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한 강제노동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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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8-30 00:00 조회1,4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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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강제로동 체험자의 수기/로동신문
(평양 8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로동신문> 25일부는 <숨진 어린 령혼들이 절규한다>라는 제목으로 된 평양시 중구역 류성동에서 사는 안성득의 수기를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 지나간 추억들이 점차 희미해 지기마련이다.특히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은 쉽사리 잊혀 진다고 한다.그러나 나에게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잊을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이 있다.일제가 나에게 그런 상처를 남겨 놓았다.
1944년 8월경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강원도 철원군에서 살던 내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한짐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 오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풀이 죽어 있었다.
사연인즉은 군경찰서에서 나에 대한 호출장을 두고 갔다는것이였다.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경찰서로 오라고 하는가.
그날 밤 우리 식구들은 걱정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경찰서에 가니 내또래의 아이들이 10여명이 와있었다.경찰서장은 <너희들은 비상시국에 (천황)페하를 위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수 있는 곳에 가게 되였다>고 하는것이였다.나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철렁하였다.
몇년전에 강원도 철원양주공장에서 술통배달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악질적인 일본인감독과 맞서 싸운것으로 해서 경찰서에 끌려 가 죽도록 뭇매를 맞고 그 어혈로 사망하였다.그러고 보니 집에는 홀어머니와 3명의 동생들뿐이였다.
당직경관놈은 부모형제들과 헤여지지 않겠다고 울고 불며하는 우리들에게 격검채를 휘두르면서 <말을 듣지 않는 새끼들은 류치장에 가두어 넣겠다>고 위협하였다.그리고는 우리들에게 조금 있으면 좋은데로 가게 된다,거기 가면 푸짐히 밥도 먹고 새옷도 준다고 귀맛 좋은 소리를 하였다.
그날 우리들은 모두 화물차에 강제로 실려 철원역으로 끌려 갔다.
우리는 철원역의 화물취급입구에 두줄로 서서 짐짝처럼 화차에 옮겨 실렸다.경관들은 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칼집으로 때리면서 화물칸들에 집어 넣고는 자물쇠를 채웠다.도중에 기차가 멎자 경관들은 화차문을 열고 인원수를 확인하더니 다시 자물쇠를 잠그는것이였다.
우리가 끌려 간 곳은 경기도 인천시에 있는 통신기계조립공장이였다.
이 공장은 일본 도꾜 시바우라통신기계주식회사에 소속되여 있었다.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둘러 친 공장의 모서리마다에는 군견들이 매여 져 있었으며 일제의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공장에는 나처럼 강제로 끌려 온 13살-16살정도의 조선소년들이 200여명 있었다.하는 일은 매일과 같이 방공호파기,건물기초파기와 같은 땅파기작업과 군사훈련에 내몰리우는것이였다.하루 12-15시간씩 일하였다.매 아이의 작업량은 하루에 화물자동차 1대분의 흙을 파서 차에 싣는것이였다.오전작업량을 다해야 점심밥표를 주었고 오후작업량을 다해야 저녁밥표를 주었다.아무리 몸이 아프고 배 고프고 힘이 진해도 작업량을 끝내지 못하면 밥표를 주지 않았다.대신 채찍이 안겨 졌다.
숙식조건은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길다란 창고 같은 건물이 58동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숙소로 리용되였다.한동에 30여명씩 들었다.가마니를 깐 방바닥은 습하고 방안에서는 곰팡이냄새가 코를 찔렀다.방구석에는 쥐들이 욱실거렸다.밤에는 벼룩,빈대성화에 잠을 잘수 없었다.
더울 때에는 모기성화까지 겹치였다.베개대신 통나무를 베고 자야 했다.먹는것은 대여섯 숟가락 뜨면 밑창이 나는 대두박 또는 납작보리밥이였고 찬이란것은 무우절임에 소금국이 전부였다.아이들은 주림에 견디기 힘들어 군견의 먹이까지 채먹었다.얼마 안 가서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곳에서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였다.일제는 <지금은 전쟁을 하는 비상시국이기때문에 너희들의 임금은 제1선에 기부금으로 다 보냈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품값도 주지 않았다.
위생조건이 불비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다가 가혹한 고역에 시달리다나니 우리들속에서는 각종 질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 환자들이 늘어 났다.감독들은 앓는 아이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차면서 작업장에 내몰았다.
평강군에서 온 14살 난 황기철이라는 소년이 내옆에서 자고 나와 한조에서 일하였는데 그는 무슨 병에 걸렸는지 열이 몹시 나면서 헛소리를 치며 심하게 앓았다.나는 기철이를 간호하다가 대렬점검에 늦게 참가하여 격검채세례를 받았다.
앓아 누워서 점검에 참가하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 방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 나왔다.내가 급히 방에 뛰여 가보니 기철은 구두발에 채워 반죽음이 된 상태였다.그는 반듯이 누워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몇번 하더니 눈도 감지 못한채 숨이 지고 말았다.우리들은 죽은 사람은 눈을 감겨 주어야 한다는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누군가가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를 지르자 놈들이 우르르 쓸어 들어 오더니 기철이가 깔고 자던 가마니로 숨진 그를 말아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후 어떻게 처리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 역시 얼마 못 가서 앓아 눕게 되였다.기침할 때마다 피가 섞인 가래가 나오군 하였다.그러던 1945년 6월 초경에 처음으로 검진이 있었다.왜놈의사가 내몸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 지면서 기침과 함께 피가래가 튀여 나왔다.그것이 왜놈의사의 위생복과 마스크에 묻었다.그러자 왜놈의사는 벅적 고아 대며 청진기로 나의 면상을 후려 갈기고 <검진표>에 <표식> 기입하고는 나를 밖으로 내쫓는것이였다.불행중 다행이라고 하겠는지 그 <덕>으로 공장철문밖으로 나오게 되였다.나는 이집저집 돌아 다니며 밥을 빌어 먹으면서 인천에서 서울,의정부,동두천을 거쳐 여러 날만에 겨우 집에 돌아 왔다.
그래도 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고향에 돌아 올수 있었다.하지만 일제에게 강제로 끌려 간 수많은 조선의 청소년들이 중세기적인 노예적로동과 커다란 고통속에서 시달리다가 땅에 묻히고 말았다.
일제는 수십년에 걸치는 식민지군사강점통치기간에 많은 조선청소년들을 마소와 같이 부려 먹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억울하게 숨진 어린 령혼들이 일제를 절규한다.
일본이 열백번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해도 우리 인민이 당한 그 고통과 수모를 어떻게 잊을수 있겠는가.아무리 보상을 한다고 해도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조선사람들의 생명이야 어떻게 되살려 낼수 있겠는가.피가 거꾸로 솟는다.
일본당국자들은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끓고 있는 원한을 똑똑히 알고 하루빨리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끝)
(평양 8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로동신문> 25일부는 <숨진 어린 령혼들이 절규한다>라는 제목으로 된 평양시 중구역 류성동에서 사는 안성득의 수기를 실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 지나간 추억들이 점차 희미해 지기마련이다.특히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은 쉽사리 잊혀 진다고 한다.그러나 나에게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잊을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이 있다.일제가 나에게 그런 상처를 남겨 놓았다.
1944년 8월경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강원도 철원군에서 살던 내가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한짐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 오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풀이 죽어 있었다.
사연인즉은 군경찰서에서 나에 대한 호출장을 두고 갔다는것이였다.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경찰서로 오라고 하는가.
그날 밤 우리 식구들은 걱정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경찰서에 가니 내또래의 아이들이 10여명이 와있었다.경찰서장은 <너희들은 비상시국에 (천황)페하를 위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수 있는 곳에 가게 되였다>고 하는것이였다.나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철렁하였다.
몇년전에 강원도 철원양주공장에서 술통배달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악질적인 일본인감독과 맞서 싸운것으로 해서 경찰서에 끌려 가 죽도록 뭇매를 맞고 그 어혈로 사망하였다.그러고 보니 집에는 홀어머니와 3명의 동생들뿐이였다.
당직경관놈은 부모형제들과 헤여지지 않겠다고 울고 불며하는 우리들에게 격검채를 휘두르면서 <말을 듣지 않는 새끼들은 류치장에 가두어 넣겠다>고 위협하였다.그리고는 우리들에게 조금 있으면 좋은데로 가게 된다,거기 가면 푸짐히 밥도 먹고 새옷도 준다고 귀맛 좋은 소리를 하였다.
그날 우리들은 모두 화물차에 강제로 실려 철원역으로 끌려 갔다.
우리는 철원역의 화물취급입구에 두줄로 서서 짐짝처럼 화차에 옮겨 실렸다.경관들은 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칼집으로 때리면서 화물칸들에 집어 넣고는 자물쇠를 채웠다.도중에 기차가 멎자 경관들은 화차문을 열고 인원수를 확인하더니 다시 자물쇠를 잠그는것이였다.
우리가 끌려 간 곳은 경기도 인천시에 있는 통신기계조립공장이였다.
이 공장은 일본 도꾜 시바우라통신기계주식회사에 소속되여 있었다.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둘러 친 공장의 모서리마다에는 군견들이 매여 져 있었으며 일제의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공장에는 나처럼 강제로 끌려 온 13살-16살정도의 조선소년들이 200여명 있었다.하는 일은 매일과 같이 방공호파기,건물기초파기와 같은 땅파기작업과 군사훈련에 내몰리우는것이였다.하루 12-15시간씩 일하였다.매 아이의 작업량은 하루에 화물자동차 1대분의 흙을 파서 차에 싣는것이였다.오전작업량을 다해야 점심밥표를 주었고 오후작업량을 다해야 저녁밥표를 주었다.아무리 몸이 아프고 배 고프고 힘이 진해도 작업량을 끝내지 못하면 밥표를 주지 않았다.대신 채찍이 안겨 졌다.
숙식조건은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길다란 창고 같은 건물이 58동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숙소로 리용되였다.한동에 30여명씩 들었다.가마니를 깐 방바닥은 습하고 방안에서는 곰팡이냄새가 코를 찔렀다.방구석에는 쥐들이 욱실거렸다.밤에는 벼룩,빈대성화에 잠을 잘수 없었다.
더울 때에는 모기성화까지 겹치였다.베개대신 통나무를 베고 자야 했다.먹는것은 대여섯 숟가락 뜨면 밑창이 나는 대두박 또는 납작보리밥이였고 찬이란것은 무우절임에 소금국이 전부였다.아이들은 주림에 견디기 힘들어 군견의 먹이까지 채먹었다.얼마 안 가서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곳에서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였다.일제는 <지금은 전쟁을 하는 비상시국이기때문에 너희들의 임금은 제1선에 기부금으로 다 보냈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품값도 주지 않았다.
위생조건이 불비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다가 가혹한 고역에 시달리다나니 우리들속에서는 각종 질병에 걸려 자리에 눕는 환자들이 늘어 났다.감독들은 앓는 아이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차면서 작업장에 내몰았다.
평강군에서 온 14살 난 황기철이라는 소년이 내옆에서 자고 나와 한조에서 일하였는데 그는 무슨 병에 걸렸는지 열이 몹시 나면서 헛소리를 치며 심하게 앓았다.나는 기철이를 간호하다가 대렬점검에 늦게 참가하여 격검채세례를 받았다.
앓아 누워서 점검에 참가하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 방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 나왔다.내가 급히 방에 뛰여 가보니 기철은 구두발에 채워 반죽음이 된 상태였다.그는 반듯이 누워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몇번 하더니 눈도 감지 못한채 숨이 지고 말았다.우리들은 죽은 사람은 눈을 감겨 주어야 한다는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누군가가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를 지르자 놈들이 우르르 쓸어 들어 오더니 기철이가 깔고 자던 가마니로 숨진 그를 말아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후 어떻게 처리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 역시 얼마 못 가서 앓아 눕게 되였다.기침할 때마다 피가 섞인 가래가 나오군 하였다.그러던 1945년 6월 초경에 처음으로 검진이 있었다.왜놈의사가 내몸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 지면서 기침과 함께 피가래가 튀여 나왔다.그것이 왜놈의사의 위생복과 마스크에 묻었다.그러자 왜놈의사는 벅적 고아 대며 청진기로 나의 면상을 후려 갈기고 <검진표>에 <표식> 기입하고는 나를 밖으로 내쫓는것이였다.불행중 다행이라고 하겠는지 그 <덕>으로 공장철문밖으로 나오게 되였다.나는 이집저집 돌아 다니며 밥을 빌어 먹으면서 인천에서 서울,의정부,동두천을 거쳐 여러 날만에 겨우 집에 돌아 왔다.
그래도 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고향에 돌아 올수 있었다.하지만 일제에게 강제로 끌려 간 수많은 조선의 청소년들이 중세기적인 노예적로동과 커다란 고통속에서 시달리다가 땅에 묻히고 말았다.
일제는 수십년에 걸치는 식민지군사강점통치기간에 많은 조선청소년들을 마소와 같이 부려 먹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억울하게 숨진 어린 령혼들이 일제를 절규한다.
일본이 열백번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해도 우리 인민이 당한 그 고통과 수모를 어떻게 잊을수 있겠는가.아무리 보상을 한다고 해도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조선사람들의 생명이야 어떻게 되살려 낼수 있겠는가.피가 거꾸로 솟는다.
일본당국자들은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끓고 있는 원한을 똑똑히 알고 하루빨리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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