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김혜숙 전민특위 뉴욕파견 일꾼</font>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5년 10월 6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font color=red>김혜숙 전민특위 뉴욕파견 일꾼</font>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01-06-13 00:00 조회1,603회 댓글0건

본문

자주민보 이창기 발행인은 민족통신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이곳으로 부터 3천마일이나 떨어진 뉴욕등을 방문하면서 미주내 민족민주운동 각계 인물들을 만나 취재했다. 자주민보 6월호는 그중 몇분을 소개했다. 처음으로 전민특위 김혜숙 공동사무국 부국장 편을 소개하고 차례로 실을 계획이다.[민족통신 편집실]
.....................................................................

특별기획·6월23일, 미국 심판의 날

김혜숙 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부국장을 만나

“두 아들의 한을 풀어 달라던
노근리 할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글:이창기 | 발행인


kimhs.jpg미국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는 비행기로 5시간이나 걸렸다. 미국의 땅은 정말 넓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곳도 많았다. 농사를 다 지으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농민들에게 보조금까지 주어가며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나라, 미국은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지고서 왜 그렇게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미국 정치·경제의 중심부인 워싱턴과 뉴욕을 오가며 진실을 파헤쳐 세계만방에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는 김혜숙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부국장은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지만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목소리만큼은 비분에 찬 서릿발이었다.

―전민특위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2000년 5월과 7월, 8월 전민특위 국제조사단과 함께 학살지를 순례했다. 매향리에서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린 포탄이 마을 바로 앞 사격장에서 터지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럴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 그리고 노근리, 함안, 군북, 의령, 마산, 경산 지역 등을 돌아다니서 유가족들의 증언도 직접 듣고 폐광 동굴에 쌓인 유골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이성을 떠나 감정적으로 분노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민특위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했고, 때마침 공동사무국의 제안과 소속단체인 전국연합의 요구도 있고 해서 해외로 파견 나와 일을 하게 되었다.”

―전민특위는 그 동안 어떠한 활동을 했나
“주로 대외 선전사업을 많이 했다. 영국에서 개최한 ‘열화우라늄탄 진실규명 대회’에 가서 우리나라 매향리 미군기지의 문제를 알렸다. 그곳에 참석한 외국 사람들은 매향리에서 에이-10기가 훈련을 한다고 했더니 그 비행기는 유고전과 이라크전에서 열화우라늄탄을 전문적으로 장착한 비행기라며 매향리에 암환자 발생률이 높은 것을 봐도 열화우라늄탄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며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
2001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7분간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이 회의에는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15개국 대표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양민학살의 진실을 알려낸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이북은 유엔인권위 안에서 정력적으로 미군 양민학살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장 의의가 컸던 활동은 ‘증언청취대회’ 사업이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상남도 대책위원회 조현기 집행위원장과 황계일 씨가 미국의 엘에이, 샌프란시스코, 뉴욕, 보스턴, 워싱턴에 와서 당시의 생생한 학살장면을 증언했다. 증언을 들은 동포들과 미국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본의 5개 도시에서도 증언청취대회를 했고 캐나다에서도 진행했는데 캐나다인들로 구성된 캐나다 ‘민중연대’ 사람들과 전민특위가 연대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6·23 국제전범재판’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번 6·23 국제전범재판은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이 반미자주화의 공식적인 포문을 여는 것이 되며 남북해외 3자연대 사업으로 자주화투쟁과 통일투쟁을 동시에 한다는 의의가 있다.

양민학살은 미군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으로 그 대상과 기간이 실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전쟁 전, 전쟁 중 그리고 이후에도 학살은 계속되고 있으며 임산부의 배속에 있는 아이부터 고령의 노인까지 그들은 마치 장난치듯 죽였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국군이 죽였다고 해도 그들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이것도 미군의 양민학살이라는 것이다. 전 미 법무부 장관이었으며 국제 인권변호사이자 국제행동센터의 상임대표인 램지 클라크는 북에 가하는 경제 봉쇄도 또다른 양민학살로 규정한다.

그러나 수많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50년 넘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억울하다는 말 자체가 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전범재판은 우리 민족 스스로가 전세계 앞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인권과 자주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캐나다의 ‘민중연대’ 사람들이 그들의 기관지에서 한국전쟁의 도발자는 미국이라는 사실까지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진의를 떠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이러한 자신의 피해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에도 외국의 의식있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싸워왔다. 영국에 갔을 때 비비씨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는 50년 한국전쟁 기간에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영국의 ‘모닝스타(새벽별)’라는 신문사의 기자 두 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미군의 세균전이나 이북, 이남 지역에서의 양민학살 진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가 입국을 거부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프랑스와 중국에서 각각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우리가 싸워야 한다. 아무리 외국의 벗들이 도와주려고 해도 우리가 주체로 나서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진상조사를 위해 노근리에 갔을 때 한 할머니가 손을 붙들고 미군이 죽인 두 아들의 한을 풀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 분은 대가 끊긴 집안에서 남편과 말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 남편마저 몇년 전에 죽고 이 사실을 말할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다며
죽기 전에 이 사실을 세상에 꼭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정기열 전민특위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은 이번 전범재판은 겨레의 쌓인 한을 푸는 일이라고 했다.

2000년 11월에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의 미군기지에 대한 국제특별재판이 있었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반미운동의 계기가 되어 푸에르토리코 주지사 선거에서 새로 당선된 주지사가 부시 정부에게 미군철수를 요구할 정도로 대중적인 미군철수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높아졌다.”

―전범재판 이후의 활동계획은
“미 대사관에 사죄배상을 요구하면 아예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근리도 유감표명만으로 진실을 묻어버리려 하고 있다. 이번 전범재판은 법적구속력이 없는 민간차원의 재판이지만 이를 통해 진상을 적극 알려내 미국과 전세계 양심세력의 지지를 얻고 이 힘으로 법적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노근리는 이미 법적투쟁단계에 들어갔다. 미국의 40여 개 단체와 그 외세계 각국의 30여 개 단체 그리고 10여 명의 저명한 인사가 전민특위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런 일은 국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다. 이북의 정권은 열심히 싸우는데 남측정부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민간차원에서라도 싸우는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더 미국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김혜숙 부국장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끝)
"""""""""""""""""""""""""""""""""""""""""
◎필자, 이창기 자주민보 발행인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시인으로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에 심신문학상, 효원문학상, 임수경통일문학상 등을 수상한바있고 문학계간지 [노듯돌]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대학시절에 두리출판사에서 펴낸 그의 첫 시집 『바보 과대표』그리고 『10분 사랑』으로 한국의 청년학생들에게는 그의 필명인 홍치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대학시절 전대협 활동을 통해 전국 풍물패 연합 건설운동에 기여한바도 있고 졸업후에는 전대협시절 문예일꾼들과 함께 문학예술청년공동체 를 꾸리는 일을 하였고 그 기관지 『사과꽃』편집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
■ 시집구입 및 자주민보 구독 문의는 jajumb@hanmail.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