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공동월드컵에 가려진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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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6-16 00:00 조회1,4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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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라도 한 듯 "할머니"의 관을 바라보는 이들이 흐느끼고 있었다. 목놓아 흘릴 눈물은 마를 법도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이들에겐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향년 80세. 온전한 생을 살았다 치면 "호상"(好喪)이라 불러도 좋겠건만 눈물은 계속 흐른다. 앞으로 볼 수 없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서럽게 살다, 사죄 한 번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할머니의 생이 서러울 뿐이다.
관이 서서히 뜨거운 불로 던져지고, 한 줌 재로만 할머니는 이승의 흔적을 남겼다.
"할머니 안녕히, 평안히 잠드세요."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 할머니의 죽음이 지워질 수 있는가. 오히려 시대적인 책임에 지켜보는 이들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만성신부전증을 앓아 "복막투석"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던 일본군 "위안부" 서봉임 할머니의 "비보"가 알려진 것은 지난 5일의 일이었다. 평소 앓던 신부전증이 악화돼 대구 "곽병원"으로 옮겨진 지 닷새만에 들려진 소식이었다.
4일 저녁부터 생명마저 위험하다는 판단에 중환자 실로 옮겨진 후, 겨우 호흡기로 생의 마지막 끈을 끈질기게 잡고 있던 할머니. 끝내 다음날 낮 12시 39분 팔십 평생 험난했던 삶을 마감했다.
▲할머니의 시신이 화장되려고 하자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오열하고 있다.
고 서봉임 할머니의 증언은 상세히 기록되지는 않았다. 지난 90년 중풍으로 쓰러진 후 말문마저 막혀, 상세히 증언하기 힘들었다는 게 관계자들이 전해준 이유였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은 할머니의 고단한 "인생"은 1922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한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모두 사망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할머니는 38년, 16살의 나이에 단지 "잘 먹고 돈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먼 이국 땅 사이공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성노예" 생활을 한 서할머니는 40년쯤에는 다시 자바로 옮겨졌다. 이 당시 할머니에게 누군가는 "아야꼬"라는 이름을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후 다행히 인천을 통해 한국 땅에 돌아온 할머니는 한때 결혼을 하면서 아이까지 낳기도 했지만, 조산 탓인지 아이는 죽게되고 남편마저 오래 전 사별했다고 한다. 그 후 90년 할머니는 위안소 시절의 후유증으로 인해 중풍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아예 거동자체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93년에는 뒤늦게 보건복지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인정을 받게되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병수발을 받던 할머니는 지난 97년 10월에는 자원봉사자 정현정(37)씨의 도움으로 정씨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나 만성신부전증을 앓던 할머니는 매일저녁 이어졌던 복막투석과 혈액투석으로 힘들어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수발을 다른 자원봉사들과 맡았던 정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몸이 아파 말씀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 지경이었다"면서 "특히 밤마다 해야하는 혈액투석에 할머니는 무척 괴로워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청춘 시절에는 "성노예"로 괴롭힘을 당하고, 노년에는 갖은 병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끝내 세상과 등을 지고 말았다.
7일 오전 9시 곽병원 영안실, 고 서봉임 할머니와 같은 처지로 삶을 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 곽동협. 이하 시민모임) 회원 등 50여명이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이날 고 서봉임 할머니의 영결식은 대구·경북지역 시민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간간이 스며 나오는 흐느낌과 숙연함이 서 할머니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영결식은 진행됐다.
영결식 중 "조사"를 한 대구여성회 안이정선 회장은 "힘없고 가난한 나라에 여자로 태어난 죄 하나 때문에, 꿈 많은 열 여섯의 나이에 남의 나라 군대 위안소의 위안부가 돼야만 했던 가엾은 우리 할머니. 이제 저희들이 할머니를 열여섯 소녀의 그 시절로 되돌려 드리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그의 목이 메어왔다.
이어 안 회장은 "때로는 아기 같은 천진한 미소로 때로는 그저 말없이 방긋 웃는 온화한 웃음으로 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 그래서 할머니께 붙여드린 별명이 "서나리자" 였습니다. 그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서나리자"로 남아 계실 겁니다"며 눈물을 흘렸다.
서할머니의 죽음을 배웅하는 다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떨까. 함께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살아있는 고통을 서로는 헤아릴 수 있기에 서할머니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과도 다를 바 없다.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72)할머니는 "할머니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살아있는 서할머니에 말하듯 "언니"를 부르는 이용수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용수 할머니가 고 서봉임 할머니의 영정을 뒤로한 채 말을 잇고 있다.
"서봉임 언니! 언니가 죽은 건 일본놈이 보기 싫어 돌아가신 거죠. 아직도 우리를 외면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다만 눈을 감고 누워있는 거죠. 언니나 우리나 아무 죄도 없었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났다는 죄 밖에 없잖아요. 이젠 사과 없는 일본 정부가 원망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저주스러울 뿐이죠. 언니, 먼 나라에 가서는 고이 잠드소서. 제발 고이 잠드소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에 대한 원망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민족이라는,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보내는 냉대와 무관심을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에 대해 이날 영결식 사회를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지금 한국은 일본에게서 해방됐는지 모르지만 할머니들은 아직도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과거 친일 부역배들이 여전히 두텁게 정치권을 주무르고 있는 마당에 할머니들의 해방은 요원하기만 하다"며 탄식했다.
고 서봉임 할머니의 죽음은 국경을 넘어 "양심적인" 일본인들에게도 아픔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발벗고 나서고 있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꾸야먀 연락회"와 "후꾸야먀 왔다갔다회" 대표를 맡고 있는 츠즈끼 스미에(都築 壽美枝·49)씨는 할머니 영정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올해 시민모임이 만든 달력 속의 할머니 얼굴은 건강해 보였지만 그 사진이 후꾸야마에서는 할머니의 영정이 돼 버려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츠즈끼씨는 또 "지금 일본과 한국에서는 월드컵 공동개최로 전국이 들끓고 있다"면서 ""과거는 닫고 미래를 향한 우호 친선"이라는 듣기 좋은 슬로건, 그 이면에는 전후 보상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럴 때야말로 우리들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확실히 청산하는 것 바로 이것만이 미래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영결식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 원장 능광스님의 축원 기도에 이어 참석자들의 분향과 헌화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영결식을 마친 후, 곽병원 영안실을 출발한 일행은 10시쯤 "대구장묘사업소"에 도착해 간단한 제를 올리고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했다.
약 한 시간이 지난 후 할머니의 시신은 한줌 가루가 되어 "납골함"에 담겨졌다. 할머니의 영정을 따라 나서는 행렬을 뒤로하고, 고 서봉임 할머니는 영원한 안식을 위해 대구시립납골당 "3층 우 3252번"에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다. 할머니의 안식처 곁으로는 지난해 3월 이미 중국 훈춘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할머니도 잠들어 있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공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을 밝히신 할머니는 대략 150명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늘어가는 세월의 깊이만큼 죽음의 문턱에는 한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사과와 역사청산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일공동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열띤 환호 속에 자칫 잊혀질지 모를 역사의 숙제를 쓸쓸한 할머니의 죽음 앞에 다시 되돌아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인 공동월드컵을 개최하는 것만으로 한국과 일본의 과거 문제가 덮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외적인 행사로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허울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또 다시 논란을 만들고 맙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제대로 사과 한 번, 배상 한 번 받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를 버리고서는 도저히 역사청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구여성회 한이정선 회장의 말이다.
"일제 청산, 진상규명 특별법으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반세기가 흐르고 있지만 태평양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픔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지금도 상흔을 남기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원폭피해자·강제징용자 피해 문제 등….
하지만 일본의 태도는 좀처럼 변할 기색이 없어 보인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생존자들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분노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상황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역사교과서 문제에서 보여주듯 역사왜곡을 자행까지 했다.
그렇다면, 손놓고 기다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과거 역사청산을 위해서는 당시 사건과 피해들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이 국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상규명을 수순을 밟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별법 제정 추진위" 집행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일본정부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보다도 한국정부가 나서서 당시 피해들에 대해 정확한 조사와 정리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특별법의 제정 의미를 밝혔다. 현재 일제강점하에 국외로 동원된 피해자가 약 150만명, 국내 징용피해자는 6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별법은 이런 피해규모에 비해 해방 이후 정부차원에서 정확한 피해 조사와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이 미비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의 진상규명 △피해자의 인권회복 △역사의 진실 규명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입법권을 행사해야 할 정치권의 자세에 있다. 지난 10월 법률안을 시민단체 쪽에서 제출해 놓은 상태이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지원 부재와 당쟁으로 미뤄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 변호사는 "특별법 제정은 보수와 진보, 정치문제 등보다 민족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과거 친일 부역배들이 정치권에 뿌리내리고, "일본을 괜히 건드릴 필요 있냐"는 시각도 많아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욱 기자 baebsae@ohmynews.com
[출처:오마이뉴스 2002.6.7]

관이 서서히 뜨거운 불로 던져지고, 한 줌 재로만 할머니는 이승의 흔적을 남겼다.
"할머니 안녕히, 평안히 잠드세요."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 할머니의 죽음이 지워질 수 있는가. 오히려 시대적인 책임에 지켜보는 이들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만성신부전증을 앓아 "복막투석"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던 일본군 "위안부" 서봉임 할머니의 "비보"가 알려진 것은 지난 5일의 일이었다. 평소 앓던 신부전증이 악화돼 대구 "곽병원"으로 옮겨진 지 닷새만에 들려진 소식이었다.
4일 저녁부터 생명마저 위험하다는 판단에 중환자 실로 옮겨진 후, 겨우 호흡기로 생의 마지막 끈을 끈질기게 잡고 있던 할머니. 끝내 다음날 낮 12시 39분 팔십 평생 험난했던 삶을 마감했다.

고 서봉임 할머니의 증언은 상세히 기록되지는 않았다. 지난 90년 중풍으로 쓰러진 후 말문마저 막혀, 상세히 증언하기 힘들었다는 게 관계자들이 전해준 이유였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은 할머니의 고단한 "인생"은 1922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한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모두 사망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할머니는 38년, 16살의 나이에 단지 "잘 먹고 돈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먼 이국 땅 사이공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성노예" 생활을 한 서할머니는 40년쯤에는 다시 자바로 옮겨졌다. 이 당시 할머니에게 누군가는 "아야꼬"라는 이름을 붙여졌다고 한다.
해방 후 다행히 인천을 통해 한국 땅에 돌아온 할머니는 한때 결혼을 하면서 아이까지 낳기도 했지만, 조산 탓인지 아이는 죽게되고 남편마저 오래 전 사별했다고 한다. 그 후 90년 할머니는 위안소 시절의 후유증으로 인해 중풍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아예 거동자체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93년에는 뒤늦게 보건복지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인정을 받게되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병수발을 받던 할머니는 지난 97년 10월에는 자원봉사자 정현정(37)씨의 도움으로 정씨 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나 만성신부전증을 앓던 할머니는 매일저녁 이어졌던 복막투석과 혈액투석으로 힘들어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수발을 다른 자원봉사들과 맡았던 정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몸이 아파 말씀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 지경이었다"면서 "특히 밤마다 해야하는 혈액투석에 할머니는 무척 괴로워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청춘 시절에는 "성노예"로 괴롭힘을 당하고, 노년에는 갖은 병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끝내 세상과 등을 지고 말았다.
7일 오전 9시 곽병원 영안실, 고 서봉임 할머니와 같은 처지로 삶을 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 곽동협. 이하 시민모임) 회원 등 50여명이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이날 고 서봉임 할머니의 영결식은 대구·경북지역 시민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간간이 스며 나오는 흐느낌과 숙연함이 서 할머니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영결식은 진행됐다.
영결식 중 "조사"를 한 대구여성회 안이정선 회장은 "힘없고 가난한 나라에 여자로 태어난 죄 하나 때문에, 꿈 많은 열 여섯의 나이에 남의 나라 군대 위안소의 위안부가 돼야만 했던 가엾은 우리 할머니. 이제 저희들이 할머니를 열여섯 소녀의 그 시절로 되돌려 드리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그의 목이 메어왔다.
이어 안 회장은 "때로는 아기 같은 천진한 미소로 때로는 그저 말없이 방긋 웃는 온화한 웃음으로 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 그래서 할머니께 붙여드린 별명이 "서나리자" 였습니다. 그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서나리자"로 남아 계실 겁니다"며 눈물을 흘렸다.
서할머니의 죽음을 배웅하는 다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떨까. 함께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살아있는 고통을 서로는 헤아릴 수 있기에 서할머니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과도 다를 바 없다.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72)할머니는 "할머니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살아있는 서할머니에 말하듯 "언니"를 부르는 이용수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서봉임 언니! 언니가 죽은 건 일본놈이 보기 싫어 돌아가신 거죠. 아직도 우리를 외면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다만 눈을 감고 누워있는 거죠. 언니나 우리나 아무 죄도 없었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났다는 죄 밖에 없잖아요. 이젠 사과 없는 일본 정부가 원망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저주스러울 뿐이죠. 언니, 먼 나라에 가서는 고이 잠드소서. 제발 고이 잠드소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에 대한 원망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민족이라는,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가 보내는 냉대와 무관심을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에 대해 이날 영결식 사회를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지금 한국은 일본에게서 해방됐는지 모르지만 할머니들은 아직도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과거 친일 부역배들이 여전히 두텁게 정치권을 주무르고 있는 마당에 할머니들의 해방은 요원하기만 하다"며 탄식했다.
고 서봉임 할머니의 죽음은 국경을 넘어 "양심적인" 일본인들에게도 아픔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발벗고 나서고 있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꾸야먀 연락회"와 "후꾸야먀 왔다갔다회" 대표를 맡고 있는 츠즈끼 스미에(都築 壽美枝·49)씨는 할머니 영정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올해 시민모임이 만든 달력 속의 할머니 얼굴은 건강해 보였지만 그 사진이 후꾸야마에서는 할머니의 영정이 돼 버려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츠즈끼씨는 또 "지금 일본과 한국에서는 월드컵 공동개최로 전국이 들끓고 있다"면서 ""과거는 닫고 미래를 향한 우호 친선"이라는 듣기 좋은 슬로건, 그 이면에는 전후 보상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럴 때야말로 우리들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확실히 청산하는 것 바로 이것만이 미래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영결식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 원장 능광스님의 축원 기도에 이어 참석자들의 분향과 헌화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영결식을 마친 후, 곽병원 영안실을 출발한 일행은 10시쯤 "대구장묘사업소"에 도착해 간단한 제를 올리고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했다.
약 한 시간이 지난 후 할머니의 시신은 한줌 가루가 되어 "납골함"에 담겨졌다. 할머니의 영정을 따라 나서는 행렬을 뒤로하고, 고 서봉임 할머니는 영원한 안식을 위해 대구시립납골당 "3층 우 3252번"에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다. 할머니의 안식처 곁으로는 지난해 3월 이미 중국 훈춘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할머니도 잠들어 있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공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을 밝히신 할머니는 대략 150명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늘어가는 세월의 깊이만큼 죽음의 문턱에는 한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사과와 역사청산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일공동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열띤 환호 속에 자칫 잊혀질지 모를 역사의 숙제를 쓸쓸한 할머니의 죽음 앞에 다시 되돌아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인 공동월드컵을 개최하는 것만으로 한국과 일본의 과거 문제가 덮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외적인 행사로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허울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또 다시 논란을 만들고 맙니다. 지난 50여년 동안 제대로 사과 한 번, 배상 한 번 받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를 버리고서는 도저히 역사청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구여성회 한이정선 회장의 말이다.
"일제 청산, 진상규명 특별법으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반세기가 흐르고 있지만 태평양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픔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지금도 상흔을 남기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원폭피해자·강제징용자 피해 문제 등….
하지만 일본의 태도는 좀처럼 변할 기색이 없어 보인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생존자들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분노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상황과는 달리 일본 정부는 역사교과서 문제에서 보여주듯 역사왜곡을 자행까지 했다.
그렇다면, 손놓고 기다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과거 역사청산을 위해서는 당시 사건과 피해들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이 국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상규명을 수순을 밟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별법 제정 추진위" 집행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일본정부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보다도 한국정부가 나서서 당시 피해들에 대해 정확한 조사와 정리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특별법의 제정 의미를 밝혔다. 현재 일제강점하에 국외로 동원된 피해자가 약 150만명, 국내 징용피해자는 6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별법은 이런 피해규모에 비해 해방 이후 정부차원에서 정확한 피해 조사와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이 미비했기 때문에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의 진상규명 △피해자의 인권회복 △역사의 진실 규명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입법권을 행사해야 할 정치권의 자세에 있다. 지난 10월 법률안을 시민단체 쪽에서 제출해 놓은 상태이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지원 부재와 당쟁으로 미뤄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 변호사는 "특별법 제정은 보수와 진보, 정치문제 등보다 민족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과거 친일 부역배들이 정치권에 뿌리내리고, "일본을 괜히 건드릴 필요 있냐"는 시각도 많아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욱 기자 baebsae@ohmynews.com
[출처:오마이뉴스 200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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