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성, 피에르 부르디외 별세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1-31 00:00 조회1,51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프랑스 전역이 슬픔으로 술렁이고 있다. 3개 TV 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를 비롯한 모든 신문이 24일자 1면 머릿기사와 대부분의 지면을 한 지식인의 부음과 헌사로 채웠다. AP 등 세계 통신사가 타전한 부음이 전세계 언론의 국제면을 장식했다.
행동하는 지성이자 투사로서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투쟁해 왔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er Bourdieu)가 지난 24일 밤 파리에서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세계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헌신한 그의 투쟁은 위업으로 남을 것"이라는 시라크 대통령의 추모성명이 고요하게 프랑스 전역을 울렸다. 또 조스팽 총리 역시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학의 석학이자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이라고 칭송하고 나섰다.
이들은 부르디외가 생전에 항상 민중의 목을 죄는 신자유주의자들로 비판했던 인물들이었다. 또 일제히 그의 추모 특집을 내보는 신문과 언론도 역시 부르디외가 생전에 맹렬히 비난을 했던 대상들이었다.
`좌파중의 좌파`, 빈민, 노동자, 이민자, 실업자를 위한 저항운동 속에서 늘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하며 권력에 기생하는 지식인이기를 거부했던 실천하는 지성 부르디외의 죽음이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 진보진영과 소외계층, 그리고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反신자유주의의 투사로 알려진 부르디외는 사회학에서의 업적은 물론이고 노동자 파업, 환경보호운동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 현장에 직접 참여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히 비판해 왔다.
그의 학문은 사회적 소외계층과 약자를 위한 것이었고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이른바 학문과 실천을 일관된 일상의 삶으로 투영시킨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1964년 펴낸 <상속자들>이란 저서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68년 5월 학생혁명의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재생산>(1970), <구별짓기>(1979) 등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을 지닌 계층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며 권력을 재생산하는가를 분석해 내 전세계 지성계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말하기의 의미>(1982), <호모아카데미쿠스>(1984), <국가귀족>(1989), <예술의 규칙>(1992), <텔레비젼에 대하여>(1996), <파스칼적 성찰>(1997), <맞불>(1988>, <남성지배>(1998) 등의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예술, 방송, 신문, 취미 기호, 성차별 등에 감추어진 권력의 작동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해 왔다.
81년부터는 프랑스 지성의 전당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90년대 들어서는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반대진영을 이끌어 왔다.
`세계화의 위대한 경멸자`로 불렸던 그는 2000년 5월 1일 노동절에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연대한 투쟁 모임을 주도, 귄터 그라스 등 세계지식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96년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부르디외를 세계 최고의 지식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2위는 미셸 푸코, 3위는 위르겐 하버마스, 4위는 사르트르였다.
미국의 노엄 촘스키와 함께 지난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부르디외는 청와대 방문을 몇 차례나 고사해 주최측을 난처하게 만든 일화도 전해주고 있다.
서울 방문 당시 교보빌딩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이미 암 진단이 나와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예정 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열띤 강연을 통해 지식인의 임무와 역할,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하던 것이 기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는 강연에서 유럽의 지성이라고 칭송 받는 앤소니 기든스 등이 지식인의 감투를 팔아 권력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학문적으로 팔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규정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민중을 위한 지식인을 강조한 바 있다.
그의 죽음은 `지식인의 위기`로 통칭되는 우리 사회 지식인 자화상에 신선한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홍민 기자 (tongil@tongilnews.com)
[출처:통일뉴스 2002-01-26]
행동하는 지성이자 투사로서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투쟁해 왔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er Bourdieu)가 지난 24일 밤 파리에서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세계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헌신한 그의 투쟁은 위업으로 남을 것"이라는 시라크 대통령의 추모성명이 고요하게 프랑스 전역을 울렸다. 또 조스팽 총리 역시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학의 석학이자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이라고 칭송하고 나섰다.
이들은 부르디외가 생전에 항상 민중의 목을 죄는 신자유주의자들로 비판했던 인물들이었다. 또 일제히 그의 추모 특집을 내보는 신문과 언론도 역시 부르디외가 생전에 맹렬히 비난을 했던 대상들이었다.
`좌파중의 좌파`, 빈민, 노동자, 이민자, 실업자를 위한 저항운동 속에서 늘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하며 권력에 기생하는 지식인이기를 거부했던 실천하는 지성 부르디외의 죽음이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 진보진영과 소외계층, 그리고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反신자유주의의 투사로 알려진 부르디외는 사회학에서의 업적은 물론이고 노동자 파업, 환경보호운동 등 다방면의 사회운동 현장에 직접 참여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히 비판해 왔다.
그의 학문은 사회적 소외계층과 약자를 위한 것이었고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이른바 학문과 실천을 일관된 일상의 삶으로 투영시킨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1964년 펴낸 <상속자들>이란 저서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68년 5월 학생혁명의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재생산>(1970), <구별짓기>(1979) 등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을 지닌 계층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며 권력을 재생산하는가를 분석해 내 전세계 지성계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말하기의 의미>(1982), <호모아카데미쿠스>(1984), <국가귀족>(1989), <예술의 규칙>(1992), <텔레비젼에 대하여>(1996), <파스칼적 성찰>(1997), <맞불>(1988>, <남성지배>(1998) 등의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예술, 방송, 신문, 취미 기호, 성차별 등에 감추어진 권력의 작동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해 왔다.
81년부터는 프랑스 지성의 전당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90년대 들어서는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반대진영을 이끌어 왔다.
`세계화의 위대한 경멸자`로 불렸던 그는 2000년 5월 1일 노동절에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연대한 투쟁 모임을 주도, 귄터 그라스 등 세계지식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96년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부르디외를 세계 최고의 지식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2위는 미셸 푸코, 3위는 위르겐 하버마스, 4위는 사르트르였다.
미국의 노엄 촘스키와 함께 지난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부르디외는 청와대 방문을 몇 차례나 고사해 주최측을 난처하게 만든 일화도 전해주고 있다.
서울 방문 당시 교보빌딩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이미 암 진단이 나와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예정 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열띤 강연을 통해 지식인의 임무와 역할,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하던 것이 기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는 강연에서 유럽의 지성이라고 칭송 받는 앤소니 기든스 등이 지식인의 감투를 팔아 권력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학문적으로 팔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규정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민중을 위한 지식인을 강조한 바 있다.
그의 죽음은 `지식인의 위기`로 통칭되는 우리 사회 지식인 자화상에 신선한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홍민 기자 (tongil@tongilnews.com)
[출처:통일뉴스 2002-01-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