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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선생 추모 도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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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09-19 00:00 조회1,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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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싶어 2년의 세월을 보내며 눈물로 책을 썼습니다"

leesuja-3.jpg세계적 작곡가이며 통일운동 지도자였던 윤이상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이수자 여사(고인의 부인)의 도서출판 기념회가 7일밤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됐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미주본부(회장:김도안 스님)가 주최한 윤이상 부인 이수자 여사가 펴낸 도서 "나의 독백"(한겨레신문사 발행:2001.9.24)과 "내 남편 윤이상"(상)권과 (하)권 (창작과 비평사: 2000.6.30 5판발행)의 출판기념회가 미주에서는 저자가 참석한 가운데 최초로 열리게 되어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이날 로스엔젤레스 시내 관음사 문화원 강당에서 개최된 출판기념식은 김도안 스님의 인사말, 선우학원 박사를 비롯 차종환 박사, 양은식 박사의 축하말, 김운하 포교사의 독후감 소개와 불교합창단의 축하음악 순서와 함게 저자의 인사말로 진행되었다.

축하말을 전한 인사들은 윤이상 선생이 세계적인 음악가로 그리고 해외통일운동 지도자로 우뚝 설수 있게 하였던 그 배후에는 온 정성을 다하여 뒷 바라지 한 내조자, 이수자 여사의 숨은 공이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필력은 훌륭하다고 격찬했다.

leesuja-2.jpg 이 여사는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국문과를 수료한후 부산 남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역임했고 1948년 윤이상 선생과 결혼한 후 1961년 독일로 이주해 33년은 국내에서 그리고 42년의 세월을 해외에서 살아왔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남편 윤이상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며 공인으로 한 삶을 살아왔었다고 회고했다.

윤이상 선생이 남긴 작품들은 150여곡이 된다고 밝힌 이 여사는 "내 남편이라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전재하며 "모든 작품들이 주옥과 같은 곡들입니다"라고 소개하며 음악의 나라들이 산재한 유럽에서만 그의 위대성이 인정된 것이 아니라 미국 고전음악전문가(뉴욕 브르클린 음악원 음악가들)들이 평가한 세계음악가들 10여명중에 한사람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긍지높게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위대한 음악성과 그의 가슴 뜨거운 애국정신을 한국정부가 대접해 주지 못하고 동백림사건(1967년 6월17일 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서울로 납치)으로 너무나 가혹하게 탄압했던 사실에 대해 아직도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내 남편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싶어 2년의 세월을 눈물을 흘리며 책을 썼습니다" 남편이 타계한지도 오는 11월이면 7년째(1995년 11월3일 베를린서 78세 일기로 운명)가 되는데 이 여사는 아직도 남편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심정을 고백했다.

1963년 봄 남편을 따라 금단의 땅, 이북을 방문하여 이북사람들에게 느꼈던 따뜻한 정, 순수성, 인가다운 인간성 등을 접하면서 뿔달린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정치적으로 선전되어 온 것들과 실제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1984년에 평양에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설립되어 이 연구소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북 당국에서는 15층 건물, 독립관현악단, 연구사 등 1백50여명의 일꾼들이 이 연구소를 위해 일한다고 소개한 이 여사는 "그 동안 윤이상음악연구소는 독일순회공연, 놀웨이 공연, 중국 심양공연 등을 통하여 윤이상 음악의 특수성, 특히 우리 민족과 동양의 심오한 철학을 현대음악에 접목시킨 독특한 예술성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구상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이었다고 말해줬다.

이 여사는 자신이 집필한 책들은 남편의 진실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을 담은 내용들이라고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이북에 대한 실상을 부분적이나마 알려줌으로써 남은 생애에 조금이라도 조국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3권의 책들을 펴내게 되었다고 출판에 대한 취지를 설명해 줬다.

이북사람들의 순수한 아름다움 마음들, 문화유산들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애국적인 자세들, 80%가 산악지역인데 어딜가나 아름다운 강산들, 민족을 위해서는 개인들의 무엇들도 희생하며 사는 애국적인 삶들의 실상들을 남녘이나 해외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넘쳐흘렀다.

이 수자 여사는 사회주의 동구권이 없어지고 어려운 국제환경에서 노력해 온 이북동포들의 말없는 노력과 함께 지난 90년대 중반에 겪었던 큰물난리로 인해 그 동안 이북동포들이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체험했던 사실들을 돌이켜 보면서 목이 메어 말끝을 잊지 못하는 순간, 출판기념식 장은 잠시 숙현해 지기도 했다.

이 여사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귀한 출판기념식을 마련해 준 이곳 불교계 인사들과 협조해 준 여러분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9/8/2002]

참고 자료

청공 윤이상 선생 연보


1917년 9울17일 경남 산청출생
1935년 일본유학, 오사카 음악학원서 작곡,이론, 첼로 공부
1948년 결혼(이수자)
1950년 서울 대학들에서 강의하며 가곡, 실내악곡 등 발표
1955년 "현약4중주 1번"과 "파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6년 유럽유학(사양음악 이론, 현대음악 무조음악 연구 목적)
1957년 서베르린 음대에서 작곡연구
1959년 9월 네델랜드 빌토벤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작품"
그리고 다름 슈타트에서 "일곱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각각 초연
1960년 관현악곡 "바라"를 작곡
1963년 4월 부인과 함께 이북방문
1964년 교성곡 "음마니반메흠"을 작곡
1967년 6월17일 <동베르린 사건>으로 한국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 부인 이수자 3년언도(6개월 복역)
1968년 3월13일 2심재판에서 5년으로 감형
1968년 5월 함부르그 학술원 회원
1968년 감옥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변원에서 <율>과 <상상>을 완성
1969년 2월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돼 독일로 돌아옴
1971년 독일 국정취득
1972년 뮌헨 올림픽 전야제에 <심청> 초연
1974년 음악계의 최고영예인 <베를린 에술원 회원>으로 추대
1977년 베를린 예술대 정교수과 되어 1987년까지 지도
1981년 5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초연
1984년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 설립
1987년 독일연방 정부로 부터 베를린 정도 750주년 기념 대공로훈장 받음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발표
1988년 "민족합동음악축제"를 남북한 정부에 제안함
1990년 10월 평양에서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 주관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축제>가 서울 및 지방에서 열렸으나 참석치 못함
1995년 5월 일본 됴꾜에서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초연, 이것이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었음
1995년 11월3일 오후 4시45분(베르린 시간) 베르린의 발트병원에서 타계
한국서 스님 참석하여 13일불교식으로 영결식하고 베르린 국립묘지에 안장, 인천용화선원에서 위패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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