 8.15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9월에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해외의 통일인사들을 입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대의 냉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표적 해외인사인 송두율 교수의 귀국은 냉전 청산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취지아래 해외에서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위해 활동했던 해외인사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입국제한 해제가 이번 조치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취지에 정부당국이 이해하고 협조해줄 것을 다시 한번 요청드리며 송두율 교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해온 경력과 활동에 대한 자료를 첨부합니다. 당국의 검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0년 7월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준)
<자료1>송두율 교수 귀국 성명 요지(1999년)
저의 귀국문제해결을 위해 애쓰시는 <민족회의>와 <귀국추진위>의 여러분들게 먼저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귀국문제가 완전타결을 보지못한 현재, 완성된 형태의 <귀국성명서>를 보내드리지 못하는 점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러한 성명이 발표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다음과 같은 기본골간과 내용을 갖는 <귀국성명서>를 우선 생각해보았습니다. 참고해주시고 고견을 기대합니다.
1. <민족회의>와 <귀국추진위원회>에 대한 감사
2. 현 정부하에서 귀국이 가능해진 점에 대한 소견
3. <유신>과 80년 <광주>를 거쳐 87년 6월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독재에 대해서 나의 양심과 지성이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그때 비판과 행동을 했다.
4. 독재정당화의 논리의 핵심에는 항상 민족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이야기되기 때문에 민족화해와 통일문제는 당연히 나의 인식관점의 중심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5. <7.4공동성명>과 <합의서>의 정신은 민족화해와 통일에 있어서 꼭 지켜져야 한다.
6. 이러한 남북사이의 <상호인정의 정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남이냐 북이냐하는 양자택일의 관성적 사고와 행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공통분모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7. 현실정치적 구조가 그러나 여전히 양자택일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우선 남쪽의 독재와 맞부디친 나의 행동은 북쪽을 위한 행동으로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부당하게 매도되었다.
8. 특히 망명한 황정엽씨가 본인이 북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매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러한 어마어마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한 순간도 있어본 적이 없다. 귀국하면 담당변호사와 법정대리인과 현재 계류중인 소송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의할 것이다.
9. 독일의 통일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본인은 남과 북이 서로를 <내속에 들어있는 타자>라는 인식을 공유할 때만이 서로 화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1995년부터 매해 중재해온 <남, 북, 해외통일학자회의>를 더욱 발전시켜 남과 북을 아우르는 <학문공동체>가 분단된 조국땅위에서 튼튼히 설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다.
10.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기위해서는 특히 남북정부의 이해와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2년만의 본인의 조국방문의 하나의 중요한 의의를 여기에 두고 있다.
1999년 8월 8일 베를린에서 송두율
<자료2>송두율 교수와 정경모 선생 귀국 무산에 대한 민족회의의 입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는 지난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유럽과 아시아의 평화운동단체들과 함께 한반도냉전청산과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대회를 개최하였다. 본래 이 대회에는 일본과 독일에서 30여 년 이상을 망명자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정경모 선생과 송두율 교수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두 분의 귀국 조건으로 준법서약서 작성과 과거활동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라는 점을 내세움으로써 결국 귀국이 다시 무산되었다.
민족회의는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과거 정권과 꼭 같은 태도를 고집하여 두 분의 귀국이 무산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정부가 준법서약서를 강요하는 것은 냉전 시대의 낡은 작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또한 두분 선생에 대해 귀국조건을 내세우며 귀국을 무산시킨 것은 현정부의 통일정책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남북노동자 축구대회가 성사되고 남북간에 정당사회단체공동회의를 하자고 제의하는 마당에 북한사람도 아닌 세계적 명망을 지닌 해외인사의 귀국을 사실상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우리 민족회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야말로 냉전 청산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해왔다. 냉전의 청산에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냉전구조에 저항하다 조국을 떠나 망명해야 했던 해외인사들에 대한 조국의 따스한 동포애, 또 하나의 햇볕정책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송두율, 정경모 두 분을 포함한 미귀국 해외인사의 조건없는 귀국 허용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임을 밝힌다.
1999년 8월 15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4. 송두율 교수 <제5회 늦봄 통일상> 수상소감
거의 매년 품어보았던 저의 조국방문의 꿈이 번번이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귀국을 시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까지 느껴지던 차에,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을 향한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는 <늦봄통일상>의 금년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만감이 교차하는 며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분단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받은 통보였기에 더욱이나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분단된 조국을 멀리 떠나 30 년 이상 독일 땅에서 살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저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역시 독일의 통일보다는 먼저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독일은 이미 통일을 이룩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고통을 안고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을 늘 어둡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자나깨나 통일을 이야기하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늘 다투기만 하느냐는, 핀잔 섞인 이야기를 독일 사람들에게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발표된 이후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그들이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 이러한 관습화된 판단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갖 예상을 뛰어넘고 남북 정상이 새로운 통일 시대의 대문을 함께 여는 모습은 정말로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서 다가왔었습니다.
국내에서 여러분들께서는 이번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감동 속에서 실감나게 경험했겠지만, 저는 독일 텔레비전에 비친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눈빛들을 통해서 정말 이제는 우리 민족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활짝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화>의 시대에도 민족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는,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가 하루라도 빨리 좋은 열매를 맺어 남북이 하나가 되어 날로 좁아만 가는 <지구촌>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말로 어렵게 만든 이번의 귀중한 기회를 살려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이 반드시 큰 열매를 맺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제 남북 당국간에 실무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예견치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도 나타나겠지만, 함께 산다는 상생의 철학과 지혜로 일관한다면 어려운 문제들도 곧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되는 문제는 이제 남북 당국간의 대화와 접촉이 활발해진 조건에서 민간 수준의 대화나 접촉의 의의와 비중이 오히려 낮아질 수도 있다는 걱정도 생깁니다. 통일의 과정과 오늘의 결과를 현장에서 오래 지켜본 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당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민간차원의 다방면에 걸친 접촉과 교류 없이는 <마음의 장벽>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와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좋은 조건을 가졌던 동서독이 정치적, 경제적 통일이 이룩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문화적 통합에 있어서 숱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민간 차원의 남북 접촉과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실은 제가 오는 33년만에 서울 땅을 밟아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도 그 동안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 시대를 이제 활짝 연 남북 정상의 만남도 역시 개인적인 희생과 노력을 다 바치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생각됩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결행하셨던 북행길이 있었기에 남북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이 가능성은 현실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목사님께서 걸으셨던 통일의 길을 기리는 <늦봄통일상>이 담는 이러한 엄청난 무게를 생각할 때, 저에게는 이 상은 사실 너무나도 과분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가서 살아야할 하나가 된 <고향>을 그리며 외국 땅에서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사셨던 여러 선배님들 - 우선 윤이상, 임창영, 배동호 선생님을 떠올리게 됩니다만 - 이 제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이 분들을 대신한다는 심정으로 오늘 <늦봄통일상>의 시상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조국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저의 마음이 무척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이제 정말로 어렵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통일 시대에는 외국 땅에서 이미 쓸쓸히 사신 분들이 심심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통일의 길을 남북 겨레와 함께 걸을 수 있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도 미진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과분하게도 <늦봄통일상>을 수여하여 만 33년만에 조국방문의 정말 귀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친의 임종도 볼 수 없었던 불효 자식인 저에게, 그래도 성묘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여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저와 저의 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꿈 이야기를 하나 하고 저의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뮌스터에 강의차 내려가 있을 때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꿈을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인즉, 돌아가신 문 목사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동안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애쓰다가 돌아가신 여러 선배님들의 얼굴이 새겨진 이불포를 저에게 주시면서, "이 이불포가 비록 때가 탔지만 세탁하면 새것이나 다름없으니 잘 사용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이 꿈의 내용은 통일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많은 과제들을 제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감격을 항상 기억하면서 미력한 힘이나마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에 보탬이 되도록 더욱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국이 또 다시 무산된 이 순간의 심정을 담은 몇 마디를 추가합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통일시대]의 시작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긴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북/해외에 있는 우리 민족 모두가 노력하지 않고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통일시대] 의 긴 노정을 같이 갈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또 한번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우리의 통일문제와 연결해 보면서 반드시 여러분들을 머지 않아 뵈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베를린에서 2000년 7월 3일 오후3시 송두율
자료 제공 -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송두율 교수, 수구세력 반격 우려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宋斗律) 독일 뮌스터대학 교수는 13일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경색되고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수구세력의 반격이 우려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자신은 이미 수많은 국내 언론매체에 기고해 왔으며 10여권의 저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바 있다고 밝히고 현시점에서 `한겨레" 기고만을 문제삼는 것은 의도적 도발의 혐의가 짙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과 일부 언론이 칼럼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기고한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말로는 언론자유를 외치면서 스스로 언론자유에 반하는 주장을 펴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시대적인 틀에 묶여 있는 정치나 언론이 있는한 한국 사회의 변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정치가 권력투쟁의 게임으로만 머물 경우 국민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송 교수는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 대해 이미 모든 해명, 반박 자료를 다 제출했다고 밝히고 이 재판이 2년 6개월 동안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가정보원측이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7년 망명한 황씨는 자신의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서 송 교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송 교수는 지난 67년 독일에 유학온 이후 한번도 남한을 방문하지 못했으나 지난 9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10여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송 교수는 지난해 2차례 고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나 당국이 준법서약서 제출 등을 요구하자 귀국을 포기했다.
송 교수는 지난 95년부터 남북한 학자와 해외에 머물고 있는 한민족 학자들이 모이는 `남북한 및 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선해오고 있다.
기사 = 연합뉴스 제공
1.송두율 교수 경력 및 활동
학력
○ 1951∼57 : 광주 중앙국민학교
○ 1957∼60 : 광주 서중학교
○ 1960∼63 : 서울 중동고등학교
○ 1963∼67 :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 1967년 7월 : 서독 유학
○ 1969년 6월 : 서독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박사(지도교수 : 하버마스)
○ 1982년 1월 :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교수 자격 취득
경력
○ 1972∼77 : 서독 뮌스터대학 사회학 조교수
○ 1977∼83 : 서독 베를린 자유대학 조교수
○ 1984년 이후 :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과 교수
○ 1988년 :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
○ 1994∼97 :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 교수
○ 1998년 이후 : 뮌스터대 사회학과 교수
※ 기타 초빙교수로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스웨덴 스톡홀롬 대학 등지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했고 1991년 1년 동안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초빙교수로서 초청을 받았으나 관계기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주요 학술활동
○ 철학과 사회학 관련 6권의 독일어 저서와 현재 출간 준비중인 영어단행본이 있으며 50여편의 영어, 독일어 논문이 다수 있다. 우리말 저서로서는 "계몽과 해방", "소련과 중국", "현대와 사상", "전환기 세계와 민족지성",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역사는 끝났는가", "21세기와의 대화" 등 7권이 있고 근 100편의 논문과 글이 발표되었다.
○ 1991년 5월 3주간 북한 사회과학원의 초청으로 사회과학원과 주체과학원 그리고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현대철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강연을 했다. 1995년부터는 매해 북경에서 열린 [남, 북, 해외 학자 통일회의]를 주도하여, 남북한간의 "학문공동체"를 실현시키는데 힘쓰고 있다.
해외에서의 민주, 통일운동
○ 1974년 3월 1일 유신독재철폐를 위한 운동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약칭 "민건")에 주도적으로 참여, 초대회장("74)과, 2대("75), 5대("78), 6대("79) 회장을 역임했다. 발기인 55명으로 시작된 "민건"은 국내의 유신반대 투쟁을 지원하고, 해외에서 이를 지지하는 연대운동을 벌여왔다. 이 단체는 80년대 중반까지 적극적으로 활약하다가 다수 회원의 귀국으로 그 이후는 활동이 한동안 정지되었다.
○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김대중씨 구명운동으로 고 윤이상 선생과 함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국제적 지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87년대선 이후에는 주로 저작, 학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송교수는 남북간의 학문 교류가 장기적으로 건강한 상호이해의 토대를 마련해 줄 것으로 확신하고 남북간의 학문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의 도움을 얻어 1995년에 남북해외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북경회의"를 추진하였으며, 현재까지 이 행사는 매년 진행되고 있다. 현재 남북한 학자 연인원 150여명이 이 행사에 참가하였다. 이 행사에 참여한 남측의 주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구성준(제주대) 구영록(서울대) 권만학(경희대) 길승흠(전 서울대) 김경량(강원대) 김기정(연세대) 김연각(서원대) 김정기(한국외대) 김태일(영남대) 문정인(연세대) 민병석(명지대) 박건영(카톨릭대) 박기덕(세종연구소) 박명림(고려대) 백영철(건국대) 손호철(서강대) 신욱희(서울대) 심지연(경남대) 안석교(한양대) 오기평(서강대) 이정복(서울대) 이종석(세종연구소) 임용순(성대) 임혁백(고려대) 장공자(충북대) 장달중(서울대) 전홍택(KDI) 정영길(동국대) 정운찬(서울대) 정진위(연세대) 조동호(KDI) 지병문(전남대) 최장집(고려대) 하영선(서울대) 한배호(고려대) 외
2. 송두율 교수가 전해온 귀국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
○ 황장엽씨 망명 이후 1년이 넘고서야 발설된 "노동당 비밀당원 김철수=송두율"이라는 논란으로 현재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중이지만 아직까지는 별 진전이 없는 상태다. 이 문제로 그는 조국방문과 관련하여 홍역을 더 치루고 있는데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실이 규명될 것으로 믿고 있다.
○ 그는 이번에 귀국하게 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부친 성묘를 할 생각이고(지난 96년 당시 부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려 했으나 당국에 의해 귀국을 거부당하였다), 그가 추진해온 남북학문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국내의 학자들과 논의하고 아울러 학계의 동향도 둘러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광주를 비롯하여 조국의 주요 도시를 방문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 그는 귀국할 경우 귀국성명 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소회(所懷)와 향후 계획에 대해 일반에 밝힐 예정이다. 그는 이 성명 혹은 회견을 통해 비록 많은 오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걸어온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임을 밝힐 것이다.
3. 송두율 교수 귀국 건의서 : 조건 없는 귀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2000년 7월)
우리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들은 현재 독일에 20여년 이상 머무른 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송두율 교수(독일 뮌스터대)가 올해 8.15 55주년을 기념하고 제2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대회"에 아무런 제약 없이 귀국할 수 있도록 당국이 협조해주실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송두율 교수는 멀리 해외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업적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어온 큰 학자입니다. 우리는 만약 송두율 교수가 자유로이 귀국하게 되면 당사자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송두율 교수는 본인의 뜻과는 달리 오랫동안 입국이 금지되어왔지만 이번 귀국을 통해 조국으로부터의 소외감을 털고 동포애의 따뜻함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20여 년만에 귀국했던 홍세화씨는 자신의 강연에서 "프랑스가 제2의 고향으로 느껴지는지"에 대한 한 젊은이의 질문에 "프랑스는 내게 너무나 잘 해준다. 그러나 내게 그곳이 제2의 고향이라는 느낌이 든 적이 한번도 없다. 프랑스 사회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나는 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가족 친지 이웃은 물론 우리 문화와 떨어진 채 타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정신적 어려움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화해를 추구하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천년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송두율 교수 등에 대해 조국이 따뜻함을 배려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송두율 교수의 귀국은 당사자 개인의 명예회복은 물론 과거 갈등에서 생긴 고통을 치유하고 화합을 도모하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 뿐 아니라 많은 해외인사들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군부독재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 이들의 삶을 왜곡하여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였습니다. 이제 정부가 앞서서 마땅히 이들의 삶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훼손된 개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한편으로는 과거 비민주적 사회의 갈등과 대립문화를 청산하여 서로 존중하는 화합의 문화를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새로운 세기 제2의 건국을 위해 노력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국민의 정부의 취지에도 부합하는 일입니다.
셋째,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갖고 있음에도 반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그 동안 비민주적 정권아래에서 귀국할 수 없었던 송두율 교수가 귀국하게 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고 있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확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도 국제사회 기준에는 충분치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만일, 송두율 교수의 입국을 자유로이 허용한다면 한국 정부의 민주발전과 인권신장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천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당국이 충분히 고려해주기를 바랍니다.
넷째, 송두율 교수의 귀국 허용은 냉전구조 청산과 민족의 화해를 추구하는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대북 포용정책과 민족화해 정책의 출발은 순수하게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 과거 냉전시대와 독재정권의 왜곡 때문에 지게된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곧 인위적으로 만든 냉전문화를 청산하고 민족의 화해와 남북이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올해 6.15일 남북정상이 만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허심탄해 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올 8.15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9월에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해외의 통일인사들을 입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대의 냉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표적 해외인사인 송두율 교수의 귀국은 냉전 청산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취지아래 해외에서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위해 활동했던 해외인사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입국제한 해제가 이번 조치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취지에 정부당국이 이해하고 협조해줄 것을 다시 한번 요청드리며 송두율 교수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해온 경력과 활동에 대한 자료를 첨부합니다. 당국의 검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0년 7월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준)
<자료1>송두율 교수 귀국 성명 요지(1999년)
저의 귀국문제해결을 위해 애쓰시는 <민족회의>와 <귀국추진위>의 여러분들게 먼저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귀국문제가 완전타결을 보지못한 현재, 완성된 형태의 <귀국성명서>를 보내드리지 못하는 점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러한 성명이 발표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다음과 같은 기본골간과 내용을 갖는 <귀국성명서>를 우선 생각해보았습니다. 참고해주시고 고견을 기대합니다.
1. <민족회의>와 <귀국추진위원회>에 대한 감사
2. 현 정부하에서 귀국이 가능해진 점에 대한 소견
3. <유신>과 80년 <광주>를 거쳐 87년 6월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독재에 대해서 나의 양심과 지성이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그때 비판과 행동을 했다.
4. 독재정당화의 논리의 핵심에는 항상 민족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이야기되기 때문에 민족화해와 통일문제는 당연히 나의 인식관점의 중심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5. <7.4공동성명>과 <합의서>의 정신은 민족화해와 통일에 있어서 꼭 지켜져야 한다.
6. 이러한 남북사이의 <상호인정의 정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남이냐 북이냐하는 양자택일의 관성적 사고와 행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공통분모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7. 현실정치적 구조가 그러나 여전히 양자택일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우선 남쪽의 독재와 맞부디친 나의 행동은 북쪽을 위한 행동으로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부당하게 매도되었다.
8. 특히 망명한 황정엽씨가 본인이 북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매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러한 어마어마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한 순간도 있어본 적이 없다. 귀국하면 담당변호사와 법정대리인과 현재 계류중인 소송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의할 것이다.
9. 독일의 통일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본인은 남과 북이 서로를 <내속에 들어있는 타자>라는 인식을 공유할 때만이 서로 화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1995년부터 매해 중재해온 <남, 북, 해외통일학자회의>를 더욱 발전시켜 남과 북을 아우르는 <학문공동체>가 분단된 조국땅위에서 튼튼히 설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다.
10.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기위해서는 특히 남북정부의 이해와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2년만의 본인의 조국방문의 하나의 중요한 의의를 여기에 두고 있다.
1999년 8월 8일 베를린에서 송두율
<자료2>송두율 교수와 정경모 선생 귀국 무산에 대한 민족회의의 입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는 지난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유럽과 아시아의 평화운동단체들과 함께 한반도냉전청산과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대회를 개최하였다. 본래 이 대회에는 일본과 독일에서 30여 년 이상을 망명자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정경모 선생과 송두율 교수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두 분의 귀국 조건으로 준법서약서 작성과 과거활동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라는 점을 내세움으로써 결국 귀국이 다시 무산되었다.
민족회의는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과거 정권과 꼭 같은 태도를 고집하여 두 분의 귀국이 무산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정부가 준법서약서를 강요하는 것은 냉전 시대의 낡은 작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또한 두분 선생에 대해 귀국조건을 내세우며 귀국을 무산시킨 것은 현정부의 통일정책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남북노동자 축구대회가 성사되고 남북간에 정당사회단체공동회의를 하자고 제의하는 마당에 북한사람도 아닌 세계적 명망을 지닌 해외인사의 귀국을 사실상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우리 민족회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야말로 냉전 청산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해왔다. 냉전의 청산에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냉전구조에 저항하다 조국을 떠나 망명해야 했던 해외인사들에 대한 조국의 따스한 동포애, 또 하나의 햇볕정책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송두율, 정경모 두 분을 포함한 미귀국 해외인사의 조건없는 귀국 허용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임을 밝힌다.
1999년 8월 15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4. 송두율 교수 <제5회 늦봄 통일상> 수상소감
거의 매년 품어보았던 저의 조국방문의 꿈이 번번이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귀국을 시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까지 느껴지던 차에,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을 향한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는 <늦봄통일상>의 금년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만감이 교차하는 며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분단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받은 통보였기에 더욱이나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분단된 조국을 멀리 떠나 30 년 이상 독일 땅에서 살면서 경험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저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역시 독일의 통일보다는 먼저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독일은 이미 통일을 이룩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고통을 안고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을 늘 어둡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자나깨나 통일을 이야기하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늘 다투기만 하느냐는, 핀잔 섞인 이야기를 독일 사람들에게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발표된 이후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그들이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도 사실 이러한 관습화된 판단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갖 예상을 뛰어넘고 남북 정상이 새로운 통일 시대의 대문을 함께 여는 모습은 정말로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서 다가왔었습니다.
국내에서 여러분들께서는 이번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감동 속에서 실감나게 경험했겠지만, 저는 독일 텔레비전에 비친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눈빛들을 통해서 정말 이제는 우리 민족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활짝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화>의 시대에도 민족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는,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가 하루라도 빨리 좋은 열매를 맺어 남북이 하나가 되어 날로 좁아만 가는 <지구촌>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말로 어렵게 만든 이번의 귀중한 기회를 살려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이 반드시 큰 열매를 맺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제 남북 당국간에 실무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예견치 못했던 어려운 문제들도 나타나겠지만, 함께 산다는 상생의 철학과 지혜로 일관한다면 어려운 문제들도 곧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되는 문제는 이제 남북 당국간의 대화와 접촉이 활발해진 조건에서 민간 수준의 대화나 접촉의 의의와 비중이 오히려 낮아질 수도 있다는 걱정도 생깁니다. 통일의 과정과 오늘의 결과를 현장에서 오래 지켜본 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당국간의 책임 있는 대화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민간차원의 다방면에 걸친 접촉과 교류 없이는 <마음의 장벽>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와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좋은 조건을 가졌던 동서독이 정치적, 경제적 통일이 이룩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문화적 통합에 있어서 숱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민간 차원의 남북 접촉과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실은 제가 오는 33년만에 서울 땅을 밟아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도 그 동안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 시대를 이제 활짝 연 남북 정상의 만남도 역시 개인적인 희생과 노력을 다 바치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생각됩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결행하셨던 북행길이 있었기에 남북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이 가능성은 현실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목사님께서 걸으셨던 통일의 길을 기리는 <늦봄통일상>이 담는 이러한 엄청난 무게를 생각할 때, 저에게는 이 상은 사실 너무나도 과분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가서 살아야할 하나가 된 <고향>을 그리며 외국 땅에서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사셨던 여러 선배님들 - 우선 윤이상, 임창영, 배동호 선생님을 떠올리게 됩니다만 - 이 제 곁에 계셨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이 분들을 대신한다는 심정으로 오늘 <늦봄통일상>의 시상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조국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저의 마음이 무척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이제 정말로 어렵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통일 시대에는 외국 땅에서 이미 쓸쓸히 사신 분들이 심심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통일의 길을 남북 겨레와 함께 걸을 수 있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도 미진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과분하게도 <늦봄통일상>을 수여하여 만 33년만에 조국방문의 정말 귀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친의 임종도 볼 수 없었던 불효 자식인 저에게, 그래도 성묘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여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저와 저의 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꿈 이야기를 하나 하고 저의 수상 소감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뮌스터에 강의차 내려가 있을 때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꿈을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인즉, 돌아가신 문 목사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동안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애쓰다가 돌아가신 여러 선배님들의 얼굴이 새겨진 이불포를 저에게 주시면서, "이 이불포가 비록 때가 탔지만 세탁하면 새것이나 다름없으니 잘 사용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이 꿈의 내용은 통일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많은 과제들을 제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감격을 항상 기억하면서 미력한 힘이나마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에 보탬이 되도록 더욱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국이 또 다시 무산된 이 순간의 심정을 담은 몇 마디를 추가합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통일시대]의 시작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긴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북/해외에 있는 우리 민족 모두가 노력하지 않고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통일시대] 의 긴 노정을 같이 갈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또 한번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우리의 통일문제와 연결해 보면서 반드시 여러분들을 머지 않아 뵈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베를린에서 2000년 7월 3일 오후3시 송두율
자료 제공 -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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