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김 가족의 한맺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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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2-01-25 00:00 조회1,4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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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없애는 운동 벌여야 합니다"
"죽으면 원귀가 돼서라도 이 나라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었습니다." 차분
히 말을 이어가던 김옥경(45) 씨는 87년 1월을 떠올리게 되자, 격앙된 목소
리로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지난 연말 검찰에 의해 87년 "수지김(김옥분)
피살 및 간첩조작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김 씨의 가족들은 비로소 세상
을 향해 15년 세월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
인 아래 겪어야 했던 수모는 "빨갱이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김옥경 씨 가족의 고초는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직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남편과 저를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의 안가(安家)로 연행했습니다. 하룻밤의 조사가 끝나고 새벽에 풀려난 뒤,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며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 물었죠. 말없이 담
배를 피우던 남편이 그러더군요. "더럽고 수치스러워서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다"구요." 남편은 "죽을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고 말할 뿐, 지금도 그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입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남편의 흉중은 짐작으로
만 헤아릴 뿐이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뿐만 아니라, 김옥경 씨의 남편은 다니던 직장마저도 스스로 그만뒀다고 한
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다행히 김옥경 씨 부부는 가정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경우는 달랐다. 툭하면 "빨갱이 집안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핀잔과
독설을 듣고 살던 동생은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하나둘 이승을 떠나는 가족들이었다. 맏언니는 사건 발생 후 회사에
서 쫓겨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객사했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오빠마저도 술로 연명하다 사고로 숨지는 등, 김
씨 가족의 한은 그렇게 쌓여 왔다.
김옥분 씨의 무고함을 믿던 가족들은 사건 발생 초기에 언론사와 정부청사
를 쫓아다니며 백방으로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싸늘하게 돌아오는 시선
속에서 체념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입 한번 열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야 다시 탄원서를 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찰 수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남은 가족들은 비로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뻔뻔한 장세동에 분통 터트려
"누명을 벗은 것은 시원해요. 하지만 죄를 짓고도 뻔뻔한 장세동(당시 안기
부장)의 모습을 TV에서 보고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김옥경
씨는 언니를 살해한 사람보다도 살인사건을 은닉하고 언니를 간첩으로 둔갑
시킨 안기부 책임자들에 대해 더욱 치를 떨었다. "솔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벌을 달라고 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용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 배 째
보라"는 식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김옥경 씨는 공소시효 때문에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힘들다는 사실을 이
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건가요? 국민들
이 가만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김 씨의
가족들은 장세동을 비롯한 당시 안기부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서명운동
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범죄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없애는 운
동을 해야 합니다." 수지김 가족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치는 외마디 호소
다. [이창조]
"죽으면 원귀가 돼서라도 이 나라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싶었습니다." 차분
히 말을 이어가던 김옥경(45) 씨는 87년 1월을 떠올리게 되자, 격앙된 목소
리로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지난 연말 검찰에 의해 87년 "수지김(김옥분)
피살 및 간첩조작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김 씨의 가족들은 비로소 세상
을 향해 15년 세월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
인 아래 겪어야 했던 수모는 "빨갱이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김옥경 씨 가족의 고초는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직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남편과 저를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의 안가(安家)로 연행했습니다. 하룻밤의 조사가 끝나고 새벽에 풀려난 뒤,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며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 물었죠. 말없이 담
배를 피우던 남편이 그러더군요. "더럽고 수치스러워서 아무 것도 말 할 수
없다"구요." 남편은 "죽을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고 말할 뿐, 지금도 그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입을 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남편의 흉중은 짐작으로
만 헤아릴 뿐이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뿐만 아니라, 김옥경 씨의 남편은 다니던 직장마저도 스스로 그만뒀다고 한
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다행히 김옥경 씨 부부는 가정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경우는 달랐다. 툭하면 "빨갱이 집안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핀잔과
독설을 듣고 살던 동생은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하나둘 이승을 떠나는 가족들이었다. 맏언니는 사건 발생 후 회사에
서 쫓겨난 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객사했고,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오빠마저도 술로 연명하다 사고로 숨지는 등, 김
씨 가족의 한은 그렇게 쌓여 왔다.
김옥분 씨의 무고함을 믿던 가족들은 사건 발생 초기에 언론사와 정부청사
를 쫓아다니며 백방으로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싸늘하게 돌아오는 시선
속에서 체념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입 한번 열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야 다시 탄원서를 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찰 수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남은 가족들은 비로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뻔뻔한 장세동에 분통 터트려
"누명을 벗은 것은 시원해요. 하지만 죄를 짓고도 뻔뻔한 장세동(당시 안기
부장)의 모습을 TV에서 보고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김옥경
씨는 언니를 살해한 사람보다도 살인사건을 은닉하고 언니를 간첩으로 둔갑
시킨 안기부 책임자들에 대해 더욱 치를 떨었다. "솔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벌을 달라고 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용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 배 째
보라"는 식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도 역겨웠습니다."
김옥경 씨는 공소시효 때문에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힘들다는 사실을 이
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건가요? 국민들
이 가만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김 씨의
가족들은 장세동을 비롯한 당시 안기부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서명운동
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범죄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없애는 운
동을 해야 합니다." 수지김 가족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치는 외마디 호소
다. [이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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