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나메기운동 펴는 백기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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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2-11-12 00:00 조회1,5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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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를 ‘마지막 재야’라고 부른다. 백범연구소에 이어 현재 통일문제연구소를 꾸려가고 있는 백기완(白基玩·70) 소장. 서울 대학로 뒷골목에 위치한 연구소를 찾았을 때 허름한 대문에 나붙은 한편의 벽시(壁詩)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거센 물살에 곤두박질 쳐도/ 자기를 삿대로 하면 그것이/ 바다로 나아가는 것/ 갈갈이 찢기고/ 알알이 바사져도/ 대를 세워 맴을 치면…”. ‘아, 절망에 떠도는 사람아’라는 제목 그대로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것일까. 하지만 지난날 세상을 향해 꾸짖고 외쳐대던 거인으로서의 면모와 여유는 여전한 듯했다.
“나같은 사람에게 뭔 얘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거야. 아무래도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 텐데”. 자리에 마주앉았으나 농담조의 첫마디부터 은근히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온기가 없이 썰렁한 방바닥에 주저앉고도 그저 태연할 뿐이다. “손님을 맞으려고 모처럼 전기장판 스위치를 넣었다”는 지나가는 말투에서 요즘의 처지가 대략이나마 읽혀졌다. 여간해서는 난방비 부담 때문에 차가운 방바닥을 그대로 견뎌낸다고 했다. 그 바람에 신경통이 도졌다면서도 그쯤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다.
군부독재가 일찌감치 끝난 마당에 재야운동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었더니 해방 직후로까지 답변이 거슬러올라갔다. 백범 김구의 통일운동과 여운형·조봉암이 이끌었던 진보운동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물론 민중개혁 운동을 아우르고 있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재야운동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치 해묵은 노트를 외우다시피 강의가 줄줄이 이어졌다. “재야운동이 지금부터라면 원로로서 어깨가 매우 무거우시겠다”고 슬쩍 거들었으나 “나는 어깨도 없이 땅바닥을 기어가는 무지랭이”라며 비켜가고 말았다.
사실은 ‘재야’라는 말을 처음 붙인 것이 바로 그였다. 어느날 우연히 이 말을 끄집어내자 함석헌·장준하 선생도 “그거 말되네”라고 맞장구쳤으며, 그뒤부터 신문에서 두루 쓰이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의 말마따나 “가슴이 헛헛해지면 돼지비계를 가마솥 가득 삶아먹던 시절”이었다. 그는 함석헌 선생에 대해 꼬박꼬박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무려 서른 살이나 위였다는 얘기다. “영감님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늙은이로 오해받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봤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바로 정색하듯이 “아니, 나는 학벌·권력·재산 아무것도 없었으니 손해볼 것도 없었지”라고 고쳐 말했다. 재야의 기본 정신이 그런 것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정치권에 대한 불만은 만만치 않았다. “뻔뻔스런 놈들” “썩어 문드러진 새끼들”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뭔가 잔뜩 토라졌음을 내비쳤다. 정치 얘기는 아예 묻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받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되던 터였다. 심지어 함께 독재타도 운동에 앞장섰던 지난날의 동지들에 대해서까지 못마땅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왜 그렇게 틀어지셨느냐”고 물었더니 대번에 역정이다. “성질이 웬만큼 맞아야지, 도대체 사귈 사람들이 못된다”며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눈치없이 질문을 던졌다가 1992년의 14대 대선 출마자의 입장에서 몇마디 끌어내려던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현재의 통일 논의에 대해서는 더욱 섭섭한 모양이었다. 어렵던 시절 온갖 압력과 박해를 무릅써가며 외롭게 견뎌왔는데, 이제 세월이 펴지니까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거슬릴 밖에는 없을 것이다. “거짓말쟁이들이 거들먹거리고 있다”며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된다”고도 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진 책꽂이 위에 빛바랜 백범 사진 한장이 눈에 띄었다. 백범 생전에 직접 받았는지 ‘백기완군 기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범이 황해도 이웃 마을에 살았으며, 자신의 할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했다. “내 할아버지 역시 열혈 우국지사였다”고 자랑삼아 소개했다.
요즘은 ‘노나메기’ 운동에 매달리고 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해서 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란다. “코란·불경·성경은 물론 과학적 사회주의 교본에도 없는 민중사상”이라며 포부를 내비쳤다. 이런 뜻을 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로 얼마 전 강원도 동해시 부근에 800평의 땅을 어렵사리 장만했으나 벽돌값에 부딪쳐 있다. “한장에 1만원씩 10만장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중이지만 벽돌쌓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후원회에 동참하려면 국민은행(031-01-0331-930), 농협(049-02-225015) 계좌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전화 (02)762-0017
다시 질문을 던졌으나 눈치가 모자라긴 마찬가지였다. “‘노나메기’가 우리말이라고 하는데 왜 한글사전에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이 따지듯 들린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잘난 체하고 앉았으니 무슨 될 일이 있겠느냐”며 여간 답답하지 않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사전에 없는 우리말이 어디 한둘인가라는 얘기다. 하긴, 사전에도 없이 그가 퍼뜨린 말이 ‘새내기’ ‘달동네’ ‘모꼬지’ ‘속꽂이’(다이빙) ‘옛살라비’(고향) 등 수두룩하다. “언론에서 ‘대거리’라는 좋은 말을 놓아두고 ‘인터뷰’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도 고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가 우리말을 챙기다가 엉뚱한 고초를 겪은 얘기를 듣다보면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산터널 공사가 진행될 당시 ‘터널’이라는 말을 ‘맞뚜레’나 ‘판굴’로 쓰자고 청와대에 건의했다가 수사기관에 끌려가 얻어터지기도 했다. 집게로 혓바닥을 비틀리기도 했다니 한글운동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최근 문제가 된 피의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뿐 아니라 마땅히 대통령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흥분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지난날 재야운동을 하면서 온갖 고문을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했다.
어쩌다 축구 얘기가 나오면서 말투가 누그러졌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특별강연을 했을 만큼 축구를 좋아한다니, 생각 밖이었다. “한때 선수가 되려고까지 했으나 중학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꿈을 접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분을 푸느라 애꿎은 돌뿌리를 차면서 가난 때문에 재주를 파묻어야 하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공차기만 보면 그때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며 “아마 그런 마음이 내 재야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며 어느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축구 때문에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과 각별한 관계로 맺어졌다니, 희한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날 모처럼 큰맘 먹고 공항까지 전별을 나갔고 또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는 편지도 받았다. “히딩크 얘기가 보도되는 바람에 옛 제자 몇명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들러서 개고기를 사고 갔으니 결과적으로 그에게 신세를 진 셈”이라면서 “다음에 히딩크를 만나면 보신탕 대접으로 보답하겠다”며 껄껄 웃어댔다.
그를 얘기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 궁금했다. “‘모래를 짜먹을지언정 굶주림엔 결코 꿇지 말라’던 어머님 말씀을 들으며 고향을 떠나오던 열세 살 어린 시절부터 아련한 시의 정서를 느꼈던 것 같다”는 답변이다. 자신이 쓴 시 중에서는 ‘젊은 날’을 몸부림치듯이 아낀다. “추렴거리 땡전 한푼 없는 것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식은 밥에 김치말이 끓는 화로에/ 내 속옷의 하얀 서캐를 잡아주던/ 말없는 그 친구가 좋았다/…”. 장장 여섯 페이지 분량의 길다란 시를 토하듯 읊어대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어두웠던 시절 감옥에 끌려가 똥오줌을 질질 싸면서 거꾸로 매달려 지껄인 게 시가 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도 더없이 아름다웠을 젊은 날을 생각하며 이빨을 악물고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는 뜻이다. 그때를 떠올리면 술을 들이켜다가, 노래를 악지르다가, 결국 울고 만다는 얘기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 “떨어지는 가랑잎에도 시퍼렇던 신록의 추억이 있겠건만 요즘 젊은 것들은 ‘개죽’이야. 잎사귀가 나올 듯하다가 그냥 시든다는 뜻이지. 따스운 방바닥만 찾다간 엉덩이가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텐데”.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대학로에는 노란 은행잎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허영섭 전문기자 gracias@kyunghyang.com〉
“나같은 사람에게 뭔 얘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거야. 아무래도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 텐데”. 자리에 마주앉았으나 농담조의 첫마디부터 은근히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온기가 없이 썰렁한 방바닥에 주저앉고도 그저 태연할 뿐이다. “손님을 맞으려고 모처럼 전기장판 스위치를 넣었다”는 지나가는 말투에서 요즘의 처지가 대략이나마 읽혀졌다. 여간해서는 난방비 부담 때문에 차가운 방바닥을 그대로 견뎌낸다고 했다. 그 바람에 신경통이 도졌다면서도 그쯤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다.
군부독재가 일찌감치 끝난 마당에 재야운동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었더니 해방 직후로까지 답변이 거슬러올라갔다. 백범 김구의 통일운동과 여운형·조봉암이 이끌었던 진보운동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물론 민중개혁 운동을 아우르고 있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재야운동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치 해묵은 노트를 외우다시피 강의가 줄줄이 이어졌다. “재야운동이 지금부터라면 원로로서 어깨가 매우 무거우시겠다”고 슬쩍 거들었으나 “나는 어깨도 없이 땅바닥을 기어가는 무지랭이”라며 비켜가고 말았다.
사실은 ‘재야’라는 말을 처음 붙인 것이 바로 그였다. 어느날 우연히 이 말을 끄집어내자 함석헌·장준하 선생도 “그거 말되네”라고 맞장구쳤으며, 그뒤부터 신문에서 두루 쓰이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의 말마따나 “가슴이 헛헛해지면 돼지비계를 가마솥 가득 삶아먹던 시절”이었다. 그는 함석헌 선생에 대해 꼬박꼬박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무려 서른 살이나 위였다는 얘기다. “영감님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늙은이로 오해받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봤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바로 정색하듯이 “아니, 나는 학벌·권력·재산 아무것도 없었으니 손해볼 것도 없었지”라고 고쳐 말했다. 재야의 기본 정신이 그런 것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뜻밖에도 정치권에 대한 불만은 만만치 않았다. “뻔뻔스런 놈들” “썩어 문드러진 새끼들”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뭔가 잔뜩 토라졌음을 내비쳤다. 정치 얘기는 아예 묻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받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되던 터였다. 심지어 함께 독재타도 운동에 앞장섰던 지난날의 동지들에 대해서까지 못마땅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왜 그렇게 틀어지셨느냐”고 물었더니 대번에 역정이다. “성질이 웬만큼 맞아야지, 도대체 사귈 사람들이 못된다”며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눈치없이 질문을 던졌다가 1992년의 14대 대선 출마자의 입장에서 몇마디 끌어내려던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현재의 통일 논의에 대해서는 더욱 섭섭한 모양이었다. 어렵던 시절 온갖 압력과 박해를 무릅써가며 외롭게 견뎌왔는데, 이제 세월이 펴지니까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거슬릴 밖에는 없을 것이다. “거짓말쟁이들이 거들먹거리고 있다”며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된다”고도 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진 책꽂이 위에 빛바랜 백범 사진 한장이 눈에 띄었다. 백범 생전에 직접 받았는지 ‘백기완군 기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범이 황해도 이웃 마을에 살았으며, 자신의 할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했다. “내 할아버지 역시 열혈 우국지사였다”고 자랑삼아 소개했다.
요즘은 ‘노나메기’ 운동에 매달리고 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해서 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란다. “코란·불경·성경은 물론 과학적 사회주의 교본에도 없는 민중사상”이라며 포부를 내비쳤다. 이런 뜻을 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로 얼마 전 강원도 동해시 부근에 800평의 땅을 어렵사리 장만했으나 벽돌값에 부딪쳐 있다. “한장에 1만원씩 10만장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중이지만 벽돌쌓기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후원회에 동참하려면 국민은행(031-01-0331-930), 농협(049-02-225015) 계좌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전화 (02)762-0017
다시 질문을 던졌으나 눈치가 모자라긴 마찬가지였다. “‘노나메기’가 우리말이라고 하는데 왜 한글사전에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이 따지듯 들린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잘난 체하고 앉았으니 무슨 될 일이 있겠느냐”며 여간 답답하지 않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사전에 없는 우리말이 어디 한둘인가라는 얘기다. 하긴, 사전에도 없이 그가 퍼뜨린 말이 ‘새내기’ ‘달동네’ ‘모꼬지’ ‘속꽂이’(다이빙) ‘옛살라비’(고향) 등 수두룩하다. “언론에서 ‘대거리’라는 좋은 말을 놓아두고 ‘인터뷰’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도 고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가 우리말을 챙기다가 엉뚱한 고초를 겪은 얘기를 듣다보면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산터널 공사가 진행될 당시 ‘터널’이라는 말을 ‘맞뚜레’나 ‘판굴’로 쓰자고 청와대에 건의했다가 수사기관에 끌려가 얻어터지기도 했다. 집게로 혓바닥을 비틀리기도 했다니 한글운동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최근 문제가 된 피의자 고문치사사건에 대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뿐 아니라 마땅히 대통령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흥분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지난날 재야운동을 하면서 온갖 고문을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했다.
어쩌다 축구 얘기가 나오면서 말투가 누그러졌다. 지난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특별강연을 했을 만큼 축구를 좋아한다니, 생각 밖이었다. “한때 선수가 되려고까지 했으나 중학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꿈을 접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분을 푸느라 애꿎은 돌뿌리를 차면서 가난 때문에 재주를 파묻어야 하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공차기만 보면 그때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며 “아마 그런 마음이 내 재야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며 어느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축구 때문에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과 각별한 관계로 맺어졌다니, 희한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날 모처럼 큰맘 먹고 공항까지 전별을 나갔고 또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는 편지도 받았다. “히딩크 얘기가 보도되는 바람에 옛 제자 몇명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들러서 개고기를 사고 갔으니 결과적으로 그에게 신세를 진 셈”이라면서 “다음에 히딩크를 만나면 보신탕 대접으로 보답하겠다”며 껄껄 웃어댔다.
그를 얘기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 궁금했다. “‘모래를 짜먹을지언정 굶주림엔 결코 꿇지 말라’던 어머님 말씀을 들으며 고향을 떠나오던 열세 살 어린 시절부터 아련한 시의 정서를 느꼈던 것 같다”는 답변이다. 자신이 쓴 시 중에서는 ‘젊은 날’을 몸부림치듯이 아낀다. “추렴거리 땡전 한푼 없는 것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식은 밥에 김치말이 끓는 화로에/ 내 속옷의 하얀 서캐를 잡아주던/ 말없는 그 친구가 좋았다/…”. 장장 여섯 페이지 분량의 길다란 시를 토하듯 읊어대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어두웠던 시절 감옥에 끌려가 똥오줌을 질질 싸면서 거꾸로 매달려 지껄인 게 시가 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도 더없이 아름다웠을 젊은 날을 생각하며 이빨을 악물고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는 뜻이다. 그때를 떠올리면 술을 들이켜다가, 노래를 악지르다가, 결국 울고 만다는 얘기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 “떨어지는 가랑잎에도 시퍼렇던 신록의 추억이 있겠건만 요즘 젊은 것들은 ‘개죽’이야. 잎사귀가 나올 듯하다가 그냥 시든다는 뜻이지. 따스운 방바닥만 찾다간 엉덩이가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텐데”.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나오는 대학로에는 노란 은행잎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허영섭 전문기자 gracia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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