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만에 평양간 임수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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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1-09-09 00:00 조회2,1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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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15일 오후 2시22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던 임수경(당시 21, 외국어대 불어과4년)씨가 문규현 신부와 손을 맞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섰다. 분단 이후 회담 대표단 이외에 군사분계선을 넘은 최초의 남쪽 민간인이자, 북한이 판문점 통과에 관한 한 정전협정 위반에 해당함을 스스로 인정한 유일한 사례였다.
[금년 8.15 평축행사에 평양에 간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평양시민들로 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고 있는 모습-사진은 통일뉴스 자료]
임씨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마자 안전기획부 관계자들에 의해 서울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건강검진이 명분이었지만 불법적 수사기간 연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뒤 3년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로부터 꼭 12년 뒤인 2001년 8월15일 낮 12시56분. 그는 아시아나항공 전세기를 타고 서해 직항로를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발을 디뎠다. ‘2001민족통일대축전’ 8·15평양 행사 남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방북한 것이다.
8월3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들머리 북카페에서 만난 ‘아줌마’ 임수경(33)씨는 “임수경도 합법적으로 북한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남북관계가 이전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축전 참가자 "약속" 지켰어야
반대세력에 빌미준 것 너무 화나
89년 45박46일 동안의 방북활동 중 당돌하고 신념에 찬 행동으로 남과 북 모두에 충격을 줬던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8월21일 서울로 돌아온 뒤 휴대전화를 거의 받지 않고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그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고 화가 난다”고 했다.
방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와 평양에서의 일을 물었다. “오랜 세월 잊지 않고 내 걱정을 해준 북녘 동포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다”는 짧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평양에서 북쪽 동포들에게 면목도 없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8·15공동행사 대표단이라면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하는 게 당연하다. 장소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북쪽은 왜 옮기려 하지 않는지, 장소라는 게 결국 명분일뿐인데 남쪽은 왜 그렇게 가지 못하게 하는지, 안타까웠다”고 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8월18~19일 묘향산과 백두산 관광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일로 북쪽 안내원과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북녘 동포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랬을까.
“(참석하지 않는다는 게)정부와 국민과 한 약속이었다. 예전같으면 합법적 방북을 꿈도 못꿀 사람들까지 방북 승인하며 정부가 내건 조건은 딱 한가지였다. 그리고 추진본부 집행부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300명이 넘는 남쪽 대표단이 합법적으로 평양에 가서 북쪽과 해외 동포들과 민간교류를 논의한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단추를 잘 끼워야 했고, 약속은 지켜야 했다.”
"평양에서도 내내 불편했다"
말을 받아 통일운동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통일운동을 했다기보다, 10년 넘게 통일을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아닌가, 굉장히 자괴감에 빠져 있다. 나는 늘 남북 민중들 사이의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를 위해 서로 진실을 알게 하고 자주 만나며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 명백하게 갈라졌다. 거기에 빌미를 줬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89년 방북 때 난 겨우 대학 4학년에 불과했지만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조심하려고 각별하게 애썼다. 그런데 그만한 조심성도 없는 행동들을 왜들 그렇게 했을까, 작은 일로 빌미를 줬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어쨌거나 7천만 온 겨레가 통일을 해야 한다면, 통일운동은 철저하게 대중운동이다. 전선운동이 절대 아니다. 예전엔 만남 자체가 큰 진전이었지만, 지금은 만남을 소중하게 가꿔가는 게 절실하다. 흔한 말로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필요하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다. 굳이 따져 묻는 대신, 서울로 돌아온 뒤 언론보도 등 논란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조선>과 <중앙> 등의 보도를 보곤 한마디로 경악했다. 뭔가 걸리면 와 하며 한사람을 묵사발을 만드는 건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명백히 반통일적이다.”
나이 서른 셋, 그는 지금 ‘늦깎이 학생’이다. 올 초부터 외국어대 신문방송학 박사과정과 방송대 법학과 3학년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가 언론과 법을 두손에 화두로 부여잡고 있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언론개혁 관련 법률 공부
“20대 이후, 정확하게 말해 89년 방북 이후 난 법과 언론의 피해자였고, 내 삶은 법과 언론을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법과 언론, 나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나이에 비해 법정에 참 많이도 섰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변호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전문지식에 대한 갈망같은 게 있었다. 지금 관심사는 언론개혁에 필요한 제반 법률과 법률 구제 등 언론법제를 공부하는 거다. 솔직히 남북관계 보도는 가치설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언론보도에 문제가 너무 많다.”
그는 아직 직업의 둥지를 틀지 않았다. 학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 “그건 ‘국가 대표급’들이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농반진반으로 웃으며 슬쩍 비껴 갔다. “아카데믹하게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자신이 없다. 얘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어쨌든 공부는 끝까지 할 생각이다.”
정치는? 찔러봤더니 칼로 베듯 단호했다. “통일되는 그날까지 특정 정당이나 특정 단체의 조직원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한 개인으로서 나를 지금도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는 북(과 남)의 동포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통일의 꽃’, 2시간 남짓한 인터뷰 뒤 그는 혼잣말하듯 되뇌었다. “그때(89년) 판문점의 매미 울음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데….”
글 이제훈 기자nomad@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2001-9-2]

임씨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마자 안전기획부 관계자들에 의해 서울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건강검진이 명분이었지만 불법적 수사기간 연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뒤 3년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로부터 꼭 12년 뒤인 2001년 8월15일 낮 12시56분. 그는 아시아나항공 전세기를 타고 서해 직항로를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발을 디뎠다. ‘2001민족통일대축전’ 8·15평양 행사 남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방북한 것이다.
8월3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들머리 북카페에서 만난 ‘아줌마’ 임수경(33)씨는 “임수경도 합법적으로 북한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남북관계가 이전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축전 참가자 "약속" 지켰어야
반대세력에 빌미준 것 너무 화나
89년 45박46일 동안의 방북활동 중 당돌하고 신념에 찬 행동으로 남과 북 모두에 충격을 줬던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8월21일 서울로 돌아온 뒤 휴대전화를 거의 받지 않고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그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고 화가 난다”고 했다.
방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와 평양에서의 일을 물었다. “오랜 세월 잊지 않고 내 걱정을 해준 북녘 동포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다”는 짧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평양에서 북쪽 동포들에게 면목도 없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8·15공동행사 대표단이라면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하는 게 당연하다. 장소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북쪽은 왜 옮기려 하지 않는지, 장소라는 게 결국 명분일뿐인데 남쪽은 왜 그렇게 가지 못하게 하는지, 안타까웠다”고 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8월18~19일 묘향산과 백두산 관광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일로 북쪽 안내원과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북녘 동포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랬을까.
“(참석하지 않는다는 게)정부와 국민과 한 약속이었다. 예전같으면 합법적 방북을 꿈도 못꿀 사람들까지 방북 승인하며 정부가 내건 조건은 딱 한가지였다. 그리고 추진본부 집행부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300명이 넘는 남쪽 대표단이 합법적으로 평양에 가서 북쪽과 해외 동포들과 민간교류를 논의한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단추를 잘 끼워야 했고, 약속은 지켜야 했다.”
"평양에서도 내내 불편했다"
말을 받아 통일운동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통일운동을 했다기보다, 10년 넘게 통일을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아닌가, 굉장히 자괴감에 빠져 있다. 나는 늘 남북 민중들 사이의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를 위해 서로 진실을 알게 하고 자주 만나며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 명백하게 갈라졌다. 거기에 빌미를 줬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89년 방북 때 난 겨우 대학 4학년에 불과했지만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조심하려고 각별하게 애썼다. 그런데 그만한 조심성도 없는 행동들을 왜들 그렇게 했을까, 작은 일로 빌미를 줬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어쨌거나 7천만 온 겨레가 통일을 해야 한다면, 통일운동은 철저하게 대중운동이다. 전선운동이 절대 아니다. 예전엔 만남 자체가 큰 진전이었지만, 지금은 만남을 소중하게 가꿔가는 게 절실하다. 흔한 말로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필요하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다. 굳이 따져 묻는 대신, 서울로 돌아온 뒤 언론보도 등 논란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조선>과 <중앙> 등의 보도를 보곤 한마디로 경악했다. 뭔가 걸리면 와 하며 한사람을 묵사발을 만드는 건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명백히 반통일적이다.”
나이 서른 셋, 그는 지금 ‘늦깎이 학생’이다. 올 초부터 외국어대 신문방송학 박사과정과 방송대 법학과 3학년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가 언론과 법을 두손에 화두로 부여잡고 있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언론개혁 관련 법률 공부
“20대 이후, 정확하게 말해 89년 방북 이후 난 법과 언론의 피해자였고, 내 삶은 법과 언론을 극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법과 언론, 나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나이에 비해 법정에 참 많이도 섰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변호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전문지식에 대한 갈망같은 게 있었다. 지금 관심사는 언론개혁에 필요한 제반 법률과 법률 구제 등 언론법제를 공부하는 거다. 솔직히 남북관계 보도는 가치설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언론보도에 문제가 너무 많다.”
그는 아직 직업의 둥지를 틀지 않았다. 학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 “그건 ‘국가 대표급’들이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농반진반으로 웃으며 슬쩍 비껴 갔다. “아카데믹하게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자신이 없다. 얘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어쨌든 공부는 끝까지 할 생각이다.”
정치는? 찔러봤더니 칼로 베듯 단호했다. “통일되는 그날까지 특정 정당이나 특정 단체의 조직원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한 개인으로서 나를 지금도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는 북(과 남)의 동포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통일의 꽃’, 2시간 남짓한 인터뷰 뒤 그는 혼잣말하듯 되뇌었다. “그때(89년) 판문점의 매미 울음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데….”
글 이제훈 기자nomad@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20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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