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태권도연맹 촤홍희총재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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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2-06-27 00:00 조회1,5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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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통신 발]국제태권도련맹 총재인 최홍희선생은 불치의 병으로 주체91(2002)년 6월 15일 20시 35분 84살을 일기로 평양에서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
최홍희선생은 오래동안 남조선과 해외에서 곡절 많은 길을 걸어 오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품에 안겨 비로소 애국의 길을 찾고 태권도로 나라의 통일위업에 이바지해 온 애국지사이며 이름 있는 활동가이다.
최홍희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 신음하던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화대군 룡원리에서 출생하여 식민지망국노의 설음을 겪다가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였다.
선생은 일제를 반대하여 전민항쟁을 벌릴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방침을 높이 받들고 <가자 백두산으로>라는 구호밑에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안에 <반일학도병무장대>를 내오고 반일애국활동을 벌리던중 일제에게 체포되여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나라의 광복과 함께 석방되였다
.
최홍희선생은 광복후 남조선군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1955년 4월 민족무도인 태권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으며 그것을 세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하여 1966년 3월 국제태권도련맹을 결성하고 총재로 활동하였다.
최홍희선생은 남조선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날로 심화되고 독재자들이 태권도를 군사파쑈통치에 리용하려는데 항거하여 1972년에 카나다로 망명하였다.
최홍희선생은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 민족의 얼이 깃든 태권도를 지켜 내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리는 한편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카나다조국통일회>,<배달민족회>,<해외민주예비역장병회> 등을 조직하고 교포신문인 <배달신보> 발행인으로서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데 이바지하였다
.
선생은 해외에서 통일애국활동을 벌리는 기간 여러차례 조국을 방문하여 위대한 주석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자주정치와 민족대단결사상,넓은 도량에 매혹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자애로운 어버이로,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열렬히 흠모하면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 왔다.
선생은 불치의 병에 걸리자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생을 마칠 각오밑에 조국을 찾아 왔으며 심장의 고동을 멈추는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장군님께 모든것을 의탁하고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태권도의 장래발전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최홍희선생의 서거는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 민족과 모든 태권도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
최홍희선생은 비록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한채 우리 곁을 떠나 갔으나 그가 조국과 민족,태권도의 강화발전을 위해 남긴 공적은 길이 남아 있을것이다.
2002년 6월 1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 구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최태복동지 승상섭동지
김중린동지 박순희동지
김용순동지 안경호동지
김영대동지 강련학동지
류미영동지 장 웅동지
렴순길동지 황봉영동지
김경호동지 김유호동지
고 최홍희선생의 령구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 안치,17일 발인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에서
고 최홍희선생의 령구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 안치되여 있다.
고인과 영결하기 위하여 찾아 오는 조객들을 6월 16일부터 6월 17일까지 맞이할것이다.
2002년 6월 17일 15시에 고인의 령구를 발인한다.(끝)
최홍희선생은 오래동안 남조선과 해외에서 곡절 많은 길을 걸어 오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품에 안겨 비로소 애국의 길을 찾고 태권도로 나라의 통일위업에 이바지해 온 애국지사이며 이름 있는 활동가이다.
최홍희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 신음하던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화대군 룡원리에서 출생하여 식민지망국노의 설음을 겪다가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였다.
선생은 일제를 반대하여 전민항쟁을 벌릴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방침을 높이 받들고 <가자 백두산으로>라는 구호밑에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안에 <반일학도병무장대>를 내오고 반일애국활동을 벌리던중 일제에게 체포되여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나라의 광복과 함께 석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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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선생은 광복후 남조선군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1955년 4월 민족무도인 태권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으며 그것을 세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하여 1966년 3월 국제태권도련맹을 결성하고 총재로 활동하였다.
최홍희선생은 남조선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날로 심화되고 독재자들이 태권도를 군사파쑈통치에 리용하려는데 항거하여 1972년에 카나다로 망명하였다.
최홍희선생은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 민족의 얼이 깃든 태권도를 지켜 내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리는 한편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카나다조국통일회>,<배달민족회>,<해외민주예비역장병회> 등을 조직하고 교포신문인 <배달신보> 발행인으로서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데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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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해외에서 통일애국활동을 벌리는 기간 여러차례 조국을 방문하여 위대한 주석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자주정치와 민족대단결사상,넓은 도량에 매혹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자애로운 어버이로,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열렬히 흠모하면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 왔다.
선생은 불치의 병에 걸리자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생을 마칠 각오밑에 조국을 찾아 왔으며 심장의 고동을 멈추는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장군님께 모든것을 의탁하고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태권도의 장래발전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최홍희선생의 서거는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 민족과 모든 태권도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
최홍희선생은 비록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한채 우리 곁을 떠나 갔으나 그가 조국과 민족,태권도의 강화발전을 위해 남긴 공적은 길이 남아 있을것이다.
2002년 6월 1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 구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최태복동지 승상섭동지
김중린동지 박순희동지
김용순동지 안경호동지
김영대동지 강련학동지
류미영동지 장 웅동지
렴순길동지 황봉영동지
김경호동지 김유호동지
고 최홍희선생의 령구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 안치,17일 발인
고 최홍희선생의 장의위원회에서
고 최홍희선생의 령구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 안치되여 있다.
고인과 영결하기 위하여 찾아 오는 조객들을 6월 16일부터 6월 17일까지 맞이할것이다.
2002년 6월 17일 15시에 고인의 령구를 발인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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