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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김주열 열사 42주기 추모식</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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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3-19 00:00 조회2,1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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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비가 내렸다. 김주열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할 때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고 한다. 95년 명예졸업장 수여 때도 그랬고, 흉상 제막 때도 비가 내렸다. 14일 남원에서 열린 "제42주기 김주열 열사 제향과 추모식" 때도 어김없이 그랬다.

020314_ysh_kjy9.jpg"형제학교" 결연을 맺은 용마고(옛 마산상고)와 남원 금지중 학생을 비롯해, 마산과 남원의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42주기 제향과 추모식이 열렸다. 용마고는 1999년부터 계속해서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다.

제향은 원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 마산 대표단이 도착하자 바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박영철 김경남 김영만 씨가 제관을 맡았으며, 바로 옆에 있는 묘소를 참배한 뒤 금지중학교 방문을 끝으로 14일 행사를 마쳤다.

15일은 남원 대표단이 3.15 의거탑을 참배하고,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 장소인 중앙부두와 용마고를 답사/방문할 예정이다. 이처럼 남원과 마산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이 1999년부터 오고가면서 의미 있는 행사를 갖고 있다.

추모사-"입으로만 3.15 외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형규 이사장은 김경남 사료관장이 대신 읽은 추모사에서 "3.15와 4.19, 5.18, 6.10의 위대한 역사를 후대가 자랑스럽게 간직할 정신적 가치와 역사적 교훈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가다듬어 넘겨주어야 하는 시대적 책무를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김영만 "마산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공동대표는 "60년 전까지만 해도 "영남과 호남"은 지금의 "마산과 창원"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만들어 놓았는데, 김주열 열사를 생각하면 지역감정이란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주열은 남원의 아들이자 마산의 아들이다. 정치인과 기득권세력들이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이상 3.15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빚어내는 온갖 문제와 사건들로 절망하고 분노하는 우리 자신과 많은 이웃들을 보면서 "이건 바로, 우리가 입으로만 3.15, 4.19를 외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는 현실과 타협하면서 비겁하게 살아온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차라리 눈을 감고 이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박영철 "남원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공동대표는 "동서갈등은 기득권층이 하고 있다. 일반 서민들은 영호남 갈등이 없다.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를 없애는 것이 3.15정신과 김주열 열사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와 마산상고 동기생이었던 김재철 마산시의원은 명예졸업장 수여에 관한 일화를 떠올렸다. "95년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태 전부터 교장과 교육장, 교육감을 찾아다니며 명예졸업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졸업을 안 했느니"하면서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했다. 95년 4월 11일 행사를 갖고 유족을 대신해서 졸업장을 받았는데, 그 날도 비가 내렸다."

3.15 정신 제대로 이어받고 있나

020314_ysh_kjy8.jpg4.19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조영근 경남대 교수는 김주열의 일기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주열은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가 죽은 뒤 일기장이 발견되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었다. 당시 언론에도 소개되고 했다. 일기 내용을 보면 그는 의협심이 강했고 당시 시대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일기장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누군가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일기장을 찾아내야 한다."

남원에서 중학교를 나온 김주열을 마산상고에 진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하용욱(61) 씨도 추모식에 참석했다. 하씨는 남원에서 앞뒷집에 살았으며, 그는 마산상고의 선배였다. "60년부터 마산상고에 장학제도가 도입되어 성적이 좋으면 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이같은 소식을 김주열에게 알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산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마산에서 남원 집까지 가려면 이틀은 걸렸다. 하루 전날 집에서 나와 남원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대양고속의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가면 오후 늦게 도착했다. 너무나 먼 거리였는데, 장학제도 탓에 마산상고로 진학했던 것이다."

하용욱 씨는 "김주열은 지역감정, 반공이데올로기, 군사독재의 희생양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시발점은 김주열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는 누구인가

열사는 남원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1944년 10월 7일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에 태어났다. 1956년 금지동초교, 1959년 금지중을 졸업하고, 그해 남원농고(현 남원농공고)에 진학한 뒤 그해 7월 퇴학한다. 1960년 마산상고에 응시해 합격하고 그 해 4월 1일 마산 이모 집으로 옮겨간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한 상황에 다달았고, 3.15 부정 선거를 감행하였으며, 마산에서 민중의 민주화 의거가 폭발하자 열사는 시위대의 선봉에 섰다. 그는 당시 마산시청 앞에서 순국했고, 경찰은 시신을 숨겨 행방불명으로 처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바로 마산으로 가 목숨을 걸고 열사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전국을 뒤흔들었던 부정부패척결, 민주화 열망의 시위도 수그러들 무렵인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열사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 앞에서 떠올랐다.

시신은 교복을 입은 채였고, 오른쪽 눈에는 미국제 최루탄이 박혀 있고, 주검에는 퍼렇게 이끼가 낀 상태였다. 경찰은 열사의 시신을 남해바다 멀리 수장하였으나 밀물을 타고 27일간 흘러 마산 앞바다까지 온 것이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어부는 신문기사에게 연락했고, 기자가 찍은 처참한 주검의 사진은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마산시민의 울분은 제2의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항쟁은 서울과 부산을 비롯해 전국으로 타올랐고, 4.19 혁명을 완성해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를 부르짖은 민중이 독재 정권을 축출한 혁명이었고, 그 중심에 김주열 열사의 얼과 생명과 주검이 우뚝 서 진두 지휘한 결과였다.

남두현 "마산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이사는 "3.15 하면 신동엽 선생이 시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4.19를 생각하게 된다"면서 갖가지를 지적했다. "젊은 사람이 죽은 것을 추념만 하고 만다. 미완성의 혁명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공화당에 협력한 사람이 3.15를 기념하는 무슨 행사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수구세력의 핵심이었던 인사가 공식 직책을 갖고 있다. 기념식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 남 이사는 "행사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개혁의 대상인 사람이 개혁을 외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역사왜곡이며 역사의식 부재다"라고 지적했다.

"마산시가 문학관을 건립하는데 이름을 "노산(이은상)문학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마산을 "3.15정신"과 "가고파의 고향"이란 말을 쓴다. 미안하지만 이은상은 3.15와 나란히 놓을 수 없다. 늘 기득권층에 빌붙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한 사람의 이름을 딴 문학관을 건립할 수 있는가. 그러고도 마산에서 3.15를 이야기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 두 주역, 박영철 김영만 공동대표

박영철 남원 대표 = 박영철(61) 대표는 "김주열 열사야말로 대한민국 민주화의 제일 큰 공로자다. 이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가복원과 장학사업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김주열 열사의 생가는 현재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를 국가나 자치단체가 사들여 성역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김주열 열사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장학사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영철 대표는 20년 전 "남원민주실천동우회"를 만들어 2대 회장을 지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주열 열사 묘소 정화사업을 시작으로 갖가지 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마산의 3.15의거가 그 효시다. 목숨 바쳐 못다 이룬 민주화를 주검으로 이끌어낸 김주열 열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주열 열사는 이 땅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면서 기폭제였고, 찬란하게 꽃피운 민주화의 화신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남원시는 2001년 광한루~금곡교 사이 17.5킬로미터 거리를 "김주열로"로 이름 붙였다. 김주열 열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거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남원시는 2년 전 묘소 바로 밑에 추모관과 기념관을 지어 놓았다.

김영만 마산 대표 = 김영만 대표는 김주열 열사와 마산상고 입학 동기다. 김영만 공동대표는 당시 일을 떠올리며, 김주열 열사 추모행사가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이 떠올랐다. 시신을 마산의료원에 두었는데, 그 주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밀물듯이 몰려들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차 봉기가 일어났던 것인데, 당시 경찰은 시신을 밤에 몰래 빼돌려 남원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남원에 그의 뼈가 묻혀 있다."

김 대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5.16이 일어난 뒤 민주화와 관련한 행사를 못하게 되었고, 김주열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군사정권 32년 동안 마산시민조차 김주열을 이야기하기를 꺼렸고, 그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60년 4월 11일 그의 주검을 보기 위해 줄을 선 행렬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명예졸업장을 주는데도 숱한 세월이 흘렀고, 남원 묘소를 참배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마산-남원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남원과 마산의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는 앞으로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남원사업회는 올해 안으로 생가를 매입해 복원할 예정이며, 사업회의 사단법인화를 추진할 예정이다.
2004년에는 1960년 4월 11일을 기념해 마산의료원에서 남원시 묘소까지 시신이 운구되던 옛길을 따라 "그 날 그 길 이어달리기" 행사를 열 계획이다. 또 마산-남원-서울 수유동 4.19국립묘지까지 "민주횃불이어달리기"를 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마산사업회는 우선 마산상고와 중앙부두 사이 도로를 "김주열로" 이름 짓는 것을 시에 건의할 예정이다. 15일 오전 행사를 마치고 시에 "김주열로 제정 건의문"을 전달할 예정이다.

그리고 무학초교 담장을 역사현장으로 복원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 담장은 3.15 그 날을 생생하게 증언하던 귀중한 역사유물로, 무수한 총탄이 박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담장에 총탄이 박혀 있던 흔적이 담긴 사진을 근거로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혁> *1999년 1월 15일-마창연합 소속 인사들이 "3.15 정신 계승과 김주열 열사 추모,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3.15행사 추진위원회" 구성. *1999년 3월 5일-김영만 외 36명이 "3.15 정신 계승 동서순례단" 발족, 남원 민주동우회 중심으로 추모사업행사추진위원회 발족. *1999년 3월 14일-마산시민과 마산상고 학생 등 70여명이 처음으로 "마산시민의 이름"으로 남원 김주열 열사 묘소 참배하고 다음 날 남원 대표 10명이 마산 방문. *1999년 4월 23일-남원 금지중과 마산상고 형제학교 결연. *2000년 2월 1일-"3.15 정신 계승 동서 순례단"을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 준비위원회"로 개칭. *2000년 3월 15일-마산상고 교정에 김주열 흉상 제막. 윤성효 기자 ysh@ohmynews.com

[출처:오마이뉴스200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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