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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매향리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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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10-16 00:00 조회1,4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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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매향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향리로 돌아가는 먼 길" 만든 고안원석 감독



이정미 기자



2000년 매향리의 뜨거운 여름을 기억하십니까?

50년 넘게 미국의 군사훈련장으로 몸살을 앓아온 매향리. 미군의 폭격을 막기위해서 더 이상은 전쟁놀음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거 참 쑥스러운데" 동영상 인터뷰라고 하자 무지 쑥스러워하는 고안원석씨 ⓒ민중의소리
언론의 관심도 집중이 되었던 매향리에 일년동안 둥지를 틀고 주민들과 함께 살며 투쟁의 현장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색곰팡이(구 a-tv)사람들이 그들입니다.

2001년 5월, 일년간의 기록이 영화화되어 세상에 선보여졌습니다. 매향리 주민회관 앞마당에서 투쟁속보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고안원석 감독은 지난 일년동안 시사회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해왔습니다.

직접 만나 본 고안원석씨는 참 편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본 사람들하고도 편하게 이야길 주고 받고, 이야기하는 동안 잘 웃고 웃기기도 합니다.

그 무거운 장비들을 혼자서 다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갸냘퍼 보이는 외모.

사무실 부엌에 바퀴벌레가 있어서 불을 켜놓고 한참 있다가 들어간다고 하길래 잡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무서워서 어떻게 잡냐고 되묻는 고안원석 감독을 보면서 무슨 남자가 바퀴벌레를 다 무서워하냐는 생각이 문득 스쳤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폭격중인 농섬까지 갔을까?
장난스런 모습을 보이다가도 미디어운동이나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무지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될 듯도 했습니다.

시사회를 통해서만 그 뜨거웠던 여름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게 아쉬운 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와의 일문일답을 싣습니다.


△"매향리는 아직 승리한 싸움은 아니다" 아직도 매향리는 싸우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민중의소리
매향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때는 언제였나?

민족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었고, 주한미군 일반에 대해서 이야길 하고 싶었다. 글과는 달리 영상은 시각적인게 필요하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11월에 매향리에 가게 되었다.

나도 전에 매향리에 대해 이야길 듣긴 했는데 잘 알지는 못했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매향리에 대해 알리는게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일년동안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내용이 나온 거 같다. 살면서 어렵지는 않았나?

우리는 어떤 사안을 대할 때나 영상작업을 할 때도 큰 사안을 많이 보게된다. 접근을 하는 방식에서 반미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큰 담론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서 거기에서 피해받거나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개인으로 만나지 않고 "뭐뭐하는 사람" 하는 식의 담론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서 살아보니까 그게 깨지게 되더라.

내 자신이 사람들을 만날때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만난다는 걸 깨달았고 반성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10년동안 언론에 피해자로 노출되면서 그런 모습이 고정되어 있는게 있었다. 평상시는 형님동생하면서 지내다가도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갑자기 존대를 하거나 말이 굳어지는 거였다.

사람들을 대할 때 나도 카메라를 들고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민도 많이 되었고 처음 몇달은 참 힘들었다.

작품외에 내가 얻은게 있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거였다.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이주하자는 사람들과 하지말자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그런걸 보는게 참 가슴이 아팠다.
외부 사람들은 이주하자는 사람들을 나쁘게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고, 주민들끼리 갈등이 있기는 했다. 주민 모두가 피해자이고 그게 다 국방부의 이간질때문에 생기는 건데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니였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다.

처음에 매향리에 갔을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언론이 집중될 것을 몰랐을 것 같다. 과정에서 객관상황이 바뀐게 많아서 내용의 변화도 있었을 텐데 편집과정에서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했나?

처음엔 매향리를 알려야된다, 현실을 알리기만 해도 내 작품의 50%는 성공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만든 것보다는 방송국에서 만든게 화면도 더 커서 알리는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편집하면서는 폭탄터지고 피흘리고 싸우고하는 눈요기감만으로 멈춰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매향리는 군사주의가 사람의 심성을 어떻게 망치고 있는가하는 문제가 기본이다. 편집에서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고 촬영하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게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미디어운동과 다큐영화의 전망을 이야기하는동안 내내 그는 진지한 얼굴이였다. ⓒ민중의소리
매향리 투쟁과정에서 농섬에 들어간것 때문에 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되었나?

벌금이 150만원 나왔는데 지금은 선고유예 상태다. 처음 벌금형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다들 벌금을 물고 끝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우리 재판정이 취재를 어디까지 인정해주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항소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도 웃긴게 처음 검찰에서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길래 다큐감독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건 취미고 진짜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드라. 계속 다큐감독이 직업이라고 하니까 고집세다면서 결국 공소장에 직업이 다큐감독이라고 올라갔다.

2차 판결을 할때 판사한테 그동안 내가 찍은 테입을 다 가져다 주면서 증거로 제출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판사가 이걸 다 보라는 거냐고 그러드라. 당연히 다 봐야 나에 대해서 판결을 내릴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드라고.

국내 독립다큐에 대한 법이 전무했는데 전형을 만들었다는게 나름대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본다.

좀 뒤늦은 질문이긴 하지만 작품을 끝내고 맨 먼저 한 일이 뭐였는지? 심정이 어떤가?

작품이 끝나고 맨 먼저 한 일은 음... 결혼을 했죠. 하하.. 이건 농담이고..승리적 관점으로 끝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난 여전히 매향리는 싸우고 있고 끝났다고 보지 않는다. 50년 넘은 훈련으로 받은 피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남아있는데다가 사실 훈련도 끝나지 않고 농섬에서 진행중이다.

내 안의 매향리는 아직 개운하지 않고 그 안에서 몇 십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게 내가 어떻게 해도 어설플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내 안의 매향리는 그렇다.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게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승리적인게 좋지않겠냐는 말이 많았다. 김동원 감독님 같은 경우도 지금 시점에서 매향리가 기능해야 되는게 있는데 좀 더 쎄게 가야 되는거 아니냐고 하셨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한축은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내 방식이 더 적절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재편집해야 되는거 아닌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내 맘이 그게 아니여서 그런지 그냥 가기로 했다. 억지로는 안되드라.

아직까지 비디오로 출시가 안되었는데 딱히 이유가 있는지?

비디오로 판매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던 적던간에 모여서 보고, 본 사람들이 나와 소통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몇 사람이 모이든 시사회를 많이 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비디오로는 만들지 않을 계획이다.

시사회에 온 사람들의 반응은?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시사회에 온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감을 많이 얻게 되었다.


△"폭력이 사람의 심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민중의소리
작업이 끝나고 매향리에는 가봤는지?

우리가 살던 주인 집 아주머니하고도 연락하고 여전히 사람들과 연락을 자주 한다. 요즘은 바빠서 가본 지 몇달 된거 같다.

오색곰팡이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다큐작업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기엔 이름이 좀 특이하다. 무슨 뜻이 있는지?

지금까지 한국독립다큐를 바라보는 시각은 운동권과 동일시 하는 것이였다. 그런 경직성이 안좋아서 만든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난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창작활동이라는 뜻을 담고 싶어서 오색곰팡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현재 세명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들 그 부분에 동의하고 마음이 맞다.

다큐를 어떻게 시작하고 되었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학생운동을 했었다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관심이 있었다.
문화운동이라는 말을 90년대에 접했는데 구호 외치는 것만이 다가 아니구나, 말하는 법이 그것 말고도 있구나 하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엔 사진을 시작했었다. 내가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계속 구호 외치고 돌던지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나이먹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고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다큐 영화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이게 내가 평생 안고 갈 주제다 이런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노동에 관해서 작품을 하나 했고, 이번에 매향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어느 것이 되었든지 폭력에 의해서 사람의 심성이 어떻게 변하는 지 이야기하고 싶다.

반전, 전쟁의 폭력 이런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워낙 군사주의 문화가 뿌리가 깊다보니 그런 게 많다. 당분간은 이런 내용으로 가고 싶다.

반미도 접근하는 방식이 민족적인 관점도 있고 반전의 관점도 있는데 나는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뼛속 깊이 남아있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시사회에 대한 문의는

오색곰팡이 사무실 전화 02-325-1968
홈페이지 http://coloroutsider.org/



2002년10월09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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