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항일독립투사 손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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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2-11-14 00:00 조회1,4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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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항일독립투사 손원금
원래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손원금동지와는 별로 인연도 없으셨고 또 서로 만나서 통성을 한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손원금동지의 경력이며 활동내용을 십년지기 못지 않게 잘 알고 계셨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 손원금동지의 투쟁사적을 처음으로 소개해 준 사람은 항일투사 박영순동지였습니다. 작탄강습에 출연하려고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마촌에 온 그는 김일성주석님과 한방에 누워 있으면서 며칠동안 신변잡사에 대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손원금동지의 이름도 이따금씩 껴묻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주석님께서 손원금동지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호기심을 가지시고 듣곤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업적으로써도 유명해질 수 있고 재능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으며 사건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습니다. 1932년 당시의 손원금동지는 경찰서탈출사건으로 간도지방의 몇몇 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약장사로 변신한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통신연락 임무를 수행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고문에 만신창이 된 몸을 끌고 구정물이 허리를 치는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나와 옹근 하루낮을 강물속에서 보냈습니다. 경비가 철통같은 적의 소굴을 무사히 탈출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하루 해를 물속에서 보냈다는 것도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김일성주석님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에도 입대하고 공산당에도 입당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이때부터 성실한 노력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항일유격대원들이 자체로 만들어 사용한 작탄중에는 연길폭탄도 있었습니다. 이 폭탄을 제작하는데 많은 자재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재를 병기창 성원들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면 무수한 노고를 바쳐야 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언제나 이 노고의 앞장에서 걸린 고리들을 풀어나갔습니다.
한번은 폭탄을 만들다가 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었는데 장약함을 만들 종이와 천이 거덜났던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방도를 찾느라고 머리를 썩였습니다. 그런데 손원금동무는 어느새 마을로 뛰어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왔습니다. 그런가하면 철사가 모자라서 작탄제작이 중단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수십리 밖의 곳에 가서 300미터나 되는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왔습니다. 유황도 무쇠조각도 양철판도 손원금동지가 구해왔습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느날 밤 양철판과 무쇠를 한짐 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온 손원금동지의 뒤로는 주소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한 분이 무쇠가마를 이고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노인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손원금동지를 따라오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노인의 며느리가 중병에 걸려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약장사를 하던 손원금동지가 돈 한 푼 안 받고 약도 지어다 주고 쌀도 사다주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 신세를 갚으려고 노인은 자기 집 가마중에서 제일 큰 가마를 가지고 따라나섰던 겁니다.
병기창 성원들은 할머니가 가지고온 가마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마사진 가마가 아니라 새 가마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 가마를 도로 가져다 쓰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왈칵 짜증을 냈습니다. 일본놈들이 내 아들을 둘이나 불에 태워 죽였는데 이까짓 무쇠덩이가 무얼 그렇게 아깝겠는가고 하면서 말입니다.
병기창 일군들은 그 이상 할머니를 설복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시어 손원금동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셨습니다. 김일성주석님을 매혹시킨 손원금동지의 인간상에서 핵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강쇠같은 자력갱생의 정신이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전 동만이 다 아는 인물로 됐습니다.
박영순동지가 강습을 끝내고 마천을 떠날 때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화룡에 돌아가면 손원금동무에게 그의 경험이 강습참가자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언제인가는 우리들이 서로 만나 정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님과 손원금동지와의 상봉은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작업도중 폭발사고로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불행까지 당했습니다.
당시 화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항상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작탄이나 총탄에 화약을 재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원금동지는 작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낙심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동무들, 슬퍼말라. 비록 두 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은가. 두 팔이 있고 두 다리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지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는 손더듬으로 쇠줄을 자르고 작탄을 조립하면서 인터내셔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많은 세월의 바람받이에 아버지를 묻고 형을 묻고 누이를 묻고… 이제는 또 자신의 광명마저 잃은 손원금동지! 그는 아직 반생에 이르지도 못한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후 손원금동지는 동지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대를 떠나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금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항일유격대를 헐뜯고 공산당을 헐뜯는 적의 염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격대는 산에서 전멸되었다."
"근거지 사람들도 다 굶어 죽었다."
"처창즈에 가보라. 백골뿐이다."
"공산당의 정치는 망하는 정치다. 공산당을 따라다녔대야 먹을 알이 쥐뿔도 없다."
손원금동지의 혈관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끊어번졌습니다. 그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아니다. 유격대는 살아있다. 살아서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갔다. 지금 남북만 도처에서 적들을 치고 있다. 몇 십명으로 출발했던 유격대오가 지금은 대포와 기관총을 가진 수백 수천명의 대오로 자라났다. 동포들, 형제들! 적들의 선전에 속지말고 인민혁명군을 더 잘 원호하자. 항일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손원금동지의 발자욱은 금곡촌의 범위를 벗어나 수백리 밖에 있는 연길과 용정에서 찍혀갔습니다. 이전날처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이 "소경걸인"을 군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노상에서 김일성주석님께서 1937년 6월 4일에 몸소 조직지휘하신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시고 보천보를 습격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했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가는 죽가마처럼 끊어번졌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동지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이것은 그가 사형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동지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습니다.
원래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손원금동지와는 별로 인연도 없으셨고 또 서로 만나서 통성을 한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손원금동지의 경력이며 활동내용을 십년지기 못지 않게 잘 알고 계셨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 손원금동지의 투쟁사적을 처음으로 소개해 준 사람은 항일투사 박영순동지였습니다. 작탄강습에 출연하려고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마촌에 온 그는 김일성주석님과 한방에 누워 있으면서 며칠동안 신변잡사에 대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손원금동지의 이름도 이따금씩 껴묻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주석님께서 손원금동지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호기심을 가지시고 듣곤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업적으로써도 유명해질 수 있고 재능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으며 사건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습니다. 1932년 당시의 손원금동지는 경찰서탈출사건으로 간도지방의 몇몇 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약장사로 변신한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통신연락 임무를 수행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고문에 만신창이 된 몸을 끌고 구정물이 허리를 치는 하수도 구멍으로 빠져나와 옹근 하루낮을 강물속에서 보냈습니다. 경비가 철통같은 적의 소굴을 무사히 탈출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하루 해를 물속에서 보냈다는 것도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김일성주석님께서 이끄시는 항일유격대에도 입대하고 공산당에도 입당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이때부터 성실한 노력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항일유격대원들이 자체로 만들어 사용한 작탄중에는 연길폭탄도 있었습니다. 이 폭탄을 제작하는데 많은 자재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재를 병기창 성원들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면 무수한 노고를 바쳐야 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언제나 이 노고의 앞장에서 걸린 고리들을 풀어나갔습니다.
한번은 폭탄을 만들다가 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었는데 장약함을 만들 종이와 천이 거덜났던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방도를 찾느라고 머리를 썩였습니다. 그런데 손원금동무는 어느새 마을로 뛰어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왔습니다. 그런가하면 철사가 모자라서 작탄제작이 중단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선봉에 섰습니다. 그는 수십리 밖의 곳에 가서 300미터나 되는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왔습니다. 유황도 무쇠조각도 양철판도 손원금동지가 구해왔습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느날 밤 양철판과 무쇠를 한짐 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온 손원금동지의 뒤로는 주소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한 분이 무쇠가마를 이고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노인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손원금동지를 따라오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노인의 며느리가 중병에 걸려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약장사를 하던 손원금동지가 돈 한 푼 안 받고 약도 지어다 주고 쌀도 사다주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 신세를 갚으려고 노인은 자기 집 가마중에서 제일 큰 가마를 가지고 따라나섰던 겁니다.
병기창 성원들은 할머니가 가지고온 가마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마사진 가마가 아니라 새 가마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 가마를 도로 가져다 쓰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왈칵 짜증을 냈습니다. 일본놈들이 내 아들을 둘이나 불에 태워 죽였는데 이까짓 무쇠덩이가 무얼 그렇게 아깝겠는가고 하면서 말입니다.
병기창 일군들은 그 이상 할머니를 설복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시어 손원금동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셨습니다. 김일성주석님을 매혹시킨 손원금동지의 인간상에서 핵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강쇠같은 자력갱생의 정신이었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전 동만이 다 아는 인물로 됐습니다.
박영순동지가 강습을 끝내고 마천을 떠날 때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화룡에 돌아가면 손원금동무에게 그의 경험이 강습참가자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언제인가는 우리들이 서로 만나 정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님과 손원금동지와의 상봉은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작업도중 폭발사고로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불행까지 당했습니다.
당시 화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항상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작탄이나 총탄에 화약을 재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원금동지는 작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손원금동지는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낙심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동무들, 슬퍼말라. 비록 두 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은가. 두 팔이 있고 두 다리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지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는 손더듬으로 쇠줄을 자르고 작탄을 조립하면서 인터내셔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많은 세월의 바람받이에 아버지를 묻고 형을 묻고 누이를 묻고… 이제는 또 자신의 광명마저 잃은 손원금동지! 그는 아직 반생에 이르지도 못한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후 손원금동지는 동지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대를 떠나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금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항일유격대를 헐뜯고 공산당을 헐뜯는 적의 염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격대는 산에서 전멸되었다."
"근거지 사람들도 다 굶어 죽었다."
"처창즈에 가보라. 백골뿐이다."
"공산당의 정치는 망하는 정치다. 공산당을 따라다녔대야 먹을 알이 쥐뿔도 없다."
손원금동지의 혈관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끊어번졌습니다. 그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아니다. 유격대는 살아있다. 살아서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갔다. 지금 남북만 도처에서 적들을 치고 있다. 몇 십명으로 출발했던 유격대오가 지금은 대포와 기관총을 가진 수백 수천명의 대오로 자라났다. 동포들, 형제들! 적들의 선전에 속지말고 인민혁명군을 더 잘 원호하자. 항일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손원금동지의 발자욱은 금곡촌의 범위를 벗어나 수백리 밖에 있는 연길과 용정에서 찍혀갔습니다. 이전날처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이 "소경걸인"을 군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노상에서 김일성주석님께서 1937년 6월 4일에 몸소 조직지휘하신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시고 보천보를 습격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했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가는 죽가마처럼 끊어번졌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동지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이것은 그가 사형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동지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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