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 묻힌 민족지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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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6-21 00:00 조회1,5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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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산증인" 이원용 선생 12일 타계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 역임...15일 영결식 가져
6·13 지방선거 다음날이자 16강 진출을 놓고 한국과 포르투갈팀이 결전을 치른 14일 아침 조간신문에는 한 원로의 부음기사가 실렸다.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 선생이 12일 저녁 7시 30분 향년 82세로 별세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 12일 타계한 이원용 선생의 98년 당시 모습. 이 선생은 해방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에서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냈는데, 반민특위 관련 생존자 가운데 최고위급 인사였다. ⓒ 정운현
이 선생은 해방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특위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분이다. 이 선생의 타계로 반민특위의 산증인 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셈이다.
아직도 친일문제가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선생의 타계는 친일논쟁에서 "결정적인 증거물" 하나를 잃은 것과 다름 아니다. 이미 그 때의 당사자들이 거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때론 공허한 공박마저 오가는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8년 2월경 선생을 처음 만난 이후 기자는 여러 차례에 걸친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반민특위의 "전모"를 복원하려 시도했었다. 그 가운데 3차례에 걸친 집중인터뷰와 이 선생을 포함, 반민특위 관계자 6인의 증언을 묶어 이듬해 9월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삼인 펴냄)를 펴낸 적이 있다.
그 무렵 8순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반세기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가슴에 한이 맺힌 사안이어서 두고두고 그 때의 일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고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가깝게는 지난 3월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에서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확정, 공개했을 때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선생은 기회있을 때마다 친일파 척결문제에 대해 못다한 열정을 불태우곤 하셨다. 반민특위가 무참히 좌절된 이후 마치 "죄인"처럼 지내온 과거의 삶에 대한 회한이 아니었을까 싶다.
14일 한-포르투갈전이 열리던 오후 서울 성내동 지하철역에 내려 서울아산병원 영안실로 선생을 찾아갔다. 사적으로는 생전에 기자를 마치 아들처럼 대해 주시기도 하셨지만, 한 시대의 민족사의 한을 간직한 채 살다간 한 장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빈소로 들어서자 선생은 영정 속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마치 "정 선생, 이제 왔소?" 하는 양으로. 두 어달 전 세종문화화관 뒤 분수대 광장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전연 선생의 건강을 의심치 않았다. 선생의 장남 해성(53)씨에 따르면, 지난 5월초 신장이 안좋으셔서 입원을 해 검사를 받아보니 일종의 혈액암이랄 수 있는 다발성 골수종이 4년째 진행중이었는데 그게 이미 신장으로 전이된 상태였다고 한다.
한 달여 신장투석을 하며 병고를 겪으셨으나 의사는 1~2년은 산다고 해서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선생의 몸속에 광범위하게 전개된 합병증이 악화돼 지난 12일 선생은 심근경색으로 황망히 가셨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2남3녀), 친지들이 지키고 있는 빈소에는 "보통" 문상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빈소 안에는 장철 광복회장,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그리고 교회 관계자 등이 보낸 화환 몇이 놓여 있을 뿐 세도가의 상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고관대작 명의의 화환이나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면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한 민족지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정녕 이런 모습인가.
문상을 마치고 장남 해성씨와 잠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선생의 자녀들은 선생이 젊었을 때 뭘 했는지를 7~8년 전에서야 비로소 소상히 알게 됐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 때는 95년 "광복50주년" 전후로, 그 무렵 친일파, 일제잔재 청산문제 등이 공론화되면서 선생이 비로소 세상에 얼굴을 공개적으로 내민 셈이다. 이곳 저곳 신문사,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자녀들은 언론에 소개된 부친 관련 보도를 보고 부친의 과거행적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건국초기 선생은 참으로 중요한 일을 맡아 하셨다. 제헌국회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구성한 반민특위의 "사무총장"격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경교장 판공처 비서실에 속해 있으면서 귀국한 민족지사들의 뒷치닥거리를 도맡아온 선생은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임정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의 요청을 받아 반민특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선생은 초창기 특위의 예산편성, 청사마련, 특위 인원구성 등 특위 출범의 산파역할을 하셨는데 1949년 9월 특위가 해체될 때까지 중앙사무국(국장 공석)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동했다. 특위가 해체되고 그 업무가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이관될 때 선생은 그동안 특위의 활동내용을 적어 이 곳으로 넘겼는데 생전에 그걸 다시 보고자 했으나 찾지 못해 안타까워 하시곤 했다.
98년 봄 선생과의 세 번에 걸친 집중인터뷰는 첫째, 특위 출범초기 상황, 둘째, 직접 검거한 주요 반민피의자의 면면, 셋째, 특위내 요원(조사위원, 검찰관, 재판관, 조사관, 특경대원)들에 대한 얘기 등으로 나눠 진행됐다.
특위 청사내 비품마련을 위해 내무부, 교통부를 드나드신 얘기, 예산편성을 위해 내무부 경리과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경리업무를 배우게 된 얘기, 삼청동으로 친일파 김대우(일제말기 경북도지사)를 잡으러 갔다가 김대우가 체포되기 직전 자신의 부친의 사진 앞에서 고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는 얘기, 또 친일경찰 김태석을 붙잡아 나오는데 그 딸들이 이 선생 일행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그 딸들의 인사의 의미가 대체 무얼 뜻하는지 아직도 알듯말듯하다고 하신 얘기 등등.
반민특위 관련자료가 거짓말처럼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서 선생의 증언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 현대사의 사료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당시 신문의 보도를 통해 복원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선생이나 몇몇 관계자들의 증언이 아니고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선생이 반민특위와 관련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총무과장 이외에도 조사관, 예산집행관, 위원장 비서관 등 1인4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반세기전의 일을 기억을 더듬어 증언해 주셨고, 특위 내부의 좌석배치도, 특위 요원들이 매일 아침 청사 옥상에 올라가 함께 낭독했다는 "선서" 등은 그리거나 또는 적어서 보여주시기도 했다. 특히 선생은 "내용을 아는 연구자가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자신이 소장했던 자료 가운데 몇몇 원본자료를 기자에게 건네주시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선생의 인생도 날개가 부러졌다. 일제 때 광산전문학교를 나온 인연으로 대한중석에서 10여 년간 밥벌이를 하였지만 다른 반민특위 관계자들처럼 선생도 순탄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생전에 선생은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몇 번 일자리를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고 기자에게 토로한 바 있다.
빈소에서 만난 선생의 부인 민숙기(77) 여사는 남편의 "옛일"을 조금도 자랑삼아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피의자를 체포해 왔을 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러 봤다"거나 7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이 직장을 나온 이후 자신이 벌이를 하면서 "그 때 힘들게 지낸 적이 있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기자와 헤어질 무렵 선생의 자녀들은 "작은 소원" 하나를 비로소 입 밖에 꺼냈다. 이 선생이, 즉 자신들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안될 것도 없어 보인다. 해방후 "친일파 처단"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위해 몸바쳐 토대를 마련했고, 또 수행한 공로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선생보다 훨씬 공로가 적거나, 심지어 가짜 유공자까지 버젓이 연금받고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자가 한 둘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선생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은 어쩌면 논의 이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월드컵 16강 진출로 온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인 가운데 선생의 장례는 15일 4일장으로 조용하게 치러졌다. 유해는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하여 일산 소재 한 납골묘원에 모셔졌다. 늘 단아한 정장차림으로, 아랫사람에게도 존대를 아끼지 않으며, 자신을 낮추시던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정운현 기자 jwh59@ohmynews.com
[출처;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kr]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 역임...15일 영결식 가져
6·13 지방선거 다음날이자 16강 진출을 놓고 한국과 포르투갈팀이 결전을 치른 14일 아침 조간신문에는 한 원로의 부음기사가 실렸다.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 선생이 12일 저녁 7시 30분 향년 82세로 별세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선생은 해방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됐던 반민특위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분이다. 이 선생의 타계로 반민특위의 산증인 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셈이다.
아직도 친일문제가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선생의 타계는 친일논쟁에서 "결정적인 증거물" 하나를 잃은 것과 다름 아니다. 이미 그 때의 당사자들이 거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때론 공허한 공박마저 오가는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8년 2월경 선생을 처음 만난 이후 기자는 여러 차례에 걸친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반민특위의 "전모"를 복원하려 시도했었다. 그 가운데 3차례에 걸친 집중인터뷰와 이 선생을 포함, 반민특위 관계자 6인의 증언을 묶어 이듬해 9월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삼인 펴냄)를 펴낸 적이 있다.
그 무렵 8순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반세기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가슴에 한이 맺힌 사안이어서 두고두고 그 때의 일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고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가깝게는 지난 3월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에서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확정, 공개했을 때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선생은 기회있을 때마다 친일파 척결문제에 대해 못다한 열정을 불태우곤 하셨다. 반민특위가 무참히 좌절된 이후 마치 "죄인"처럼 지내온 과거의 삶에 대한 회한이 아니었을까 싶다.
14일 한-포르투갈전이 열리던 오후 서울 성내동 지하철역에 내려 서울아산병원 영안실로 선생을 찾아갔다. 사적으로는 생전에 기자를 마치 아들처럼 대해 주시기도 하셨지만, 한 시대의 민족사의 한을 간직한 채 살다간 한 장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빈소로 들어서자 선생은 영정 속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마치 "정 선생, 이제 왔소?" 하는 양으로. 두 어달 전 세종문화화관 뒤 분수대 광장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전연 선생의 건강을 의심치 않았다. 선생의 장남 해성(53)씨에 따르면, 지난 5월초 신장이 안좋으셔서 입원을 해 검사를 받아보니 일종의 혈액암이랄 수 있는 다발성 골수종이 4년째 진행중이었는데 그게 이미 신장으로 전이된 상태였다고 한다.
한 달여 신장투석을 하며 병고를 겪으셨으나 의사는 1~2년은 산다고 해서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선생의 몸속에 광범위하게 전개된 합병증이 악화돼 지난 12일 선생은 심근경색으로 황망히 가셨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2남3녀), 친지들이 지키고 있는 빈소에는 "보통" 문상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빈소 안에는 장철 광복회장,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그리고 교회 관계자 등이 보낸 화환 몇이 놓여 있을 뿐 세도가의 상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고관대작 명의의 화환이나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면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한 민족지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정녕 이런 모습인가.
문상을 마치고 장남 해성씨와 잠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선생의 자녀들은 선생이 젊었을 때 뭘 했는지를 7~8년 전에서야 비로소 소상히 알게 됐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 때는 95년 "광복50주년" 전후로, 그 무렵 친일파, 일제잔재 청산문제 등이 공론화되면서 선생이 비로소 세상에 얼굴을 공개적으로 내민 셈이다. 이곳 저곳 신문사,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자녀들은 언론에 소개된 부친 관련 보도를 보고 부친의 과거행적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건국초기 선생은 참으로 중요한 일을 맡아 하셨다. 제헌국회에서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구성한 반민특위의 "사무총장"격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경교장 판공처 비서실에 속해 있으면서 귀국한 민족지사들의 뒷치닥거리를 도맡아온 선생은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임정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의 요청을 받아 반민특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선생은 초창기 특위의 예산편성, 청사마련, 특위 인원구성 등 특위 출범의 산파역할을 하셨는데 1949년 9월 특위가 해체될 때까지 중앙사무국(국장 공석)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동했다. 특위가 해체되고 그 업무가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이관될 때 선생은 그동안 특위의 활동내용을 적어 이 곳으로 넘겼는데 생전에 그걸 다시 보고자 했으나 찾지 못해 안타까워 하시곤 했다.
98년 봄 선생과의 세 번에 걸친 집중인터뷰는 첫째, 특위 출범초기 상황, 둘째, 직접 검거한 주요 반민피의자의 면면, 셋째, 특위내 요원(조사위원, 검찰관, 재판관, 조사관, 특경대원)들에 대한 얘기 등으로 나눠 진행됐다.
특위 청사내 비품마련을 위해 내무부, 교통부를 드나드신 얘기, 예산편성을 위해 내무부 경리과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경리업무를 배우게 된 얘기, 삼청동으로 친일파 김대우(일제말기 경북도지사)를 잡으러 갔다가 김대우가 체포되기 직전 자신의 부친의 사진 앞에서 고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는 얘기, 또 친일경찰 김태석을 붙잡아 나오는데 그 딸들이 이 선생 일행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그 딸들의 인사의 의미가 대체 무얼 뜻하는지 아직도 알듯말듯하다고 하신 얘기 등등.
반민특위 관련자료가 거짓말처럼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서 선생의 증언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 현대사의 사료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당시 신문의 보도를 통해 복원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선생이나 몇몇 관계자들의 증언이 아니고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선생이 반민특위와 관련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이유는 총무과장 이외에도 조사관, 예산집행관, 위원장 비서관 등 1인4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반세기전의 일을 기억을 더듬어 증언해 주셨고, 특위 내부의 좌석배치도, 특위 요원들이 매일 아침 청사 옥상에 올라가 함께 낭독했다는 "선서" 등은 그리거나 또는 적어서 보여주시기도 했다. 특히 선생은 "내용을 아는 연구자가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자신이 소장했던 자료 가운데 몇몇 원본자료를 기자에게 건네주시기도 했다.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선생의 인생도 날개가 부러졌다. 일제 때 광산전문학교를 나온 인연으로 대한중석에서 10여 년간 밥벌이를 하였지만 다른 반민특위 관계자들처럼 선생도 순탄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생전에 선생은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몇 번 일자리를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고 기자에게 토로한 바 있다.
빈소에서 만난 선생의 부인 민숙기(77) 여사는 남편의 "옛일"을 조금도 자랑삼아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피의자를 체포해 왔을 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러 봤다"거나 7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이 직장을 나온 이후 자신이 벌이를 하면서 "그 때 힘들게 지낸 적이 있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기자와 헤어질 무렵 선생의 자녀들은 "작은 소원" 하나를 비로소 입 밖에 꺼냈다. 이 선생이, 즉 자신들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안될 것도 없어 보인다. 해방후 "친일파 처단"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위해 몸바쳐 토대를 마련했고, 또 수행한 공로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선생보다 훨씬 공로가 적거나, 심지어 가짜 유공자까지 버젓이 연금받고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자가 한 둘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선생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은 어쩌면 논의 이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월드컵 16강 진출로 온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인 가운데 선생의 장례는 15일 4일장으로 조용하게 치러졌다. 유해는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하여 일산 소재 한 납골묘원에 모셔졌다. 늘 단아한 정장차림으로, 아랫사람에게도 존대를 아끼지 않으며, 자신을 낮추시던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정운현 기자 jwh59@ohmynews.com
[출처;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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